<인페르노>는
기호학자 로버트 랭던(톰 행크스)을 앞세운, 댄 브라운의 소설을 영화화한 세 번째 탐정물이다. 그런데 <다빈치 코드>와
<천사와 악마>의 로버트 랭던이 기호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중세부터 이어져 오던
종교집단들의 은밀한 광기를 추적해 나간 것과 달리 <인페르노>의
로버트 랭던은 현대문명을 관통하는 인구과잉문제와 연관된 테러리즘에 맞선다. 어떤 의미에서 <인페르노>의 로버트 랭던은 그가 아니어도 될만한 일까지
떠맡은 셈인데 그의 역할을 만들어주기 위해 동원된 건 단테라는 모티브를 통해 구상한 기호학적인 퍼즐이다. 그러니까 <다빈치 코드>와
<천사와 악마>가 로버트 랭던의 개입을 자연스럽게 유도할 수 있는 이야기였던
것과 달리 <인페르노>에선 인위적인 구조적 설계가
필요하다.
<인페르노>의
로버트 랭던은 의문의 사나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기억상실증 상태로 피렌체의 한 병원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가 품은 의문과 관객의 의문은 똑같이 제시된다. 결국 그가 기억을 회복하며 단테의 지옥도에 담긴
의미를 쫓아 피렌체와 베니스, 이스탄불을 누비는 과정에 동참하는 관객의 흥미는 그가 왜 이 사건에 휘말렸는가라는
물음표에 놓여있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인페르노>는 <다빈치 코드>나 <천사와 악마>처럼 로버트 랭던을 탐정처럼 앞세운 지적인
추리극으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미스터리에 더 큰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초반에 제시하는
물음표의 흥미는 중후반부에 다다라 싱거워지는데 아무래도 각본의 내러티브가 완급조절에 실패한 인상이다.
전반부가 정체불명의 물음표로 가득한 호기심을 잉태하는 장이었다면 후반부는 그 물음표의 장막을 벗긴 실체의 위압감을
증명해야 하는 장이다. 문제는 로버트 랭던이 고도의 지적 추리를 통해 추적한 적의 실체가 그리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영화를 지탱하던 의문들이 손쉽게 자기 손을 들어서 정체를 드러내듯 미스터리의
동력이 손쉽게 소진된다. 게다가 극의 향방을 전환시키는 결정적 존재가 자기 정체를 드러낸 직후 그 인물과
관련된 과거사를 제시하는데 그 순간 이 영화가 멜로를 지향했던 것인가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감상적이라 영화의 지향점에 의문이 생길 정도다. 덕분에 영화의 서스펜스를 지탱하던 물음표의 패가 모두 다 열린 극 후반부에선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완전히 증발돼버린
듯해서 클라이맥스의 존재감 자체가 부재한 인상마저 준다.
한편 <인페르노>에서
탁월한 병풍 역할을 하는 피렌체와 베니스, 이스탄불의 풍경들은 아이맥스 카메라의 광대한 시선을 등에
업고 관광영화의 묘미를 극대화시킨다.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두오모돔과 조토의 종루 그리고 베키오
궁전과 우피치 미술관을 아우르는 피렌체부터 베니스의 산 마르코 광장 그리고 이스탄불의 하기스 소피아 성당과 예레바탄 지하궁전까지, 세계적인 유산이라 할만한 풍경이 아이맥스 카메라의 광대한 시선을 통해 중계되는 건 영화적 완성도와 무관하게
그럴 듯한 볼거리를 이룬다. 물론 충분한 기회비용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자비에 돌란은 일찍이 게이임을 커밍아웃했다. 그가 자신의 영화
대부분에서 직접 게이로 등장하는 건 아마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리얼리티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자비에 돌란의 영화를 퀴어영화의 범주에 묶어서 설명하는 건 간편하겠지만 한편으론 나태한 일이다. 자비에
돌란의 영화에 등장하는 성소수자들은 대부분 퀴어영화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존재로서 살아가기 보단 영화적인 스토리텔링으로 극대화되는 '삶'의 감정선을 극대화시키는 장치로서 작동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자비에 돌란 스스로 자전적인 영화라고 밝힌 연출 데뷔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는 자비에 돌란이 연기하는 후베르트의 어머니에 관한 영화다. 후베르트의 어머니는 타인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되는데 이는 모자 관계의 갈등을
점화시키는 불씨가 된다. 하지만 그 갈등은 단순히 아들이 게이라서가 아니라 지속적인 갈등 국면을 이루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동할 뿐이다.
자비에 돌란의 두 번째 연출작
<하트비트>는 특별한 삼각관계 로맨스물이다. 여기서
삼각관계를 특별하게 수식하는 건 자비에 돌란이 연기한 게이 청년 프란시스인데 그의 존재감이 삼각관계의 꼭지점 하나를 차지하면서 이 영화는 삼각관계 로맨스물의 전형성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한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남녀의 갈등이란 특이성은서 우정이란 정서를 통해 보다 특별한 삼각관계의 갈등과 화해를 형성시킨다.
<탐엣더팜>에서도 자비에 돌란이 연기하는
탐이 게이라는 설정은 영화를 지탱하는 서스펜스에 지속적인 미스터리를 불어넣는 장치에 가깝다. 동성애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례식이 열리는 연인의 고향을 찾는 탐은 현지에서 만난 애인의 친형 프란시스로부터 폭력과 협박에 시달린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엔 가학과 피학이라는 폭력적 작용과 반작용 이상의 기이한 기류가 더해진다. 자신의 폭력성을 통해서 관계적인 결핍을 충족하고 반대로 피해자는 그 폭력성을 통해서 상실감을 채우는 듯한 기이한
상충 관계가 형성된다. 이런 관계적 모호함은 결국 이 영화의 미스터리를 강화함으로써 서스펜스의 위력을
더하는데 일조한다.
어쩌면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와 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로맨스에 주목하는 <로렌스 애니웨이>야말로 자비에 돌란의 연출작 중에서 유일하게
퀴어영화의 카테고리 안에서 해석될만한 작품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칸영화제는 이 작품에 퀴어영화상을 안겼다. 하지만 자비에 돌란은 자신의 영화가 퀴어영화라는 카테고리에서 해석되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창작자 자신의 바람과 달리 자비에 돌란의 영화는 퀴어영화의 영역 안에서 언급되고 회자될 것이다. 그것이 손쉽고 간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비에 돌란의 족쇄
노릇만 하는 건 아닐 거다. 그의 영화를 선전하는 날개가 된다는 것도 부정할 순 없다. 퀴어영화라는 정체성이 주목 받을 만한 재능을 알리는 쇼윈도 노릇을 한다면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셈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자비에 돌란 자신이 이를 가장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호빗> 시리즈를 이끄는 건 <반지의 제왕>으로 익숙한 피터 잭슨이다. 불가피한 이유로 길예르모 델 토로에게서 메가폰을 넘겨 받았다 해도 <호빗>은 끊임없이 <반지의 제왕>과 비교당할 운명을 타고난 작품이란 것이다. 그리고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는 새로운 트릴로지를 받치는 허리이자 전후를 잇는 다리 역할에 충실해야 할 두 번째 속편이다. 본격적인 서사의 진전이 이뤄진다. 트릴로지의 성패를 쥐고 있는 분수령이 되는 작품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속편 역시 초당 48프레임을 영사하는 하이 프레임 레이트(HFR) 방식으로 제작됐다. 사실 전작인 <호빗: 뜻밖의 여정>에서 HFR은 과욕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서사의 시동을 거는 첫 작품에서 이 특수한 기술이 효율적으로 활용됐다고 말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서사의 주행을 위해서 진로를 설계하는 목적이 강했던 첫 작품에선 액션신의 비중도 적었던 만큼 무언가 특별한 것을 보고 있다는 인상을 부여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역동적인 카메라의 이동을 통해서 공간 전반을 활용하는 몇몇 액션신에선 확실히 HFR의 장점이 부각되는 인상이었다. 스펙터클한 액션신과 이미지의 비중이 늘어난 이번 작품에선 HFR의 장점이 보다 뚜렷해 보인다. 특히 다이내믹한 카메라의 이동과 전방위적인 공간 활용이 빛을 발하는 협곡에서의 추격신은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에서 단연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원작자인 J.R.R 톨킨은 <반지의 제왕>에서 세계관의 자궁 역할을 한 <호빗>의 일부 설정을 수정했다. 피터 잭슨이 톨킨의 <호빗>을 바탕으로 원작과 다른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건 이와 비슷하다. <반지의 제왕>은 톨킨의 원작에 충실한 작품이지만 <호빗>은 오히려 <반지의 제왕>의 프리퀄로서의 목적에 충실하고자 원작을 적극적으로 인큐베이팅해낸다. 원작과의 연관성에 관대해질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는 훌륭한 각색물이자 <반지의 제왕>의 프리퀄로서의 목적을 확실히 달성하는 작품이다. 어떤 면에선 <반지의 제왕>보다도 피터 잭슨의 인장이 보다 확실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기술적 시도와 서사적 의도가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성공적인 트릴로지의 완결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