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스발(하비에르 바르뎀)은 두 아이의 아버지다. 그는 가난한 가장이다. 그는 마약 거래와 밀입국자들의 취업을 알선하는 브로커로 삶을 꾸려왔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삶은 그렇게 흘러 넘어왔다. 그에게는 남다른 능력도 하나 있다. 죽은 자를 보는 것, 그리고 말을 하는 것.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본적이 없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그는 서서히 직감한다. 선명하지 않은 삶의 흐름 속에서도 선명해지는 것이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는 죽은 자를 본다. 그리고 그들과 대화를 한다. 그러나 어떤 이의 죽음은 목격이 가능해도 대화가 불가능함을 안다. 아니, 더 이상의 대화가 필요 없음을 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죽음이다.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비우티풀 Biutiful>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궁금할 것이다. ‘Beautiful’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이도 있을 것이다. 맞다. 바로 그 단어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Beautiful’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라틴어에 뿌리를 둔 어느 언어인가. 아니다. 이 세상에 이와 같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Biutiful은 Beautiful을 소리 나는 대로 받아쓴 언어다. 이는 고의가 아니다. 그저 어느 한 남자의 직관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일 뿐이다. 이 행위에는 숨겨진 의도가 없다. 그저 그 남자, <비우티풀>의 욱스발이 인식한 단어의 외형이 그러했을 뿐이다. <비우티풀>은 그런 영화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마치 자신의 꿈을 해몽하듯 이 영화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그 여정 안에서 점차 어떠한 의도가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이내 흐릿해진다.
알 수 없는 두 시퀀스의 연결을 통해서 시작되는 <비우티풀>은 그 불투명한 원점의 의미를 선명하게 밝히며 눈을 감듯 끝난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핸드헬드의 불안이 영화 곳곳을 채운 몽타주들을 수집하다 이내 인물의 감정으로 파고들 때, 영화에 잠재된 수많은 비극이 제 머리를 들고 제 몸을 드러내듯 구체화되고 명확해질 때, 관객 대부분은 영화와 함께 시름하면서도 그 세계 자체를 둘러싼 기이한 현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이냐리투는 <비우티풀>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통해서 영화적 해석에 개입하고자 했는데, 그의 변에 따르면 <비우티풀>은 오로지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된 영화였으며 어느 공간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었다. <비우티풀>은 온전히 이냐리투의 직관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물인 셈인데, 이 영화는 그만큼 비선형적인 구조의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어떤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영화는 한 남자의 생을 통해서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에 대해서 고찰하고 사유한다. 이 영화는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이자 이 세계에 자리한 어느 한 공간에 관한 이야기이자 보편적인 삶 속에 자리한 어떤 하나의 생에 관한 이야기다. 규정된 언어가 모든 감정의 진폭을 대변하고 전달하는 것이 아니듯 규정에서 벗어난 언어가 때로는 더욱 분명한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마치 규정되지 않은 언어처럼 쓰여졌다. 어느 한 남자의 삶으로부터 뻗어나간 영화는 결국 이 세계를 채운 어느 특별한 삶을 통해서 보여지는 보편적인 생의 너비, 즉 죽음이라는 비극과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삶의 보편적 숙명의 너비가 저마다의 생으로 채워지고 모여서 이 세계의 형상을 끊임없이 유지하면서 변화시키고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인과의 변형적 제시를 통해서 흥미를 돋우는 화술과 메인 플롯과 서브 플롯의 부조화가 이루는 특정한 리듬감, 이냐리투 특유의 화법과 묘사로 채워진 이 영화의 인장을 더욱 근사하고 명확하게 새겨 넣는 건 바로 하비에르 바르뎀이다. <비우티풀>은 이냐리투의 영화이며 바르뎀은 그 세계를 완성하는 핵심처럼 영화 속에 자리한다. 아버지로서의 고뇌와, 죽음을 앞둔 한 인간으로서의 고통, 그리고 삶의 고단함을 통해서 생존을 체득한 이가 체감하는 불행, 바르뎀은 강인하면서도 섬세한 인상을 통해서 그 모든 생의 스펙트럼을 일거에 점령하듯 영화 속에서 걸어나간다.
<비우티풀>은 그 남루한 삶에서 벗어나는 방식, 즉 죽음을 목격하는 방법을 통해서 생에 대한 인식에 신비로운 사유를 더한다. 영화의 시작과 결말의 대구는 마치 생과 사의 경계처럼 잉태되고 종말된다. 그 끝에서 의미는 선명해진다. 삶을 정지시키듯 죽음이 찾아올 때, 그 정지된 삶이 새로운 세상에서 보존될 수 있다면 과연 이 세계에서의 삶은 무엇으로 남겨지는가. 그 끝에 다다라야만 알 수 있는 물음. 하지만 당신의 삶은 어느 언어로도 규정할 수 없는 가치로 누군가에게 전승될 것이다. 삶을 이루는 건 ‘삶’이란 단어가 아니라 그저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바로 그것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규정할 수 없는 삶을 각자의 언어로 읽어나가듯 살아간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가듯 사라진다.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 우린 그것을 전통이라 부른다. 그 전통 위에서 새로운 가치가 창출된다. 바르셀로 라발 호텔은 전통과 새로움을 함께 보여준다.
길에 들어서자 행위예술가들의 다양한 퍼포먼스가 눈에 들어왔다. 과거 이주빈민들의 거처였던 람볼라 거리는 1980년대 정부 정책의 일환으로 아티스트의 거리가 됐다. ‘MACBA(Museu d’art Contemporani de Bacelona)’와 같은 현대미술관이 설립되고 다양한 문화 교류의 장이 마련됐다. 지금의 람블라 거리는 그렇게 탄생했다. 바르셀로나의 중심이자 최고의 번화가라 불리는 ‘람블라 거리(La Rambla)’는 카탈루냐 광장에서 남부의 항구를 잇는 거리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중간계다. 벽돌 한 장까지도 유일무이하고 독창적인 위엄을 풍기는 가우디의 건축물, 중세시대의 엄숙함을 뾰족하게 드높인 고딕지구, 람블라 거리엔 시간의 중력을 거스른 옛 역사의 향취가 곳곳을 지배한다. 풍요로운 바다를 곁에 두고 플라타너스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은 느긋하게 어제 속 오늘을 걷는다. 하지만 람블라 거리에도 분명 변화가 도래하고 있다. 변하지 않는 울타리 안에서도 역동적인 동선을 그리는 사람들에게서 변화와 흐름이 감지된다. 거리 곳곳을 밀물처럼 채우고 썰물처럼 비우는 사람들은 그 거리를 모자이크처럼 채우고, 콜라주처럼 보태며 거리의 표정을 바꿔나간다. 개개인이 수집한 트렌드의 조각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 거리의 패션을 이룬다.
넉넉한 플라타너스 잎사귀로 수놓인 람블라 거리에서 도보로 불과 5분 정도 걸리는 ‘바르셀로 라발(Barcelo Raval)’ 호텔은 건축가 ‘조셉 M. 블랑코’가 건설설계사 ‘CMV’와 협력해 완성했다. 지난 2008년 여름에 개장한 4성급 호텔이다. 항구에 인접한 바르셀로나 국제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20분 정도를 달리자 람블라 거리를 거쳐 ‘람블라 델 라발(Rambla del Raval)’에 들어섰다. 거대한 원기둥 형태의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이 바로 바르셀로 라발 호텔이다. 마치 거대한 현대미술 전시를 보는 듯한 바르셀로 라발을 멀리서 보면 유리로 덮인 거대한 알루미늄 캔처럼 생겼다. 외벽 전체에 스테인리스 재질의 와이어 망사를 덮은 탓에 다소 어둡지만 그 위에 씌운 크리스탈 마감재가 뛰어난 반사율을 자랑한다. 무엇보다 그 독특한 형태의 호텔 외벽이 지닌 기능이 중요하다. 투숙객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철저한 방음, 시내의 전경을 고스란히 전시하는 투명한 외벽은 태양의 열기를 온전히 차단해낸다. 360도 타원형으로 이뤄진 건물의 높이는 37.5미터, 지름은 무려 1만 평방미터에 이른다. 바르셀로나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전망대나 다름없다. 일광욕을 즐길 수 있는 테라스나 수영장이 있는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시내의 전경은 바르셀로 라발이 제공하는 가장 훌륭한 서비스다. 파노라마 필름을 재생한 와이드 스크린을 통해 바르셀로나를 관람하고 있다는 착각을 느낄 정도로 탁 트인 바르셀로나의 전경은 보기만 해도 포만감을 준다. 총 182개의 룸은 바르셀로나 시내를 향한 창문 덕분에 제각각 특별한 경관을 뽐낸다. 만일 바르셀로 라발을 다시 찾는다면 결코 같은 방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만 바르셀로나의 풍경을 수집하는 재미를 얻을 것이니까.
바르셀로 라발은 젊고 실용적인 현대적인 건축물이다. 곡선미가 두드러지는 외형처럼 실내 인테리어 또한 곡선의 디테일을 강조했다. 포괄적인 테두리부터 세심한 디테일까지 모던한 감각과 실용적인 편의를 자랑한다. 모서리의 흔적을 지워낸 가구들의 곡선 테두리는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감상과 편의가 공존하는, 화려함과 안정감의 조화로부터 바르셀로 라발의 체온이 느껴졌다. 73개의 채널을 비롯해 아이팟 로더까지 제공하는 32인치 평면 TV와 작은 업무용 테이블,네스프레소 커피메이커까지, 모든 방은 투숙객들의 편의와 취향을 배려한다. ‘듀퐁’ 계열의 인조 대리석 전문기업 ‘코리안(Corian)’에서 마감한 욕실의 매끄러운 바닥재는 관광으로 쌓인 여독을 우아하게 씻어내린다. 사우나와 체육관 시설을 찾는다면 여독을 완전히 증발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방을 비롯해서 로비와 루프 테라스에서도 무선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 비즈니스를 위해 묵는 고객이라면 사업적인 미팅을 비롯해 연회와 컨퍼런스를 열 수 있는 대회의실을 사용할 수 있다. ‘A bird told me(Un Oiseau m’a dit)’, 즉 투숙객의 요구에 제공되는 카운터 서비스는 고객의 비밀을 철저히 보장한다.
바르셀로나의 젊은 트렌드를 만끽하고 싶다면 레스토랑 라운지 바 ‘B라운지’를 찾는 것도 좋다. 코스모폴리탄 콘셉트를 표방한 B라운지는 유명한 인테리어 디자이너 ‘조르디 갈리(Jordi Gali)’의 작품이다. 블랙 앤 화이트의 투톤 컬러가 대비를 이루는 라운지 내부는 LED조명의 다채로운 색감을 갈아입으며 세련된 멋을 더한다. 테크놀러지에 결합된 심플한 감성이 돋보이는 복도와 정문도 조르디 갈리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무채색과 단색의 배치를 투명하게 보좌하는 LED조명이 패셔너블한 이미지를 연출한다. 총 125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B라운지는 엄선한 요리와 칵테일을 즐길 수 있는 카페라운지다. 주방장 후안 고메즈(Joan Gomez)는 말한다. “가장 신선한 재료를 모아 즐거운 미식을 제공함으로써 여행의 묘미를 전한다.” B라운지는 혁신적인 메뉴를 개발한 퓨전 레스토랑으로서 확고한 명성을 뽐내고 있다.
바르셀로 라발은 바르셀로나의 성장과 발전을 상징하는 혁신적인 건축물이다. 전통적인 색채가 강한 바르셀로나에서 현대적인 인테리어를 보여주는 바르셀로 라발은 불과 1년 여만에 바르셀로나의 랜드마크로 그 입지를 굳혔다. 바르셀로 라발의 진가는 심플한 레드 색상의 정문을 들어설 때 확인할 수 있다. 디테일과 규모, 실용성과 감성을 동시에 자랑하는 바르셀로 라발은 현대적인 디자인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바르셀로나엔 전설이 하나 있다. 카탈루냐 광장에서 항구 쪽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카날레타스 샘물을 마시면 바르셀로나에 매료되어 살게 된다는 내용이다. 바르셀로 라발은 새로운 전설이다. 바르셀로 라발을 찾은 고객은 다시 한 번 새로운 풍경의 조각을 수집하고자 그 문을 두드릴 것이다. 람블라 거리의 전통과 바르셀로 라발의 현대적 안락함은 마치 시간 여행을 즐기는 듯 유쾌하고 즐겁다.
비키(레베카 홀)와 크리스티나(스칼렛 요한슨)는 지금 막 미국에서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서로를 잘 이해하는 친구 사이지만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두 사람은 특히 남자에 대한 견해가 판이하다. 조건을 꼼꼼히 따지며 신중하게 접근하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는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다. 안정적인 직장을 지닌 약혼자가 있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는 최근 새 남자친구와 이별을 겪었다.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바르셀로나에 왔지만 두 사람의 기대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Vicky Christina Barcelona>(이하, <내 남자>)는 심플한 원제처럼 ‘비키’와 ‘크리스티나’가 ‘바르셀로나’에서 겪은 이야기다. 건축학 석사논문에 도움이 될만한 가우디 건축물을 기대하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새로운 경험과 상대를 원한다. 비키와 크리스티나의 전혀 다른 꿍꿍이는 두 사람의 휴가를 사소함으로부터 밀어낸다. 물론 그 계기는 엉뚱하게 찾아온다. 우연히 미술관에서 마주친 화가 안토니오(하비에르 바르뎀)에게 반한 크리스티나는 비키와의 식사 테이블로 찾아와 여행에 초청하겠다는 안토니오의 뻔뻔한 청을 받아들인다. 비키는 이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결국 그 여행에 합류하게 되고 그 여행은 두 사람의 휴가를 사소함으로부터 이탈시킬 만한 비밀을 선물한다.
크리스티나의 위궤양으로 인해 예기치 않은 비밀을 얻게 된 비키는 이로 인해 자신의 일생을 뒤흔들릴만한 충동을 겪게 된다. 한편 여행을 병석에서 보낸 크리스티나는 다시 바르셀로나에 돌아와 안토니오와 연인이 된다. 하지만 안토니오의 유명한(!) 전처 마리아(페넬로페 크루즈)가 나타나고 기묘한 삼각관계가 이뤄진다. <내 남자>는 두 개의 삼각관계를 중첩하는 세 여자와 한 남자 사이에 놓인 기묘한 사연을 펼쳐놓은 영화다. 한 쪽은 비밀에 휩싸여 있으며 한 쪽은 기묘하게 얽혀있다. 누군가에게 익히 비정상이라 불릴 만한 관계 속에서도 로맨스는 이뤄지고 일상은 반복된다.
특별한, 혹은 기이한 사연을 담담하게, 혹은 유쾌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건 그 사연을 대하는 영화의 관점이 한없이 사소한 까닭이다. 동시에 리드미컬한 내레이션과 경쾌한 배경음이 불미스러움으로부터 그 인물들의 행위를 구출하는 덕분이기도 하다. 두드러지지 않지만 소소하게 묻어나는 유머 감각이 산재한 이 막장 스토리를 조율하는 우디 알렌의 감각적 리듬이 영화의 중심에 있다. 저마다의 감정을 이루고 동선을 펼치는 캐릭터들의 조합은 어떤 약속도 없는 이야기를 펼쳐내듯 흥미롭게 사연을 구성한다. 우연적인 감정과 필연적인 본능에 휩싸일 때 사연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튄다. 그러나 그 예기치 못한 사연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주체들을 결심하거나 체념하게 만든다.
비키와 크리스티나는 바르셀로나에서 각각 예상 밖의 경험을 얻는다. 안토니오와 그의 전처 마리아는 그 경험의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그 경험을 통해 비키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가치관의 진동을 느끼고, 크리스티나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가능성을 발굴한다. 자신과 전혀 무관할 것 같은 일상을 체험하거나 예측하지 못했던 방향성을 발견한다. 타인과의 관계는 비키와 크리스티나에게 불가능한 영역을 선사하거나 선물한다. 물론 대단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하나의 경험담을 관통할 뿐이다. 그렇다고 <내 남자>가 그저 그래서 허무할 것 같은 이야기 따위는 아니다. 형태적으로 비키와 크리스티나는 바르셀로나에서 휴가를 보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비키는 자신의 약혼자와 결혼한 채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크리스티나는 여전히 또 다른 충동을 꿈꾼다. 하지만 그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두 사람의 인생에 미묘한 변화를 부르는 첫 번째 도미노가 된다. 약혼자와의 잠자리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거나, 아무런 재능도 없다고 믿어지는 삶에서 뷰파인더의 가능성을 찾는다. 또한 서로 사랑하지만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믿는 안토니오와 마리아 역시 크리스티나를 통해 완전한 삼각관계(!)를 이루고 만족스런 일상을 보낸다.
우디 알렌은 항상 인물들의 작은 사연들을 관망하듯 수집한 뒤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그 세계엔 윤리적 태도보다도 결과적인 이야기의 형태만이 끝내 자리잡는다. <내 남자>도 그 과정 끝에 남는 어떤 결과만이 존재할 뿐이다. 스토리텔링은 어떤 훈계를 위해 복무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저 스토리텔링으로서 순기능에 충실하며 인물들은 저마다의 삶을 산다. <내 남자>는 그 사연이 부르는 후일담이 대단하다기 보단 순간을 채우는 관계와 사건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한 이야기다. 누군가의 흥미로운 경험담을 듣는 즐거움에 가깝다. 결국 그 이야기 속에서 한 차례 경험담을 거친 인물들은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간다. 뭔가 대단한 형태의 결과를 기대한다면 한편으로 허무에 시달릴지 모를 일이나 그저 그 과정 자체를 즐긴다면 충분한 만족감을 얻을 만하다. 훌륭한 재담꾼의 이야기는 그저 듣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만족감을 부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야기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도 간과할 수 없는 감상포인트가 된다. 특히 페넬로페 크루즈는 남미의 태양처럼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뿜어낸다. 물론 한 가지 애석한 점은 심플하고 도도한 원제를 천박한 막장 드라마 반열에 올린 한국개봉명이랄까. 좀처럼 적응하기 힘든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라는 제목은 영화에 대한 기대감도, 만족감도, 하나 같이 깎아 내릴만한 작명 센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