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과 <아가씨>는
중력 같은 영화들이다. 근래 한국영화를 두고 논할 때 좀처럼 발음되지 않았던 언어가 두 영화 주변으로
시끄럽게 모여들었다.
지난 5월 11일에 개최된
칸국제영화제에서 <아가씨>는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곡성>은 비경쟁부문에 초청됐다. <아가씨>는 박찬욱 감독이 미국으로 건너가 완성한 <스토커> 이후 3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이었다. 국내에서 제작된 작품으로선 <박쥐> 이후로 7년만이었다.
<곡성> 역시 나홍진 감독이 <황해> 이후로 6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었다. 두 작품 모두 개봉 전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예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불어오고 있었다. <곡성>은 5월 11일에 개봉했다. 한
달여 만에 600만 관객을 끌어들였다. <아가씨>는 6월 1일에 개봉했다. 2주 만에 300만 관객을 끌어들였다. 흥행작이 됐다. 그리고 여느 흥행작처럼 수많은 감상이 올라왔다. 그런데 근래 여느 흥행작들과는 다른 느낌의 감상들이 쏟아졌다.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넘어서 영화에 대한 해석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영화적 의도에 관한 논쟁이 뜨겁게 오간다. 관객의 시점에서 영화를 평가하기 보단 감독의 시점을 유추해내려는 노력이 두드러진다. 객석보단 스크린 너머에 주도권이 놓인 인상이다.
<곡성>은 감각을
마비시키는 작품이다. 영화를 본 대부분의 관객들은 시속 150km로
날아오는 폭투를 피한 것처럼 넋이 나간 기분으로 상영관을 나왔을 것이다. 너무 세게 맞아서 통증보다
얼얼함이 느껴지는 듯한, 그래서 뒤늦게 깨어난 감각과 함께 살아나는 통증의 정체를 알고 싶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아졌을 거다. <아가씨>는 민감한 소재를 도발적으로 다루면서도 감각을 예민하게 일깨우는 작품이다.
어떤 이는 몸을 휘감고 지나가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고, 어떤 이는 자신의 욕망을 발가벗기고
조롱 당한 듯한 불쾌함과 직면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지지 여부를 사이에 둔, 언어의 전선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두 영화를 둘러싼 언어의
온도는 각기 다르다. 하지만 두 영화가 어떤 식으로든 존중 받고 있다는 건 명확하다. 찬사와 비판 모두 영화의 의도 안에서 이뤄진다. '재미있다' 혹은 '재미없다'는 이분법적인
감상을 넘어 영화적인 의도 자체를 중심에 둔 해석과 논쟁이 야기된다는 건 결국 두 영화가 지닌 '영화적인
힘' 자체를 인정 받았음을 의미한다.
근 몇 년 사이 한국영화는 일정한 억양으로만 발음됐다. 영화에 대한
완성도를 논하는 억양은 여전하지만 영화를 해석하고, 지지하고, 영화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억양은 힘을 잃었다. 소위 말해 '때깔'이 좋은 영화들은 많아졌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별다르게 하고 싶은 말이 없어졌다. 영화들이 너무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최고의 화제작이자 흥행작이었던 <암살>과 <베테랑>을 봐도 그렇다. 두 작품은 우리가 짊어진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사회를 관통하는 수작이다. 보고 나면 우리가 지금 시대에 던져야 할 말에 대해 깨닫게 되는 쾌감이 있다. 하지만 결국 언어도 그 쾌감에 갇힌다. 두 영화가 지닌 영화적 문법을
설명하거나 두 영화가 관통하는 화두의 배경 지식과 사회 분위기를 살필 순 있지만 두 영화를 통해 무언가를 상상하긴 어렵다. 물론 이는 <암살>과 <베테랑>을 저평가하기 위해 동원된 언어가 아니다. 다만 최근의 한국영화 대부분이 그런 장르적 쾌감과 형태적 완성도 그리고 이야기의 완결성에 사로잡혀 무언가를
자꾸 잊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말이다. 형식적으론 꽉 차 있지만 상상하게 만드는 재미가 현저하게 줄어든
인상이랄까. 또 다른 화제작이었던 <내부자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에 대한 호감은 있지만 영화 이상의
호기심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저 이 세계가 돌아가는 부조리한 함수를 상영관에서 확인하고 사회적인 불만과
분노를 대신 일갈하고 때려눕혀준 영화에 대한 대리만족적인 쾌감만 되새김질될 뿐이다.
그런 면에서 나홍진의 <곡성>과
박찬욱의 <아가씨>는 한국영화가, 그리고 한국영화를 본 관객들이 잃어버린 언어를 실감하게 만든다. 인간의
내면적인 호기심을 직설적으로 강타하고, 기이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세계의 은유를 통해 호기심의 외연을
키워낸다. 상영관을 벗어난 순간 맺힌 감상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털어내 버리기 보단 들여다 보고 싶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영화
신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나홍진과 한국영화 신에 지속적인 흥미를 부추기는 박찬욱을 통해 환기된 영화를 향한 언어들은 보다 소중하다.
본래 영화는 보는 재미만큼이나 말하는 재미가 쏠쏠한 매체다. 대중문화의
카테고리 안에 놓인 어떤 매체보다도 말의 힘이 강력하다. 그래서 영화에 관한 리뷰는 플랫폼의 형태와
무관하게 끊임없이 소비된다. 대중문화의 카테고리 안에 놓인 여느 매체보다도 언어로 재생산되는 비율이
현저하고, 관련 커뮤니티도 발달돼 있다. 대중문화 안에서
가장 활발하게 소비되는 매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든 영화를 동일한 가격에 볼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른다는 건 결과적으로 기회비용이 따르는 선택이다. 영화에 대한 말을 듣는다는 건 더 좋은 영화를 소비하겠다는 욕망과 깊게 연관돼 있다. 결국 영화를 말한다는 건 우리가 더 나은 영화를 볼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언어들은 우리가 흥미롭게 여기는 감독들과 작가들의 자궁 노릇을 했다. 영화를 말한다는 건 결국 흥미로운 영화를 볼 수 있는 문턱으로 한 걸음 다가가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한 기회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의 아이콘으로 선택된 건 호주 출신의 미아 바시코프스카였다. 사람들은 의아했다. 팀 버튼이 말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을 통해서 당신이 이 세계를 목격할 것이기 때문이지.” 발음만큼이나 생소한 그녀가 배우의 길을 선택한 건 15세 무렵이었다. 구글을 통해서 시드니의 에이전시를 검색했고, 오디션에 참여한 뒤, 연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2008년, HBO의 미니시리즈 <인 트리트먼트>로 미국에 진출한다. 그녀는 올해 동명 고전을 영화화한 <제인 에어>와 구스 반 산트의 신작 <레스트리스>에서 예사롭지 않은 재능을 전시했다. 분위기가 다른 두 영화에서 상반된 캐릭터를 연기했음에도 그녀에게서는 유사한 재능이 읽힌다. 비밀스러움과 신비로움, 나약함과 강인함, 그녀에게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힘이 있다. 그야말로 타고난 재능이 아닐까. 바시코브스카는 최근 박찬욱의 할리우드 진출작 <스토커>(2012)의 촬영을 마쳤다.
제62회 칸영화제가 막을 내렸다. 현지시간으로 24일 오후 7시 경, 칸 뤼미에르대극장에서 열린 폐막식 및 시상식을 끝으로 12일간의 대장정을 마쳤다. 그리고 최고영예인 황금종려상의 주인공으로 <화이트 리본>의 미카엘 하네케가 호명됐다.
쿠엔틴 타란티노, 제인 캠피온, 페드로 알모도바르, 켄 로치, 이안, 라스 폰 트리에, 두기봉등, 거장들의 신작이 대거 경쟁부문에 초청되며 별들의 잔치라 불렸던 이번 칸영화제는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경악의 연속이었다. <박쥐>를 시작으로 라스 폰 트리에의 <안티크리스트>를 비롯해 잔혹하고 폭력의 수위가 높은 작품들이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기대를 모았던 몇몇 작품들은 평이한 반응을 얻으며 실망감을 더했다. 그런 가운데 제인 캠피온의 <브라이트 스타>와 미카엘 하네케의 <화이트 리본>, 쟈크 오디아르의 <예언자>가 좋은 평을 얻으며 조심스럽게 황금종려상 수상 가능성을 예상케 했다.
결국 지난 2001년 <피아니스트>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고, 2005년엔 <히든>으로 감독상을 수상했던 미카엘 하네케의 <화이트 리본>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에 앞서 쟈크 오디아르의 <예언자>가 심사위원대상에 호명됐다. 지난 해 로랑 캉테의 <더 클래스>에 이어 2년 연속으로 황금종려상 트로피가 프랑스 영화에게 돌아갈 기회가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그에 앞서 역시나 혹평의 중심에서 논란을 면치 못했던 브릴란테 멘도자의 <키나타이>가 감독상을 거머쥐며 야유까지 얻었고, 역시나 범작이라는 평이 우세했던 로우 예의 <스프링 피버>도 각본상을 수상하며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한편, 지난 2004년 <올드보이>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던 <박쥐>의 박찬욱 감독은 <피쉬 탱크>의 안드레아 아놀드와 함께 심사위원상을 공동수상했다. 이로서 박찬욱 감독은 유일하게 칸영화제 트로피를 2개 이상 소유한 한국영화인이 됐다. 기대를 모으던 송강호의 남우주연상은 <인글로리어스 바스타즈>의 크리스토프 왈츠에게 돌아갔다. 브래드 피트보다도 눈에 띄는 연기를 펼쳤다는 중평이 많았다. 또한 칸영화제 최고의 문제작이라 꼽히던 <안티크리스트>에서 자학적인 연기를 서슴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샬롯 갱스부르는 여우주연상으로 이에 보답 받았다. 한편 <무성한 잡초 Wild Grasses>를 발표하며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던 누벨바그의 거장 알랭 레네는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그 밖에 비경쟁부문인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됐던 봉준호의 <마더>는 현지에서 고른 호평을 얻었지만 지난 23일 칸 드뷔시 극장에서 열린 시상식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다. 학생영화를 대상으로 하는 씨네파운데이션 부문에 출품된 조성희 감독의 중편 <남매의 집>은 씨네파운데이션 3등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제62회 칸 영화제 수상작
황금종려상(Palme d'Or): <화이트 리본 The White Ribbon> 미카엘 하네케 심사위원대상(Grand Prix): <예언자 A Prophet> 쟈크 오디아르 심사위원상(Jury Prize): <박쥐 Thirst> 박찬욱, <피쉬 탱크 Fish Tank> 안드레아 아놀드 (공동수상) 감독상(Award for Best Director): <키나타이 Kinatay> 브릴란테 멘도자 각본상(Award for Best Screenplay): <스프링 피버 Spring Fever> 로우 예 남우주연상(Award for Best Actor): <인글로리어스 바스타즈 Inglorious Basterds> 크리스토프 왈츠 여우주연상(Award for Best Actress): <안티크리스트 Antichrist> 샬롯 갱스부르 평생공로상(Lifetime achievement award for his work and his exceptional contribution to the history of cinema):알랭 레네
환자를 앞에 둔 신부는 기도를 거듭할 뿐이다. 기도는 환자는 살리지 못한다. 그저 무기력한 언어로서 환자를 배웅할 뿐이다. 신부는 환자를 살리고 싶다. 하지만 신부는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의 몸을 제단에 바친다. 백신개발실험에 참여해 자신의 육체를 바이러스의 볼모로 삼는다. 하지만 그 결과 신부는 뱀파이어가 된다. 죽음에 직면했던 신부는 뱀파이어의 피를 수혈 받고 살아난다. 스스로의 말처럼 ‘그저 좋은 일을 하려 했을 뿐’인데 운명은 가혹하다. 뱀파이어가 된 신부의 아이러니로부터 <박쥐>는 시작된다.
<박쥐>는 ‘뱀파이어가 된 신부’와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이라는 두 개의 바퀴를 통해 굴러간다. 박찬욱 감독이 택한 두 장의 카드는 박찬욱이라는 네임밸류 안에서 적절해 보인다. 특히 <박쥐>가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건 일면 타당한 느낌이다. 식물적인 삶에 길들여져 있던 여인이 건장하고 본능에 충실한 남자를 만나 정욕을 깨닫고, 이는 흉악한 치정극을 성립시켜 살인의 공모에 다다르게 한 뒤, 질환적인 죄의식에 시달리며 피폐하게 말라가던 공모자들이 결국 성스러운 공멸을 선택하게 된다는 소설의 흐름은 박찬욱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던 관념과 의식들과 적나라하게 연관돼있다. 이는 온전히 개인의 취향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박찬욱 감독의 취향 그 자체로 채워진 사적인 유희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박쥐>는 개인 취향의 수집품에 가깝다.
통제된 연출 속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과장된 표정과 격양된 몸짓을 통해 저마다 인공적인 양식에 철저히 복무한다. 공간을 구성하는 잡다한 소품부터 거창한 미장센까지 하나 같이 기능적인 의미에 종속된 인테리어적 구실에 여념이 없다. 모든 상황이 인공적이다. 연출적인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때때로 배우들은 본연의 인상을 무의식적으로 노출하며 부조리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상당히 과장된 연기를 펼치는 가운데 아주 간혹 제 얼굴을 드러낸다. 본래 각인된 이미지가 강할수록 그 찰나는 자주 반복된다. 이는 연기적 문제에 대한 지적이 아니다. 말 그대로 이 영화가 얼마나 배우의 자의적 해석이 불가능한 영화인가를 드러내는 지점이라 흥미로울 따름이다.
‘뱀파이어’는 부조리를 드러내기 위한 직접적 수단이 되어 흉악하게 응용되고 때때로 빈틈을 찾아 웃음을 삽입하는 소품처럼 활용되기도 한다. 뱀파이어가 <박쥐>의 날개라면 ‘테레즈 라캥’은 몸통이다. 날개와 몸통은 어떤 비중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저 역할의 배분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극적 묘사에 판본 그대로 활용되거나 변주된 이미지로서 모티브의 흔적을 강렬하게 자각시키는 ‘테레즈 라캥’은 <박쥐>를 구현하기 위한 몸통 그 자체다. 특히 <박쥐>에서 인상적인 이미지를 확보했다고 말할만한 시퀀스의 대부분은 테레즈 라캥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에 가깝다. 하지만 때때로 시퀀스를 연결하는 매듭이 헐겁다. 구조적으로 불친절한 형태로 시퀀스가 이어짐을 지각하게 된다. 소설을 미리 접한 자는 분명 결핍을 느낄 것이다. 반대로 소설로부터 동떨어진 이는 의문을 느낄 것이다. 게다가 ‘뱀파이어’와 ‘테레즈 라캥’은 서로 잘 달라붙지 못하는 인상이다. 연상 자체는 기발하지만 효과적인 연동을 보여주지 못하는 느낌이다.
결과적으로 대단히 숭고한 파괴의 절정으로 치닫는 <박쥐>를 마주한 관객들은 두 번 시험에 들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 유희적 취향을 존중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건널 수 있다면, 이차적으로 그 유희를 지지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에 빠질 것이다. 이는 결국 신앙의 차이다. 영화의 결과물 자체가 박찬욱의 완벽한 의도 안에서 이뤄진 산물이라 믿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감상을 설계할 수 있는 관객은 <박쥐>를 성스러운 복음이라 믿고 따르며 기꺼이 자신의 해석을 바칠 것이다. 그러나 지독한 결핍과 인공적 내음을 자각하고 지나친 과잉과 자만의 산물이라 판단하는 이에게 <박쥐>는 그저 지독한 악취미로 치부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박쥐>는 분명 존중할만한 취향이다. 비록 개인적인 영역 안에서 어떤 소통의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제한할만한 작품이지만 분명 그 안에 담긴 예술적 성취 자체를 마냥 질시할 수 있는 그릇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중적인 지지와 작품의 고유한 가치 사이의 함수를 따질만한 셈이 동원될 것이다. <박쥐>는 마치 욕탕의 수면처럼 뜨거운 작품이다. 그 표면의 뜨거움을 참아내는 관객은 누구보다 깊게 잠수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참지 못한다면 그저 발 한번 담가보지 못하고 외면당할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박쥐>는 영화보다도 영화를 둘러싼 말의 형태가 더욱 흥미로운 영화가 될 공산이 크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건 그리 놀랍지 않다. 식물적인 삶에 길들여져 있던 여인과 본능에 충실하던 남자가 만나 정욕을 깨닫고 흉악한 치정극을 거쳐 살인을 공모한 뒤, 질환적인 죄의식에 시달리며 피폐하게 말라가다 결국 성스러운 공멸을 선택하게 된다는 소설의 흐름은 박찬욱의 영화를 관통하던 관념들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박쥐>는 온전히 박찬욱 감독의 취향으로 채워진 사적인 유희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개인 취향의 수집품에 가깝다. 관객은 두 번 시험에 들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 유희적 취향을 존중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건넌다면, 이차적으로 그 유희를 지지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 뒤따른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과장된 표정을 띠고 격양된 연기를 펼치며, 공간을 구성하는 잡다한 소품들은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기능적인 인테리어의 속성에 얽매여있다. 대단히 인공적인 형태로 모든 상황이 연출적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배우들의 연기는 그 통제에 얽매여 있다가도 종종 배우 본연의 얼굴을 숨기지 못해서 이질감을 발생시키기도한다. ‘뱀파이어’는 부조리를 묘사하기 위한 수단처럼 흉악하게 응용되거나 때때로 유머러스한 소품이 되기도 하지만 끝에 다다를수록 숭고해진다. 다만 대부분의 극적 묘사에 판본 그대로 활용되거나 모티브로서 변주된 ‘테레즈 라캥’의 흔적들이 굴러가는 풍경은 시퀀스 자체의 성취를 보여주는 반면 구조적인 불친절을 지각하게 만든다. 소설을 숙지한 자라면 결핍을 발견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의문에 빠질 것이다. ‘테레즈 라캥’과 ‘뱀파이어’의 연동은 기운의 결탁자체로서 기발하지만 두 콘텐츠가 잘 달라붙어 연동되지 못하고 틈을 벌린 채 굴러간다는 인상을 남기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신앙의 문제다. 영화의 결과물 자체가 박찬욱의 완벽한 의도라고 믿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감상을 설계할 수 있는 관객에게 <박쥐>는 성스러운 복음이 될 것이다. 반면 결핍과 인공성이 지나친 과잉과 자만이라고 판단하는 이에게 <박쥐>는 그저 악취미라 불쾌한 것이 될 뿐이다. 그 취향을 존중할 필요는 있다. 지지할 수 있는가가 문제다. 아이러니하지만 <박쥐>는 영화보다도 영화를 둘러싼 말의 형태가 더욱 재미있는 영화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