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 다섯 군대 전투>를 축약하자면 점입가경이라 할 수 있다.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을 통해 한차례 증명된 바 있지만 피터 잭슨이 물리력을 총동원해서 전투신을 뽑아냈을 때의 스펙터클은 볼거리 중의 볼거리다. 아이맥스에서 봐야 한다는 말을 아낄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여러 종족이 엮어서 발생하는 공명심과 이기심의 복마전과 물리력의 차이를 바탕에 둔 전투적 정황의 다양성은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입체적인 감상 구조를 제공하고, 켜켜이 틈이 없는 감상적 지층을 만들어내는 덕분에 딱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조차 주지 않는다. 그야말로 완벽한 롤러코스터. 어떤 식으로든 아이맥스에서 보시란 말밖에 할 수가 없다. 피터 잭슨이 다시 중간계로 끌려 들어가 <호빗> 트릴로지, 심지어 원전에도 없는 내용을 확장해 가며 3부작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살짝 혀를 차는 입장이었는데 이 세 번째 작품으로 다시 한번 갈무리된 트릴로지를 봤을 땐 대사업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스타워즈>의 살짝 민망한 3부작 프리퀄과 대조적으로 언급될 만한 프리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올 겨울에 이만한 볼거리는 없다. 무조건 극장에서, 이왕이면 아이맥스다.
1. 뒤늦은 <노예 12년> 관람기. 스티브 맥퀸의 영화답게 적절하게 가학적인 영화다. 하지만 남북 전쟁 이전의 미국 남부에서의 흑인 노예를 소재로 둔 영화라는 점에선 생각보단 물리적인 가학성이 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나치게 감정을 싣지 않고 적절하게 고통을 묘사한다. 물론 적절하다고 말하기엔 물리적으론 끔찍하지만 그 시대적인 예상 안에서 정확히 머무르는 인상이랄까. 인물이 짊어진 고통을 영화가 끌어올려 대변하는 느낌이 전혀 없다. 어떤 면에선 역시 지독한 중립성이 느껴진다. 너무나도 사실적인, 한 치의 과부족이 없는 시대의 공기를 포착해낸다.
2. 육체적인 끔찍함을 넘어서 전체적인 풍경이 선사하는, 압도적인 참담함을 느끼게 해줄만한 신들이 더러 있는데 특히 중반부에서 신... 한복판에 절대절명의 상황에 놓인 주인공의 모습을 제시한 뒤 점차 주변부의 풍경을 스케이프로 확 펼쳐놓는 광경은 마치 <만종>과 같은 평온함 사이에 갇힌 개인의 지옥을 너무나 사실적인 화풍에 담아 그리듯 전하는 인상이라 입을 벌리고 본 것 같다. 공감이나 이해라는 단어를 동원할 수 없는 그 시대적인 절망감이 한순간에 밀려오는데 이건 내가 어떤 식으로든 이렇다, 저렇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라는 압도적인 살풍경이었다. 단언컨대 손에 꼽힐만한 명장면이었다. <헝거>와 <셰임>에선 생각지도 못했던, 스티브 맥퀸이 놀라울 만큼 명확한 시선을 지닌 동시에 광각의 시야를 조망할 수 있는 감독이라고 생각했다. <노예 12년>을 압축하는 하나의 신이라고 생각한다.
3. 치웨텔 에지오포는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아도 손색이 없다. 마이클 패스벤더는 정말 끔찍했다. 영화가 끌어 안아야 할 서스펜스를 잘 해결해준다는 면에서 <노예 12년>의 일등공신이라고 생각한다. 눈에 띌 때마다 조마조마했던 폴 다노도 물론. 개인적으론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캐릭터가 기능적으로 중요했다고 본다. 그 시대적인 관성 안에서 '착한' 주인을 묘사함으로서 시대적인 한계를 명확히 보여주는 바로미터 같은 캐릭터랄까. 결말부 즈음에 짤막하게 등장해서 일장연설을 하는 브래드 피트는 왠지 제작자 찬스를 쓴 느낌.
4. 이 정도면 회자될만한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걸작으로서의 울림과 무관하게 관객에게 호감을 남길 작품이 될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상업적인 성공 여부를 짐작하는 게 아니다. 흑인 감독이 그린 흑인 노예에 관한 영화가 이리도 냉정한 거리감을 둘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노예 12년>은 감정적인 이입을 거부한 채 명확하게 그 시대성을 환기시킨다. 그래서 그 환기가 관객 입장에선 시리거나 쓰리거나 무거울 거다. 그래서 관람을 권하고 싶다. 통증을 공감하는 것 이상으로 통증 그 자체를 목도하는 것도 때론 중요하다.
<호빗> 시리즈를 이끄는 건 <반지의 제왕>으로 익숙한 피터 잭슨이다. 불가피한 이유로 길예르모 델 토로에게서 메가폰을 넘겨 받았다 해도 <호빗>은 끊임없이 <반지의 제왕>과 비교당할 운명을 타고난 작품이란 것이다. 그리고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는 새로운 트릴로지를 받치는 허리이자 전후를 잇는 다리 역할에 충실해야 할 두 번째 속편이다. 본격적인 서사의 진전이 이뤄진다. 트릴로지의 성패를 쥐고 있는 분수령이 되는 작품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속편 역시 초당 48프레임을 영사하는 하이 프레임 레이트(HFR) 방식으로 제작됐다. 사실 전작인 <호빗: 뜻밖의 여정>에서 HFR은 과욕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서사의 시동을 거는 첫 작품에서 이 특수한 기술이 효율적으로 활용됐다고 말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서사의 주행을 위해서 진로를 설계하는 목적이 강했던 첫 작품에선 액션신의 비중도 적었던 만큼 무언가 특별한 것을 보고 있다는 인상을 부여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역동적인 카메라의 이동을 통해서 공간 전반을 활용하는 몇몇 액션신에선 확실히 HFR의 장점이 부각되는 인상이었다. 스펙터클한 액션신과 이미지의 비중이 늘어난 이번 작품에선 HFR의 장점이 보다 뚜렷해 보인다. 특히 다이내믹한 카메라의 이동과 전방위적인 공간 활용이 빛을 발하는 협곡에서의 추격신은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에서 단연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원작자인 J.R.R 톨킨은 <반지의 제왕>에서 세계관의 자궁 역할을 한 <호빗>의 일부 설정을 수정했다. 피터 잭슨이 톨킨의 <호빗>을 바탕으로 원작과 다른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건 이와 비슷하다. <반지의 제왕>은 톨킨의 원작에 충실한 작품이지만 <호빗>은 오히려 <반지의 제왕>의 프리퀄로서의 목적에 충실하고자 원작을 적극적으로 인큐베이팅해낸다. 원작과의 연관성에 관대해질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는 훌륭한 각색물이자 <반지의 제왕>의 프리퀄로서의 목적을 확실히 달성하는 작품이다. 어떤 면에선 <반지의 제왕>보다도 피터 잭슨의 인장이 보다 확실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기술적 시도와 서사적 의도가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성공적인 트릴로지의 완결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