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의 ‘공감’각
<카트>는 뜨거운 현실에서 잉태된 영화다. 뜨거움만으로 세상을 바꿀 순 없다. 부지영 감독은 알았다. 공감할 수 있는 온도의 언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영화가 공감의 언어일 수 있음을.
<카트> 개봉이 일주일 남았다
인터뷰를 하도 많이 했더니 이미 끝난 영화 같다.
여성감독으로서의 어려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을 거 같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요즘 대학교 영화과엔 여자가 더 많고 남자보다 성적도 좋다는데 현장 상황은 그렇지 않다. 분장이나 헤어, 의상 쪽엔 항상 여자가 많지만 조명, 촬영, 연출, 제작 분야는 반대다. 그런 걸 보면 남자보다 여자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적은 건 맞는 것 같다.
제목은 처음부터 <카트>였나
시나리오 단계에서도 제목은 <카트>였다. 너무 딱딱한 제목이라 바꿔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이 있었고, 몇 가지 제목을 생각해봤지만 더 나은 게 없었다.
카트는 영화 속에서 중요한 ‘변화’를 대변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카트는 고객들이 쇼핑을 위해 이용하는 도구다. 마트 직원들 입장에선 카트가 일자리를 유지시켜주는 도구인 셈이다. 그래서 마트 직원들은 카트의 혜택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된다. 하지만 파업을 하고 마트를 점거하면서 카트는 저항의 무기가 된다. 카트의 쓰임이 변하듯 사람들도 성장하고 변화한다. 그래서 영화와 맞아떨어지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2007년, 비정규직 보호법 실행 후 일어난 이랜드의 비정규직 대량해고에서 비롯된 파업이 주요한 모티프가 됐다던데
그렇게 알고 있다. 시나리오 각색 과정에서 다른 비정규직 관련 사례를 비롯한 다양한 사건들을 살펴보고, 1년 넘게 시나리오를 만졌다.
각색 과정에서도 추가적인 취재가 필요했나 보다
과거의 사건이 모티프가 됐지만 지금도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는 일이니까 현재 상황에서의 리얼리티가 보강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우린 항상 을입니다’란 스티커는 한 백화점의 직원 탈의실 벽에 붙어있던 것을 반영했다. 조직도를 직원 공간에 붙여놓음으로써 암암리에 실행하는 억압된 관리 체제도 보여주고 싶었다.
<카트>의 리얼리티는 사실적 묘사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이 세상이 원래 이렇다라는 잠재적 인식도 한몫을 거드는 것 같다
이미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일 거다. 굳이 꺼내서 얘기하지 않는 거지. 상업영화로서 의미가 있다는 건 그래서다. 거리감이 느껴지게 ‘비정규직’이란 단어로 설명하는 대신 영화를 보면서 내 처지가 될 수도 있다고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영화를 통해 보다 쉬운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거다.
보고 나면 화가 나는데 우울하진 않아서 좋은 영화였다
화가 났다니 인물들의 정서에 깊게 공감한 것 같다. 선희(염정아)도 화를 내고, 태영이(도경수)도 화를 내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스컴을 통해서 이런 사건을 접하게 되다 보니 사람보단 사건을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감정이 움직이지 않는 거다. 하지만 영화는 사람으로 접근하니까 공감대가 달라진다. 나는 그게 <카트>의 강점이라고 본다.
소재의 심각함을 끌어안으면서도 대중성을 확보하는 게 관건이었겠다
맞다. 시나리오를 보고 나서 심재명 대표님을 만났는데 “<카트>를 작은 영화로 만들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 사실 독립영화로 이런 이야길 하면 약간 빤해 보이는 인상이 있고, 배급 상황도 열악해질 확률이 크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상업영화로 만들겠단 생각 자체가 멋있었고, 명필름이라면 가능할 거 같았다. 시나리오에 감동했다며 캐스팅에 응해준 배우들도 고마웠다.
배우들의 열연이 영화에 큰 공헌을 했다
빚을 많이 졌다. 눈빛이나 표정만 봐도 잘하려고 애쓰는 게 보였다. 격한 신들이 적지 않고, 겨울에 물대포도 맞았는데 자신들이 나오는 컷이 아니어도 옆에서 열심히 하더라. 40명 정도의 배우들이 한 장소에서 대기하고, 촬영하면서 진짜 유대감이 생긴 것 같다.
본격적인 파업 전후에 따라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컷의 편집이 달라진다
전반부는 차분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마트에서의 일상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진상 고객을 응대하거나 연장근무 명령을 받거나 탈의실이나 휴게실에서 불합리한 처우를 받는 모습까지도. 그래서 파업 전까진 광각렌즈로 전체적인 풍경을 조망할 뿐, 카메라가 나서지 않는다. 후반으로 갈수록 인물들의 갈등이 표출되니 개개인의 심리를 드러내고자 망원렌즈로 접근했다. 사람들이 움직이면 카메라도 춤을 춘다. 계산대 점거 신에선 롱테이크로 전체적인 움직임을 쭉 훑었고, 공권력이나 용역과 대치하는 장면에선 컷을 많이 나눠서 격렬함을 드러내고 싶었다.
영화 속 마트는 세트였다던데
용인에 있는 물류창고인데 외관이 마트와 비슷했고, 내부 공간이 700평이라 적당해 보였다. 그리고 세트 현장과 15분 거리에 숙소를 마련해서 배우나 스태프 모두 출퇴근하듯 현장에 갈 수 있으니 편했다. 산 주변에 덩그러니 있는 곳이라 외부풍경은 다 CG로 만들었다. 영화의 반이 CG다.
대형마트의 협조를 얻기 힘든 영화일 거 같긴 한데, 혹시 시도는 해봤나
하긴 했다. 혹시라도 직원들 공간이나마 찍을 수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촬영 시간 확보가 어려웠다. 지금은 24시간 근무 체제가 아니지만 폐점과 개점 사이에 쓸 수 있는 시간이 일곱 시간 정도에 불과해서 물리적으로 촬영이 힘들겠더라. 물론 시나리오를 보여줘도 좋아하지 않았겠지만.
엄마인 선희(염정아)의 각성이 아들 태영(도경수)의 각성을 이끌어낸다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처럼 느껴진다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엄마로 인해 발생하는 자신의 변화에 갈등하지만 끝내 엄마와 화해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이 영화가 희망적으로 느껴진다. 어떤 분들은 가난의 대물림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태영이 엄마와 겪은 갈등과 화해가 어른이 돼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상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 결말이 힘있게 느껴지는 것도 태영의 변화가 희망의 담보가 되는 덕분이다
동의한다. 해고된 마트 직원들이 부당함에 맞서 싸우길 결심한 건 사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인데 결국 가족들과 갈등하게 된다. 그런데 아들인 태영이랑 화해하는 선희에겐 해피엔딩인 거다. 그 싸움이 어떻게 될진 몰라도 아들의 이해와 지지를 받는다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모든 캐릭터에 존재감을 살리는 것도 중요했을 거 같다
그건 배우들이 너무 잘해줘서(웃음)…… 사실 나는 도경수만 신경 썼다. 유일하게 연기 경험이 전무한 신인이었기 때문에 공을 들여야 했다.
<괜찮아, 사랑이야>에 캐스팅되기 전에 <카트> 촬영이 끝났다고 들었다. 연기 경험이 전무한 도경수를 캐스팅한 배경이 궁금하다
내가 캐스팅 과정에 관여한 건 아니다. 명필름에선 존재감 있는 인물이 이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아이돌 캐스팅을 염두에 둔 오디션을 봤다. 캐스팅 디렉터의 안목으로 도경수를 선택했다. 사진으로 봤을 땐 감이 안 왔는데 직접 보니 기대감이 생겼고, 열정이 보였다. 뭔가를 말해주면 잘 받아들인다. 스폰지 같더라. 잘하는 척하거나 계산하지 않고 자신의 바닥까지 드러내며 최선을 다하니까 부족한 게 보이면 바로 말해줄 수 있었다. 그 친구를 대하는 게 수월했다.
<카트>의 결말은 <델마와 루이스>의 결말과 닮았다. 절망적인 형태의 결말인데 이상향으로 돌진하는 쾌감이 닮았다. 절망적인 상황을 체감하면서도 더 강한 의지를 품는 두 여자의 모습에서 버디무비의 특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전작인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를 비롯한 단편 연출작에서도 두 여자의 관계를 조명한 경우가 많았다
처지나 성격이 다른 여자들이 만나 특별한 관계로 거듭나는 과정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 사실 가족도 가족이 아니면 같이 살 이유가 없는 사람들일 수 있다. 성격이나 행동도 다 다르고. 그래서 전혀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 유사가족이나 친구가 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관심이 모텔에서 만난 두 노동자나 아빠가 다른 자매, 같은 일을 하지만 생각이 다른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이런 식으로 변주가 되는 것 같다.
관계에 대한 관점이 남다른 것 같다
사실 내가 잘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사람들과 사귀기만 잘해도 인생이 즐거울 텐데.
못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나이가 들수록 귀찮아진다(웃음). 사실 영화에선 쉽게 보여주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하고 친구가 된다는 건 힘든 일이다. 유유상종이란 말이 왜 있겠나. 그 어려운 일을 영화 속에서 해내면서 희열을 느끼는 것도 같다.
단편 연출작인 <산정호수의 맛>의 주인공은 마트 노동자다. 소재면에서 <카트>와 동일하다
사랑이야기를 연출해 달라는 전주영화제의 제안에 응한 뒤 고민하다가 동네 마트 시식 코너에 있는 아주머니를 봤다. 손님이 없어서인지 멍하게 서있더라. 문득 그 분의 삶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마트 노동자가 주인공이 됐다. 우연이었지. 그런데 그 덕분에 <카트>를 하게 됐다.
심재명 대표가 추천했다던데
그 영화를 봤다고 하더라.
<카트>엔 지난 연출작들과 달리 역동적인 신이 더러 있다
파업 신에선 두 가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란 점에서 감정이나 정서를 잘 다뤄야 했고, 역동적인 투쟁 광경도 잘 묘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무술감독이 있었던 현장이기도 했다. 최대한 다치지 않도록 몸싸움을 해야 하니까 합을 짜줄 무술감독이 필요했는데 개인적으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게다가 김우형 촬영감독이 워낙 그런 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서 많이 의지했다.
김우형 촬영감독은 남편이니까 논의도 편했을 거 같다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냥 믿었다(웃음).
개인적으론 다양한 연출 노하우를 습득할 수 있는 현장이었을 거 같다
지난 작품들에 비해 스케일이 큰 영화다. 스태프 수만 첫 영화의 두 배였으니까. 그래서 허덕인 측면도 있지만 전문적인 스태프들 덕분에 수월하게 작업했다.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컷, 오케이만 하면 나머지는 각각의 포지션에 있는 스태프들이 알아서 해결한다. 사전 논의를 거친 작업이라 해도 내겐 놀라운 경험이었다. 영화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협업이란 걸 여실히 느꼈다.
혹시 최규석 작가의 웹툰 <송곳>은 봤나? <카트>와 유사한 관점을 지닌 작품이다
시나리오 각색을 마치고 촬영을 준비할 무렵 연재가 시작된 걸로 안다. 4회 정도까지 보다가 <카트>와 비슷한 장면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그 뒤론 보지 않았다. 동일한 주제의식에서 출발한 작품이니 비슷한 국면이 있을 순 있지만 그 장면 자체의 느낌이 너무 비슷해서 영향을 받게 될까 봐 안 봤다. 이젠 봐도 되겠지. 작가님과는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 기사가 나가면 아마 <카트>는 개봉 2주차일 거다
일단 손익분기점은 넘었으면 좋겠다. 어쨌든 많은 사람이 봤으면 좋겠다. 12세 관람가니까 12세 이상은 다 봤으면(웃음)? 그래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면 좋겠다.
(ELLE KOREA DECEMBER 2014 NO.266 'ELLE inter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