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의 세계는 점차 광대해지고 있다. 기억을 잃은 사내의 퍼즐 같은 일상은 거대한 꿈의 해석으로 진전됐다. 놀란의 꿈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의 팽이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 모든 경험을 더듬어서 영화를 만들어왔다.” 크리스토퍼 놀란 스스로가 말하는 경험은 7살에 시작됐다. 시카고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액션 피규어와 함께 아버지의 슈퍼 8mm 카메라를 장난감처럼 다루며 영화를 익혔다. 후에 학업을 위해 런던으로 돌아온 놀란은 런던대학교 산하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며 칼리지 필름 소사이어티에서 활동하는 가운데 몇 편의 단편을 연출한다. 졸업 후, 장편 데뷔의 활로를 모색하던 그는 훗날 제작자로서 든든한 후원자가 될 엠마 토마스를 만나 1997년 결혼식을 올린다.
이듬해 ‘신카피 필름’이라는 제작사를 설립한 놀란은 장편데뷔작 <미행>을 연출한다. 단돈 6천불의 저예산 영화 <미행>은 촬영 허가를 얻지 못한 탓에 도둑촬영이라 불리는 게릴라 슈팅과 핸드헬드로 촬영된 작품이다. 주말 동안만 촬영을 이어나간 탓에 1년 만에 완성된 영화는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서 주목을 얻은 뒤, 북미 2개 극장에서 상영되어 5만 불의 수익을 올렸다. 작가지망생 빌이 임의의 인물을 미행하다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는 내용의 <미행>에 대해 놀란은 이처럼 말했다. “그건 트릭이다."순행적인 서사의 흐름을 조각처럼 자르고 이를 정확히 절반으로 나누어 마주세운 뒤 플래쉬백과 플래쉬포워드의 형식으로 전진시킨 <미행>의 서사는 관객에게 하나의 레일에서 마주보고 달려오는 두 개의 기차를 지켜보는 것과 같은 긴장감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메멘토>는 명확하게 <미행>보다 스케일이 커졌지만 두 영화의 스타일은 거의 비슷하다”는 놀란의 말처럼 <메멘토>는 내러티브의 문법에 도전한 <미행>의 성공이 낳은 또 다른 실험적 결과물이다.
동생 조나단 놀란의 단편소설 <메멘토 모리>를 기초로 완성한 <메멘토>는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범인을 찾아 복수하려는 남자의 여정을 그린다. <미행>의 서사적 구조를 흡수한 <메멘토>는 단기 기억상실증이라는 장치를 통해 그 구조적 특이성을 더욱 특별하게 보완했다. 10분 이상 기억을 지속시키지 못하는 남자의 1인칭 시점과 내레이션을 통해 마주보듯 진전되는 두 개의 서사는 결국 중간 지점에서 충돌하듯 멈춰 선다. 은폐된 서사의 조각을 통해 비밀을 위장했던 <미행>과 달리 <메멘토>는 서사적 구조를 통해 감춰진 사실이 드러날 때 진실이 변질되는 과정을 목격하게 된다. <미행>이 진실에 관한 추적을 그린다면 <메멘토>는 진실에 대한 폭로를 그린다. 무엇이 옳은가라는 객관적 사실을 넘어서 무엇을 믿고 있는가라는 주관적 진실을 겨냥한다. 다양한 영화제에서 수상을 거듭하고 흥행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둔 이 작품은 결국 놀란의 재능을 전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할리우드의 러브콜 속에서 놀란이 선택한 건 동명의 스웨덴 영화를 리메이크한 <인썸니아>(2002)였다. 뉴욕의 베테랑 형사 도머는 알래스카의 살인사건에 파견수사를 나오던 중에 백야로 인해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린다. 그는 <메멘토>의 레너드와 같이 진실을 헤매는 동시에 미로와 같은 함정 속에서 신념을 고민해 나간다. 무엇보다도 알 파치노, 로빈 윌리암스, 힐러리 스웽크의 캐스팅은 당시 할리우드에서 놀란의 입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차기작은 이를 증명한다. 놀란은 <블레이드>시리즈의 각본가인 데이비드 S. 고이어와 함께 호흡정지 진단이 내려진 <배트맨>시리즈의 생명연장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이 낡은 히어로 시리즈의 부활은 새로운 심장의 이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만화적인 과장에 기대며 악몽의 세계관을 연출한 팀 버튼과 달리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2005)는 논리적인 인과와 사실적인 묘사가 동원된 하이퍼 리얼리즘의 히어로 블록버스터로 완성됐다. 이는 결국 <다크 나이트>(2008)를 위한 단단한 초석으로서 확실한 가치를 얻었다.
<다크 나이트>에 앞서 연출한 <프레스티지>(2006)는 크리스토퍼 프리스트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야심만만한 두 젊은 마술사의 경쟁을 그린 작품이다. 마술과 마법, 트릭과 환상이라는 가짜와 진짜의 경계 속을 넘나드는 마술사들의 이야기는 마치 허구와 실재의 세계에 두 다리를 걸친 작가의 고뇌와도 어울리는 것이었다. 스토리의 완성도나 캐릭터의 관계, 서사적 구성까지 모든 측면에서 놀란의 능력이 극대화된 이 작품은 캐릭터의 팽팽한 대립구조를 통해 배트맨의 강적 조커가 등장하는 <다크 나이트>의 리허설을 연상케 만들었다.
“슈퍼맨은 근본적으로 신이지만 배트맨은 헤라클레스와 같다. 그는 많은 결함을 메워나가는 인간이다.” <배트맨 비긴즈>에서 블랙 슈트에 가려진 인간의 결핍과 고독을 발췌해냈던 놀란은 <다크 나이트>에 다다라 본격적으로 그 이중성에 주목해 나가기 시작한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배트맨과 조커를 그린 <다크 나이트>는 오락적 이미지로 위장한 사회학적 실험의 양상마저 연출한다. “영웅으로 살다가 죽거나 오래 살아남아서 악당이 되거나”라는 명대사는 제도적 결함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배트맨의 반제도적 활약에서 비롯되는 딜레마를 겨냥한다. 조커의 공황적인 태도 속에서 고립되는 영웅의 자화상은 제도적 한계와 사회적 정의의 함수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개봉을 앞두고 급작스러운 비보를 전한 히스 레저의 무시무시한 열연이 담긴 <다크 나이트>는 전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키며 블록버스터의 완성과 깊이에 대한 새로운 전형을 제시했다. 동시에 이는 거대한 시스템을 능숙하게 운용할 수 있다는 놀란의 자신감이 피력된 결과물이다.
“나는 <인셉션>(2010)이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다른 장르들과 수많은 다른 타입의 영화기법이 조합된 영화라고 생각한다.” 놀란의 말처럼 <인셉션>은 다양한 장르를 쌓아 올린 지층과 같은 영화다. 타인의 꿈에 침입해 생각을 추출해내는 인물들의 활약을 그린 <인셉션>은 초현실적인 상상력을 통해 얻어진 SF적 세계관에 다양한 캐릭터의 개성과 활약상을 전시하며 케이퍼 무비 특유의 활력을 주입한다. 동시에 카체이싱과 무중력 격투, 설원의 총격전까지, 경계를 넘을 때마다 생소한 환경으로 돌변하는 꿈의 단계적 변화는 다양한 액션신을 연출하기 위한 공간적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동시에 이 모든 여정은 확실한 마침표를 찍지 않음으로써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결말을 통해 관객에게 지울 수 없는 페이소스를 ‘인셉션’시킨다. 이 열린 결말은 놀란 스스로 자신의 손을 떠나간 영화의 결과에 대한 관객 스스로의 판단을 유도하는 것과 같다. 넘어질 듯 비틀거리는 팽이를 비추던 줌인숏이 암전되는 순간, 그 모든 ‘꿈의 해석’은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남게 된다. 그 순간에 탄식을 내뱉었다면 다시 한번 되돌아가서 팽이를 응시하라. 놀란은 “나에게 영화의 즐거움이란 당신이 인식할 수조차 없게 누군가의 머리 속으로 당신을 데려다 놓을 수 있는데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놀란을 따라 팽이 앞에 섰다. 팽이를 계속 돌릴 것이냐, 멈출 것이냐, 그건 이제 당신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