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 하나와 몸통 밖에 남지 않은 여자 마네킹, 태엽을 감아 움직이는 장난감 물고기, 그리고 그들에게 (진짜 당신이 알아먹을 수 있는) 말을 거는 카멜레온 한 마리. 그는 연기자다. 그는 자신이 선 땅이 자신의 무대라 여기며 자신을 최고의 연기자라 자부한다. 그러나 곧 자신이 두 발로 딛고 선 그 땅이 안주할 수 없는 무대임을 깨닫게 된다. 사막을 관통하는 아스팔트 한 가운데에 내동댕이쳐진 그는 비로소 자신을 위해 마련된 그 에덴이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어항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떨어진 모하비 사막이 생전 처음 만난 생지옥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뜨거운 사막 위에서 거듭 되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하지만 뒤늦게 해답을 얻는다. “누군들 될 수 있는, 나는 랭고다.”
디즈니의 해양 어드벤처 블록버스터 <캐리비안의 해적>시리즈를 연출한 고어 버빈스키의 첫 번째 애니메이션 연출작 <랭고>는 카멜레온으로 환생한 잭 스패로우에 관한 영화이거나 <캐리비안의 해적>의 무대를 사막으로 옮긴 웨스턴 무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건 (잭 스패로우를 연기하던) 조니 뎁을 카멜레온 형태로 리모델링한 주인공 랭고를 비롯한 각양각색의 동물 캐릭터들이다. <캐리비안의 해적> 그 중에서도 세 번째 시리즈였던 <세상의 끝에서>에서 구체화됐던 잭 스패로우의 물음은 <랭고>에서 또 한번 반복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랭고의 물음은 잭 스패로우의 그것처럼 자신에게 맞아떨어지지 않는 세계에 대한 정체성 찾기의 반복이자 자문에 가깝다. 동시에 이는 연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어느 인물이 겪게 되는 정체성의 모순 그 자체와도 맞닿는다. 애초에 카멜레온이라는 설정 속에 조니 뎁을 녹였다는 것 자체가 의도적인 농담처럼 보인다.
수많은 동물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랭고>는 의인화된 캐릭터들을 관습적인 방식으로 수용하는 전통적인 애니메이션의 형태와 거리를 둔 특수한 작품이다. 명랑하고 귀여운 개성을 지닌 각양각색의 동물 캐릭터들이 의인화된 행위를 펼치는, 혹은 그 나름의 동물적 특성을 캐릭터의 개성으로 연결시키는, 오랜 애니메이션의 관습적 태도와 달리 이 작품 속의 동물들이 펼쳐 보이는 행위와 언어는 그들만의 독자적인 커뮤니티를 일찍부터 형성하고 있었던 고유의 풍경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이 단지 동물 탈을 쓴 사람들의 거짓 흉내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좀 더 발전시키자면 이는 동물들로 둘러싸인 하나의 가상적 커뮤티니의 세계, 혹은 평행우주를 염탐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귀엽거나 앙증맞기보단 거칠고 사나우며 메마른 웨스턴 세계의 비정성을 품은 이 애니메이션 속의 캐릭터들은 그 자체로서 역설적인 냉소를 뿜어낸다.
그 표면상의 이미지만으로도 <랭고>는 분명 웨스턴의 클리셰로 치장된 애니메이션이다. 쓸쓸한 사막지대 속에 자리한 낡은 풍경 속에는 미서부 개척시대의 정서를 온몸으로 간직한 억척스러운 풍경들이 갖은 형태로 그려 넣어져 있다. 선악의 대비가 불분명한 웨스턴 정글의 세계관 속에 놓인 인물들은 명확한 교훈적 의식으로 극의 기승전결을 밀고 나가지 않으며 끝없이 반복되는 소동극 속에서 발견되는 건 파란만장한 모험 속에서 우연과 필연의 여정을 거쳐 자아를 향해 달려들게 되는 도마뱀 랭고의 뚜렷한 여정이다. 그리고 이따금 튀어 나오는 허무주의적인 위트가 발견되고 인간 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부정할 수 없게 드러나며 아동적인 취향을 완전히 걷어낸 형태로 극이 진전된다. 이 자체가 이 애니메이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만들지만 동시에 이런 태도는 이 애니메이션의 정체성을 보다 강력하게 드러내는 일종의 역설적인 자아로 이 작품을 단련시킨다. 기시감과 미시감 사이에 정체성을 확보한다.
이 모든 특성을 비롯해서 할리우드의 VFX효과를 책임지는 ILM의 기술력으로 완성해냈다는 점 역시 픽사와 드림웍스의 왕중왕전이 펼쳐지는 애니메이션 월드에 새롭게 머리를 든 <랭고>의 특이점이라 할만하다. 물론 동화적이고 순수한 애니메이션의 기질을 박차버리듯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정서와 이미지로 무장한 <랭고>는 관객의 취향에 따라 명확하게 호불호가 갈릴 만한 작품인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 호의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건 이 작품이 할리우드 장르물들의 관습을 포용하면서도 그것을 끝내 뭉개버리는 태도로서 되레 진화적인 감상으로 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시감으로 범벅이 됐음에도 그 모든 이미지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며 단지 그것이 모호하거나 애매한 태도로서 감상의 뒤편에 남는 대신, 보다 적극적으로 호기심을 자극하고 감상을 진전시킨다. 할리우드 영화들의 관습을 대거 도둑질하듯 끌어다 차용하며 그런 관습적 전통들을 하나의 웃음거리로 만들지만 끝내 그 모든 가치들을 훼손시키지 않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개성을 설득시키며 이를 통해 색다른 위트와 문법들을 완성시켰다. 마치 장인들이 의도적으로 장난을 벌이고 있는, 심오한 소품에 가깝다.
불과 2살의 나이에 백혈병에 걸린 케이트(소피아 바실리바)를 위해 엄마 사라(카메론 디아즈)와 아빠 브라이언(제이슨 패트릭)은 맞춤형 아기를 낳는다. 안나(아비게일 프레슬린)는 케이트를 위해 생을 얻은 아이다. 당연히 케이트를 위해 골수를 채취하고 신장 하나를 넘겨줄 운명이다. 그러나 안나는 유명 변호사인 알렉산더 켐벨(알렉 볼드윈)을 찾아가 자신의 건강을 보호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의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건다. 소송장을 받아 든 사라는 안나의 태도에 격분하지만 브라이언은 안나의 의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며 안나를 인정하고 오빠인 제시(에반 엘링슨)는 말은 아낀다. 그리고 병세가 심각해지는 케이트로 인해 가족의 시름은 깊어져 간다.
완벽한 가족계획을 통해 태어난 아이. 언니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필연적인 운명을 타고난 동생. 유전자 조작에 의해 인간의 맞춤형 생산이 가능해진 현대에서 만물의 창조에 관여하는 건 단지 신만이 아니다.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의 시대에서 생명을 잉태한다는 건 단순히 콘돔의 유무에 따라 가늠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유전자 과학의 발달과 함께 제기되는 윤리적 문제를 가족의 갈등과 충돌로 치환한 뒤 화해적 드라마로 뻗어나간다. 백혈병을 앓고 있는 딸의 치료를 위해 맞춤용 아기를 계획한 부모와 이런 태생적 운명을 뒤늦게 거부하는 딸의 충돌,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나머지 가족들.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문제작에 가까운 소재를 통해 논란을 발생시키지만 그 논란은 가족이란 범위 내의 갈등과 충돌로서 발휘되며 궁극적으로 그 갈등은 가족들의 상흔과 고민을 드러내는 매개로서 작동된다.
<쌍둥이별>이란 제목으로 국내에서도 출간되어 인기를 얻었던 조디 피콜트의 원작소설을 스크린에 이양한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가족이라는 운명적 테두리에 귀속된 구성원 개개인의 속내를 들추고 이를 통해 그 테두리의 형태 너머의 본질을 들춘다. 집안에 소송을 거는 막내딸 안나의 독백을 통해 출발하던 1인칭 시점의 플롯은 다른 가족들의 시점으로 중심을 이동하며 가족이란 테두리 내에 갇혀놓았던 개개인의 심리를 스크린에 나열한다. 가족이란 이름 아래 단단하게 여며져 있다고 믿었던 구성원들의 마음이 실은 조각처럼 나눠지고 저마다의 결핍과 고독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다는 은연 중의 진실이 스크린 위로 조심스럽게 펼쳐진다. 투병 중인 케이트를 위한 온 가족의 헌신은 그 선택의 의미를 벗어나 때때로 가족 간의 상처를 방치하고 저마다의 불합리를 무시하게 만드는 계기로서 작동한다.
소재만으로 문제작이라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과학 발전에서 비롯된 인간적 윤리를 가족의 안방으로 끌고 들어와 가족이라는 테두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궁극적으로 가족에 대한 성찰과 드라마틱한 감동을 거두는 작품이다. 원작의 명료한 문체를 감각적인 영상과 배경음악으로 치환하고 저마다의 1인칭 독백을 통해 수집된 개개인의 심리를 플롯으로 이어나가며 입체적인 내러티브를 구축한다. 그 바탕이 되는 건 배우들의 열연이며 삭발 연기로 화제가 된 카메론 디아즈의 헌신적 연기만큼이나 아역들의 열연이 대단하다. 특히 소피아 바실리바와 아비게일 프레슬린의 연기는 훌륭하다. 투병 중인 케이트의 고통과 함께 성숙한 내면을 드러내는 소피아 바실리바의 연기는 의외적 결말을 선사하는 영화적 선택을 위한 설득력을 보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아비게일 프레슬린의 똑 부러진 연기 역시 영화의 본심을 감추기 위한 중요한 태도였다는 점에서 주요하다. 성인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어린 배우들의 영특한 연기는 문제적 시선을 폭넓게 확장하는 동시에 영화적 흥미를 돋운다.
과학의 발전과 함께 인류의 삶은 진보하지만 윤리적 가치판단은 나날이 어려워진다.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그 윤리적 논쟁을 실생활로 이끌고 들어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건드려 깨우치게 만든다. 삶이란 그 삶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산 자가 스스로를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원작과 명확히 달라진 <마이 시스터즈 키퍼>의 결말은 원작의 형태보다도 설득력 있는 형태로서 변주됐다. 그리고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죽음이 무엇을 남기는가라는 질문에 이성적으로 답변하는 동시에 감동마저 선사하는 작품이다. 가족은 결국 살아간다. 누군가의 빈 자리는 영원히 추억된다. 산 자는 살아야 한다. 대신 죽은 자의 꿈을 먹고 새로운 삶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