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세계 ‘아스가르드’를 통치하는 최고신 오딘(안소니 홉킨스)은 군대를 이끌고 난폭한 거인족의 수장 라우페이가 이끄는 ‘요툰하임’의 위협에 맞서 세계를 구한다. 오딘의 통치 아래 오랜 평화를 맞이한 신계는 오딘의 첫째 왕자 토르(크리스 헴스워드)에게 절대무적의 병기 ‘뮬니르’를 하사하는 왕위계승식이 있던 날, 갑작스러운 요툰하임의 침입으로 혼란에 빠진다. 왕위 계승식을 방해 받게 된 토르는 불 같은 성격을 다스리지 못하고 오딘의 명령과 주변의 만류를 어긴 채, 동생 로키(톰 히들스톤)와 동료 전사들을 규합해서 요툰하임을 공격한다. 결국 이에 격분한 오딘은 토르로부터 뮬니르와 힘을 빼앗은 뒤, ‘미스가르드’ 즉 지구로 추방한다.
그리스 신화만큼이나 인간과 닮은 호전적인 신들이 등장하는 북유럽 바이킹 신화에 기초한 슈퍼히어로물 <토르>는 <스파이더맨>이나 <아이언맨>, 그리고 (차후에 <퍼스트 어벤저>라는 제목의 영화로 공개될) <캡틴 아메리카> 등과 함께 마블 코믹스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시리즈로 꼽히는 작품이다. 번개를 다스리는 북유럽 신화의 수장 토르는 그리스 신화에 빗대자면 제우스 격에 가까운 최고신이다. 동시에 마블코믹스의 라이벌격인 DC코믹스의 히어로 캐릭터 중, 전지전능한 능력을 지닌 슈퍼맨에 대적할 수 있는 마블의 히어로이기도 하다. 사실 코믹스물에서 묘사되는 토르는 본래 호전적인 신화의 양태와 달리 기독교적인 희생으로 인류에게 헌신하는 면모를 드러내기도 하는데 영화 역시 이런 측면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토르는 이국의 오랜 신화의 외형을 빌려서 자기 입맛에 맞게 각색한 사생아 같은 캐릭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화와 원작을 떠나서 <토르> 자체에 집중해 보자면, 이 영화는 토르라는 캐릭터가 겪는 질풍노도의 성장드라마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벤저스>의 전초전 성격에 가까운) <토르>는 토르의 본격적인 활약상을 선보이기 전에 캐릭터의 정체성을 소개하는, 일종의 캐릭터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상 마블 엔터테인먼트가 마블 슈퍼히어로 올림픽이라 해도 좋을 <어벤저스>로 가는 수순으로서 자신들의 모든 캐릭터들을 하나씩 스크린에 소비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토르> 역시 이 캐릭터에 대한 심오한 치장에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어벤저스>에 기대를 걸고 있는 매니아들과 캐릭터의 기원조차 알지 못하는 일반적인 관객들 사이에서 감상의 편차가 발견될 수 있는 건 어쩌면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토르>는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라는 엔터테인먼트적 기본기를 갖춘 작품이다. 신계와 인간계, 즉 아스가르드와 미드가르드를 오가는 카메라는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신계의 풍경과 북유럽 신화를 고스란히 차용한 특별한 아이템들을 전시하며 자신만의 볼거리를 과시한다. 또한 신과 인간의 만남, 초자연과 과학의 만남이라는 대비적 특성을 발견하게 만드는 토르와 제인(나탈리 포트만)의 인연을 통해 멜로적인 드라마를 구축하고 이런 감정선을 토대로 성장드라마의 노선을 밟아나간다. 또한 전시 수준에 가까운 선악의 극명한 대비도 오락적 취향의 갈등을 삽입한 의도로 보이며 이 역시도 깊은 수준의 감정을 잉태할만한 자질은 엿보이지 않지만 이 영화가 취하는 태도, 즉 거대한 계획을 염두에 둔 소품적인 태도를 염두에 둔다면 이런 얄팍함이 용인되지 못할 것은 아닌 셈이다. 다만 CG로 완성한 가상적인 이미지의 전시력에 비해서 액션 시퀀스의 파괴력이 미흡해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영화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자질을 충분히 설명해내는 수준을 유지해낸다. 물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가장 잘 해석해내는 감독으로 꼽히는 케네스 브레너의 재능이 보다 탁월하게 반영될만한 슈퍼히어로물로 거듭나지 못했다는 건 일면 아쉬운 지점이다.
어쨌든 마블 코믹스가 잉태한 슈퍼히어로 올스타전이라 불려도 좋을 <어벤져스>의 영화화를 계획한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전초전이 하나씩 현실화되고 있는 지금은 바야흐로 슈퍼히어로 무비의 새로운 전환점이 열리는 시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토르: 천둥의 신>(이하, <토르>)은 <아이언맨> 시리즈를 통해 구체화된 마블의 슈퍼히어로 대통합전을 위한 또 한번의 전초전이다. <어벤저스>로 가는 또 하나의 징검다리와도 같은 이 작품이 토르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한다 하여 섭섭하다면 2년여 간의 유예 기간을 기다릴 것. <어벤저스>의 문을 여는 캐릭터가 토르임을 염두에 둔다면 진짜 활약상을 볼 기회는 여전히 유효하다. <토르>는 진정한 토르를 보기 위해 건너야 하는 무지개 다리, 즉 아스가르드의 ‘비프로스트’라는 말이다. (그래도 스크린에서 구출해오고 싶을 정도로 존재감이 미비한 아사노 타다노부가 안쓰러운 건 어쩔 수 없다.)
늑대인간은 드라큘라와 함께 서구의 고전적인 서스펜스의 소재로서 이야기를 통해 장수를 누려왔다. <울프맨>은 이 고전적 소재가 현대에서도 얼마나 유용할 수 있는가를 설득하고자 하는 작품 같다. 1941년, 조지 와그너가 연출한 동명원작을 리메이크한 <울프맨>은 ‘랩 디졸브(Lap Dissolve)’ 기법을 활용하며 당대 영상기법의 교과서적 선례로 추앙받았던 원작의 시대로부터 현격하게 진화된 CG기술력을 토대로 현대적인 영상기술의 발전을 증명하면서도 고전적인 특수분장기법을 포용함으로써 클래식한 이미지를 구현해낸다. 원작이 동시대 안에서 파격적인 가치를 증명했던 것과 달리 <울프맨>은 되레 복고적인 가치를 어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형식적 태도는 원작의 형태를 수용한다는 점에서 리메이크라는 방식의 가치를 생산해낸다.
사실 <울프맨>은 서사적인 측면에서도 원작의 자장 안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10여 년 간,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배우로 활동하던 로렌스(베네치오 델 토로)에게 동생이 실종됐다는 비보가 전해지고, 이로 인해 로렌스는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로 인해 아버지 존(안소니 홉킨스)과 재회하는 로렌스는 괴기한 사건에 휘말림과 동시에 아버지와 관련된 트라우마에 다시 사로잡히게 된다. 큰 틀 안에서 원작과 특별한 차이를 두지 않는 서사는 딱히 그 원작을 경험해보지 못했을 현대의 젊은 관객들에게도 낯설게 느껴질 만한 것이 아니다. <울프맨>은 전형적인 늑대인간 이야기를 정통적으로 계승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소재가 잉태한 스토리의 원형에 근접한 작품인 까닭이다. 예기치 않게 늑대인간의 운명에 속박돼 버린 사내의 비극적 운명론, 그리고 그 위에 덧입혀질 로맨스적 비극 등은 하나 같이 고전적인 소재의 전형성을 설명하기 좋은 사례에 가깝다.
물론 <울프맨>이 원작의 서사적 육체에 온전히 빙의된 것만은 아니다. 변형된 캐릭터의 이름은 자처하고라도, 로렌스와 대립각의 위치에 선 아버지 존의 캐릭터의 변화는 원작과 <울프맨>사이의 정서적 거리감을 이루는 가장 큰 수단이다. 액자구성에 가까운 아버지의 서사에 비극적인 감정선을 부여한 원작과 달리 <울프맨>은 철저하게 존에게서 비극적인 감정선을 배척시킨다.그는 <울프맨>에서 로렌스의 분노를 야기시키고 그의 비극성과 폭력성을 보다 강렬하게 부각시키는 대립각으로서 보다 강한 존재감을 설득한다. 동시에 존을 연기하는 안소니 홉킨스는 이런 영화의 의도를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다 할만한 연기를 선보인다. 이런 캐릭터의 완성도는 결말부에 연출되는 파국적 정서를 보다 강력하게 보좌하는 것이기도 하다.
<울프맨>은 CG를 비롯한 현대적 영상기술을 전시하며 늑대인간의 변신이나 폭주가 발생시키는 잔인한 볼거리를 부각시키기 보다도 고전적인 서사와 문학적 비극의 연출에 보다 적극적이다. 늑대인간이 된 인간의 비극적 운명론과 오이디푸스적인 트라우마, 그리고 멜로적 파토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정서적 무게가 중후한 시대적 이미지를 포착하는 영상을 곁들이며 <울프맨>에 앤티크(antique)한 가치를 부여한다. 실제로 로렌스가 배우로서 <햄릿>의 무대에 서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는 <울프맨>은 마치 세익스피어의 비극적 딜레마가 극적 분위기에 적극적으로 수용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울프맨>이 추구한 과거지향적인 방식의 수용은 때때로 낡은 산물이라는 인식을 온전히 차단해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늑대인간이라는 고전적 소재의 낡은 감성 덕분일 수도 있겠지만 고전적인 연출을 지향하는 영화의 서사적 투박함에서 기인한 문제이기도 하다. 비극적 정서를 지향한 서사적 의도는 일면 비범한 구석이 있지만 그것을 탄탄하게 여며야 할 서사적 진전에서 느슨한 간극들이 발견된다. 또한 늑대인간이 연출하는 서스펜스적 긴장감과 액션의 박진감을 묘사하는데 많은 러닝타임을 할애하기 보다도 개인의 트라우마와 딜레마를 정신분열저인 이미지로 묘사하는데 공을 들이기도 하는 양상이 때때로 혼란스럽다. 고전적인 서사의 양식을 수용하겠다는 극적 의도와 달리 인물의 정서는 현대적인 정신질환적 분석 안에서 적극적으로 해부되는 양상이다.
물론 영화의 중후한 무게감을 관철시키는 언해피엔딩의 결말부까지, <울프맨>은 자신의 서사적 의도를 며확히 관철시키는 작품이란 점에서 평가를 얻어낼만한 작품이다. 동시에 고전적인 중후함과 우아함을 갖춘 배우들의 풍모와 기질은 <울프맨>의 의도를 명확히 다지는 영화적 밑천으로서 유효한 역할을 해낸다. 다만 고전적인 품위를 유지하는 이미지 안에서 현대적인 정신분석학에 기인한 트라우마를 연출해내는 작품의 기질로부터 발생할만한 감상적 불협화음은 상업영화적인 자극적 세기를 원하는 오늘날 대다수의 관객의 기대감 안에서 불협화음을 일으킬 가능성이 다분하다. 마치 안티히어로의 감수성에 젖은 현대 관객의 기대감에 고전적 괴물의 트라우마를 들이미는 꼴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