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창한 숲과 높은 돌담 속에 자리한 저택의 한 방에서 타이즈 차림으로 감금되듯 살아가는 여인 베라(엘레나 아라야)는 세계적인 성형외과 의사로서 인공피부 개발에 전념하는 로버트(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실험대상이다. 하지만 베라의 일상을 매일 같이 모니터하는 로버트의 시선에서는 실험적 욕망과 다른 관음적 태도가 엿보인다. 사실 그는 아내와 사별했고, 딸과 함께 살 수가 없는 현실을 살고 있는데, 이런 결과들이 그 태도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이 불편한 동거 상황은 로버트의 모친인 마릴리아(마리사 파데레스)의 도움을 통해서 유지되고 있는데, 그녀의 또 다른 아들 세카(로베르토 알라모)의 등장과 함께 파국을 경험한 뒤, 새로운 관계 국면을 맞게 된다.
<내가 사는 피부>는 티에르 종케의 <독거미>를 각색한 작품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유일하게 원작이 있는 작품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사는 피부>는 알모도바르의 작품들에 익숙한 관객의 입장에서도 지극히 이질적인 결과물이라고 할만한 작품이다. 마치 연극적인 무대장치처럼 고안된 저택 안에서 관음의 주체와 대상, 그리고 그 주변인으로 자리하는 관계 구도의 작위성, 이 모든 영화적 모티프들은 인공적으로 구조화됐으며 스스로 그런 특성을 감추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세 챕터로 나뉜 <독거미>는 냉소적인 문체를 바탕으로 시제의 단절과 관계에 대한 착시를 감행하며 감상적 충격을 야기시킨다. 캐릭터의 세밀한 사연을 해부해서 재조립하듯 마련된 영화의 각본은 소설과 유사한 이야기 흐름을 지니고 있지만 다양한 장르적 장치를 도입함으로써 인위적인 인상을 더욱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다.
사실 <내가 사는 피부>는 알모도바르의 소품처럼 보인다. 일단 그의 영화라는 점에서 <내가 사는 피부>의 인위적인 디자인 양식은 대단히 생경하게 느껴지는데, 영화를 채운 이미지와 캐릭터, 스토리텔링까지 이 모든 영화적 조건들은 하나 같이 비현실적인 세계 속에 놓여있음을 노골적으로 피력하듯 보일 정도다. 동시에 이런 갖은 요소들이 저마다 파편처럼 영화 속에 자리하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탓에 간혹 영화 자체의 집중력이 흐려진다는 인상이 나타난다. 전체적인 하나의 인상을 완성해나간다기 보단 퍼즐의 조각을 제각각 살펴보는 것과 같이 감상이 흩어진다. 하지만 이런 인공적인 인상이 때때로 그로테스크한 감상으로 귀결되며 영화적 호기심을 부추기고, 미스터리를 짙게 드리우는데 효과적이다. 하지만 때때로 불필요한 정보를 구술하고 있거나 그 정보에 대한 확신을 주기에는 능력이 부족해 보이는 신이 발견되기도 한다.
<독거미>와 마찬가지로 <내가 사는 피부> 역시 복수극의 플롯을 완성하고 있는데 초중반까지의 모호한 미스터리가 그 이후의 플래시백과 맞붙어 인과를 이룰 때, 영화의 잠재된 서스펜스가 극대화된다. 사실 이야기의 흐름 자체도 완전한 인과의 합을 이루고 있다는 인상은 아니지만 결말부에 다다라 증강되는 서스펜스는 확실하게 자신의 위치를 점하고 그 역할을 해낸다. 궁극적으로 <내가 사는 피부>는 징벌과 속죄라는 표면적 상황을 통해서 가학과 피학의 욕망을 표현하는 자품처럼 보이는데 알모도바르 특유의 관음적인 페티시는 이런 추측을 보다 가능성 있는 해석이라 단정짓게 만드는 단서이기도 하다. 결국 <내가 사는 피부>는 영화적 결과의 일부를 찬찬히 뜯어놓고 봤을 때, 알모도바르의 지난 영화들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물처럼 보이지만 총합적인 측면에서 특유의 매력을 품은 작품이라 이해될 만큼 돌연변이 같은, 소품의 경력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전편인 <슈렉 3>는 <슈렉>시리즈의 명성을 죄다 깎아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지 시리즈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강박과 캐릭터의 인기에 온전히 기대버린 듯한 성의 없는 완성도는 지난 두 편의 전작이 일궈낸 성과의 발목을 잡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슈렉 포에버>는 어딘가 의심스러운 작품이다. 단지 <슈렉 3>의 속편이란 점만으로도 <슈렉 포에버>는 시리즈의 배수의 진이나 다름없다. 전편의 실패를 만회할 것이냐. 하지만 <슈렉 포에버>는 다른 의미의 승부수를 던졌다. 시리즈의 피날레, <슈렉 포에버>는 시리즈의 마지막을 공언한 작품이다. 이는 비장한 결의의 일종이거나 모종의 비겁한 변명이다. 물론 판단은 작품의 완성도에 달렸다.
<슈렉 포에버>는 더 이상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전시용 괴물이 되어버린 듯한 슈렉의 불만스런 일상을 비춘다. 자신을 빼닮은 세 아이와 사랑하는 아내 피오나, 그리고 언제나 자신의 곁을 지키는 친구 동키와 장화 신은 고양이, 슈렉은 이들과 함께 매일 같이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아니, 적어도 다른 사람들 눈에 행복하게 보일 것 같은 일상을 버틴다. 결코 변하지 않는 매일은 쳇바퀴 돌듯 찾아오고, 안락한 삶은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 된다. 그러니까 슈렉이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의 권태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점차 프리하고 와일드한 지난 날의 일상이 그리워진다. 그리고 그에게 단 하루나마 그 일상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다시 한번 냉정하게 말하자면 <슈렉 포에버>는 더 이상 이 시리즈가 원래의 아이덴티티를 회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증거처럼 보인다. 그리고 스스로 시리즈의 마지막을 선언한 지금의 입장에서는 마치 고백처럼 이해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시리즈 안에서 성공적인 결과물이었다 평할 만한 <슈렉>과 <슈렉 2>는 기존의 디즈니 월드로 대변되는 착하고 순수한 동화적 패러다임을 전복시키는 패러디 세계관이 뚜렷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의 위트나 유머와 연동됨으로서 시리즈만의 확실한 가치를 어필했던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슈렉 3>를 비롯해 <슈렉 포에버>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그 세계관의 온전한 상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앞선 두 편과 달리 그 뒤를 잇는 두 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특징은 애초에 <슈렉>이 패러디하던 세계관이 온전히 껍데기만 남겨졌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자신이 패러디했던 세계관에 대한 독설은 사라지고, 그 알맹이가 사라진 껍데기들이 체스판의 말처럼 움직이며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 물론 <슈렉 포에버>에서도 여전한 건 활기 넘치는 캐릭터들을 보는 재미 그 자체다. 슈렉은 여전히 슈렉이다. 하지만 <슈렉>은 여전히 <슈렉>이 아니다.
물론 서사적으로 <슈렉 포에버>는 극명한 실패의 사례라고 해도 좋을 <슈렉 3>보다 나은 완성도를 품고 있다. 시리즈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그 시작점과 연결된 에피소드를 착안하며 나름의 전개적 논리를 마련한 것도 발전적이다. 하지만 이는 애초에 <슈렉>이라는 시리즈의 아이덴티티를 회복할 수 있는 결과물이 아닌, 혹은 그럴 가능성조차 희박해보이는 기획이다. 동화적 세계관의 껍데기를 엮어 새로운 이야기를 창출함으로서 스스로 동화가 되려는 것처럼 보이는 <슈렉>을 본다는 건 자신의 앞선 전력을 온전히 망각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슈렉은 그렇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따위가 <슈렉>이 할 수 있는 해피엔딩이었던 것일까. 그나마 다행인 건 <슈렉 포에버>가 시리즈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제 슈렉이 돌아왔다, 는 변명 따위로 끌려나온 슈렉의 어색한 모습은 더 이상 보지 않아도 좋다는 말인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