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과 <아가씨>는
중력 같은 영화들이다. 근래 한국영화를 두고 논할 때 좀처럼 발음되지 않았던 언어가 두 영화 주변으로
시끄럽게 모여들었다.
지난 5월 11일에 개최된
칸국제영화제에서 <아가씨>는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곡성>은 비경쟁부문에 초청됐다. <아가씨>는 박찬욱 감독이 미국으로 건너가 완성한 <스토커> 이후 3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이었다. 국내에서 제작된 작품으로선 <박쥐> 이후로 7년만이었다.
<곡성> 역시 나홍진 감독이 <황해> 이후로 6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었다. 두 작품 모두 개봉 전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예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불어오고 있었다. <곡성>은 5월 11일에 개봉했다. 한
달여 만에 600만 관객을 끌어들였다. <아가씨>는 6월 1일에 개봉했다. 2주 만에 300만 관객을 끌어들였다. 흥행작이 됐다. 그리고 여느 흥행작처럼 수많은 감상이 올라왔다. 그런데 근래 여느 흥행작들과는 다른 느낌의 감상들이 쏟아졌다.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넘어서 영화에 대한 해석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영화적 의도에 관한 논쟁이 뜨겁게 오간다. 관객의 시점에서 영화를 평가하기 보단 감독의 시점을 유추해내려는 노력이 두드러진다. 객석보단 스크린 너머에 주도권이 놓인 인상이다.
<곡성>은 감각을
마비시키는 작품이다. 영화를 본 대부분의 관객들은 시속 150km로
날아오는 폭투를 피한 것처럼 넋이 나간 기분으로 상영관을 나왔을 것이다. 너무 세게 맞아서 통증보다
얼얼함이 느껴지는 듯한, 그래서 뒤늦게 깨어난 감각과 함께 살아나는 통증의 정체를 알고 싶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아졌을 거다. <아가씨>는 민감한 소재를 도발적으로 다루면서도 감각을 예민하게 일깨우는 작품이다.
어떤 이는 몸을 휘감고 지나가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고, 어떤 이는 자신의 욕망을 발가벗기고
조롱 당한 듯한 불쾌함과 직면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지지 여부를 사이에 둔, 언어의 전선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두 영화를 둘러싼 언어의
온도는 각기 다르다. 하지만 두 영화가 어떤 식으로든 존중 받고 있다는 건 명확하다. 찬사와 비판 모두 영화의 의도 안에서 이뤄진다. '재미있다' 혹은 '재미없다'는 이분법적인
감상을 넘어 영화적인 의도 자체를 중심에 둔 해석과 논쟁이 야기된다는 건 결국 두 영화가 지닌 '영화적인
힘' 자체를 인정 받았음을 의미한다.
근 몇 년 사이 한국영화는 일정한 억양으로만 발음됐다. 영화에 대한
완성도를 논하는 억양은 여전하지만 영화를 해석하고, 지지하고, 영화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억양은 힘을 잃었다. 소위 말해 '때깔'이 좋은 영화들은 많아졌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별다르게 하고 싶은 말이 없어졌다. 영화들이 너무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최고의 화제작이자 흥행작이었던 <암살>과 <베테랑>을 봐도 그렇다. 두 작품은 우리가 짊어진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사회를 관통하는 수작이다. 보고 나면 우리가 지금 시대에 던져야 할 말에 대해 깨닫게 되는 쾌감이 있다. 하지만 결국 언어도 그 쾌감에 갇힌다. 두 영화가 지닌 영화적 문법을
설명하거나 두 영화가 관통하는 화두의 배경 지식과 사회 분위기를 살필 순 있지만 두 영화를 통해 무언가를 상상하긴 어렵다. 물론 이는 <암살>과 <베테랑>을 저평가하기 위해 동원된 언어가 아니다. 다만 최근의 한국영화 대부분이 그런 장르적 쾌감과 형태적 완성도 그리고 이야기의 완결성에 사로잡혀 무언가를
자꾸 잊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말이다. 형식적으론 꽉 차 있지만 상상하게 만드는 재미가 현저하게 줄어든
인상이랄까. 또 다른 화제작이었던 <내부자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에 대한 호감은 있지만 영화 이상의
호기심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저 이 세계가 돌아가는 부조리한 함수를 상영관에서 확인하고 사회적인 불만과
분노를 대신 일갈하고 때려눕혀준 영화에 대한 대리만족적인 쾌감만 되새김질될 뿐이다.
그런 면에서 나홍진의 <곡성>과
박찬욱의 <아가씨>는 한국영화가, 그리고 한국영화를 본 관객들이 잃어버린 언어를 실감하게 만든다. 인간의
내면적인 호기심을 직설적으로 강타하고, 기이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세계의 은유를 통해 호기심의 외연을
키워낸다. 상영관을 벗어난 순간 맺힌 감상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털어내 버리기 보단 들여다 보고 싶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영화
신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나홍진과 한국영화 신에 지속적인 흥미를 부추기는 박찬욱을 통해 환기된 영화를 향한 언어들은 보다 소중하다.
본래 영화는 보는 재미만큼이나 말하는 재미가 쏠쏠한 매체다. 대중문화의
카테고리 안에 놓인 어떤 매체보다도 말의 힘이 강력하다. 그래서 영화에 관한 리뷰는 플랫폼의 형태와
무관하게 끊임없이 소비된다. 대중문화의 카테고리 안에 놓인 여느 매체보다도 언어로 재생산되는 비율이
현저하고, 관련 커뮤니티도 발달돼 있다. 대중문화 안에서
가장 활발하게 소비되는 매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든 영화를 동일한 가격에 볼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른다는 건 결과적으로 기회비용이 따르는 선택이다. 영화에 대한 말을 듣는다는 건 더 좋은 영화를 소비하겠다는 욕망과 깊게 연관돼 있다. 결국 영화를 말한다는 건 우리가 더 나은 영화를 볼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언어들은 우리가 흥미롭게 여기는 감독들과 작가들의 자궁 노릇을 했다. 영화를 말한다는 건 결국 흥미로운 영화를 볼 수 있는 문턱으로 한 걸음 다가가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한 기회다.
세상은 손쉽게 뜨겁고, 차갑다. 그토록 뜨겁고 차가운 세상에서 누군가는 쉽게 떠오르고 진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제 자리를 지켜낸다. 전지현은 17년 동안 배우였다. 벗어난 적이 없었다.
촬영이 시작된 스튜디오에선 한 곡의 노래가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비긴
어게인>의 OST에 수록된 ‘Lost stars’였다. 전지현은 항상 화보 촬영 현장에 직접 노래를
준비해온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준비한 그 한 곡을 반복적으로 듣는다고 했다. 수많은 화보 스태프들이 스튜디오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이에서 전지현의 움직임은 그리 크지 않음에도 눈에
띄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역시 그랬다. 스튜디오 안에 자리한
수많은 이들의 시선은 둘 중 하나였다. 스튜디오 안에 자리한 그녀를 보거나, 스튜디오 안에 자리한 그녀의 찰나가 연이어 전송되는 모니터를 보거나. 모두가
나름의 시선으로 전지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로지 전지현만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 자신을 주목할 때,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사체가 되기 위해 스스로에게 몰입하고 있었다. 세상의 수많은 관심에 둘러싸인 그녀의 입장과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전지현은 17년 동안 배우로서 제 자리에 서있었다. 수많은 눈과 입이 모이는 한가운데 서서 수많은 시선과 언어 속에서 모이고 흩어졌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17년 사이 세상은
많이 변했다. 하지만 그녀는 시간을 견디지 않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숙성시키며 함께 흘러왔을 뿐이다. 그 자리에 서있던 그녀를 세상이 다시 주목했을 뿐이다. 그녀는 거기 있었다. 그리고 거기 있을 것이다. 스튜디오에선 호세 제임스의 ‘Come to my door’가 반복되고
있었다. 그녀가 준비해온 두 번째 곡이었다. 세 번째 곡은
없었다.
스튜디오 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보며
‘여기 전지현 씨가 있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어요.
사실 아까 창문 틈으로 밖에 있는 사람과 잠시 눈을 마주쳤어요. ‘저
사람이 나를 알아보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알아봤다면 놀라지 않았을까요?
그럴까요?
이렇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테니까요.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요? 어렸을 땐 TV에 자주 나오는 편이 아니라서 그런 인식이 있었던 것 같지만 <별에서
온 그대>(이하: <별그대>) 이후로 사람들에게 많이 익숙해진 거 같고요.
영화에 비해 TV드라마 출연 횟수가 현저히 적었죠.
사실상 <별그대>가
제 입장에선 첫 드라마라 해도 좋을 거에요.
그렇다면 첫 드라마로 대단한 성공을 경험한
셈이네요. 그만큼 영화와는 다른 파급력을 느꼈을 것 같은데요.
<별그대> 시청률이 30% 가깝게 나왔는데 그게 영화 관객 수치와 비교하면 거의 천만 수준이래요.
그러니까 일주일에 이틀씩 천만 명 앞에 섰던 거니까 영화와 완전히 다른 시장이구나 싶더라고요. 게다가
영화는 극장에 가서 돈을 주고 봐야 하지만 TV는 원하는 시간에 켜기만 하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더욱 친근감을 느끼겠죠. 게다가 <별그대>는 아시아에서도 반응이 좋았잖아요. 예전과 달리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시간에 해외반응까지 전해 듣게 되니까 놀랍긴 했어요. 이렇게 말하니까 꼭 옛날 사람 같네요(웃음).
영화에 비해서 드라마 촬영 스케줄은 타이트하게
돌아가는 만큼 힘들진 않았나요?
정말 죽겠다 싶으니까 끝나던데요(웃음). 그런데 사람 몸이 신비한 게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나도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기더라고요. 그렇게 인체의 신비를 느끼면서 견뎌냈죠(웃음).
어쨌든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엽기적인 그녀>를
찍고 나서 아시아 투어를 돌기도 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대단히 큰 기회였고, 그만큼 제가 더 잘했어야
했죠. 우습지만 그때는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거든요. 그래서 <별그대>로 다시 아시아적인 관심을 받게 돼서 정말 감사했어요. 두 번 다시 이런 기회가 안 오리라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은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랑을 하나하나 다 느끼고 싶고, 할 수 있는 만큼 다 해내고 싶어요.
시간이 지나야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더욱 절실한 것들도 생기고요
그만큼 제게 부족한 걸 채워나가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 같아요.
지난 2월에
최동훈 감독의 <암살> 촬영을 끝냈다고 들었어요. 최동훈 감독과는 <도둑들>에
이은 두 번째 작업이죠. <엽기적인 그녀>와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의 곽재용 감독 이후로 두 작품을
연이어 작업한 감독도 처음이었고요. 감회가 남다르진 않았나요?
본래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어요. 그만큼 감회가
남달랐죠. 그리고 최동훈 감독님과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어요.
확실히.
<도둑들>, <베를린>, <암살>까지 모든 영화의 촬영지가 해외네요. 해외 복이 많네요(웃음).
그런가 봐요. 그 전에 찍은 작품 중에서도 해외 로케이션 작품들이
많아요. 그런데 그런 팔자가 따로 있대요(웃음).
당연히 국내에서 촬영을 할 때와 차이가
있겠죠.
아무래도 그렇죠. 사실 해외 촬영 중엔 압박감이 심하게 느껴져요. 몸으로 일하는데 몸이 편하지 않으면 힘들잖아요. 해외 나가면 그만큼
불편한 일이 많잖아요. 연기하는 것도 힘든데 스트레스까지 받으면 긴장감도 배로 오고. 그래서 저는 해외 촬영이 별로 반갑지 않아요. 그런데 계속 해외
로케이션 영화만 찍게 되니, 이게 무슨 일인지(웃음).
<암살>에선 암살단의 대장 역할을 맡았다고 들었어요.
안옥윤이라는 인물인데, 이름에서부터 뭔가 느껴지지 않나요? 군인다운 면이 있죠. 복수를 위해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인물이지만
굉장히 순박한 면이 드러나기도 해요.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기도 하고,
다방면으로 매력적인 캐릭터였어요. 게다가 <암살>의 홍일점인데 한국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를 중심에 둔 영화는 흔치 없잖아요.
그런 기회를 얻었으니 감사할 따름이었죠.
그만큼 잘해내야겠다는 부담감도 만만치 않았을
거 같아요.
그래서 최대한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려 노력했어요. 그래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죠. 그럴 때마다 정말 안옥윤처럼 모두 다 나를 따라오라고 자신 있게 연기하려고 노력했죠. ‘나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면서.
혹시 리더십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사실 잘하는 게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제가 주도하는 경우도
없죠. 확신이 있어야 주도할 수 있잖아요. 잘하는 게 없으니까
확신할 수가 없고, 결국 따라가는 입장이 되는 거죠. 그리고
사실 어릴 때부터 일만 해서 친구가 많은 편도 아니라 친구들과 모일 일도 별로 없어요(웃음). 그런 의미에서 직업 선택은 잘한 거 같아요. 해야 되는 건 잘해내려는
타입이거든요.
최근 영화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캐스팅하고 싶은 여배우 1순위로 꼽혔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드는 작품과 캐릭터를 만나기란 쉬운 일은 아닌가 봐요.
1년에 수많은 한국영화가 개봉하지만 기억에 남는 영화는 많지 않을
거예요. 기억에 남는 여자 캐릭터는 더욱 드물고요. 그 와중에 <암살>을 만난 건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좀 더 어렸다면 이 캐릭터를 맡을 수 있었을지, 좀 더 나이가
들고 나서 이런 캐릭터를 봤다면 얼마나 아쉬울지,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국 지금 만나서 다행인 거죠.
연기를 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의심해본 적도
있나요?
많아요. 그런 생각을 떨쳐낸 건 얼마 안됐어요.
의외의 답변이네요. 그런 의심을 견뎌온 것일까요?
사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어렸을 땐 그냥 했던 거 같아요. 못해도 했고, 좋아하지 않아도 했고. 그래도 그렇게 해왔던 경험이 지금의 자산이죠. ‘어쨌든 해냈다’라는 자신감이 쌓이면 못하는 것도 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니까요. 게다가 시간이 지난 만큼 저도 어느 정도 성숙해졌고요.
10대
후반부터 활동을 시작했고, 처음부터 이목을 끄는 배우였어요. 이른
나이에 주목을 받았기 때문에 부담을 느끼진 않았나요?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지 못해서 아쉽진 않았는지,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건 다 했어요. 그만큼 추억도 많고요. 대신 일반적인 사람들과 달리 촬영장에서의 추억이 더 많죠. 그에
대한 아쉬움은 없어요. 지금도 배우로 잘 살고 있으니까. 물론
어렸을 때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면 ‘나는 특별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제가 특별하다고 여겨본 적은 없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외로워지기 마련이죠. 그래서 그런 생각에 갇히지 않으려 노력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의미인지는 알겠지만 전지현 씨가 스스로를
특별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 지나치게 겸손한 말처럼 들리기도 하네요(웃음).
’나는 여배우야. 너와
달라’ 이러고 싶진 않았어요. 그러면 정말 외로워져요. 남들이 봤을 땐 제 스스로 벽을 두르는 거니까요. 그렇게 외로워지고
싶지 않았죠. 나도 너와 똑 같은 사람이라고 알려줘야 해요.
무언가를 갖고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죠. 화보 촬영 중에 모니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문득 했습니다.
저는 (김)수현 씨 같은
배우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한테도 그런 느낌이 드나요(웃음)?
일단 외모만 봐도 평범할 순 없잖아요? 외모 또한 타인의 주목을 끌어내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선 배우에겐 타고난 재능이 될 수 있죠.
하지만 외모만으론 오래 갈 수 없어요. 그만큼 노력해야죠.
데뷔한지
17년이 됐다고 들었어요. 배우로서 살아온 긴 시간만으로도 그 노력이 증명되는 건 아닌가
싶네요. 그 긴 시간을 뒤돌아보는 기분은 어떨까요?
지금이 시작 같아요(웃음). 어렸을
땐 ‘익숙해지는 게 두렵다’는 생각도 했어요. 나름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기계적으로 일하는 것 같아서 걱정됐죠. 하지만 지금은 걱정하지 않아요. 눈 앞에 있는 일에 집중하다 보니까
일도 즐겁고요. 저는 끝까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타입이 아니에요. 그만큼 시간이 걸려도 사람들이 그 노력을 알아줄 거라 믿고요.
<엘르> 2013년 5월호에서의 인터뷰에서 ‘<도둑들>이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는 모르지만 좋은 평가를
받게 되면 그간의 오해가 조금은 사그라지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어요.
여기서 오해란 무엇일까요?
<도둑들>이
개봉할 즈음에 <베를린> 촬영을 끝냈는데 일단
어떤 작품이 나올지는 제가 제일 잘 알잖아요. 그래서 <도둑들>이나 <베를린>으로
그 동안 관객들이 느꼈을 실망을 해소시켜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던 거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한때 대중들이 실망감을
드러냈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아요. 작품들이 연이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서 전지현 씨에 대한 기대감도
많이 줄어드는 인상이었죠.
배우들은 항상 작품을 통해 관객을 만나고 이야기하잖아요. 관객들은
성공한 작품을 기억해요. 캐릭터도 마찬가지죠. 의도치 않게
국내에서 공백이 생겼지만 <엽기적인 그녀> 이후로
제 영화가 줄줄이 흥행에서 참패했으니 제 작품도, 저도 없어진 셈이죠.
배우가 작품을 통해 관객들과 소통하지 못하니까 좋은 말을 듣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고요. 저도
제 작품이 재미없으면 보지 않는데 관객들이 그런 작품을 굳이 찾아볼 이유가 없잖아요. 당연히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죠.
반대로
<도둑들>과 <베를린>, <별그대>가 좋은 반응을 얻었고, ‘배우 전지현’에 대한 기대감도 그만큼 커진 거 같습니다. 당사자에게도 고무되는 일이 아닐까 싶은데요.
일단 선입견이 없는 사람에게 다가가기 편한 법이잖아요. 사실 그 전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죠.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금은 알고 있으니까 나를 받아들여줄 수
있을지 조심스러웠어요. 그런 면에서 지금은 좀 편해진 거 같아요.
<도둑들>은 4년 만의 국내 개봉작이었죠. 그만큼 공식석상에 서면 긴장되지 않았을까요?
그렇진 않았어요. 한국에서 오랜만에 개봉하는 제 작품이긴 했지만 제가
오랜만에 작업한 작품인 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 긴장감은 없었지만 나름의 치열함이 있었죠. <도둑들>엔 캐릭터가 많고, 배우들이 많잖아요. 조금 웃기게 들리겠지만 ‘그 중에서 3등 안엔 들어가야 할 텐데’라고 걱정했어요(웃음).
<별그대>에서 천송이라는 배우를 연기했는데 배우가 배우를 연기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사실 그냥 천송이라는 캐릭터가 재미있었어요. 물론 어떨 땐 좋다고
해놓고, 어떨 땐 매몰차게 외면해버리는 대중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상황에 대해선 이해가 됐어요. 하지만 그 감정에 호소력이 생기고, 시청자들을 공감할 수 있었던
건 천송이가 기본적으로 사랑스러운 캐릭터였기 때문인 거 같아요. 그런 면에 있어선 같은 배우로서 송이한테
고마웠죠. 다만 제게 있어선 과장된 부분이 더 많게 느껴져서 배우라는 직업보단 캐릭터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됐어요.
<도둑들>과 <별그대>에서는
과장된 제스처를 통해서 캐릭터의 개성을 끌어올리는 느낌이었어요. 반대로 <베를린>은 캐릭터의 감정선을 차분하게 유지하면서 극적인
흐름에 철저히 녹아 드는 인상이었죠. 배우 입장에선 어떤 연기가 스스로에게 더 잘 맞는 옷처럼 느껴지는지
궁금하네요.
항상 나와 공통점이 있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 보다 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저와 닮은 <별그대>의
천송이보다 정반대인 <베를린>의 련정희를 연기하는
게 더 편하게 느껴졌거든요. <암살>의 안옥윤도
그랬고요. 내게 없는 면을 연기할 때 진짜 연기하는 기분이었어요. 물론
인위적으로 연기하는 인상이 느껴지면 안되겠지만 어쨌든 저에겐 그게 편했어요. 사실 <별그대> 천송이는 어려운 캐릭터였어요. 방방 뜨는 캐릭터의 감정을 표현해내기가 생각보다 힘들거든요. 계속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느낌임에도 궁극적인 뭔가를 더 보여줘야 할 것 같다는 부담감이 든다고 할까요? 하지만
차분한 역할을 연기하는 건 제가 모르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과 같고, 그렇게 이해하면서 제대로 표현해낼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게 돼요. 그리고 <별그대>를 할 땐 회당 한번씩은 웃겨줘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기도 했어요(웃음). 그래서 조금 피곤했죠.
<별그대>의 천송이와 닮은 점이 많다고 느끼시나요?
<별그대>를
보면서 남편이 그랬어요. 집에서 하는 걸 다 보여주면 어떡하냐고(웃음).
혹시 ‘치맥’도 즐기시는지?
원래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알코올이 당긴다’는 느낌을 이젠 점점 알 거 같아요. 내일 스케줄이 비었다는 걸 알면
가끔 술을 마시고 싶다는 충동도 느껴지고요. 그럴 때면 ‘어른이
된 건가?’라는 생각도 들고(웃음).
단순한 질문이지만, 외계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지구인도 많은데, 굳이 외계인까지(웃음)? 뭐, 운명적인 만남이라면, 수현이처럼
잘 생기고 인물이 좋다면 모르죠(웃음).
하루 정도 쉴 여유가 생기면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요?
요즘 좀 바쁘긴 하지만 하루도 못 쉴 정도로 바쁘게 사는 건 아니에요(웃음). 쉬는 날이면 보통 여자들처럼 관리를 받죠. 만약 이틀 정도 여유가
생기면 하루는 이렇게 제 몸을 관리하고, 다른 하루는 친구들을 만나서 밥을 먹거나 이런 식이죠. 왠지 죄송하네요. 뭔가 특별하게 답변할 게 없어서(웃음).
사실 이런 질문 많이 받을 거 같았어요. 그래서 그런 질문을 자주 받게 되면 ‘뭔가 특별한 답변을 준비해야
하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도 같아요.
맞아요! 그런 생각이 들죠. ‘쉬는
날 뭐하세요? 촬영하지 않는 날은 뭐하세요?’ 특별히 뭘
하겠어요(웃음). 사실 놀아본 사람이나 잘 놀죠. 맨날 촬영만 하면서 살다 보니 갑자기 놀아보려 해도 뭘 하고 놀아야 할지 몰라요. 그러니까 쉬는 날엔 다음 촬영을 위해 쉬면서 제 몸을 가다듬는 거예요. 그거라도
해야죠(웃음).
그런 질문을 받다 보면 ‘뭔가 특별한 답변을 준비해야 하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도 같아요.
맞아요! 정말 그럴 때가 있죠. 사실
놀아본 사람이나 놀 줄 알죠. 맨날 촬영만 하면서 살다 보니 갑자기 놀아보려 해도 뭘 하고 놀아야 할지
몰라요. 그러니까 쉬는 날엔 다음 촬영을 위해 쉬면서 제 몸을 가다듬는 거예요. 그거라도 해야죠(웃음).
<암살>에선 총을 많이 다룬다고 들었어요.
제가 맡은 안옥윤이 독립군 최고의 스나이퍼니까요.
액션연기는 많이 했지만 총을 다룬 경험은
드물지 않았나요?
몇 번 있긴 했지만 이번만큼 실컷 만져보진 못했죠. 정말 원 없이
쐈어요. 기관총 쏠 때는 스트레스가 풀렸죠(웃음).
액션 연기 경험이 많은 편이에요.
자칭 액션 배우니까요(웃음).
여배우로서 액션 연기를 소화해낸다는 게
정말 힘든 일 아닐까요?
당연히 힘들죠. 그런데 저는 몸으로 표현하는 데에 재능이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액션배우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어요. 몸으로
표현할 줄 아는 배우는 많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제게 그런 강점이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재미도 있고요.
기본적으로 운동을 좋아하는 편인가요?
좋아해요. 운동을 하다 보면 몸이 예민해져요.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 스스로 느껴야 하니까 몸이 예민해지는 거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몸으로 표현하는데 있어선 운동의 도움이 컸죠.
어떤 의미에선 근육을 단련하는 것도 연기를
위한 방편일 수 있겠네요. 사실 표정도 얼굴의 근육을 쓰는 연기이기도 하고요.
그럼요. 매달려 있을 때 발 끝까지 긴장하지 않으면 자세가 흐트러지게
돼있어요. 그만큼 운동이 많은 도움이 되죠. 하지만 표정은
얼굴 근육만으로 표현한다기 보단 감정으로 표현한다는 게 맞는 말인 거 같아요.
철야 촬영을 해도 다음날 오전엔 꼭 운동을
한다고 들었어요.
<블러드>를
준비하면서 스물세 살 무렵부터 운동을 시작했는데 그전까진 운동을 전혀 안 해서 몸이 뻣뻣했어요. 그런데 <블러드>의 사야 같은 여자가 되겠다고 마음 먹으면서 일단
다리부터 일자로 찢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 목표가 생기니까 운동을 하게 됐어요. 처음엔 러닝머신이나 크로스 트레이닝 같은 걸 10분 이상 못했는데
지금은 매일 해야 돼요. 하루라도 거르면 찌뿌둥하거든요. 지금은
완전히 습관이 됐죠.
아무래도 몸매를 유지하는 궁극적인 비결
또한 운동이겠군요.
그럼요. 나이가 들면 살이 많이 찌잖아요. 어렸을 땐 신진대사가 높으니까 걱정 없었는데 지금은 옛날처럼 먹으면 살로 가는 게 느껴져요. 그러니까 운동을 해야죠. 운동을 하면 살이 찌지 않으니까.
사실 전지현 씨는 살찔 걱정 따윈 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웃음).
그럴 리가요. 운동을 하면 피부도 달라져요. 어쨌든 세월은 흐르고 나이 들지 않을 수 없잖아요. 하지만 운동을
하면 젊어지는 기분이 드니까, 조금이나마 나이가 든다는 기분을 뒤로 미룰 수 있다면 좋지 않아요?
배우로서 소화할 수 있는 캐릭터의 연령대를
유지하는 것도 어떤 면에선 필요한 노력이겠죠. 그런 면에서 외모를 관리하는 것도 배우로서 필요한 일일
수 있겠네요.
만약 제 나이가 마흔 살인데, 10대 역할을 하려는 건 무리한 욕심이겠죠. 그리고 그저 젊은 역할을 맡기 위해 관리한다기 보단 제가 어떤 역할을 연기하건 일단 저부터 건강해야죠. 그래서 기본적으로 관리가 필요한 거 같아요.
대중적으로 큰 관심을 받았지만 사적으로
특별히 드러나는 바가 없었던 거 같아요. 스스로 말한 것처럼 정말 배우로서의 삶에 충실했기 때문일 수
있겠지만 그만큼 스스로를 잘 통제하는 완벽주의자가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데요.
결코 완벽주의자는 아니에요(웃음).
수많은 관심 속에서 산다는 건 정말 좁은 세상에서 산다는 의미일 수 있겠죠. 그걸 아는
이상 거기서 제가 조심해야 할 건 제가 몰라서 생기는 실수들인 거 같아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죠.
몰라서 하는 실수란 어떤 것일까요?
가끔씩 내 선택이 나중에서야 실수였다고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그런
거죠. 인생을 살아가면서, 제 의도와 무관하게 뒤늦게 느끼게
되는 실수가 있잖아요. 끊임없이 조심해야 하지만 결국 어쩔 수 없는?
사실 어릴 때부터 워낙 일만 해왔기 때문에 제 스스로 사는 법은 잘 아는 거죠.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다고 할까?
어느덧 현장에서 선배보다 후배가 더 많아졌을
텐데 그런 부분에 대한 책임감이란 게 있을까요?
음, 없진 않은 거 같아요. 분명
어렸을 때와는 다르죠. 그런데 선배든, 후배든, 정말 열심히 하기만 하면 현장에선 인정받을 수 있어요. 무엇보다도
배우가 먼저 인정 받아야 할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스태프들이니까요. 그래서 지금 당장 선배이니까 어떻게
한다는 건 없어요. 그냥 열심히 할 뿐이죠. 저도 아직 부족한
면이 많으니까요.
2000년에
개봉했던 <시월애>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이정재
씨와 <도둑들>과 <암살>에서 다시 만났어요. 오랫동안 세월을 공유하는 동료배우가 있다는 건 반가운 일 아닌가요?
좋은 일이죠. 처음 호흡을 맞출 때보다 두 번째가 훨씬 좋아요. 그만큼 상대가 편하게 느껴지니까요. <암살>에서 정재 오빠와 제가 나이를 먹은 것처럼 분장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서로
머리가 희끗희끗해졌는데 정재 오빠가 저를 보더니 “야, 너랑
나랑 이렇게 분장하고 쳐다 보니까 우리가 참 오래 본 거 같긴 하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보니 기분이 묘하긴 했어요. 그래서 내가 아는 정재
오빠도 잘 살았으면 좋겠지만 배우 이정재로서 끝까지 배우 생활을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시대에서
함께 연기해온 배우가 잘 사는 모습을 봐야 제 마음이 편안할 것 같거든요. 그게 어쩌면 제 모습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작품에서 계속 보고 싶어요.
30대가
막연했던 시절도 있었을 거예요.
그럼요. 어릴 땐 ‘30대
되면 죽을 거야’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니까(웃음).
그렇다면 40대에 대한 기대감은 없을까요?
저는 목표를 세우지 않아요. 그냥 지금에 충실하고자 하죠. 어렸을 땐 되레 앞날에 대한 걱정만 해서 그 좋은 시절을 충분히 만끽하지 못했어요. 그때 할 수 있는 게 정말 많았을 텐데. 지금도 마찬가지겠죠. 앞으로 살아갈 날 중에서 오늘이 제일 젊고, 제일 예쁘고, 좋은 시절일 거예요. 그러니 지금에 충실해야죠. ‘오늘 정말 뭔가 했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기대 정도는
있지 않을까요? 여자로서도, 배우로서도.
예전에도 이야기했던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여배우로서 나이 들어가는 건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 받을 수 있는 외모를 유지할 순 없겠죠. 하지만
감정의 폭은 자연스레 깊어질 테니까요. 그러니 나이 들어가고, 얼굴에
주름이 지는 게 두렵진 않아요. 지금처럼 많은 일을 할 순 없겠지만 그때에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오히려 지금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을지 모르고, 정말 모르는 일이죠.
당장 올 한해 동안 이루고 싶은 건 없을까요?
일단 올해엔 <암살>이
개봉할 테니까 잘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한동안 연이어 작품을 해왔으니까 올해엔 좀 쉬어가는 타이밍으로
삼으면 어떨까 싶어요. 천천히 차기작도 검토해보고.
링컨 대통령을 지지하는 북군의 승리로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 미국에서 승리에 도취된 북부인들의 분노를 부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연극을 관람하던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 초유의 대통령 암살을 겪게 된 북부인들은 암살에 가담한 용의자들을 추적해서 체포하고 관련자들을 색출해내고 재판석에 앉힌다. 그 가운데에는 용의자들의 아지트를 제공하고 그들을 후원했다는 혐의를 얻었으나 이를 부인하는 여인, 메리 서랏(로빈 라이트)이 자리하고 있었다. 변호사 출신으로 전쟁에 참전한 북군 장교 프레데릭 에이컨(제임스 맥어보이)은 친분이 있는 변호사 출신의 장관 리버디 존슨(톰 윌킨슨)의 요청으로 그녀의 변호를 맡게 된다. 덕분에 링컨의 암살자를 변호하게 됐다는 차가운 시선을 얻게 된 그는 개인적인 신변의 어려움을 겪어나가면서도 그녀의 주변을 조사하던 중 심각한 의문을 품게 된다.
링컨 암살 사건 이후, 그 암살자들을 법적 제도로서 처리하는 과정을 그린 <음모자>는 법정을 배경으로 두고 있으나 법정 스릴러로서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물론 죄의 유무를 가리고자 고군분투하는 젊은 변호사 에이컨이 거짓 증언을 가려내고, 북군 정부의 일방적인 처벌적 음모를 분쇄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은 흥미롭다. 그리고 이는 법정 스릴러로서의 서스펜스보다도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한 인물의 노력에서 새어 나오는 숭고함과 편견이 섞인 관점으로부터 벗어나서 객관적인 시각을 회복하게 되는 인물의 변화와 성장을 지켜보는 과정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흥미를 유발시키는 방아쇠는 바로 진실의 여부에 주목하는 영화의 관점 자체에 있다. 뒤집기 어려운 결과를 향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이의 행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서스펜스가 된다.
<음모자>는 이미 정해진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사건에 얽힌 진실 그 자체를 조명해내는 사실적 진술에 전력을 쏟는 역사물이다. 남북전쟁 당시의 풍경을 생생하게 재현해내는 것을 시작으로 그 시공간을 장악하고 있던 일방적인 관점과 그 관점에서 발전된 광기적 현상에 초점을 맞춰낸다. 미국 최초의 여자사형수이기도 했던 메리 서랏이 누명을 쓰고 사형대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정해진 결과를 재현하고 있는 이 영화가 법정 스릴러로서의 장점을 얻을 수 없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특별한 장르적 특성보다도 보편적인 가치를 논하는 이 영화는 그만큼 정직한 문법과 성실한 기술로서 뚜렷한 형태를 완성하고, 묵직한 무게를 얻어낸다.
무엇보다도 실화의 재현에 주목하고 있는 이 영화가 흥미를 부르는 건 그것이 단순히 그 시대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녀사냥에 가까운, 법치적인 제도를 통해서 이루는 반법치적인 처벌은 <음모자>가 재현하는 그 시대의 전후로도, 미국 이외의 수많은 땅 위에서도, 전세계적으로 종종 발견되곤 하는 인류의 부조리한 역사적 단면에 가깝다. 대의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권리를 묵살하고, 국가적 명분을 위해서 인간 본연의 가치를 무시하는 행위는 인류가 쌓아 올린 역사 안에서 거듭 발견돼 왔다. 실존인물에 대한 서사와 실제적인 음모론의 풍경을 묘사해온 바 있는 로버트 레드포드는 <음모자>를 통해서 또 한번 거대한 명분에 짓눌려야 했던 어느 개인의 비극적인 역사를 들춰낸다. 특별한 기교보다는 우직한 정면승부처럼 나아가는 이 작품은 시대와 사건을 관찰하는 작가의 관점과 시선을 통해서 나름의 멋을 얻어낸다. 연륜과 패기, 이 빤한 수식어가 잘 맞아떨어지는 로빈 라이트와 제임스 맥어보이의 조합은 어쩌면 이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준수한 볼거리라 해도 좋을 것이다.
만약이란 말은 부질없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뒤집어 가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불필요한 첨언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현실이 아닌 허구 안에서 가정이란 유효한 착상이다. 논픽션이 아닌 픽션의 세상을 그리는 이야기꾼들에게 가정이란 발칙한 야바위이자 무궁무진한 떡밥이니까.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은 픽션으로 디자인된 논픽션의 세상, 다시 말하자면 영화로 이입된 현실의 역사를 전복시키고 깔깔거리는 유희다. 어쩌면 메가폰을 쥔 당사자가 쿠엔틴 타란티노란 사실만으로도 알만한 사람들에게 <바스터즈>는 싹이 노란 영화일 것이다. 그리고 <바스터즈>는 과감하게 돌진하는 피칠갑의 난장 속에서도 과장과 비유를 뒤흔들어 능수능란한 유머로 발화시키는 타란티노적 시네마천국이다.
총 다섯 챕터로 구성된 <바스터즈>는 중심인물을 달리하는 챕터의 나열을 통해 사건을 범위를 빠르게 넓히고 영화적 세계관을 급속도로 확장해낸다. 1941년, 유태인 사냥꾼으로 악명을 떨치는 독일군 나치의 한스 란다 대령(크리스토프 왈츠)의 악랄한 만행과 유태인 소녀 쇼샤나 드레이퍼스의 탈출을 그리는 첫 번째 챕터는 나치를 살해하는 임무를 띠고 독일로 파견되는 미군, 일명 개떼들(Basterds)이라 불리는 알도 레인 중위(브래드 피트)의 특공대의 활약상을 그리는 두 번째 챕터로 넘어간다. 그리고 성인으로 자라 파리에서 극장을 운영하는 쇼샤나(멜라니 로랑)가 등장하는 1944년 6월의 세 번째 챕터에 다다라 앞선 두 챕터에서 별개의 동선으로 활동하던 캐릭터들의 교점을 형성하고 뒤따를 두 챕터를 통해 캐릭터의 역할을 본격적으로 접합하던 영화는 궁극적인 본색을 드러내는 피날레를 향해 가속을 올려나간다.
독일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이탈리아어와 영어까지, 총 4개국어가 동원되는 <바스터즈>는 그만큼 수다스럽고 떠들썩한 영화다. 브래드 피트를 제외하면 대부분 독일과 프랑스에 주둔한 현지 유명 배우들로 이뤄진 캐스팅은 <바스터즈>의 현실성과 허구성을 이루는 양면적 자질이나 다름없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캐릭터들의 발성과 화음이 격차를 이루고 교차되거나 변환을 이룰 때, 유머와 서스펜스의 도화선에 불이 붙고 방류되듯 불거지는 사연은 급류처럼 진전된다. 또한 과감하게 전시되는 악의적 성격의 이미지는 예나 지금이나 타란티노의 영화다운 블랙코미디적 취향을 돈독히 다져나간다. 히치콕의 맥거핀 이론을 충실히 이행하는 몇몇 시퀀스는 비범한 서스펜스로 신을 지배하다가도 순발력 있는 제스처와 언어를 발휘해서 영화적 공기를 찰나에 변주해나간다.
“우리의 임무는 나치를 잡아들이는 게 아니라 싸그리 죽이는 거야.”알도 레인의 대사처럼 <바스터즈>는 정말 나치를 싸그리 죽여버리는 영화다. 허무맹랑한 허풍에 가까운 영화적 장면들은 근엄한 표정을 버리면서도 유희적 의식을 치르듯 진지하게 허구적 상황을 대면하고 펼쳐 보인다. <바스터즈>의 나치들은 역사적 죄인으로서 복합적인 죄의식의 형태를 드러내는 악인으로서 존재하기 보단 명확한 선악의 패가 나뉜 유아적 만화 속 악당처럼 단순하며 때때로 우둔하고 어리석거나 교활하다. <바스터즈>는 히틀러 암살을 시도하게 되는 알도 레인과 쇼샤나의 목표가 어느 수순까지 다다르는가를 지켜보는 것보다 그 목표에 접근하는 행위적 수단과 방식이 어떤 수순을 밟아나가는가에 관심을 둘 때 보다 유희적인 쾌감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선악의 경계가 명확하면서도 장난끼가 다분한 인물들이 이루는 난장의 연속은 서사적 예측 범위에서 한 발자국씩 벗어난 결과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거짓된 역사를 과감하게 묘사해나간다.
<바스터즈>는 영화광이라 불리는 타란티노의 영화적 유희가 무엇을 동경하고 겨냥하는가를 저돌적으로 드러내는 하이퍼 픽션이다. 스크린이 녹아 내린 극장에서 연기에 영사된 쇼샤나의 클로즈업된 얼굴은 마치 호러적 광기를 연출하고, 극장을 채운 날카로운 웃음소리는 아비규환에 빠진 관객들의 비명과 함께 거대한 난장을 부추기다 거대한 허구적 단죄로 승화된다. 물론 <바스터즈>를 나치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이루는 비범한 작품이라 치장할 필요까진 없을 것이다. 다만 <바스터즈>가 '세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은 유희'라는 말을 영화로 증명하는 타란티노의 비범한 역작이란 것 정도는 인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영화적 세계관으로 이입된 현실적 부조리를 마음껏 쥐고 흔들며 조롱하는 <바스터즈>는 결국 타란티노가 지닌 영화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결과물이다. 피칠갑의 난장 속에서도 과장과 비유로 상황을 비틀고 뒤흔드는 능수능란한 타란티노식 유머는 <바스터즈>에서도 강력한 쾌감을 부여하며 이를 통해 연극적 단죄마저 유쾌하게 거둔다. “아무래도 나의 최고 걸작이 되겠는걸.”알도 레인 중위의 마지막 대사처럼 그 자뻑마저도 유쾌할 정도로, <바스터즈>는 분명 재치 있는 야바위꾼 감독의 유쾌한 저항을 그리는 결과물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