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인형 놀이를 하듯이 영화를 만들어왔던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놀랍도록 비범한 걸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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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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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에서 근무하는 존(로버트 드니로)은 가석방 심사관이다. 가석방 심사 자격을 원하는 죄수들은 그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반성의 기미를 보인다. 혹은 연기한다. 그의 업무는 바로 그 연기를 구분하고 진심을 파악하는 일이다. 그의 앞에 어느 날과 같이 한 죄수가 앉았다. 그는 방화죄로 검거되어 형을 치르고 있다고 했다. 이름은 스톤(에드워드 노튼). 그는 자신이 가석방될만한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죄를 뉘우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존은 고민한다. 그런 그의 곁에 미모의 여성이 나타난다. 스톤의 아내 루세타(밀라 요보비치)라고 했다. 죄수의 주변인과의 만남은 부적절하기에 그녀를 피하던 존은 거듭되는 그녀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하고 그녀와 마주 앉게 된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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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지간 이라 말하기보단 이란성 쌍둥이라고 말하는 게 적확하다. <인크레더블>은 이안 감독의 <헐크>로부터 잉태된 작품이 아니다. <헐크>는 이안 감독의 야심으로 인해 원작이 변주된 사례지만 <인크레더블>은 마블 코믹스가 본래 지향했던 코믹스의 원천적인 야심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두 작품은 모태가 같을 뿐, 지향하는 형태가 다르다. 이안 감독의 <헐크>가 변화구였다면 <인크레더블 헐크>(이하, <인크레더블>)는 직구다.

<인크레더블>의 도입부는 자만이라기보단 자신감에 가깝다. 미국 정부 산하의 실험을 돕던 브루스 배너(에드워드 노튼) 박사가 실험 중 사고로 감마선에 과잉 노출된 뒤 헐크로 변하게 됐다는 캐릭터의 탄생비화를 개괄적인 방식으로 간략하게 집약하는 <인크레더블>의 오프닝 시퀀스는 <헐크>와 또 다른 개별적 자아를 증명하려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전자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동시에 어필한다. 또한 이는 <인크레더블>(을 자체 제작한 ‘마블’)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헐크’라는 캐릭터의 유명세에 자신감을 표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으론 1977년 이래로 여러 번에 걸쳐 TV시리즈로 극화되고 2003년에 이미 한차례 스크린판이 제작된 마당에 이 캐릭터의 전사를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제작진의 자기진단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됐건 <인크레더블>의 오프닝 시퀀스는 도전적이지만 합리적인 방식으로 서사의 너비를 좁히고 묘사의 영역을 넓히는데 기여하며 <인크레더블>의 목표의식에 확고하게 접근한다. 원작의 제목을 고스란히 영화의 타이틀로 오려 붙인 <인크레더블>은 이미지에 충실한 작품이다. 원작에 비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고뇌를 짊어진 영화는 지극히 기본적인 서사의 골격에 근육질 이미지를 키우는데 주력한다. 대부분의 안티히어로 무비의 선례처럼 <인크레더블>에서도 주인공을 위기로 몰아넣을만큼 막강한 적, 어보미네이션이 등장하고 <인크레더블>의 헐크는 그와 격렬하게 싸우는 지점에서 클라이막스를 찍는다.-이 점은 이안 감독의 <헐크>와 가장 큰 차이이기도 하다.-

게다가 <인크레더블>은 근래 다양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을 통해 전시된 액션 시퀀스 이미지를 대거 포용한다. 극 초반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골목과 옥상에서 펼쳐지는 브루스 배너와 미정부군의 추격씬은 <본 얼티메이텀>의 도심 추격씬을 떠올리게 하고 후반부, 뉴욕 시가지에서 등장한 어보미네이션을 쫓는 카메라 앵글은 캠코더 버전의 <클로버필드>처럼 대상을 과감히 비추지 못하며 어지럽게 흔들린다. 게다가 헐크와 어보미네이션의 도심격투씬은 <아이언맨>처럼 날렵하고 <트랜스포머>만큼 육중하다. 물론 <인크레더블>은 <헐크>와 마찬가지로 CG로 완성한 거대한 녹색괴물의 이미지를 이용해 탱크를 때려부수고 헬기마저도 박살낸다.

감정적 내러티브도 중시된다. 통제불능의 괴물로 변모했지만 자신의 연인을 보호하고자 사력을 다하는 헐크의 헌신적인 순정. 이는 <킹콩>과 비슷한 감수성을 유발한다. 흉폭한 폭력성을 표출하던 헐크가 자신이 사모하는 여인 앞에서 온순한 강아지처럼 선량한 눈빛을 내보이는 장면은 묘한 감동을 준다. 제어가 불가능해 보이는 광폭한 초인적 자아를 막아서는 강건한 로맨스는 <인크레더블>에 낭만적 감수성을 부여한다. 다만 그 낭만이 영화를 지배하던 <킹콩>에 비해 <인크레더블>의 그것은 장치적 효과로 작동되는 것이다. 그 감수성은 본격적인 액션의 스케일을 광역화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이는 결국 <인크레더블>이 <킹콩>과 비슷한 방식으로 감정적 내러티브를 형성하지만 그에 비해 구도는 빈약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크레더블>은 철저하게 자신의 존재적 의미를 캐릭터가 지닌 파괴력 안에 귀속시킨다. 헐크라는 내면적 자아로 인해 고통 받던 브루스 배너에 방점을 찍었던 이안의 <헐크>와 달리 <인크레더블>은 그 자아로 인해 고통 받던 브루스 배너에게 그 흉폭한 내면을 제어할 수 있는 자각적 능력을 끝내 부여한다. 이는 결국 <인크레더블>은 ‘헐크’에 방점을 찍는 영화라는 것이다. 그만큼 극적 스케일과 시퀀스의 스타일이 중시되고 내면적 갈등보단 외면적 격돌이 중시된다. 그 지점에서 <인크레더블>의 호불호는 갈릴 공산이 크다. 어쩌면 <인크레더블>은 이안 감독의 실험소재로 활용됐던 ‘헐크’라는 기자재를 더욱 제 모습에 가깝게 활용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이언맨>에 이어 자가생산한 원작모델의 영화화 작업을 외주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스크린에 이미지를 재생시킨 마블 코믹스는 <아이언맨>에 이어 자신들의 본질에 가까운 영화적 작업을 또 한번 완성했다. 게다가 극의 말미에 이르면 알겠지만 (현재 수많은 관람자들이 유포하기도 한 것처럼) 최근 화제가 됐던 동류 블록버스터의 인물이 출연한다. 게다가 마블 코믹스에서 마블 엔터테인먼트로 발돋움한 <인크레더블> 제작진의 야심을 선전포고하듯 드러내는 지점이라 더욱 흥미롭다. 힌트를 하자 주자면 마블 엔터테인먼트에서 <인크레더블> 이전에 제작한 영화는 당신도 알겠지만 <아이언맨>이다. 아무래도 몇 년 후에 우리는 ‘쉴드’의 정체를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유명 안티히어로들의 연합과 격돌까지도.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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