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동물원을 샀다>라니, 동물원을 인수한 어느 갑부에 관한 이야기냐. 물론 아니다. 도전 정신이 강한 칼럼니스트 벤자민 미(맷 데이먼)가 어느 날 덜컥 사버린 동물원에 관한 이야기다.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고, 이젠 아들과 딸이 남았다. 사별한 아내의 추억으로부터 달아나듯 새로운 터를 찾던 그에게는 좀 더 자연친화적이고, 너른 안식처가 필요했다. 그런 집이 동물원에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그는 동물원을 샀고, 우여곡절 끝에 그의 주변의 모든 이들이 결국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라고 말하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영화가 바로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인 것이다.
이 영화는 실존 인물인 벤자민 미가 인수한 영국의 ‘다트무어 동물원’에 관한 일화를 담은 에세이집을 동명의 제목 그대로 각색한 작품이다. 하지만 실화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영화는 큰 변주를 시도한다. 영화는 주인공이 동물원을 사게 되는 계기에 보다 직접적인 정서적 관여를 시도한다. 벤자민 미가 아내의 죽음으로 그 상실감의 부채처럼 남겨진 집을 처분하고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게 되는 영화의 시작점은 실화와 다르다. 실제로는 동물원의 집으로 이사한 뒤, 동물원 개장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아내가 죽었다. 실화로부터 벗어난 각색이지만 ‘동물원을 산 가족’이라는 소재에 감정적인 드라마를 실어준다는 목표에서는 보다 효과적인 판단처럼 보인다. 어머니이자 아내였던 한 여자의 죽음으로 가족 모두에게 맺힌 상실감은 새출발을 위한 터전을 찾아나선 벤자민의 가족이 동물원을 사게 된 과정에 나름의 합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동물원을 샀다>는 치유와 화해를 그린 평이한 드라마다. 어머니이자 아내를 잃은 한 가정과 경영난 속에서 주인을 잃고 방치되던 동물원의 만남, 그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감정적 시너지가 이 영화의 뿌리이자 줄기에 가깝다. 제목에서 소동극의 뉘앙스가 느껴지지만 실상 이 작품은 힐링 무비에 가까운 애잔한 드라마다.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는 여전히 카메론 크로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제리 맥과이어>와 같이 상실과 회복의 여정을 그리는 작품이지만 감정적인 진폭이 상대적으로 큰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드라마의 잔잔한 흐름이 썩 어울린다. 동물원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사연들 속에서 자잘하게 뒤엉켜 있던 갈등의 줄기들이 풀려나가는 과정을 미니멀한 감정선 안에서 유연하게 그려나간다.
인생이란 어쩌면 이처럼 사소한 행복의 발견을 통해서 평생을 채우고 밀고 나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는 현실의 사소한 일상에 깃든 발견의 순간들을 깨닫게 만드는 영화다. 대단한 갈등이나 거대한 회복으로 기승전결의 파고를 만들어내기 보단 어느 특별한 사건을 밑그림 삼아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이 훈풍처럼 느껴진다. 이는 결국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서로 알게 모르게 영화 같은 일상으로 재현될 수 있는 특별한 삶임을 깨닫게 만든다. 전반적으로 배우들의 연기는 적절하다. 배우 본연의 얼굴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탁월하게 캐릭터에 종사한다. 무엇보다도 더욱 특별한 건 시규어 로스의 프론트맨 욘시의 음악이다. 치유와 회복을 그리는 이 영화의 결정적인 순간을 채우는 욘시의 음악은 그야말로 치유를 위한 송가로서 부족함이 없으며 그것이 이 영화를 보다 특별하게 만든다.
다코타 패닝과 엘르 패닝은 할리우드의 ‘뜨거운 자매’다. 다코타는 일찍이 연기 잘하는 아역배우 수준을 넘어서 할리우드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엘르 역시 그녀의 예쁜 여동생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그러나 엘르는 선언하듯 말했다. “다코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죠.” 그리고 심상치 않은 행보를 걷고 있다. 지난 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소피아 코폴라의 <썸웨어>(2010)에서 엘르의 존재감은 기대 이상이다. 화려한 일상을 전전하며 공허한 일생을 채우는 어느 스타 배우가 유일하게 자신의 삶을 수식해주는 딸과의 교감을 담고 있는 이 작품에서 엘르는 현재진행형의 성숙을 마음껏 자랑한다. 특히 근작인 <슈퍼 에이트>(2011)에서 그녀는 또래의 남자 아역배우들과 비교될 만큼의 성숙한 면모를 과시한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사랑할 뿐이에요.”이제 엘르는 더 이상 타코타의 동생으로 불리지 않는다. 준비된 슈퍼 탤런트로 자신의 미래를 꿈꾼다.
<슈퍼 에이트>를 이루는 줄기는 이렇다. 결핍과 불화가 잠재된 가족 내에서 성장하는 소년, 거대한 기차 탈선 사고, 미스터리한 실종과 도난 사고의 연속, 군이 개입된 정부적 음모론, 그리고 무시무시한 미지의 존재. 하지만 <슈퍼 에이트>라는 제목의 의미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을 누군가에게 보다 중요한 정보는 따로 있다. 슈퍼 8mm 카메라로 영화를 촬영하는 아이들. <슈퍼 에이트>라는 제목의 출처는 이렇다. 아이들의 영화 찍기는 <슈퍼 에이트>가 품은 갖은 요소들의 변두리를 돌면서도 언제나 그 모든 요소들로부터 동떨어지지 않은 채 존재하는 행위다. 이는 동시에 이 영화의 태생적인 목표를 대변하고 그 야심을 담고 있는 도구를 겨냥한 제목이기도 하다.
만약 당신이 <슈퍼 에이트>를 이루는 이 모든 줄기들로부터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면, 아마 당신은 최소한 80년대 즈음에 개봉하거나 TV로 상영된 인기 외화를 보고 자란 세대일 것이다. <슈퍼 에이트>는 80년대를 주름잡던 앰블린 엔터테인먼트 영화의 다양한 자양분을 뿌리 삼아 자라난 오마주 덩어리다. J.J.에이브람스가 연출을 맡았지만 제작을 맡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향력이 더욱 농후해 보이는 앰블린의 21세기적 재현에 가깝다. <E.T>나 <구니스>와 같이, SF와 어드벤처의 자양분이 가족영화라는 테마 안에서 귀결되고 적절한 성취를 거두던 그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련된 서스펜스와 현대적인 스타일이 결합된 오늘날의 감각을 자랑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J.J.에이브람스는 이 세계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 같다. 이 작품에서 에이브람스는 스필버그의 자장 속에서 자란 자신의 추억을 환기하는데 여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단지 그 오랜 추억의 재현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과 감각을 동원해 그 오래된 세계를 오늘날의 취향에 걸맞은 것으로 치장해낸다. <E.T>와 <클로버필드>의 조우라고 불릴 만한 이 작품은 고전적인 할리우드 가족영화의 감수성을 현대적인 엔터테인먼트의 감각으로 끌어올린다. 타이틀 시퀀스로부터 15분여 만에 등장하는 기차 탈선 사고의 스펙터클 이후로 관객들에게 정체불명의 의문을 쥐어준 영화는 이를 방치한 채 아이들의 영화 찍기에 관한 사연에 집중하면서도 종종 그 의문을 좀처럼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미끼를 던져나간다.
일명 ‘떡밥의 제왕’이라 불리는 에이브람스의 술법은 <슈퍼 에이트>에서도 여전하다. 하지만 이는 이야기의 흥미를 극대화시키고 달아나버리는 맥거핀으로 집중되기 보단 다채로운 영화적 요소들을 한 자리에 엮어내는 매듭의 역할을 해낸다. 아이들의 영화 찍기는 거대한 사고의 목격으로 이어지고, 이는 거대한 음모론에 관한 의문과 추적, 미스터리한 존재에 관한 서스펜스로 확장된 뒤, 미지의 세계로 탈출해버린 뒤, 그 모든 요소들을 감싸고 있던 인물들의 화해로 귀결된다. 에이브람스가 단지 관객의 호기심을 낚아내는데 능한 재주꾼 정도로 인식했다면 이 영화를 통해서 그의 재능을 다시 한번 확인해도 좋을 것이다. 조각처럼 펼쳐진 소재들을 하나의 줄기로 이어나가는 에이브람스의 화술은 <로스트>나 <프린지>와 같은 ‘미드’에서도 유효했으며 새로운 <스타트렉>시리즈를 프리퀄과 시퀄의 평행우주로 띄우는데 혁혁한 공헌을 한바 있다.
대단한 스펙터클을 전달하는 기차 탈선 사고는 미스터리한 의심과 연동되고, 어떤 식의 추측은 가능하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미지의 존재의 파괴적 행위를 의문스럽게 전시하며, 이 모든 사건에 개입하는 군의 행위는 음모론적인 추측을 낳는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슈퍼 에이트>는 한 소년의 성장을 비추는 드라마다.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 갈등하던 소년은 자신의 취향과 친구들과의 영화적 작업을 통해서 모험에 뛰어들게 되고, 사랑을 깨닫게 되며 이를 위해 뛰어든 위기 속에서 미지의 세계와 조우한 뒤, 자신을 비롯한 모두를 구원한다. 앰블린 엔터테인먼트의, 그 가운데서도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절대명사의 장르를 채운 다양한 양식들로 병풍을 세운 <슈퍼 에이트>는 에이브람스 특유의 감각과 화술을 통해 긴장과 유머를 넘나들고 끝내 순수한 감동을 건져낸다.
우연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갖은 사건을 건너는 동안, 필연적인 결과물의 완성에 다다른다. <슈퍼 에이트>에서 액자처럼 자리한 아이들의 영화 만들기는 사실 이 영화의 본체와 같다. 대단한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아이들의 영화는 이 영화의 끝에 다다라 소품처럼 전시된다. 그리고 어쩌면 <슈퍼 에이트>는 이 소품을 전시하기 위해 건너는 통과의례일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영화를 되새긴다는 것, 즉 누군가의 과거 속에 자리한 추억의 현시. <슈퍼 에이트>는 추억을 위한 영화다. 그 추억이란 결국 영화관람의 행위에 관한 것이며 그 행위의 기억을 통해서 추억될 수 밖에 없는 어떤 작품들에 관한 언급으로 재생되는 것이다. 결국 <슈퍼 에이트>는 바로 당신이 기억할만한 혹은 기억해낼 지난 날의 추억들을 환기시키는 도구인 셈이다. <슈퍼 에이트>는 추억마저 낚아내는 에이브람스의 슈퍼 탤런트로 엮어낸 슈퍼 엔터테인먼트의 재현이자 재해석인 것이다.
아이가 태어났다. 축복을 공유해야 할 이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비통하다. 산모가 죽었다. 그 때문인가. 다들 아이를 경계한다. 아이의 얼굴을 본 아버지의 얼굴은 경악을 품더니 그 아이를 들고 어디론가 미친 듯이 달려간다. 그리고 아이는 버려진다. 팔순 노인의 주름으로 가득한 작은 얼굴과 백내장에 관절염까지 앓고 있는 노쇠한 육체는 막 태어난 아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든다. 노인들의 요양원에서 거두어진 아이는 운명처럼 노인들 사이에서 자라난다. 그곳에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하, <벤자민>)는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로 알려진 스콧 F. 피츠제럴드의 동명 단편을 모티브의 뼈대로 삼아 풍만한 살을 붙여나간다. 제목은 영화를 탁월하게 함축한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의 특별한 일대기를 회상과 재현의 방식으로 전진시키는 160분의 서사는 저 제목으로 완전히 압축된다. 서사적인 흐름에 역류하는 인물의 성장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과 그 주변에 선 인물을 묘사하는 영화는 원작과 궤가 다르다. 시대적 배경을 비롯한 상당부분의 설정이 원작으로부터 이탈된다. 인물을 둘러싼 변화를 덩어리진 서사의 경계적 진행에 담아 묘사하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사실적인 연대를 서사로 삼아 그 안에서 발생하는 시대적 배경을 사건에 결부시켜 인물과 시대의 변화를 연관시켜 작동한다. 1860년대에 시작되는 원작과 달리 <벤자민>이 1918년, 즉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해에 시작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서사로 나열되는 원작과 달리 서사를 관통하는 일관적인 맥락도 마련됐다. 어느 특별한 인생에 대한 일대기를 바탕으로 하되 그 안에 특별한 사연을 가공해 삽입한다. <벤자민>은 기이한 생을 짊어지고 가는 남자의 일생을 관통하는 감정을 그린다. 그저 노인에서 유아로 성장(?)하는 벤자민 버튼의 흥미로운 삶을 다룬 원작과 달리 <벤자민>은 그 기이한 삶 속에서 일관된 감정을 유지하는 로맨스의 추억을 드리운다. <벤자민>은 실로 미스터리 하나 로맨틱한 영화다. 벤자민 버튼이 거꾸로 가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와중에도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와의 로맨스는 은밀하게, 때론 강렬하게 지속된다. 이는 평생의 러브스토리이자 운명적인 로맨스다. 물론 긴 러브스토리는 많다. 하지만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인생이 이 러브스토리를 특별하게 배려하는 동시에 매우 절실한 감성을 보완한다. 특별한 소재와 서사의 뼈대가 온전한 원작을 통해 수려한 모티브를 발생시켰다. 각색을 맡은 에릭 로스는 흥미로운 사건을 위대한 러브스토리로 펼쳐냈다.
현실적인 연대는 <벤자민>에 현실성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벤자민>은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영화다. 특히 부드러운 붓질로 그려진 유화 같은 색감을 지닌 <벤자민>의 풍경은 영화의 문학적 상상력에 걸맞은 삽화로서 기능한다. 마치 실재 같지만 환상이며, 거짓 같지만 진실하다. 기이한 운명을 타고 난 아이가 성장해 나가는 과정은 씩씩하고, 그 운명을 관통하는 로맨스는 아련하되 투명한 여운으로 지속된다. 미스터리한 소재를 다듬어 아름다운 드라마를 연출하고 진실한 감동을 선사한다. <조디악>을 통해 중후한 거장의 분위기를 자아내던 데이빗 핀쳐는 <벤자민>을 통해 다시 한번 그 가늠할 수 없는 깊이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생이 끝나도 그 생이 남긴 사연은 회자되기 마련이다. <벤자민>은 특이한 삶보다도 특별한 감동이 서려있어 아름다운 수작이다. 160여분의 대장정 끝에 얻어진 감정은 실로 투명하다. 눈물 나게 아름답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가도 마지막까지 사랑은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