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가릴 수 없는 매력으로 존재감을 발산하는 배우들과 달리 어떤 배우들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신비로서 마음을 사로잡는다. 에밀리 블런트, 바로 그녀가 그렇다.
매우 어린 나이부터 런던의 남녀공학 사립학교 ‘Ibstock Place School’에서 교육을 받던 소녀가 심각한 말더듬이 증세를 겪게 된 여덟 살부터였다. 교사였던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 엄격한 교육보다도 치유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갖은 방도를 동원해도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하지만 12살 무렵, 소녀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한다. 연극을 지도하던 한 교사는 그녀에게 지금까지의 목소리와 다른 악센트를 지닌 캐릭터 연기를 주문한다. 그녀의 불안은 따뜻한 격려로 녹아내렸다. “진심으로 널 믿는단다.” 이는 교묘하고도 영리한 처방이었다. 그 무대에 오른 이후로 소녀의 말더듬이 증상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소녀는 그 무대에서 미래를 만났다. 그 소녀의 이름은 에밀리 블런트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에게 불어온 바람을 그저 지나쳐 보내지 않았다.
사립학교의 삭막한 분위기를 견디기 어려웠던 블런트는 다양한 예술인재를 육성하는 2년제 식스폼 칼리지 ‘Hurtwood House’로 진학한다. 그곳에서 승마와 첼로, 보컬 등 풍부한 끼를 인정받기 시작한 그녀는 2000년 에든버러 축제에서 공연하는 블랙코미디 연극 무대에 발탁된다. 이 무대에서의 연기는 한 유명 에이전트를 사로잡았다. 헬렌 미렌의 에이전트이기도 한 켄 매크레디는 블런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녀의 공식적인 첫 무대를 마련한다. 사실 이는 대단한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말의 경력도 없는 신인을 대배우 주디 덴치의 상대역으로 무대에 올려 보낸다는 건 결코 쉬운 판단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블런트는 데뷔작 <로얄 패밀리>를 통해 이브닝 스탠다드 어워드의 신인상마저 거머쥐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성공적인 데뷔전 이후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한번 더 무대에 올라 연기적 재능을 입증한 그녀 앞에 TV의 러브콜이 이어졌다. 배우로서 경력의 입지를 마련한 것이다.
다시 한번 원점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하자면, 블런트는 10년이 조금 넘은 경력을 지닌 배우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블런트의 경력을 현시점에서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그녀는 분명 입지전적의 상승세를 타고 온 배우다. 물론 10년 여의 경력이 짧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그녀가 단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에서 앤 해서웨이를 향해 비아냥거리던 얄미운 동료비서 에밀리를 연기하며 갑작스럽게 세간에 얼굴을 알린 할리우드 조연배우의 성공사례는 아니라는 말이다.
블런트의 매력을 보다 제대로 설명하려면 그녀의 영화 진출작 <사랑이 찾아온 여름>(2004)을 통해야만 한다. 영국 아카데미를 비롯한 유수의 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얻은 이 작품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모범적으로 자라났지만 일탈을 즐기는 소녀 탐신 역을 맡은 그녀는 와이드한 스크린의 너비만큼이나 광활한, 자신의 숨겨진 매력을 마음껏 발산한다. 블런트는 이 작품으로 빼어난 첼로 연주와 승마 솜씨를 선보이는 기회를 얻었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건 이 영화가 블런트가 지닌 진정한 매력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도전적인 눈빛에 감춰진 나약한 심성, 대범한 행동성 속에 감춰진 자기보호적 본능, 반항과 굴종의 심리가 부조리하게 얽힌 캐릭터의 이중성을 표현해내는 건 영화의 완성도와 직결된 것이었으며 이를 완벽하게 소화해낸 블런트는 영화가 얻은 찬사를 고스란히 자신의 성과로 가져갔다.
이중성은 블런트의 캐릭터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분명 메릴 스트립과 앤 해서웨이의 영화였다. 그럼에도 블런트의 존재가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건 일단 비중을 막론하고 캐릭터들의 매무새를 잘 어루만진 각본과 연출의 힘일 것이다. 하지만 역시 배우들의 능력을 간과할 수 없다. 메릴 스트립의 압도적인 연기와 앤 해서웨이의 설득력 있는 면모가 이 영화의 구조를 지탱하고 있다면 블런트를 비롯한 조연들은 그 구조를 빛내는 장식과 같다. 악마 같은 편집장의 시중을 견뎌온 베테랑 비서 에밀리는 실수 연발인 신참 비서 앤디를 향해 냉소적인 눈빛을 날리지만 이는 끝내 편집장의 신임을 얻은 신임과의 역전된 처지 속에서 구겨진 자존심이 반영된 질투로 변모한다. 에밀리를 연기한 블런트는 냉혹한 사회 조직의 질서 속에서 자존심을 통해 스스로를 방어하다 끝내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한 여인의 심연을 특유의 눈빛으로 소화해냈다. 특히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에밀리가 남몰래 눈물을 쏟아낼 때 밀려오는 처연함은 좀처럼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의 고충을 연민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었다. 남편과의 반목을 이겨내기 위해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 여인들에게 천착하는 <제인 오스틴 북 클럽>(2007)의 프루디나, 성인이 되어서도 자립하지 못하는 열등감으로 방황하는 <선샤인 클리닝>(2008)의 노라 역시 켜켜이 쌓인 내면의 상처를 숨긴 인물의 내면을 통해 연민을 자아낸다.
대영제국의 황금기를 주도한 빅토리아 여왕의 로맨스에 주목한 <영 빅토리아>(2009)는 블런트의 새로운 면모를 선보인다. 이 작품은 여왕의 치적을 나열하는 대신, 우아한 왕실의 풍경 속에 감금된 여왕의 인간적인 로맨스에 주목한다. 그녀는 권력자로서 고독을 감내해야 하는 운명에 매서운 눈빛으로 맞서기도 하지만 사랑을 갈구하는 심약한 여인의 초상을 수용하며 보다 섬세한 감수성을 연출해낸다. 반대로 얌체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달콤, 살벌한 여인’ 로즈로 등장하는 <와일드 타겟>(2010)은 블런트가 지닌 발랄한 면모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자신이 죽여야 하는 여인에게 사로잡혀 버린 킬러의 딜레마를 우습지만 귀엽게 그려낸 이 영화에서 블런트의 백치미는 ‘귀여운 여인’ 그 이상이다. 가리거나, 드러나지 않거나, 쉽게 가늠할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 블런트의 매력은 정의될 수 있으며 그 사이에서 엿보이는 이중성의 면모가 때때로 그녀를 신비스럽게 치장한다.
때때로 <울프맨>(2010)이나 <걸리버 여행기>(2010)와 같이, 장르적 소품과 같은 작품 속에서 소모되는 시행 착오적 경험을 건너기도 하지만 블런트는 이제 영국과 할리우드를 오가며 활발히 활동하는 세계적인 배우다. 맷 데이먼의 운명적인 뮤즈로 등장하며 시종일관 뛰어다녀야 했던 <컨트롤러>(2011)도 그녀의 매력을 간과하고 있다. 하지만 온몸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현대무용수로서 신비로운 몸놀림을 연출하는 그녀의 면모는 운명에 맞서서 한 여인을 선택한 남자의 심경을 공감시키고도 남을만한 것이다. 심각한 말더듬이였던 탓에 말하는 대신 지켜봐야 했던 소녀였던 블런트를 전세계가 주목하는 배우로 도약하게 만든 것도 어쩌면 그 덕분일 것이다.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 신비로운 매혹의 뮤즈, 에밀리 블런트는 그렇게 자신만의 빛을 드리우고 있다.
늑대인간은 드라큘라와 함께 서구의 고전적인 서스펜스의 소재로서 이야기를 통해 장수를 누려왔다. <울프맨>은 이 고전적 소재가 현대에서도 얼마나 유용할 수 있는가를 설득하고자 하는 작품 같다. 1941년, 조지 와그너가 연출한 동명원작을 리메이크한 <울프맨>은 ‘랩 디졸브(Lap Dissolve)’ 기법을 활용하며 당대 영상기법의 교과서적 선례로 추앙받았던 원작의 시대로부터 현격하게 진화된 CG기술력을 토대로 현대적인 영상기술의 발전을 증명하면서도 고전적인 특수분장기법을 포용함으로써 클래식한 이미지를 구현해낸다. 원작이 동시대 안에서 파격적인 가치를 증명했던 것과 달리 <울프맨>은 되레 복고적인 가치를 어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형식적 태도는 원작의 형태를 수용한다는 점에서 리메이크라는 방식의 가치를 생산해낸다.
사실 <울프맨>은 서사적인 측면에서도 원작의 자장 안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10여 년 간,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배우로 활동하던 로렌스(베네치오 델 토로)에게 동생이 실종됐다는 비보가 전해지고, 이로 인해 로렌스는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로 인해 아버지 존(안소니 홉킨스)과 재회하는 로렌스는 괴기한 사건에 휘말림과 동시에 아버지와 관련된 트라우마에 다시 사로잡히게 된다. 큰 틀 안에서 원작과 특별한 차이를 두지 않는 서사는 딱히 그 원작을 경험해보지 못했을 현대의 젊은 관객들에게도 낯설게 느껴질 만한 것이 아니다. <울프맨>은 전형적인 늑대인간 이야기를 정통적으로 계승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소재가 잉태한 스토리의 원형에 근접한 작품인 까닭이다. 예기치 않게 늑대인간의 운명에 속박돼 버린 사내의 비극적 운명론, 그리고 그 위에 덧입혀질 로맨스적 비극 등은 하나 같이 고전적인 소재의 전형성을 설명하기 좋은 사례에 가깝다.
물론 <울프맨>이 원작의 서사적 육체에 온전히 빙의된 것만은 아니다. 변형된 캐릭터의 이름은 자처하고라도, 로렌스와 대립각의 위치에 선 아버지 존의 캐릭터의 변화는 원작과 <울프맨>사이의 정서적 거리감을 이루는 가장 큰 수단이다. 액자구성에 가까운 아버지의 서사에 비극적인 감정선을 부여한 원작과 달리 <울프맨>은 철저하게 존에게서 비극적인 감정선을 배척시킨다.그는 <울프맨>에서 로렌스의 분노를 야기시키고 그의 비극성과 폭력성을 보다 강렬하게 부각시키는 대립각으로서 보다 강한 존재감을 설득한다. 동시에 존을 연기하는 안소니 홉킨스는 이런 영화의 의도를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다 할만한 연기를 선보인다. 이런 캐릭터의 완성도는 결말부에 연출되는 파국적 정서를 보다 강력하게 보좌하는 것이기도 하다.
<울프맨>은 CG를 비롯한 현대적 영상기술을 전시하며 늑대인간의 변신이나 폭주가 발생시키는 잔인한 볼거리를 부각시키기 보다도 고전적인 서사와 문학적 비극의 연출에 보다 적극적이다. 늑대인간이 된 인간의 비극적 운명론과 오이디푸스적인 트라우마, 그리고 멜로적 파토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정서적 무게가 중후한 시대적 이미지를 포착하는 영상을 곁들이며 <울프맨>에 앤티크(antique)한 가치를 부여한다. 실제로 로렌스가 배우로서 <햄릿>의 무대에 서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는 <울프맨>은 마치 세익스피어의 비극적 딜레마가 극적 분위기에 적극적으로 수용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울프맨>이 추구한 과거지향적인 방식의 수용은 때때로 낡은 산물이라는 인식을 온전히 차단해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늑대인간이라는 고전적 소재의 낡은 감성 덕분일 수도 있겠지만 고전적인 연출을 지향하는 영화의 서사적 투박함에서 기인한 문제이기도 하다. 비극적 정서를 지향한 서사적 의도는 일면 비범한 구석이 있지만 그것을 탄탄하게 여며야 할 서사적 진전에서 느슨한 간극들이 발견된다. 또한 늑대인간이 연출하는 서스펜스적 긴장감과 액션의 박진감을 묘사하는데 많은 러닝타임을 할애하기 보다도 개인의 트라우마와 딜레마를 정신분열저인 이미지로 묘사하는데 공을 들이기도 하는 양상이 때때로 혼란스럽다. 고전적인 서사의 양식을 수용하겠다는 극적 의도와 달리 인물의 정서는 현대적인 정신질환적 분석 안에서 적극적으로 해부되는 양상이다.
물론 영화의 중후한 무게감을 관철시키는 언해피엔딩의 결말부까지, <울프맨>은 자신의 서사적 의도를 며확히 관철시키는 작품이란 점에서 평가를 얻어낼만한 작품이다. 동시에 고전적인 중후함과 우아함을 갖춘 배우들의 풍모와 기질은 <울프맨>의 의도를 명확히 다지는 영화적 밑천으로서 유효한 역할을 해낸다. 다만 고전적인 품위를 유지하는 이미지 안에서 현대적인 정신분석학에 기인한 트라우마를 연출해내는 작품의 기질로부터 발생할만한 감상적 불협화음은 상업영화적인 자극적 세기를 원하는 오늘날 대다수의 관객의 기대감 안에서 불협화음을 일으킬 가능성이 다분하다. 마치 안티히어로의 감수성에 젖은 현대 관객의 기대감에 고전적 괴물의 트라우마를 들이미는 꼴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