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자들>을 봤다. 잘 알려진 대로 윤태호 작가의 동명 원작 웹툰을 스크린에 옮겼다. 아무래도 원작을 직접 본
관객은 드물 거 같은데 원작과의 비교 선상에서 보다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건 영화 입장에선 유리한 면이 있지 않을까 싶다. 결과적으로 원작과는 다른 형태로 완성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정경유착과 밀실정치의 행태에 관한
르포르타주를 기반에 둔 원작 웹툰의 극사실적인 묘사는 영화 안에서 현실 정치에 대한 폭로극으로서의 쾌감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사실적인 이미지로 적극
활용된 것 같다. 다만 원작의 극사실적 묘사는 그 자체를 본다는 것만으로 완벽하게 현실정치를 폭로한다는 의미가
있었는데 영화에선 그런 사실적인 묘사가 극적인 쾌감을 극대화시키는데 기여하는 장치에 가깝다. 원작에서 중요한
게 밀도였다면 영화에서 중요한 건 부피와 중량이었던 것 같다. 그만큼 원작에 비해 극적이고,
현실적인 타협을 최대한 수용했다. 이를 테면 결국 관객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최대한
영리하게 보여주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달까.
뿌리 깊은 정경유착과 밀실정치가 지배하는 이 사회에 대한 무기력한 수긍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는 점에선 <부당거래>의 묘사가, 폭력적인 하드보일드한 세계관을 지배하는 권력자들을 전복시킬 야심가들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지켜봐야 한다는 점에선
<신세계>의 정서가 연상되는 작품이다. 결말은 <베테랑>과 같은 싸가지 없는 권력
때려잡기 류의 쾌감에 가깝다. 그만큼 새롭고 참신한 작품은 아니지만 자기가 그린 세계관의 입구와 출구를 명확히
세우고 닫는 작품이란 점에서 평가될만한 가치가 있다. ‘물리고 뜯길수록 더 큰 괴물이 되는’
이들을 상대로 물리고 뜯기다 결국 더 큰 괴물이 되는 방법을 찾아가는 ‘내부자들’의 악전고투를 그리는 과정의 기승전결이 단단하게 세워지고, 권력의 위엄 아래 잠재된 추잡한
민낯과 권력의 그림자 속에 기생하는 폭력의 본체 그리고 그 패악한 세계의 본질을 음흉하게 드러내는 대사들의 찰진 은유로서 폭로적인 흥미를 유발한다.
그러니까 이 세계의 그림자를 스펙터클하게 드러내는 묘사와 함께 이상적인 낭만이 가미된 결말의 쾌감은 상호보완적이다.
다만 이야기의 리듬이 잘 정리된 인상은 아니다. 덕분에 몇 차례 높은 파도를 타듯
기승전결의 흐름을 견뎌야 되는 느낌이라 그 과정에서 피로감을 느낄 가능성도 존재할 것 같다. 개인적인 집중력
차이에서 비롯되는 사안일 수도 있겠지만 연출과 묘사의 세기에 집중한 인상이라 상대적으로 그런 감상적 흐름을 간과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이병헌의 연기는 그야말로 점입가경.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양아치 건달 역을 맡았는데 숱한 조폭영화 상의 유사한 역할들과 비교해도 이만한 사례가 없었던 것 같다. 살기와 백치미를 양쪽 주머니에 차고 필요할 때마다 마음껏 꺼내 쓰는 느낌. 흥행 결과가 어찌될지는
모르겠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이 와 닿을 정도랄까.
물론 조승우와 백윤식도 확실히 배우 본연의 신뢰감을 수성한다. 그야말로 메소드 연기의
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이 세계를 흔드는 밑바닥의 실체를 목도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건
결국 배우들의 그런 대단한 연기 덕분이다.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훌륭하다.
군대에선 많이 부드러워졌다. 사회에선 내가 저항해도 피해볼 일이 없다. 그냥 싸우면 되는 거지. 하지만 군대에선 신체가 구속된 상태라 저항하면 힘들어진다. 도망칠 수도 없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내가 기고만장하게 살았던 게 내가 훌륭한 사람이라서가 아니었구나. 그래서 ‘신념이란 지킬 수 있을 때까지 지키는 것’이란 좌우명이 생겼다. 비겁한 태도라고 자학할 때도 있었지만 결국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송곳>이 독자를 쉽게 타오르게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독자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송곳>은 첫 웹툰이다.
장편 연재가 가능한 곳이 웹툰뿐이었다. 시사 잡지와도 논의했지만 시사잡지 독자에게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고, 독자와의 접촉면을 최대한 넓혀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했으니 웹툰이 나아 보였다. 특히 네이버엔 젊은 독자가 많고 유동 접속량이 월등하니까. 네이버보단 다음에 더 어울린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는데 너무 어울리는 곳에 있어도 이상하다. 너무 당연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전작들은 개인적인 범주의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덕분에 취재랄 게 거의 없었다. 가족 인터뷰 정도(웃음)? 6월 항쟁을 그린 <100℃>에는 인터뷰와 취재 과정이 필요했지만 상대적으로 자료가 많았고.
세계관이 팽창된 만큼 전작에 준하는 밀도를 채우기 위해 캐릭터의 수가 많아야 했을 거다. 그만큼 손이 많이 갈지도 모르겠다.
<슬램덩크>에선 경기에 출전하진 않아도 항상 등장하는 벤치 멤버가 있지 않나. <송곳>에도 집회활동마다 참여하는 조합원들이 있다. 그런데 <슬램덩크>보다 훨씬 많다(웃음). 그 사람들을 항상 그 모습대로 그려 넣어야 한다. 힘들다(웃음).
1부보다 2부 분량이 더 많고, 2부보다 3부 분량이 더 많다. 분량이 늘어나고 있는 건가?
조금씩 늘어났다.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늘어나면 괜찮은데 불안감 때문이라 조심해야지.
불안감?
전달이 제대로 안될 거 같다는 불안감. 노조활동이 익숙한 소재가 아니니까. 주요 사건만 보여주고 넘어가면 실제 과정이 간과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생겨서 점점 세세하게 표현하게 된다. 애초에 노동쟁의에 관한 학습 만화로 기획돼서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기도 그렇다.
소재도 익숙하지 않지만 주인공인 이수인도 얄짤 없는 캐릭터다(웃음).
그래서 두려웠다. 과연 이런 인간을 좋아할까(웃음)? 사실이수인을 움직이는 동력은 옳고 그름의 문제인데, 재미없잖아. 이런 사람(웃음). 그래서 극 초반에 과거사를 많이 삽입했다. 이수인을 통해 살아가면서 누구나 맞닥뜨릴 법한 상황을 환기시키고 싶었다. 군대에 관한 사연이 대부분이지만 사회에서도 사소한 부정을 직면하는 상황은 있을 테니까. 그런 부정에 맞서지 못했다 해도 다들 울컥했던 순간은 있었을 거다. 그런 감정을 쥐게 되면 이수인을 따라갈 거라고 생각했다.
이수인만큼이나 흥미로운 캐릭터는 구고신이다.노동법 전문가로서 이수인의 옳은 믿음에 전략을 세워주는 사람이다.
사실 대부분은 그런 옳음을 지키기 위한 행동조차 옮기지 못하기 때문에 거기에 전략이 필요한지도 알지 못한다. 이수인도 행동을 옮겼기 때문에 자신이 서툴다는 걸 알게 된 거지.
노동 문제에 빠삭한 전문가를 그리려면 작가도 그만한 수준이 돼야 할 텐데, 쉽지 않을 거 같다.
기획 초기엔 구고신이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어렵더라. 일단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인물을 그리는 건 어렵다. 내 생각에 스무 살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나면 욕했을 거 같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스무 살의 나를 이해한다. 그러니 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게다가 나보다 똑똑한 사람을 그리는 건 더 힘들다. 그리고 사회 진보에 대한 열정이 이 인간을 수십 년간 지배한 것인지, 그 사람을 그런 단계까지 닿게 만든 경험이 무엇인지, 지적 자아로서 욕구나 종교적인 열망도 있었던 건지, 그런 걸 설득력 있게 표현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게 내 안에 있다면 그걸 증폭시켜서 만들 수 있겠지만 일단 나보다 나이가 많고, 나보다 똑똑한 인물이니까, 역시 어렵다.
구고신과 이수인은 무림고수와 제자 같기도 하다. <송곳>은 이수인의 성장 드라마일 수도 있겠다.
성장이라기보다 ‘망함’의 드라마(웃음)? 이수인은 계속 망하고 있다. 진급도 물 건너갔고, 회사에서 잘리기 직전이고(웃음).
망함의 판을 짜는 작가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닌 거 같다(웃음). 어쨌든 상당히 심각하고 무거운 소재임에도 캐릭터들은 역설적으로 밝게 묘사되는 것 같다.
실제 노조 관계자들은 밝다. 힘들기 때문에 평소에 재미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원래 남자끼리 모이면 서로 웃기려고 애쓰지 않나. 게다가 노조를 조직할 사람이 침울하면 아무도 안 따라온다. 청소부 할머니 같은 분들이 자신을 신뢰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침울해서야 되겠나.
<송곳>은 까르푸 해고자들의 투쟁 실화를 바탕에 둔 작품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인 실화가 필요했던 이유는?
<송곳>을 기획하고 그에 맞는 틀을 계속 찾았다. 그냥 사건을 만들면 되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수많은 자문을 구해도 이런 사건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에 대한 한계를 예상하기 힘들다. 그래서 실제 사건을 가져다가 외곽에 두르고 그 안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왜 까르푸 사태였을까?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일단 사건이 천천히 진행돼야 했다. 노동법 얘기도, 노조 조직 과정도, 파업 이전까지 거쳐야 할 과정도 세세히 보여줘야 하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노조 생성 과정은 회사의 초강수로 사람들이 막 잘리면서 수백 명이 한꺼번에 노조에 가입하고, 당장 파업에 돌입하는 식이다. 폭발적인 과정 안에서 이야기하면 노동법에 명시된 절차가 망가지고, 이야기의 순서도 사라진다. 결국 회사가 노조를 깨기 위해 돈을 쏟아 부을 만큼 처음부터 너무 악랄하진 않아야 했다. 까르푸 사태가 그랬다.
윤리적으로 엄격한 편인가?
사소한 부정의에는 관대하다. 물론 작은 부정의이든, 큰 부정의이든, 심리적으로 동일한 지점에서 잉태된 부정의일 순 있다. 한 명을 해친 사람이 100명도 해칠 수 있고, 쓰레기를 쉽게 버리던 사람이 기업의 사장이 되면 공해물질을 배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양 사안의 무게가 같은 건 아니다. 대부분의 사소한 부정의는 사회에 소속된 개개인의 선으로 통제할 수 있다. 결국 큰 부정의를 사소하게 여기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갖는 걸까?
노동 문제는 대개 큰 부정의이다. 특히 비정규직 문제는 최악이다. 노동유연화를 시키면 나라가 돈을 번다고 강변했다. 좋다. 그럼 노동유연화 정책으로 비정규직이 돼서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축적된 부를 보상해 줘야 하지 않겠나. 분배도 유연화시켜야 되는데 그런 고리는 싹 빼버린다. 누군가만 부자가 되고 누군가는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리고 가난한 누군가만 계속 노예처럼 부린다. 이건 우리가 부정한 정책에 동의한 결과다. 그걸 알아야 한다.
만화가가 돼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그냥 그림을 잘 그렸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만화를 그렸다. 대학에 들어갈 시점에 마침 만화과가 생겼고, 적성에 맞을 거 같아 입학했다. 그런데 대학에 다니는 동안 만화계가 완전히 침체됐다. 공모전에 두 번 당선됐고, 잡지에 단편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군대에 다녀오니 만화 잡지가 사라졌더라. 연재할 수 있는 만화 잡지가 없고, 웹툰도 없었으니 구체적인 목표라는 게 생길 수 없었다. 그래서 미술학원 강사로 일했는데 한 일간지에서 토요만화 섹션이 마련됐고, 그떄 <습지생태보고서>를 연재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어영부영했다면 작가가 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만화계가 침체된 상황에서 입시만화를 가르치며 후배를 양성한다는 건 어떤 기분이었을까?
깝깝했지. 쟤네들 다 뭐 먹고살까 싶고(웃음). 그래도 그때 게임업계가 호황이라 만화과가 다른 과에 비해 취업률이 낮진 않았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여러 방식으로 재현하는 거라 잘 배워놓으면 어떻게든 먹고살았다(웃음).
본인도 먹고사는 고민이 있었을 텐데.
취직하려고도 했다. 몇몇 회사에서 연락이 와서 미팅까지 했는데 다들 묵묵부답이더라. 평범한 신입사원을 뽑으려는데 나름 업계에선 이름이 알려진 상태였고, 수상 경력도 있는 사람이라 언제 튀어나갈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투쟁이나 저항이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작가라는 인상인데, 이게 작가 입장에선 괜찮을까?
어차피 작가라면 무슨 이야기라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웃음). 뭐든 잡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작가마다 잡는 게 다른 거지. 개인적으로 작가라면 자기 감정을 긁는 걸 표현해야 한다. 그러니 투쟁이라면 투쟁이고, 저항이라면 저항일 텐데, 최소한 자격이 없는 걸 말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린 시절에 애늙은이라고 불렸다던데 지금은 동년배 중에서 가장 혈기왕성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창작자니까 직장생활 하는 친구들보단 조금 순진하거나 혈기왕성할 수 있겠다.
어쨌든 부정의한 사회 덕분에 <송곳>도 나왔고, 당신도 먹고산다(웃음).
에이, 다른 환경이었다면 다른 밥줄을 찾았겠지(웃음). 더 재미있는 만화를 그렸겠지.
더 재미있는 만화란?
<심슨가족>은 자본가도 까고, 환경론자도 까고, 노조도 까고, 페미니스트도 깐다. 모든 걸 풍자한다. 모든 것을 같은 무게로 다루는 데서 오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노조를 풍자할 순 없다. 가뜩이나 왜곡된 인식이 많은 집단이고 여전히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그럴 순 없지. 이 사람들의 활동에 대한 대중적인 이해가 갖춰지지 못한 사회에서 그런 건 불가능하다. 깝깝하지.
<송곳>이 독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나?
인간에겐 이런 권리가 당연한 것이고, 정치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존재라면 최우선적으로 다뤄져야 할 문제라는 걸 깨닫길 바란다. 나름 민주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으니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이룰 수 있다는 거다. 다만 이런 사안에 관심을 갖고 논의해서 정치가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게끔 만들면 좋겠다..
웹툰 계의 ‘암모나이트’ 혹은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강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작가다. 한결
같은 이야기를, 한결 같은 믿음으로 쓰고 그린다. 재미있는
작품에 대한 순정으로.
<무빙> 연재 전에 SNS를 통해서 대단한 각오를 남겼다.
늘 그렇다. 각오는 항상 대단해(웃음)!
자신감일까,긴장감일까?
긴장감이지. 사실 다른 작가들은 전혀 무섭지 않은데 독자들은 늘 무서워. 혹자는 창작이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하는데 난 아니야. 독자랑 싸우는
거지. 독자를 재미있게 만들어서 굴복시켜야 돼. 독자가 재미없게
느끼면 지는 거야. 그러니 늘 긴장되지.
팩션물이었던 <26년>을 제외한 전작들은 ‘순정만화’와 ‘미스터리심리썰렁물’로 구분했다. 그런데 <무빙>은 ‘액션만화’라고
했더라.
후회하고 있다(웃음). 전반부는
순정물처럼 보이지만 후반은 아니거든. 그런데 미스터리물도 아니고, 대신
후반부에 액션이 조금 나와.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이 별거 안 해. 아니, 못해(웃음). 그러다가
막판에 빵 터트리고 끝날 거야. 전체 분량의 3/4정도까지
진행돼도 액션이 안 나와. 아마 욕 좀 먹겠지(웃음).
기다린 만큼 제대로 된 액션이 안 나오면
악플 좀 달리겠는데.
‘답답이’ 같았던 애가
어느 날 갑자기 폭발했을 때 느껴지는 쾌감이 있지 않을까? 그런 쾌감을 제대로 느끼려면 정말 답답하고
짜증이 나야겠지. 우린 지금 그 과정을 지나가고 있는 거야. 제대로
날지도 못하는 뚱뚱한 봉석이를 보면서. 그래도 액션이라고 붙인 건 조금 후회된다(웃음).
그런데 왜 제목은 <무빙>일까?
만약 제목이 <액션>이었다면
비행 능력이 대단하고 큰 일을 해내는 히어로가 필요했겠지. 하지만 나는 조금씩 움직이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 캐릭터도, 이야기도. 사실 제목을 붙일 때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 편이야(웃음). 어쨌든 하늘을 나는 히어로물을 하고 싶었는데 한국의 현실에서 그럴듯한 히어로물을 해보고 싶었지. 아이언맨 같은 히어로는 미국에선 그럴 듯해 보여도 한국에선 능력이 과해 보이잖아. 그리고 시간능력자들이 등장했던 <타이밍>과 어감도 비슷해서 좋고.
그렇다면 초능력을 지닌 히어로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사실 우리나라만큼 히어로를 이야기하기 좋은 환경도 없다. 지금도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른다는 분단국가에 초능력자가 있다고 하면 남한이든, 북한이든 얼마나 많은 관심이 생기겠어.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이란 영화가 있는데 실제로 초능력
부대를 만들려고 했던 미국 특수부대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야. 그런데 우리나라 안기부에서도 첩보전에
활용할 수 있는 초능력자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탐사전문기자인 주진우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지.
정재승 박사에게도 자문을 구했다던데.
뇌과학자니까 초능력에 대해 물어봤지. 재승이 형이 카이스트에 있을
때 이상한 사람들의 문의가 많이 왔대. 실제로 자신이 초능력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서 실험도 해봤는데
결론은 초능력자는 한 명도 없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왜 초능력 중에서도 하늘을 나는
능력이었을까?
하늘을 나는 게 매력적이니까.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 사람도 많잖아.
최근작으로 올수록 비현실적인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인상이다. ‘순정만화’인 <당신의 모든 순간>이나
<마녀>조차 좀비나 오컬트라는 장르적 세계관에 담아냈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뻥을 치고 싶어진다. 만화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
말이야. 현실적인 이야기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귀신 만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뻥 치기 좋아서다. 무슨 말을 해도 구라니까 창작할만한 여지가 많거든. 초능력도 마찬가지다. 마블의 초능력자들도 말이 안되잖아. 거미인간이라니, 완전 ‘개뻥’이지(웃음). 하지만 이야기가
그럴듯하니 재미있잖아. 나도 그런 만화를 해보고 싶었다. 허황된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하는 게 작가의 몫이라 생각하니까.
<26년> 이전엔 작품마다의 연재 간격이 2개월 수준이었는데 <26년>부터 반 년으로 벌어졌고, 이젠 1년에 한 작품 수준이다. 작년엔
아예 연재가 없었고.
이야기를 쓰는데 들어가는 공이 점점 커지는 탓이다. 사실 <26년> 이전 작품들을 연재할 때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으면
그만큼 공을 들였을 거다. 하지만 그땐 연재를 하지 않으면 손가락을 빨아야 하니까 차기 연재를 빠르게
가져가야 했다. 지금은 그때보단 여유가 생겨서 작품을 다듬을 시간이 생겼지. 그런데 1년 넘게 쉰 건 이번이 처음이다. 밝힐 수 없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다.
개인적인 사정이란?
집요한 거 봐라. 훌륭한 기자일세(웃음). 하지만 지금은 말할 수 없다.
사전 작업 기간이 늘어났다는 건 작품에
대한 욕심도 그만큼 늘어났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먹었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독자들이 남기는 댓글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지루해졌다는 댓글이 몇 백 개 달리면 뒤에 있는 클라이맥스를 앞으로 끌어오고 싶어진다. 실제로 그런 짓을 하다 구조가 어그러져서 작품을 말아먹는 작가들도 있다. 그러니까
연재에 들어가기 전에 이야기를 완성해야 한다. 그래야 나를 믿고 이야기를 밀고 갈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다른 만화가들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이 아니니까 이야기까지 밀리면 안 된다. 이야기가 내 무기라 생각하니 그에 들이는 공이 커지는 거다. 대사
하나까지 완벽하게 준비했을 때 연재에 들어간다는 철칙을 지키고 있다.
스스로 그림을 못 그린다고 말할 수 있다니
그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진 않나 보다.
몇 년 전만 해도 콤플렉스였다. 왜 이렇게 그림을 못 그릴까. 처음 일상툰 형식의 <일쌍다반사>를 연재할 땐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막대한 분량의 장편 서사 만화를 소화하면서 손이 느리고, 마음 먹은 대로 표현하지 못하니 답답하더라. 그런데 그림과 만화는
다른 영역이란 걸 알게 됐다. 일러스트로 봤을 때 내 그림이 약한 건 사실인데 나는 만화는 잘 그린다. 내 이야기를 표현하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콤플렉스가 없어졌다.
이야기가 자신의 무기라고 했는데 보다 정확하게는
캐릭터가 아닐까 생각한다. 대부분의 작품이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품게 만드는 덕분에 캐릭터의 행위가
독자들의 지지를 얻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내 작품이 지루해지는 거다. 캐릭터 소개가 굉장히 길잖아. <무빙>도 6화까지
왔는데 아직 캐릭터 소개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진행된 사건이랄 게 거의 없잖아. 하지만 이 과정이 내 작품의 궁극적인 재미를 보장한다. 이야기의
성패는 독자들이 주인공을 얼마나 가깝게 느끼는가에 달려있다. 독자들이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는 정서적
공감대를 마련해야 한다. 활자로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캐릭터라고
소개하는 것보단 우유부단해 보이는 사연과 소극적으로 보이는 사연을 하나씩 보여주는 게 맞다. 무식한
방법이지만 결과적으로 그게 공감대를 열어주거든. 캐릭터를 최대한 설명하고 이해시킨 뒤엔 이야기에 힘이
붙는다. 결국 이야기가 완결됐을 때를 보고 가야 된다. 그래서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도록 완벽하게 이야기를 준비해서 진행해야 한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두 커플 이상의 중심인물이
등장해서 얽히고 설키며 이야기가 굴러간다.
<프렌즈>란
시트콤을 좋아하는데 거기 여섯 인물이 등장하잖아. 40분 남짓한 시트콤에서 두 커플씩 엮어서 세 가지
사건을 진행한다. 그러니 재미있을 수밖에. 내 작품에 다양한
커플이 등장하는 것도 비슷한 전략이다. 미비한 존재들이 협력해서 거대한 선을 이루는 이야기가 좋다.
전작들과 달리 <무빙>은 봉석이와 희수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되는 인상이다.
후반부에 봉석이네 부모님과 희수네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거다. 그러니까
결국 세 커플의 이야기가 되겠지. 전후반을 책임지는 캐릭터를 나눈 건 처음이라 지루한 감도 있는 거
같다.
죽음을 주요한 감정적 매개로 활용하는 작품이
많다. 죽음에 예민한 사람이 아닐까 궁금했다.
김중혁 소설가도 비슷한 질문을 하더라. 조금 없어 보이는 대답인데, 이야기를 쓰다가 꽉 막힐 땐 의미 있는 인물 하나를 죽이면 뚫린다(웃음). 주변 인물들이 그 구멍을 메우려고 노력하면서 이야기가 살아나거든.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많았던 거 같다. 아버지께서 목사님이셔서 가끔씩 돌아가신 신도의 장례식장을
따라가는 일이 종종 생겼거든. 그땐 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 웃고 떠드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이 들어서 알았지. 긴긴밤을 보내려면 어쩔 수 없다는 걸. 죽음만큼 극단적인 감정을 자아내는 것도 없지만 사람은 결국 자기 삶으로 돌아가게 돼있다.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고립의 정서가 느껴진다. 물리적인 고립이든, 정서적인 고립이든 결국 외로운 사람의 이야기가
되는데 그 외로움에 귀 기울여 주거나 손을 내미는 이들의 존재의 등장을 통해 짠하게 심금을 울리는 감동을 자아내는 방식이 일관되게 이어진다.
내 만화엔 유난히 가난한 사람들도 많이 나오잖아. 일찍이 가난을 경험해봤기
때문이지. 그래서 좀 외롭기도 했고.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까진 신나게 놀았던 친구들과 고등학교 시절부터 거리를 두게 됐다.
희한하게 애들이 고2때부터 돈을 가지고 놀더라. 친구
집에서 모이거나 농구를 하는 게 아니라 커피숍이나 피자집, 콜라텍에서.
그런데 나는 용돈도 없고, 버스 회수권만 들고 다녔다. 우리
집은 너무 가난했거든. 그러니까 불편해지더라. 얻어먹는 것도
한두 번이잖아. 그러니까 점점 내가 애들을 밀어내더라. 친구끼리
어떠냐고 할 수도 있고, 그 마음도 알지만 당사자가 아니면 그 상황의 외로움을 알 수 없다. 나를 배려하는 걸 알면서도 그렇더라. 게다가 그땐 예민한 사춘기
시절이기도 했고. 그래도 학교에선 애들이랑 잘 어울렸다. 그리고
방과 후엔 혼자 도서관에 갔지.
놀 수 없으니 공부를 한 건가?
중2때부터 도서관에서 책 읽는 재미를 알았다. 이야기 자체를 좋아했다. 그리고 야한 이야기를 좋아했다(웃음). <여명의 눈동자>를
김성종 작가의 원작으로 읽어보면 엄청 야하다. 여옥이가 장난 아냐(웃음)! 그리고 추리소설 중엔 여자가 벌거벗고 죽은 채로 시작되는 게 많다. 대중적인
추리소설이나 통속소설을 좋아했는데 야한 재미로 무협소설을 보다가 김용의 <영웅문>을 읽고 감명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역사소설로 넘어가서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보고 감탄했다. 그렇게 도서관 책장 하나를 다 읽었다고 뿌듯해했으니까 얼마나 공부를 안 했겠어?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그때 내가 엄청 열심히 공부하는 줄 알았을 거다(웃음).
그래도 작가로 살고 있는 지금 돌이켜보면
인생의 복선 같은 시절이라 해도 좋겠다.
그런데 다독가라는 사람을 만나면 이런 말하기 부끄러워진다. 흔히 말하는
명작은 본 게 없으니까.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처럼, 제목만 들어도 멋있는 책 있잖아. 이상하게 한두 권짜리 책엔 흥미가
안 생겼다. 적어도 세 권 이상은 돼야 읽었지. 아무튼 참
외로운 시절이었는데 그런 환경에서 바르게 엇나갔던 거 같다.
항상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만 한다.인간의 선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는 것 같다.
근본적으로 사람은 착하다는 믿음이 있다. 악당조차도 길가의 아이가
차도에 뛰어들면 달려가서 잡아줄 거라 생각한다. 사실 나는 적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은 안 본다. 결국 내가 믿는 사람들과만 교류하다 보니 내 세계에 갇힌 셈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운 좋게도 착한 사람들만 만나며 살아온 덕분일지 모르고.
그런 믿음이 휴머니즘의 감동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하지만 한편으론 선으로 표백된 세계관을 보고 있다는 의심이 들 때도 있다.
잘 알겠지만 내 작품에서 악당은 둘 밖에 없었다. <26년>의 그 인간하고 <이웃사람>의 살인마. <26년>이야
원래 나쁜 놈을 반영한 거니까 그렇다 치면 <이웃사람>의
살인마가 내가 만든 유일한 악당인 셈이다. 사실 <이웃사람>의 시나리오엔 살인마의 외로움에 관한 2화 분량의 서사가 있었다. 그런데 연재 직전까지 의심이 거둘 수 없었다. 살인마에게도 사연을
부여해야 하나? 그래서 결국 걷어냈다. 정당성을 쥐어주면
안되겠더라. 그래서 알았다. 어떤 인물에 대해 이해하도록
만들면 그 사람을 결코 악당으로 여길 수 없다는 걸. 그러니 한 명씩 다 사연을 입혀주는 내 만화의
캐릭터들은 결코 악당이 될 수 없는 거지. 그래서 한때 고민하긴 했다.
내가 너무 단편적인 이야기만 하는 건 아닐까. 그런데 괜찮겠더라. 세상에 널린 게 만화인데 이런 만화가도 하나쯤은 있어야지. 그리고
나는 착한 이야기가 재미있다. 이기적이거나 폭력적인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일단 내가 재미를 느끼기
힘들 거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이렇겠지.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다양한 외피를 씌우는 데에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겠다. 뻥을 치고 싶은 이유가 거기 있다고 할까?
나는 지금 매너리즘과 스타일의 경계에 서있다고 본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도 재미있으면 그건 작가의 스타일이다. 재미가 없으면 매너리즘이고. 착한 사람들이 누군가를 돕는 이야기를 열한 편이나 했지만 앞으로도 같은 이야기를 할 거다. 그러니 ‘강풀은 이제 뻔해’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면 결국 내가 재미있는 작품을 해야지. 그러니 매번 긴장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독자들이 무섭다. 독자들이 재미없다는데 이걸 내 스타일이라
우길 수는 없잖아. 우기면 비참재지는 일이고. 인터뷰도 그래서
잘 안하고 연재 후기도 안 남긴다. 작품을 독자에게 내보낼 때 이미 승부는 끝난 거다. 그러니 작가가 뒤늦게 자신의 작품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일일이 짚어주는 건 변명일 뿐이지.
사실 웹툰에 후기라는 포맷을 정착시키는데
일조한 장본인인데.
<순정만화> 때부터
시작했으니까. 사실 작화 과정을 공개하거나 연재를 끝낸 소감을 남기는 것 정도는 괜찮다. 그런데 작가가 작품의 의미를 일일이 설명하면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된다. 그만큼 치열하게 연재하고, 끝나면 독자의 반응에 승복해야 한다. 본편보다 후기에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으면 이미 변명의 여지가 없이 실패한 작품이라는 거지.
가끔씩 작품에서 모든 상황을 친절하게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이 느껴질 때가 있다.
솔직히 나도 이젠 <순정만화>
같은 건 오글거려서 못 본다. 그런데 가끔은 그렇게 해야 되는 건가 싶을 때가 있다. 요즘은 대사나 내레이션을 길게 썼다가 너무 설명하는 것 같아서 빼버리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나이 들었다는
걸 느낀다. 그렇게 해야 어린 애들은 이해를 하는 경우가 많거든. 그래서
‘좀 설명하면 어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래도 지금은 확실히 초기작들에 비해 내레이션은 정말 많이 줄어든 거다.
심리를 설명하는 내레이션과 인과를 펼쳐
보이는 내레이션은 다르다. 전자는 독자를 위한 가이드 라인이 될 수 있는데 후자는 독자의 상상을 제한해버릴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가끔 상상을 제한해버린다고 느낄 때가 있다.
내가 상당히 많이 개입해버리는 편이긴 하지. 아무래도 그건 평생 풀어야
할 숙제일지도 모른다. 점점 작품보다 상품을 만들고 싶어진다. 말장난
같지만 걸작보단 명작을 만들고 싶다. 생각을 곱씹으면서 의미를 찾아내는 게 작품도 좋지만 많은 사람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도 약간 헷갈린다.
내가 좀 더 덜어낼 수 있는 부분인 걸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더 들어갈 때가 있으니까. <무빙>에서도 달리기 장면은 사실 한두 컷만 있어도 된다. 그런데 그걸
열 컷 넘게 그렸다. 굳이 그렇게 개고생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냥 그 상황을 다 알아먹게 만들고 싶은
거다. 얘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다는 걸. 결국 그 고생이
내 고생으로 연결되지만(웃음).
국문학과 출신인데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을까?
없다. 소설가가 되기엔 문체가 떨어지고, 화가가 되기엔 그림체가 떨어지니까. 그런데 만화가 나를 구원했다. 두 능력으로부터 조금씩 떨어진 거리에 있었는데 거기에 만화가 있는 거다. 그리고
만화라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나한테 맞는 거 같다.
0.5와 0.5였는데 둘을 더해서 1이 된 셈이랄까.
0.5을 0.7로 올려주면
안되나? 1이 아니라 1.4가 됐다고 하자(웃음).
작품 속 공간의 모티프가 되는 실제 공간을
치열하게 찾고 취재하는 편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실제 공간에 가봐야 이야기가 잘 풀리기 때문이다. 내가 천재적인 이야기꾼이라 가만히 앉아서도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어렵다. 그래서 실제 공간을 많이 찾는다. 그러면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생긴다. <무빙>의 배경이 되는 선사 고등학교엔 지금까지 스무
번 이상 갔다. 6화에 등장하는 달리기 장면 때문에 운동장에서 실제로 뛰어보기도 했다. 집착처럼 보일지 몰라도 내 입장에선 가보면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
공간에서 멍청하게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거짓말처럼 이야기가 풀릴 때가 많다.
인지도가 생겨서 취재 요청은 수월해지진
않았나?
아무튼 인지도라는 게 참 좋더라. 초창기만 해도 말도 못하게 퇴짜를
맞았는데 이젠 많이 수월해졌다. 내 만화를 보는 독자 연령층이 높다더라. 30대가 많대. 웹툰이 시작된
2000년대 초반부터 웹툰을 봤던 독자들도 자연스럽게 나이가 든 거다. 취재가 수월해진
건 인지도 덕분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내 만화의 독자들도 무언가를 결정할 권한이 있는 사람들이 됐기 때문인 거 같다.
아직 연재 초기인데 6화 마감 때 29시간 동안 철야를 했다고 들었다. 연재를 하다가 가끔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지 않나.
맨날, 회당 30번씩(웃음). 너무 힘들 땐 ‘다음’이 폭발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웃음). 살짝 사고가 나서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이유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2~3주 안에 회복될 정도로 팔만 살짝(웃음).
그런 과정을 생각하면 연재 전부터 무서울
것 같다.
내가 어떤 생활을 해야 되는지 안다는 거지. 매일 같이 18시간 동안 책상에 앉아서 살아야 된다는 거.
그만큼 연재를 완료했을 때의 쾌감도 상당하겠다.
<26년> 끝냈을
땐 진짜 울었다. 마지막으로 원고 송고를 위해 엔터키를 누르니까 눈물이 펑펑 나더라. 그땐 너무 힘들었거든.
최근 드라마 제안을 받았다던데.
마음에 안 들어서 그냥 깠어.
어떤 작품에 대한 제안이었나.
다 들어왔다. <미생>이
잘 돼서 그런 것 같다. 착각하는 거지. 그건 <미생>이니까 잘된 거거든. 가끔씩 콘텐츠 업자들의 얄팍함이 얄미울 때가 있다. 여러 번 영화화
과정을 지켜보니까 촉이 생겼거든. 이 사람들이 정말 작품을 만들려고 제안한 건지, 그저 판권을 확보하려고 이러는 건지, 다 보인다. 투자를 받으려고 판권만 확보하려는 회사도 많거든. 그래서 90% 이상 신뢰가 생기질 않으면 아예 계약하지 않는 게 내 신조다. 그래서
안 했지.
<조명가게> 시나리오는 탈고된 거 같던데.
그렇다는데 아직 못 봤다. 변영주 감독 말로는 원작에서 많이 바뀌었대. 맘대로 하라고 했지.
작품이 영화화됐을 때 감독에게 물어야 할
질문을 대신 받는 경우도 적지 않은 거 같더라.
진짜! 대체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웃음). 항상 원작자로서의 소감을 물어보는데 아무래도 대답하기가 좀
그래. 말을 잘못하면 감독이 상처받을 거 아냐. 사실 모든
만족감을 충족해주는 작품은 드물었지만 원작자로선 항상 선물 받는 기분이다. 그리고 영화 현장에 가면
감동적이다. 나는 어시스턴트 서너 명과 작업하지만 영화 현장엔 수십 명의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잖아. 그런 광경이 멋있어. 게다가 원작자는 제작과정 처음부터 알게 되니까
그 과정의 고생을 아는 입장에선 냉정한 평가가 불가능하지. 그래서 항상 피해서 대답한다. 주관적으로 좋았습니다(웃음).
요즘 윤태호 작가는 단행본의 레이아웃에
맞춰 컷을 구성한 뒤 웹툰 형태로 떼어서 나열하는 방식으로 그린다더라. 그래서 웹툰으로도, 단행본으로도 가독성이 좋다. 그런데 강풀 작가의 작품은 웹에서 볼
때보다 단행본의 가독성은 떨어지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태호 형의 작업 방식이 효율적이지. 컷으로 나눠서 재배치하는
거니까. 나는 출판 만화를 배운 게 아니라서 그런 기술이 없다. 그래서
책으로 볼 땐 가독성이 떨어지지. 그런데 나는 모니터나 액정으로 처음 보는 순간이 가장 중요하게 느껴진다. 웹툰에서 자생한 탓인지 몰라도. 그래서 무조건 웹상에서 잘 보이도록
배경을 꽉 채운다. 내 능력 안에서 최대한 성실하게 그리는 거다. 성의
없는 그림을 보면 견딜 수가 없다. 못 그린 그림과 성의 없는 그림은 다르거든. 10년 넘게 작가 생활을 하니 보니 그런 것도 보인다.
포털사이트 중심이었던 웹툰의 플랫폼이 다양해지고
있다.
웹툰은 지금이 최고 절정기이고 여기서 더 커질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웹툰을 보는 독자의 수는 한정돼 있는데 시장이 너무 커진 감이 있다. 거품이 많이 꼈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처럼 여겨지지만 언젠가 이 거품이 빠질 거다. 그때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길을 잃을까 걱정된다. 예전에 플래시 애니메이션 시장이 팽창했다가 훅 꺼진 것처럼.
웹툰을 다른 컨텐츠로 만들어서 성공할 수
있다는 환상도 이를 부채질하는 거 같다. 판권 계약만하고 영화화가 안 되는 웹툰도 많고
후배들이 영화 계약만 하면 다 영화가 되는 줄 아는데 내가 맨날 얘기한다. 웃기고
있네(웃음). 내가 여러 번 경험했잖아. 이름 있는 작가나 포털에서 상위권 작품이면 무조건 계약해서 판권을 확보하려 들지. 그러니까 신중하게 계약해야 된다.
강동구청에서 운영하는 길고양이 급식소 사업을
주도했던데, 과정이 궁금하다.
강동구청에 강풀 만화거리를 만들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처음엔 거절했다. 민망하잖아(웃음). 그런데
문득 길고양이 급식소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각난 거야. 그래서 강풀 만화거리 만드는 거 수락할 테니 구청장님과
한 시간 독대권을 달라고 했지. 그 전에 강동구 길고양이를 돌보는 캣맘들을 만나서 아이디어를 논의했고. 구청장님을 만나서 설명했고, 그 아래 실무자들과 한 스무 번 정도
회의를 했지. 그래서 결국 진행이 결정됐고 구청에서 시범사업으로 운영하게 됐지. 그런데 고양이를 싫어하는 구민들 입장에선 세금을 왜 이렇게 쓰냐고 구청에 항의할 수 있잖아. 그래서 구청에 조건을 걸었지. 급식소 설치물과 1년치 사료를 내가 대겠다고.
한두 푼 드는 게 아니었을 텐데.
영화 <26년>이
흥행해서 개런티가 들어왔는데 절반은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기부했고 절반은 고양이 급식소 사업에 썼다. 급식소 50개를 설치하고 1년치 사료를 샀지. 왠지 <26년>으로
번 돈은 내 개인적인 목적으로 쓰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거든. 그리고 구청에서도 민원이 들어오면 기부
형태로 이뤄지는 것이니 당당할 수 있잖아. 사실 구청에선 주민 중 절반만 반대해도 사업을 시행하는 게
힘들거든. 그러니 구청에서도 대단한 용기를 냈다고 생각해. 사료를
아예 구청에 보내주면 동회의가 있을 때 동장님들한테 배급하고, 알아서 배식하게 되는 거야.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지원이지.
그 뒤로
1년이 지나지 않았나? 지금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
사실 이 아이디어는 캣맘들이 편하게 사료를 살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목적이었는데 사업 반응이 너무 좋았던
거야. 1년간 잘 운영되면서 사료 회사에 기부 제안을 했어. 대신
내가 1년마다 홍보 만화를 그려주는 대가로. 사실 길고양이
급식소가 나한테는 상당한 모험이었어. 고양이들이 1년간 안락하게
잘 먹다가 갑자기 폐지되면 죄책감에 시달릴 거 같았거든. 재작년엔 만화 외에 가장 많이 신경 썼던 게
그거였는데 정말 다행이지. 처음에는 하루에 10번씩 전화가
왔대. 고양이 잡아가라고. 그런데 요즘은 민원이 없대. 애들이 밥을 먹을 수 있으니까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안 찢는 거야. 덕분에
고양이를 싫어하던 사람들도 의식이 바뀐 것 같아. 다행이지.
연재가 끝나면 뭘 할 건가?
애 낳고 나서 연재하는 게 너무 힘들어졌다. 집에 가고 싶어져서. 6화까진 그 일념으로 늦지 않고 제 시간에
업데이트를 했다. 집에 빨리 가려고(웃음). 가족들과 여행가고 싶다.
1화 대신 1수. 윤태호는 바둑의 한 수를 두듯 <미생>을 그려나간다. 한 수 한 수 현실과 이상의 대국이 펼쳐진다. 그 안에서 수많은 성공과 실패가 지어지고 허물어진다. 그래서 미생이다.
단행본 네 권의 판매부수가 10만부를 넘었다.
사실 출판사와 계약한 건 다섯 권이었고 1년 연재하면 끝나는 분량이었으니 그것만 하고 털어내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10수 지나면서 힘이 실린다는 느낌이었다. 특히 날개 달린 대리가 나오는 에피소드를 지날 땐 이거 길게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미생>은 웹툰이지만 단행본으로 보는 맛도 괜찮더라.
사실 <미생>은 단행본 페이지로 먼저 만들고 나서 한 컷씩 떼어 웹상에 붙인 작품이다. 보통 온라인에서 상하로 나뉜 컷과 컷의 간격에 삽입된 내레이션이나 대사엔 임팩트가 있다. 그런데 책에선 스크롤 방식으로 보면서 멋있다고 생각했던 그 대사가 구석의 작은 컷 안에서 훅하고 지나가니 그런 느낌이 덜 산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책으로 먼저 보다가 기다리기 감질나니까 온라인으로 넘어온 독자들 중엔 오히려 책이 낫다는 이들도 있다. 결국 받아들이는 독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더라.
바둑과 직장을 소재로 둔 만화를 제의 받은 후 연재까지 3년이 걸렸다고 들었다.
위즈덤하우스에서 제안한 건 바둑의 10계명이라 불리는 ‘위기 10결’을 통해서 직장인들의 처세를 설파한다는 컨셉트의 작품이었다. 10년 전부터 바둑꾼들의 이야기를 생각했지만 그 제안을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이끼>는 준비부터 완결까지 5년이 걸렸다. 그렇게 보면 내가 60세까지 할 수 있는 작품이 몇 타이틀 안 되는데 <이끼>를 끝낸 마당에 직장인들의 처세에 관한 만화나 한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일단 계약금을 받았고, 그 제안을 배려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서야 지금의 방향을 제시했다. 도리어 출판사에선 고마워했다. <이끼>가 영화화되고 유명해지는 과정을 보면서 작가가 알아서 잘할 텐데 괜히 앞질러간 게 걱정됐다더라. 반대로 난 2년 동안 시간을 보내고서야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었다(웃음). 3년간 작품을 준비하는데 한번도 날 흔든 적이 없었다. 그런 배려 덕분에 더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
직장생활 경험이 없으니 취재원이 필요했을 텐데.
6수 연재할 때까지 취재를 거절 당해서 취재원을 못 만났다. 그래서 초반엔 회사 모습이 좀 두리뭉실하게 그려졌다. 사회경험이 많은 직장인들도 볼 텐데, 내가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한 지인으로부터 상사맨인 남자친구를 소개받고 시작됐다.
6수까지? 불안하지 않았나?
계약상 더 이상 연재를 미룰 수 없었다. 역시 계약은 위대하더라(웃음). 기업 홍보팀에 전화하면 매번 거절당했다. 지금 생각하면 다행이지. 만약 공식적인 루트로 조언을 받았다면 기업의 이미지를 염려하느라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못할 수도 있었을 거다. 그분들 입장에선 반기업적으로 느껴지는 정서가 포함될 수도 있고.
지금은 취재원들이 알아서 찾아올 것 같다.
메일이 엄청 온다. 특히 요르단 에피소드에선 취재 협조를 자원하는 주재원 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말에 문맥이 있듯이 취재에도 결이 있다. 너무 많은 사람의 이야길 듣게 되면 충돌 지점이 생기겠더라. 물론 사진 자료나 기본적인 정보는 감사하게 받았지만 맥락을 흔들만한 디테일이 유입될까 조심스러워서 함부로 사람을 만나진 않았다.
시점을 유지하는 주체를 명확하게 두고 다양한 팩트만 수집했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렇다. <미생>의 원 인터내셔널은 취재원들과 함께 만든 가상의 회사다. 그 회사의 폼은 일반적으로 여러 회사에 해당될 수 있다. 그런데 그 설립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가 끼어들면 전혀 다른 방향성이 생길 수 있다는 게 염려스러웠다.
당신에게 직장 경험이 없었던 것처럼 장그래도 직장을 처음 경험한다.
장그래의 보고서 작성 에피소드를 위해서 취재원들에게 긴 문장을 짧게 축약한 보고서 작성 사례를 제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결과는 갖고 있었지만 그 과정을 그리는 건 내 몫이었다. 그 과정을 찾아가는 게 재미있었다. 나와 장그래가 똑같이 발전한 셈이다. 과거 미술로 인해서 좌절했던 내 경험이 장그래의 대사로서 삽입됐을 수 있고, 데뷔 전 문하생 시절의 후회나 반성이 장그래의 인턴 생활과 겹쳤을지도 모른다.
인물의 상황에 공감하면서 자기 현실을 늘어놓는 댓글이 자주 보인다.
다들 알아서 자기 고백을 해주니까 제2의 취재가 된다. 가끔씩 올라오는 이견들도 악플과 다른 진지한 애정이 느껴진다. <이끼>때와는 상반된 체험이다.
공감대를 키우기 위한 의도적인 설정은 없었나?
93년도의 데뷔작을 독자 입장에서 처음 봤을 때 그 작품이 너무 모자라 보였다. 제3자가 된 거지. <미생>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어떤 주의나 주장을 펼치기 보단 목격하듯 묘사하자는 거다. 내가 내 데뷔작을 봤던 것처럼 독자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제3자의 입장으로 목격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최대한 대사를 소박하게 쓴다. 문장이 현란하면 특정한 누군가의 정체성처럼 느껴지지만 문장이 소박하면 자기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나.
<야후>나 <이끼> 그리고 <미생>의 사연은 주인공들의 실패와 절망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야후>의 김현이나 <이끼>의 류해국은 불처럼 뜨겁게 번지는 인물이라면 <미생>의 장그래는 물처럼 차갑고 유하게 흐르는 인물이다. 작가의 변화가 반영된 결과처럼 보인다.
최근에 이런 얘길 들었다. “드디어 작품에서 어머니가 나오네요.” 깜짝 놀랐다. 전작들에서 주인공의 심리에 영향을 미치는 건 모두 가부장이었던 거다. <로망스>에선 장인어른이 모델이었고, <야후>나 <이끼>,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도 아버지와 연관된 이야기였다. 사실 <이끼>로 단단하게 매듭을 지은 느낌이 있었다. 가부장이란 정서에 기대서 창작해왔던 시절이 <이끼>로서 결산된 느낌이랄까. <미생>엔 확실히 모성애적인 코드가 있다. 영업 3팀에서도 모성애적인 연민이 강하지 느껴지지 않나.
개인적인 삶에서 계기를 찾을 순 없을까?
한번은 고향 가족들과 지리산에 놀러 갔는데 어머니께서 딸에게 물으셨다. “아빠가 무서워? 엄마가 무서워?” 그러니까 엄마는 화를 많이 내도 이해해주는 느낌이 있지만 아빠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화만 내니까 무섭다고 했다(웃음). 한편으로 서운한 이야기지만 확실히 아내가 잘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가끔 집에 들어가면 아내가 애들한테 화낼 때 아내에게 짜증내면서 뭐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큰 애는 엄마가 자기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는 걸 정서적으로 믿는 거다. 아내의 힘을 느꼈다. 아무래도 이런 경험이 이야기도 변화시키는 것 같다.
<이끼>는 보는 사람도 힘이 들어가는 작품이었다. <미생>은 반대다. 그건 작가도 비슷하게 느끼리라 생각한다. 물론 마감은 항상 힘들겠지만(웃음).
프롤로그에선 자기 연민에 빠진 인물이 나온다. 슬픔을 먼저 던져주고 진행하는, 전형적인 내 패턴인데 그걸 딱 보니까 과거처럼 하기 싫어졌다. 나이를 먹으니까 몸이 어떻게든 조금은 자라있어서 예전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을 수 없으니까 갈아입을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그래라는 이름도 특이하다.
그 이름은 3수에 등장하는데 거의 3수 시작 직전에 생각한 이름이다. 당시에 ‘예스(Yes)’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오피스텔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거울에 비친 단어를 보고 ‘그래. 장그래?’하는데 어감이 착 붙더라. 그리곤 여자가 ‘안녕’하면 남자는 ‘그래’하는 걸로 여자 캐릭터는 ‘안영이’로 지었다(웃음). 바둑에서 오래 사는 돌을 부르는 장생을 생각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지(웃음).
<미생>의 캐릭터들은 저마다 축을 잡고 저마다의 시점과 합리를 설득한다.
다양한 직장인들이 그들 자신을 투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캐릭터를 만드는 게 목표였다. 주인공은 그런 이들을 드러내는 가이드 역할을 하는 거다. 워커홀릭인 오차장이 있고, 위아래의 교량 역할을 하는 김대리, 권위적이진 않지만 대리보단 무게감이 있는 천과장 같은 이가 그들이다. 그들과 경쟁하면서도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염려해주는 옆 부서의 팀원들도 있다. 워낙 회사의 인물군이 다채로우니까 의식적으로 캐릭터를 설정하고 묘사하기 보단 스토리의 이슈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인물을 배치하는 요령이 생긴다.
영업3팀은 굉장히 이상적인 팀이다. 능력과 배포가 있는 상사들과 발전하는 막내 사원들이 직위에 따라 역할을 수행하고 부조리가 없으며 체계가 잘 돌아간다. 영업3팀 자체가 <미생>의 주제이자 작가의 이상이라고 본다.
분명히 그렇다. ‘미생’은 완생으로 가는 길인데, 사실상 완생이란 이룰 수 없는 꿈과 같다. 대부분은 진짜 자기 꿈을 이루지 못하고 다른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엔 그 꿈을 잊는다. 하지만 성인으로서의 이상도 있는 거다. 그걸 묘사하고 싶었다. 다른 부서를 통해선 어쩔 수 없는 현실의 각박함을 보여준다면 영업 3팀은 그 자체로서 내가 짐작한 직장인들의 이상향을 그리고 싶었다. 당신은 이런 욕망과 열기를 안고 입사하지 않았나? 이런 상사를 꿈꾸지 않았나? 어쩌면 그들의 현실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꿈꿨을지도 모르는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러니까 <미생>인 거다.
하지만 결국 현실을 자각하게 만든다. 고졸인 장그래가 정사원이 되기 어려울 거란 대사가 등장할 땐 뼈아픈 기분마저 들더라.
요르단 사업 에피소드가 끝나고 ‘당연히 이 정도면 장그래도 정사원 돼야지!’란 댓글이 많이 보였다. 그래서 그 에피소드를 지난 해의 사업 실적과 10대 성과를 공개하는 2013년도 시무식 장면으로 연결했다. 독자들 입장에선 영업3팀의 요르단 사업이 대단한 이슈였고, 장그래가 큰 일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만화 속의 대기업 차원에서 엄밀하게 보자면 그 이전에 비리 과정의 유무와 관계없이 이미 존재했던 사업을 다시 한번 세팅한 것뿐이다. 사업 자체를 올바르게 되돌린 측면은 있지만 회사의 성과로선 당연한 업무였을 분이니까 장그래가 부각될 이유가 없었던 거다.
현실적이라서 더욱 가혹하다.
스토리상 항상 고민하는 지점이다. 장그래가 잘된다고 이 사회의 계약직 사원들이 다 잘되는 건 아니다. 물론 작품이 리얼리티만을 담아야 되는 건 아니지만 지나치게 현실을 무시하는 것도 기만이다. 특히 <미생>이 많은 지지를 얻은 건 독자들이 당면한 실질적인 고민을 대변했기 때문인데 장그래가 정사원이 되면 그걸 무시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장그래 정사원 시켜라!’ 이런 댓글들이 늘어서 나조차도 거부하기 어려워지기 전에 못을 박았다.
낙관적인 거짓말은 할 수 없지만 긍정적인 비전은 제시할 수 있다.
그래서 고민했다. 그런 비참함으로 끝내야 될까. 그래서 ‘지금의 회사만이 당신의 전부는 아닐 거야’라는 대사를 넣었다. 정사원이 되지 못했다고 장그래의 인생이 실패한 건 아니니까. 큰 상금이 걸린 대국에서 패한 바둑기사들은 ‘한판의 바둑이 끝난 거지’ 그러고 만다. 살다 보면 수많은 바둑판을 마주하니까 그저 한판일 뿐이다. 그 초연한 태도가 정말 매력적이다.
바둑 실력은?
10급 정도.
10급은 어느 정도 수준인가?
18급에서 1급으로 올라가고, 승단하면 초단에서 9단으로 올라간다. 10급보다 밑이면 대단히 못 두는 건데, 바둑의 재미를 느끼는 초입 단계랄까. 수는 낮지만 바둑TV에서 유명한 기사의 대국에 관심을 갖고 지켜볼 수 있는 정도?
어떻게 입문했나?
문하생 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작가 선생님들께서 가끔 바둑을 두셨는데 어른스러워 보이고 멋있더라. 그래서 바둑을 배웠다. 그런데 패배감 관리가 안되더라. 지고 나면 아까 뒀던 바보 같은 수가 계속 떠오르고 너무 분하고 약 올랐다(웃음). 남들은 하루에 서너 판도 두는데 난 한 판만 둬도 진이 다 빠졌다. 그래도 관련 서적을 읽는 건 재미있어서 그쪽으로 빠졌다. 바둑인들의 삶은 알수록 대단하다. 조치훈 9단은 교통사고가 났는데도 휠체어를 타고 와서 바둑을 둔 휠체어 대국이 유명하다. 그때 누가 왜 그렇게 바둑을 두냐고 물어보니까 이렇게 답했다. “어차피 바둑, 그래도 바둑.” 남들한텐 바둑일 뿐이지만 자신한텐 바둑이 전부라는 거다. 대단한 비장함이 느껴진다. 바둑 기사들의 정수가 남긴 어록들을 보면 흉내낼 수 없는 어떤 경지가 느껴진다.
단행본의 ‘작가의 말’에서 바둑을 자기 패배조차도 복기하는 유일한 일이라고 했다. 그 문장을 읽고 새삼 바둑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했다.
대여섯 살부터 바둑을 둔 영재급 아이들 중 몇몇은 연구생이 된다. 감정 정리도 잘 안될 것 같은 그 꼬맹이들도 가만히 앉아서 복기한다. 그 아이들이 패배의 감정을 어떻게 관리할까,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고자 어떻게 노력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연민이 생긴다. 바둑이 어려운 건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격랑의 사춘기에 연구생이 되어 승수를 채우고 입단하고자 할 텐데 이창호나 이세돌 같은 천재들이 많으면 아무래도 어렵다. 실력이 늘어도 자신보다 더한 천재를 만나서 패배하면 실력이 낮은 거다. 그런 과정을 견딘 아이들이 사회에 나오면 그 단단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어떨까 궁금했다.
부모로서의 심정도 더해질 것 같다.
아이에게 연민이 들 때가 있다. 분명히 이런 상황에선 슬플 거 같은데 웃고 있을 때가 있다. 그걸 보면 슬프다. 이 정도는 참아낼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뜻인데 부모 입장에선 그렇게 애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게 마냥 기쁘지만은 않더라.
인생이 바둑이라면 본인은 어느 정도 수를 둔 거 같나. 어떤 판국이 보이나?
포석은 다 지난 정도? 이 판이 어떻게 될 거 같다고 어느 정도 정돈된 형세랄까. 나란 사람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진 대충 정해진 거 같다. 큰 자리들을 보면 내가 확보한 지점도 있고, 남에게 넘어간 지점도 있고. 이제 중반 이후에 끝내기를 어떻게 잘 처리할지가 문제다. 한 집이라도 더 확보할 수 있도록 정당하게 잘 싸울 수 있는 판을 짜야 한다. 디테일하게 모든 단계가 중요한 시기가 온 거 같다.
지난 10년간 웹툰은 만화와는 또 다른 것으로 진화해왔다. 영화계가 웹툰을 주목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그 영화들이 기대 이하의 결과물로 완성되는 건 조금 이상하다.
지금까지 영화화된 웹툰은 총 일곱 편이다. 그 중 윤태호 작가의 <이끼>를 제외하면 사실상 ‘강풀 작가의 웹툰’만이 영화화됐다. 강풀은 2003년 무렵에 <일상다반사>라는 일상적인 개그 만화를 통해서 인지도를 얻었다. 개인 홈페이지에서 연재하다 스포츠신문의 지면에 자리를 얻었던 이 작품은 포탈사이트의 웹툰 코너로 유입됐다. 초창기 웹툰의 형태란 대부분 그런 것이었다. 양영순의 <아색기가>, 곽백수의 <트라우마> 등과 같이 일상적이거나 엽기적인 유머에 초점을 맞춘 단편적인 에피소드 형식의 연재 만화들이 웹툰이란 이름 아래 수집됐다. 재치 있는 아이디어나 번뜩이는 유머 감각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당시 기성 출판만화계에선 이런 웹툰을 일회용품 정도로 폄하하고 있었다. 출판만화계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독자를 웃길 줄만 아는 아마추어들이 웹을 통해서 득세한다는 인식도 자자했다. 무료로 유통되는 저질 콘텐츠가 출판시장을 괴리시킨다는 비난도 있었다. 하지만 웹툰은 죽지 않았다. 독자의 인내력 덕분이 아니다.
대표적인 1세대 웹툰 작가로 꼽히는 강풀은 호러와 미스터리, 멜로, 시대물을 오가며 장르적인 창작을 거듭했고 웹툰의 진화를 주도했다. 일회성 유머로 소비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작품들은 단행본으로, 뮤지컬이나 연극으로, 영화로, 유형의 영역으로 끊임없이 건너갔다. 모세처럼 웹툰이란 망망대해에 길을 열었다. 웹툰이란 콘텐츠의 소비 영역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를 입증하며 플랫폼을 정착시켰다. 영화화된 일곱 편의 웹툰엔 영화적인 요소들이 다분하다. 웹툰의 한 컷은 일반적인 만화의 한 컷과는 다르다. 좌우 상하로 눈을 돌려가며 읽는 만화책과 달리 웹툰은 시선을 모니터에 고정한 채 마우스의 스크롤로 화면을 수직 하강시킨다. 스크롤을 내리고 싶은 욕망을 부추겨야 하니 그만큼 호기심을 당길만한 서사의 흐름이 요구된다. 스크롤의 속도감은 영화의 필름 영사 방식을 닮았다. 필름 롤이 돌아가며 분할된 컷을 하나의 신으로 이어나가는 영화처럼 웹툰 역시 마우스의 스크롤을 내릴 때 분절된 컷과 컷이 역동적으로 이어져 영화처럼 연속적인 이미지를 구현하기도 한다. 기존의 출판만화의 문법에선 당연히 불가능한 효과다.
윤태호의 <이끼>에선 일정한 공간을 고정된 카메라의 샷으로 관찰하는 롱 테이크 기법과 유사한 컷들도 등장한다. 고정된 프레임으로 반복되는 컷 안에서 인물의 행위나 위치 변화가 연속적으로 묘사된다. 게다가 컷의 크기도 와이드하다. 만화책의 컷에 비해서 사이즈가 크기 때문에 개별 컷의 이미지 하나하나마다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영화화된 일곱 편의 웹툰들은 이런 요구를 충족한다. 스토리텔링의 완결성과 비주얼의 완성도를 높이고 독자적인 아이덴티티를 구축했다. 이는 대중적인 인지도로 이어졌다. 흥행성이 기대된다. 시나리오로 작업할 내러티브와 캐릭터의 성격이 분명하고, 콘티로 인용할만한 컷들도 충분하다. 영화 제작자 입장에선 입맛이 당길 수밖에. 게다가 최근의 몇몇 웹툰들은 웹이라는 환경의 가능성을 활용한 시도를 거듭하고 있다. 미스터리 연작 <연>은 극에 어울리는 배경음악을 곁들이며 작품의 감정선을 고조시킨다. 지난 해 큰 반향을 일으킨 단편 호러 <옥수동 귀신>은 플래시 동영상을 활용한 컷으로 독자들을 까무러치게 만들었고, 이런 현상은 보도까지 됐다. 웹이라는 환경에서 가능한 것들이 시도되고 있다. 만화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다.
사실 웹툰 원작 영화들은 대부분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본래 원작이 있는 영화들이 원작과의 비교를 감내해야 하는 건 타고난 팔자다. 하지만 유독 웹툰 원작 영화들에선 그런 반응이 더하다. 이유가 있다. 웹에 접속만 하면 누구나 웹툰을 볼 수 있다. 접근성이 용이하다. 너무 많이 본 독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영화를 본다. 원작의 인기가 높을수록 영화에 대한 주목도 높아지고 평가는 더욱 치열해진다. 대부분 아비만한 자식이 없기 마련이다. 지난 11월 29일에 개봉되어 개봉 3주차에 250만 관객을 동원한 <26년> 역시 뜨거운 감자였다. 그럼에도 웹툰의 영화화는 보다 활발해지고 있다. 게다가 이제 ‘강풀의 웹툰’만이 영화화되는 게 아니다.
최근 <이끼>를 연출한 강우석 감독은 <주먹의 전설> 촬영을 마쳤다. 동명 인기 웹툰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주호민 작가의 웹툰 <신과 함께> 또한 <만추>를 연출한 김태용 감독의 손으로 영화화된다. 배우 김수현이 캐스팅된 <은밀하게 위대하게> 또한 동명 웹툰이 원작이다. 사실 영화화된다, 영화화된다더라, 지지부진하다가 끝내 증발한 기획들은 적잖다. 그저 영화의 프레임에 구겨 넣어서 될 문제가 아님을 뒤늦게 깨닫기 때문이다. 웹툰은 영화의 보험이 아니다. 지난 10년 사이 웹툰 작가들은 다양한 장르의 가능성을 개척했다. 재능 있는 아마추어들이 메인스트림으로 올라설 수 있는 채널도 마련했다. 어느 날 갑자기 좋은 원석이 불쑥 머리를 내밀어도 이상하지 않은 신이 됐다. 그만큼 빛나는 원석을 값진 보석으로 가공할 줄 아는 장인이 필요하다. 영화는 영화니까.
거북이 등딱지를 매고 요리하는 토끼가 장안의 화제다. 이름하여 웹툰 <역전! 야매요리>. 주체할 수 없는 개그 본능으로 야매요리를 창시한 그녀의 이름은 정다정, 거꾸로 해도 정다정이다.
정말 유명해졌어.
길거리에서 알아봐주는 사람도 생기고, 친구들도 물어보는데 실감이 안나. 솔직히 살짝 거품이 꼈지. 원래 받을만한 관심이나 평가를 넘어서, 일종의 과대평가?
기대(?)와 달리 멀쩡하게 생겨서 실망했다는 의견들이 있던데.
오타쿠처럼 생겼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멀쩡해서? 뭐, 어쩔 거야. 내가 이렇게 생겼는데!
생각보다 어리다는 말도 있고.
다들 세상 좀 겪은 20대 후반이나 30대로 생각하는데 아니란 말이지. 뭐야, 20대 풋내기 여자잖아.
처음에는 원래 요리 잘하면서 못하는 척하는 거 아닌지 의심스러웠어.
블로그든 웹툰이든 태어나서 처음 한 요리들이야. 솔직히 이쯤에서 망쳐줘야지, 이러면 더 스트레스 받을 걸. 연습도 없이 그냥 무조건 해. 그래야 실수도 자연스럽게 나오거든.
원래 요리를 좋아하는 편?
원래 먹는 걸 좋아했는데……뭐지, 납득이 간다는 저 표정은! 2년간 미국에 있었는데 그쪽 친구들은 생일마다 브라우니 한 판을 만들어와서 나눠먹는 거야. 그게 좋아 보이고, 브라우니도 맛있어 보이고, 그래서 생일도 아니면서 맨날 만들어서 갖다 바치고, 그러니까 선생님이나 친구들은 맨날 먹을 것만 싸 들고 오냐 그러고. 그렇게 베이킹으로 시작했지.
먹고 싶어서 만들었다?
부모님 없을 때 혼자 라면 끓여먹는 거나 같아.
외국은 왜 나갔어?
외고를 갔는데, 너무 ‘빡셌어.’ 경쟁하는 분위기에 적응도 안되고 방황하던 차에 엄마가 미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보냈지. 거기 2년 있다가 돌아와 복학해서 1년 간 잘 지내다가 아빠 연수 때문에 다시 나갔다가 아예 졸업하고 작년 초에 들어왔어.
외국 생활은 좋았어?
영어도 막히는 게 없고, 사고방식도 자유로워서 잘 맞았어.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잖아. 몇 살에 학교 가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이래야 좋은 인생이지 않겠니? 명절에 친척 만나면 압박도 느끼고. 외국도 그런 게 없는 건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개인의 인생을 존중해주거든. 가치관이 달라졌고, 그 뒤로 공부를 놨어. 너희들은 공부해라. 나는 ‘야자’를 째겠다.
터닝 포인트였군.
많은 영향을 받았지. 원래 성격도 낙천적이야. 길거리에서 바이올린 켜면서 살아도 행복할 거 같아. 어떻게든 되겠지, 이런 주의라서.
보통 한국 부모님들은 극성인데.
우리 부모님도 똑같아. 초등학교 고학년쯤 인생설계를 해주시는 거야. 어느 외고를 들어가서 어느 대학교를 가고, 미국의 어느 회사에 취직하면 1년에 10만 달러를 벌 수 있어. 아빠가 자수성가해서 나도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나 봐.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더라.
아빠가 작년 한해 동안 입시 준비를 시켰는데, 그게 잘됐다면 지금쯤 대학생활 중이겠지. 돈 받아서 각종 참고서 ‘질러’놓고 정작 방에 앉아서 ‘잉여스럽게’ 컴퓨터만 했어. 나중에는 침대에 눕고, 노트북도 눕히고, 들키면 안되니까 방문 잠그고. 결국 이렇게 잉여의 결정체로……
재미로 시작한 일이 진짜 일이 됐네.
자유연재하던 블로그에서는 마음대로 소재 선택해서 요리하고 자막만 붙이면 끝인데, 이젠 정기적으로 연재하는 웹툰이니 사진과 어우러지는 스토리를 찾고 만화도 그려야 돼. 솔직히 만화가라고 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그림을 못 그리니 좌절감도 들지. 나도 요리를 사랑하는 사람인데, 가끔 이런 쪽지도 날아와. 먹는 걸로 장난치면 지옥 간다!
원래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어?
인물화는 잘 그렸어. 고등학교 다닐 때도 애들이 그려달라면 그려줬거든. 만화를 연습한 건 아닌데 항상 가방에 연습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특이한 걸 그리기도 했지. 교과서에 있는 소설을 각색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글도 많이 썼어.
고수나 샤이니 판넬 만든 거 보고 빵 터졌어.
솔로 크리스마스 케이크 만들 때 남친과 먹는 장면을 엔딩으로 하려는데 어디서 구해. 판넬을 남친으로 만들어서 앉혀놓고 함께 먹으면 처량한 느낌도 나니 좋겠다 생각했지. 사실 너무 튀는 아이템이라 금방 식상해지니까 자주 쓸 수는 없어.
블로그 연재 시절에 ‘이거 님들 웃기려고 만든 블로그가 아니라 요리해 먹으려고 만든 블로그임’이라고 당당히 선언했는데 지금은 어때?
내 만화가 요리 만화니까 ‘일상’ 카테고리에 해당된다 생각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개그’ 카테고리를 클릭하니 <역전! 야매요리>가 제일 처음에 있는 거야! 앗! 이게 개그만화구나!(웃음) 요리에 관심 없는 독자들도 개그 때문에 본다는 거야. 블로그 시절에는 남들 의식하지 않고 아무 거나 던지면서 웃겼는데 지금은 의식적으로 개그도 쳐야 되고, 요리도 해야 돼. 사진 찍고, 만화 그리고, 대사 치는 게 마지막 스텝인데 항상 고민이야. 특히 자막. 예를 들어서 당근을 썰거나 재료를 손질하는 장면은 언제든 등장할 수 있잖아. 그런데 매번 새로운 자막을 붙이면서 웃겨야 한다는 건 힘들어. 요리가 너무 잘 나오면 좀 망쳐줘야 되나 싶기도 하고.
<스타크래프트> 용어가 심심찮게 보여. 게임도 해?
미션 깨려고 <스타크래프트> 관련 책도 사봤어. 배틀넷은 안해. 지면 ‘빡치잖아.’ 그리고 상대가 말도 걸잖아. 너 진짜 못한다, 이러고. 게임은 원래 좋아해. 원래 남성스러운 면이 있나 봐.
‘소금을 소금소금, 후추를 후추후추’ 이런 말은 원래 쓰는 거야?
소금을 적당히 뿌려주세요, 이건 재미없잖아. ‘소금소금’하면 조심스럽게 뿌리는 어감이고, ‘후추후추’는 탈탈 터는 느낌? 어감이 잘 맞아떨어지고 들어도 재미있잖아. 웃길 거 같아서 작정하고 쓰는 건 잘 안 터지고, 아무 생각 없이 나온 이런 말들에 호응이 더 좋아.
정다정 작가는 천재라는 사람도 있던데.
요즘 워낙 ‘후달려서.’
캐릭터는 왜 토끼야?
내 필명이 우사미였는데, 혹시 우사미짱 알아?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의 우사미짱?
블로그에 ‘카레’ 편을 올리고 입시 때문에 한 달 정도 쉬었는데 공지만 올리면 심심할 거 같은 거야. 독자들의 질문을 Q&A로 정리하려는데 글로 쓰면 재미없잖아. 그래서 만화 형식을 구상하니 화자가 필요한 거야. 사람으로 가긴 밋밋하고 필명이 우사미짱이니 캐릭터도 토끼로 하자. 이리 된 거지.
그럼 거북이 등딱지는?
프롤로그에 부엌을 너무 어지럽히면 엄마한테 ‘등짝 스매쉬’를 맞으니까 조심하자는 멘트가 있었어. 그래서 등짝을 보호하는 뭔가가 필요하겠구나 생각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등딱지 생각이 나는 거야. 나중에 거북이 가족이 등장하는 건 그 등딱지가 동생 건데 내가 뺏어온 거라고 설정하면 재미있을 거 같았어.
메뉴 선정의 기준은?
일단 내가 먹고 싶어야 돼. 가족도 안 먹는데 내가 먹기 싫으면 처리해줄 사람도 없어. 너무 쉬워도 안돼. 계란 후라이를 하면 사진이 서너 장밖에 안되겠지? 일단 분량이 돼야 하지. 물론 가끔 기념일에 맞춰서 하는 요리는 예외지.
진짜 다 먹어?
솔직히 남기는 것도 있는데, 거의 다 먹어. 8000kcal 브라우니 알아?
발렌타인 데이 기념으로 했던?
내가 했지만 정말 맛있었어. 초콜릿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맛있어서 계속 먹게 되는 거 있지. 근데 그게 8000kcal잖아. 한 숟갈에 300kcal, 밥 한 공기야. 이건 안되겠다 싶어서 숟가락을 놨지.
요청 받는 메뉴도 많지 않아?
블로그할 때부터 있었지만 일단 내가 먹고 싶어야 되고, 그래야 스토리도 자연스럽게 나와. 남들이 시켜서 하는 요리는 잘못 되면 그 사람이 시켜서 이리 됐다고 탓할 거 같아. 책임져도 내가 지겠어!
‘파테 드 카나드 앙 크루드(Pate de Canard en Croute)’? 발음도 어려운 이 요리는 어쩌다 도전한 거야?
<줄리 & 줄리아>라는 영화에 나왔는데, 그게 실제로 요리하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잖아. 거기서 맨 마지막에 그 요리를 하거든. 그리고 내가 원래 파이를 좋아해. 게다가 그건 고기도 있고, 파이도 있으니까. 그런데 오븐이 없어서……비주얼도 충격적이었지. 원래는 더 징그러웠어. 밥통 뚜껑을 열었더니 오리 진액에 요리가 잠겨있는데, 솔직히 그건 ‘오프 더 레코드’, 도저히 내보낼 수 없었어. 그래서 좀 퍼내고 사진 찍은 거였지.
요리하면서 촬영까지 한다는 게 쉽지 않을 텐데.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원하는 구도가 나와야 하고, 그렇게 하면서 스토리 구상도 하기 때문에 직접 할 수밖에 없어. 가끔 손이 두 개가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한 손은 내 거고, 동생이나 엄마한테 한 손을 빌리지. 사진은 무조건 내가 찍고.
결과물이 나와야 스토리도 생기겠네.
막연한 구상 정도만 갖고 있다가 사진에 맞춰서 작업하는 거지. 이 타이밍에 어떤 컷이 들어가고, 인트로와 엔딩은 이렇게 잡자. 그래서 사진 찍는 게 스트레스지. 요리 하나에 150~200장 정도 찍는데, 매번 손 씻어가면서 촬영하다 보니까 한번 할 때 6시간씩 걸리는 거야. 어떨 땐 요리를 정해놓고도 하기 싫어서 이틀 뭉개다가 시작하니까 종종 마감에도 늦어.
어쨌든 디지털 카메라 개발자한테 감사해야지.
가서 절하고 요리 먹여야 돼. 두 번 먹여.
일주일에 두 번 해달라는 댓글도 있던데.
일주일 간격이 적절해. 4일 정도 작업하고, 3일 정도는 머리를 식히면서 다음 편 구상하고, 이게 나한테 딱 맞는 리듬이야.
요즘 가족 출연 분량도 늘었더라.
일상 얘기를 늘려야 될 거 같아. 독자를 길들이는 거지. <낢이 사는 이야기>도 그렇잖아. 나랑 생판 모르는 사람인데, 만화만 보면 옆집 언니 같고 그렇잖아.
엄마는 요리 잘해?
아니. 엄마가 요리를 잘하면 내가 요리를 시작했겠어?
이거 써도 돼?
나중에 머리 끄댕이 잡힐지도……
연애 경험 있어?
있어. 없을 것처럼 보이나!
커플한테 치를 떨잖아.
내가 계속 ‘커플 타도’ 외치고 다니니까 이미지가 약간 ‘모솔(모태솔로)’ 같긴 하지. 연애 한번 못해봐서 그러는 거 아니냐고 하는데 사실 길거리 지나가면서 커플 봐도 별 느낌 없어. 재미를 위해서 과장하는 측면이 있긴 하지. 이번 만우절 특집으로 트위터에 장난을 쳤어. 남자친구 생겼다고. 그런데 너무 당연한 반응이 오는 거야. ‘구라 치지 말아라.’
소재 떨어질까 봐 연애 못하겠다며.
걱정 안 해. 안 생길 거니까! 일하느라 맨날 집에만 있구먼.
설마 4월 14일은 짜장면 특집?
맞아! 14일이 마침 연재하는 토요일이잖아. 그런데 너무 뻔하네. 4월 14일, 블랙데이, 짜장면.
이제 수입도 생겼으니 식재료 구입에도 여유가 생겼겠네.
<역전! 야매요리> 때문에 쓰는 음식값만 지출하면 모르겠는데, 온갖 먹는 데 다 쓰니까 오히려 엥겔 지수가 폭발적으로 늘었어. 작년에도 과외를 해줘서 수입이 있었는데 지금과 다를 건 없는 거 같아. 계속 먹는데 지출.
<역전! 야매요리>의 ‘빅재미’는 깨알 같은 시행착오야. 그런데 요리도 하다 보면 실력이 늘 수밖에 없잖아. 실수도 줄어들고.
고민이야. 내 밥줄이니 항상 아마추어가 되자고 다짐하지. 그래서 세세한 과정까지 다 찍는 거고. 요리를 못해야 된다는 게 과제야. 과제.
그래도 트위터에서 네일아트 안 받냐는 물음에, ‘요리하는 사람은 네일아트하면 안돼요’ 라고 답할 때, 프로의식이 느껴졌어.
일종의 책임감이지. 엉망진창으로 요리하지만 나를 따라 하는 분들이 많잖아. 요리 중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넘어갈 수 있지만 네일아트는 정말 선을 넘어가는 거지.
팬카페의 ‘도전! 야매요리’ 코너 열기도 대단하던데.
덕분에 매주 항의 메일도 받아. ‘이렇게 하라 그래서 따라 했더니 지금 이게 뭐냐. 내가 지금 우리 엄마한테 ‘등짝스매쉬’ 맞게 생겼다’면서.
등짝스매쉬를 맞아야 진정한 야매요리 아냐?
오! 그렇지? 나중에 이 말 써먹어야지.
단행본 준비 때문에 보조 작가도 구했다던데.
야매요리를 진짜요리로 만들 수 있는 레시피를 깔끔하게 정리한 미니 요리책을 함께 만들 거거든. 그 분한테 감사해야지. 내 책을 누가 보겠어.
새로운 스텝에 대한 고민도 있겠어.
언젠가 대학은 갈 거야. 굉장히 큰 인생 경험을 놓치긴 싫으니까. 다만 내 의지였으면 좋겠어. 어느 정도 이상의 대학은 가야지, 이런 건 못하겠어. 경쟁하는 것도 싫고. 내 또래들은 이제 취직도 준비해야 하고 스펙 쌓는 게 중요한 나이야. 이런 말하면 재수 없을 수도 있지만 좀 안타까워.
살다 보면 또 새로운 흥미가 생기겠지.
큰 교훈을 얻었어. 평생 이리 갈순 없겠지만 ‘잉여력’이라도 소신껏 꾸준히 남들이 가지 않은 길에 도전하다 보면 언젠가 길이 뚫린다는 것.
정의를 고수하며 싸움에 승리한 남자에게 남은 건 영광이라 부르기조차 넌더리나는 상처 뿐이었다. 가정은 무너졌고, 직장은 사라졌다. 만신창이처럼 너덜해진 삶 속에서 무기력을 체감한 남자는 덧없는 교훈 하나를 짊어진 채 관계를 단절시키듯 살아왔던 아버지의 시신이 놓인 지방의 마을로 떠난다.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굴 속으로’ 들어가듯 세상과 스스로를 단절시키기 위해 서울을 떠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환대 속에서 싸늘한 기운을 느낀 남자는 ‘더러운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고 다시 마음에 지펴오르는 의심을 좇아 그 실체의 조각들을 수집하고 점차 완성돼 나가는 거대한 비밀과 마주서다 이에 맞서나가기 시작한다.
포털사이트에서 인기리에서 연재된 윤태호 작가의 <이끼>는 작은 실마리에서 출발해 거대한 담론으로 내달리는 작품이다. 마을을 둘러싼 비밀은 이 세계의 이면에 놓인 진실과 깊게 맞닿아 있으며 평온한 마을의 풍경은 부조리를 가린 위장의 합리로서 이뤄낸 것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류해국은 그 모든 위장된 합리로서 이룬 평온을 헤집어 내는 암적인 존재다. 애써 자신의 죄의식으로부터 달아나며 자신만의 공동체 속에서 평온을 유지해오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추적하는 류해국을 자신들의 영역에서 밀어내거나 제거하려 들고 이는 결국 어느 한 쪽의 끝을 볼 수 밖에 없는 지난한 싸움으로 치열하게 발전돼 나간다.
영화화 단계부터 많은 관심을 얻어온 <이끼>의 연출자로 나선 강우석 감독은 분명 의외의 카드였다. <이끼>는 고요한 용광로와 같은 작품이다. 완벽하게 감정이 정제돼 버린 듯한 메마르고 거친 세계관은 극단의 대립 구도로 맞서는 캐릭터들의 갈등과 충돌로서 뜨겁게 달궈진다. 유머나 분노와 같은 인간의 평면적인 감정을 넘쳐 나듯 활용하는 강우석의 세계관은 분명 <이끼>와 상반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영화화된 <이끼>는 원작의 영향력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작품이란 점에서 그 세계관이 스크린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재현될지 혹은 어떤 방식으로 변형될 수 있을지에 대한 호기심을 품게 만드는 것이었다.
강우석의 <이끼>는 원작의 서사 일부를 재구성함으로서 극의 질량을 줄여냈다. 문제는 원작의 캐릭터들이 고스란히 영화에 잔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작의 다양한 캐릭터들은 그 세계관을 이루는 구성원임과 동시에 그 세계관의 핵심이나 다름없다. 은밀하고도 긴밀하게 이뤄진 캐릭터들의 관계 구도는 <이끼>라는 세계가 품은 부조리를 완성하는 커다란 조각이며 그 세계관을 구성하는 이들과 대립 구도에 선 인물을 유인하는 지도나 다름없다. 캐릭터들의 사연은 그 세계관의 기원이자 그 세계를 이룬 부조리를 설명하기 위한 인과의 본체나 다름없다. 영화는 그 모든 사연을 묘사함에 있어서 힘을 배분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문제는 그것이 그 캐릭터들이 극적으로 완수해야 할 목표를 훼손한다는 사실이다. <이끼>는 캐릭터들의 질량을 더해서 그 세계관의 무게감을 채우는 작품이다. 캐릭터의 사연은 바로 그 캐릭터들의 극적인 질량감을 표현하는 수단 그 자체로서 완전하다. 개개인의 서사가 드러나고 축적되며 세계관의 본질이 완성되고 극이 진행된다. <이끼>는 원작이 묘사하는 세계관의 규모나 형태는 유지하면서도 그 세계관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서사에 빤한 편차를 둔다. 패착은 이 지점에서 발견된다. 부피는 유지하되 질량이 줄어들었고, 전체적인 밀도는 낮아졌다. 변주의 시도 자체를 지적하는 게 아니다. 다만 원작을 수용하는 방식에서 그 본질을 이루는 구조를 간과하고 그 결과적인 형태만을 수용한 듯 보이는 결과물은 원작 자체에 대한 이해가 얕았음을 의심하게 만든다.
서사의 변주 역시 좋은 효과를 거둔 결과물이라고 말하기에는 무색한 측면이 있다. 특히 서사적인 순열을 보다 손쉽게 매만지려는 의도처럼 보이는 오프닝은 궁극적으로 원작의 장점이 영화에서 희석된 이유를 보여주는 극명한 예시나 다름없다. 인과를 감춤으로서 독자의 의문을 증폭시킨 원작의 서사는 단순히 구조적인 트릭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점차 그 정체를 드러냄으로서 세계관의 너비에 서사적 질량을 늘려 나가며 극의 밀도를 채워나가는 작업과 같다. 서사의 변형은 그 구조의 자질 자체를 붕괴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물론 때때로 영화는 번뜩이는 긴장감이 담긴 시퀀스를 자랑하기도 하지만 전반적로 극의 흐름은 그 방향이 명확할 뿐, 강도의 편차가 크다. 동시에 어떤 전형적인 감정이 결여된 듯한 원작 캐릭터들과 달리 영화에서의 캐릭터들은 하나 같이 평면적이다. 배우들은 분명 열연을 펼치고 있지만 대부분 캐릭터로서 녹아들기 보단 배우가 지닌 스테레오 타입의 열연에 가깝다. 이는 배우들의 해석력 문제라기 보단 전체적인 디렉션의 방향성 문제로 여겨진다.
결과적으로 <이끼>는 리메이크라는 성과 안에서 온전히 실패한 작품이라 평할 만한 작품이다. 동시에 그것이 리메이크라는 의미를 지운 뒤의 성과 안에서도 딱히 특별하다 말할 것이 없는 평이한 범작에 가깝다. 때때로 이례적이라는 수사를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강우석 감독의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 감정적인 냉소가 느껴진다는 건 흥미롭지만 그건 상대적인 의미에 불과하다. 특히 느닷없는 장광설로 변질된 결말부나 패착에 가까운 반전은 이 작품이 원작의 기질 자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변주라는 의미 안에서도 온전한 실패를 느끼게 만든다. 서스펜스가 증발해버린 듯한 <이끼>에서 때때로 예기치 못한 유머가 발견된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이는 고의적인 의도라기 보단 우발적인 발생에 가깝다. 결국 이마저도 연출적 실패가 낳은 역설적인 결과나 다름없다. 마치 변주가 아닌 변질처럼 느껴질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