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어머니의 과거를 명예롭게 여겼다. 어머니는 이스라엘의 첩보 조직 모사드의 비밀 요원으로 활동했다. 레이첼(헬렌 미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들에게 실험이란 미명 하에 잔혹한 학살을 주도했던 어느 박사를 처단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녀의 한 쪽 볼을 가로지른, 깊은 창상이 짐작되는 긴 흉터는 일종의 훈장과 같다. 딸은 어머니의 애국적 활동을 기리고자 책을 집필했고 이를 헌정했다. 이를 지켜보는 어머니의 표정에는 감격보다도 근심의 기운이 역력하다. 사라지지 않는 지난 날의 상흔처럼 레이첼에게는 남모를 비밀이 있다.
2007년에 개봉된 이스라엘 영화 <Ha-Hov>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 <언피니시드 The Debt>는 원작의 뿌리로부터 복제된 동일한 뿌리의 영화다. 90년대의 텔아비브와 60년대의 동베를린을 오가며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환기시키는 영화는 위장된 진실로 서서히 접근해 나간다. <언피니시드>는 양심적 부채를 청산하지 못한 어떤 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덮고, 명예로운 공적을 위조한 뒤, 그 명예를 안은 채 살아가는 어떤 이들에 관한 사연이다. 논픽션에 가까운 픽션, 현실을 반영한 은유적인 대체 현실, <언피니시드>는 결국 이 세계의 어떤 불미스런 단면에 대한 자성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담긴 영화인 셈이다.
<언피니시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버지의 깃발>과 폴 그린그래스의 <본> 트릴로지, 그리고 아리 폴만의 <바시르와 왈츠를>과의 접점이 발견되는 영화다. 조작된 역사 속에서 영웅으로 위장된 인물이 양심적 가책을 깨닫는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깃발>을, 비밀 첩보 조직의 부품처럼 활용되던 어느 개인의 양심적 발로가 내부 고발을 자행한다는 점에서는 <본> 트릴로지와 같은, 그리고 독일 나치에 의한 제노사이드를 경험한 유태인들의 피해 의식이 가해자로서의 동일한 경험에 놓인 죄의식과 맞물린다는 점에서 <바시르와 왈츠를>을 연상시킨다. 다만 앞서 나열한 세 영화들에 비해서 사적인 심리를 긴밀하게 조명한다는 점에서 <언피니시드>는 좀 더 개인적인 드라마에 가깝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플래시백을 통해서 모종의 진실에 접근해 나가는 영화는 그 진실 속에 놓인 인물의 심리와 밀착하며 보다 깊은 호흡을 얻어낸다. 민족적인 명예 회복이라는 거대한 조직적 임무를 떠안은 개인은 방사능 피폭으로 인해 파괴되듯 그 임무의 폭력성에 노출되며 점진적인 심리적 붕괴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의 대의를 수긍하고 있지만 저마다 목적이 다른 세 인물은 점차 조직적인 와해를 직감하는 동시에 개인적인 공황 상태로 스스로 빠져든다. 자신들을 역사의 희생양으로 몰아넣은 파괴자들에 대한 응징과 보복을 감행하던 이들이 스스로 동일한 가해자가 되어 가는 과정을 경험하며 점차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첩보물이라는 장르적 외피를 지닌 <언피니시드>는 거시적인 역사에 매몰된 개인의 미시적인 심리에 밀착한 심리드라마에 가깝다. 영화는 극적인 서스펜스를 자아내기 위한 연출을 지양하고 리얼리즘에 가까운 상황 묘사를 통해서 관객의 시선을 보다 객관적인 위치로 안내한다. 이러한 사실성은 영화 속에 자리한 인물들의 심리가 보편적인 현실의 삶 안에서 인식되도록 유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거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치장된 영화적 표현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풍경 속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어느 개인의 삶이 발견되는 방식으로서 영화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한 인물의 전후를 차지한 제시카 차스테인과 헬렌 미렌은 동일한 흐름 속에 놓인 서사의 호흡을 서로의 위치에서 유연하게 이어받으며 극적인 흥미를 더하고 설득력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특히 상처 입은 채로 복도를 걸어나가는 헬렌 미렌의 뒷모습은 폭력적인 역사의 청산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폭력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짊어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던 어느 개인들의 고독을 대변하듯 쓸쓸하고 아련한 여운을 남긴다.
세계2차대전이 한창 중인 튀니지 사막에서 독일군 대령 장교는 다짐한다. 나는 조국 수호가 아닌 인류 수호를 위해 싸우겠다. 그는 히틀러가 독일의 영웅이 아닌 인류의 주적이라 판단한다. <작전명 발키리>(이하, <발키리>)는 그 독일군 대령 슈타펜버그(Stauffenberg, 톰 크루즈)의 양심적인 성찰을 조명하는 데서부터 영화를 시작한다. 일종의 정치적 선언이자 연기의 입을 빌어 던지는 일종의 고백성사다. 동시에 이 영화는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도입부에 이를 명백히 밝힌다. 적어도 이 허구적 산물의 어느 측면까지 실재가 반영된 것인지 가늠할 순 없겠지만-또는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이는 적어도 영화의 태도를 의심하지 않게 만드는 적절한 방어기제 노릇을 한다.
일단 <발키리>는 어느 비윤리적 집단 내부에서 피어난 양심적 선언에 대한 재현이라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발키리>는 모종의 정치적 야심을 숨기고 포복시키는 영화이기도 하다. 인물들의 두려움은 온전히 그 시대에 내포된 정신병적 파시즘에서 비롯된다. 인물들이 대항하는 건 거대한 악이 아니라 거대한 악처럼 강요되는 정신병적 불안이다. 두려움은 충돌과 갈등을 도모하고 이는 곧 영화적 서스펜스의 주체로 발전한다. 서스펜스의 날을 세우는 건 인물의 외부에서 형성되는 이미지의 결과물이 아니라 갈등과 충돌로서 이뤄지는 심리적 불안감이다. 그 불안은 인물들을 머뭇거리게 만들고 제약하며 가둔다. 그 사이에서 차분하고도 점진적인 서스펜스가 영화를 잠식해나간다.
<발키리>의 결말을 언급하는 행위가 스포일러로 규정될 이유는 없다. 어차피 이 영화는 실패한 혁명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의 허구적 야심은 역사적 기록을 뒤집고자 할 만큼 과감하지 않다. 실패한 혁명은 적어도 그 당시엔 반역으로 기록되고 처형당한다. <발키리>는 그 당시엔 반역이라 불리던 에피소드다. 히틀러가 암살당해서 죽었다는 기록을 본적이 없는 이상, 그가 자살했다는 역사적 증언을 아는 이상,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적 몸통이 온전히 실화로부터 빌려온 것임을 선언하는 영화의 도입부를 확인하는 이상, 결과는 명백하다. 슈타펜버그의 신념은 결국 무덤으로 향할 것이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이미 결론이 도출된다. <발키리>는 정해진, 혹은 예고된 결말을 향해 달리는 이야기다. 결과가 아닌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인물들의 심리적 변화와 추이를 묘사하는데 온 힘을 쏟는다. 동시에 그 정해진 비극을 향한 인물의 의지가 대두된다.
관객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온전히 비극적일 수 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발생할 수 있는 한 가지 물음은 어째서 당연한 비극적 결과를 전개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슈타펜버그의 고결한 양심적 선언을 비추기 위해서? 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첨언이 필요하다. 더 잠재적인 야심을 발굴할 필요가 있다.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이 매그니토의 유태인 수용소 씬을 등장시키는, 울버린의 인체 실험적 장면이 나치를 연상시키는 <엑스맨>의 수장 브라이언 싱어가 만든 <발키리>엔 사유화된 욕망이 잠재돼있다. <발키리>는 영화감독 브라이언 싱어와 유태인 브라이언 싱어가 공존하는 영화다. <발키리>의 슈타펜버그는 히틀러에게 대항한 범인류적 위인의 삶을 추적하는 영화이기 전에 브라이언 싱어가 복원하고픈 어떤 정의에 대한 추도다.
슈타펜버그가 히틀러 암살 기도를 꿈꾸는 군내부 세력들과 처음 접촉하는 장소에서 목격하는 건 일종의 정치다. 독일의 미래를 위해 히틀러를 죽이고자 하는 그가 히틀러를 죽이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부터 생존을 위한 정치적 모략을 목격한다. 그들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적임자를 찾고 있다. 그들의 사명감은 히틀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생의 안전에 있다. 패전이 점차 시일 안으로 다가오자 패전국의 전범으로 기록되지 않기 위해 히틀러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하지만 슈타펜버그는 히틀러의 죽음이 사명이라 믿는다. 그런 그에게 정치는 온당치 않다. 정의를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생을 위한 정치란 일종의 사기와 같은 것이다. <발키리>의 슈타펜버그는 그런 사람이다.
<발키리>의 슈타펜버그는 실제적인 슈타펜버그로부터 어느 정도 가공된 인물이다. 가공의 주체는 브라이언 싱어다. 그는 슈타펜버그가 히틀러의 나치를 윤리적으로 부정하는 인물로서 바라보고 싶었을 가능성이 크다. 슈타펜버그와 목적을 같이 하는 주변의 군부 세력들이 패전국 독일의 역사에서 명예롭게 히틀러의 존재를 지우길 원하는 것과 궤가 다르다. 패배가 예감되는 전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보유하려는 이들의 정치 가운데 슈타펜버그만이 유일하게 히틀러에 대한 윤리적 타락을 본다. 슈타펜버그는 유일한 양심이자 조직의 윤리적 타락을 비판하기 위한 기제에 가깝다. 브라이언 싱어는 슈타펜버그의 육체를 빌려서 독일 나치에 대한 윤리적 물음을 던진다. 내부적인 양심을 발효시킨다. 외부에서 유입된 강제적 진압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잉태된 자율적 신념이 스스로의 모체를 부정하길 바란다.
세계2차대전을 시간적 배경으로 두르고 있지만 <발키리>는 전장을 묘사하는 영화가 아니다. 극 초반 튀니지에서의 씬을 제외하고 전쟁터다운 장면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베를린 독일군부의 장교만이 등장한다. 연합군과 독일군과의 전투 장면은 찾아볼 수 없다. 쉽게 말하면 <발키리>는 전쟁영화라기 보단 정치영화에 가깝다. 어떤 이들은 벌써부터 이 영화에 스펙터클이 부족하다고 꼬집고 있으나 의도하지 않은 바를 스스로 원해서 실망했다 말하는 건 석연찮다. <발키리>는 전쟁의 승패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패배한 체제의 전복을 통해 자신을 보수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미 패배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전범의 역사에서 어떻게든 발을 빼려 바둥거리는 이들의 처량한 사연이다.
<발키리>에서 흥미로운 건 히틀러에 대한 테러를 주도하는 세력들간의 정치적 갈등이 발견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그 테러의 주변부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을 가늠하는 제3자들의 태도다. 슈타펜버그의 비장함이 때때로 무색하게 느껴지는 건 이 덕분이다. <발키리>는 어느 한편에 선 자들의 묵묵한 표정보다도 그 중간지대에서 방목하듯 살아가는 회색분자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지점을 갈등하고 고심할 때 더욱 흥미로운 표정을 드러낸다. 슈타펜버그의 결의에 찬 눈빛은 흔들림이 없다. 그만큼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의 편에 설 것인지를 망설이는 자들의 표정은 흥미롭다. 결국 <발키리>는 어떤 선의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 선의와 건너편의 악의 사이에 놓인 중간자들의 흔들림이 드러날 때 더욱 매력적인 흥미를 부른다. 중심부보다 주변부의 설계가 더욱 흥미롭다.
사실 슈타펜버그가 나치의 비윤리적 태도에 항거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독일의 이익에 반하는 히틀러의 행위적 결과가 참담하다는 데서 악을 규정한다. 윤리라기 보단 실리에 가깝다. 브라이언 싱어의 <발키리>가 균형을 잃는 것도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는데 있다. <발키리>는 독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어느 애국자에 대한 항거적 실화다. 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자의 내면에 다른 욕망이 숨겨져 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피해의식이 우회한다. 히틀러를 숭배하거나 숭배하는 척을 하며 살아갔던 독일인들의 무기력에 대한 항의와도 같다. 이런 태도는 <발키리>를 때때로 지극히 사유화시킨다. <발키리>는 정치를 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드러날 때 긴박해진다. 목적을 완수하는 순간까지도, 그들은 망설이고 머뭇거린다. 윤리적 신념이 아니라 정치적 야심에서 비롯된 미션이라 끊임없이 스스로의 행동을 검증하고 자신의 안위를 판단한다. 유일하게 행동을 위한 행동을 펼치는 슈타펜버그만이 적극적이다. 그는 그의 말대로 정치를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슈타펜버그를 소환한 주체가 종종 의무감의 주체를 헷갈리듯 보인다는 점이다. 실제 인물의 의지를 허구의 틀 안에서 재현하고자 하는 의무감과 캐릭터의 탈을 쓰고 자신의 유전자적 트라우마를 투영하려는 의무감이 캐릭터의 균형을 흔든다. 슈타펜버그의 강력한 정치적 매력은 그가 정치를 하지 않는 인물이란 점에서 발생한다. 그를 따르는 사람 대부분이 그의 신념을 본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때때로 슈타펜버그를 통해 어떤 정치를 하려 든다. 슈타펜버그를 윤리적 주체로 삼아 히틀러라는 상징적 비윤리를 비판하려 든다. 결말의 숭고함은 어딘가 지나치다. 페이소스가 발생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영역의 안타까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슈타펜버그의 안위와 그의 가족에 국한된 사안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발키리>는 비정치적인 인간을 통해 인간의 정치적 태도를 탐구한다. 전쟁의 패배자로 기록될 것을 예감한 이들은 자신들의 안위가 보존될 길을 찾는다. 그건 그 전쟁 속에서 정치적으로 공정한 사람이 되길 시도하는 것이다. 히틀러를 죽이면 전범이란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 패배를 자신들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자 하는 몸부림에 가까운 것이다.
<발키리>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하지만 그 어떤 홀로코스트 영화보다도 강한 자의식을 품고 있다. 홀로코스트 영화들이 비극적 역사에 갇힌 유태인들의 기적 같은 구원담을 말해온 건 그들의 처지에 대한 슬픔에서 비롯된다. 그건 휴머니즘에 기반한 일종의 대항적 희망이다. 비극에 대한 방어적 성찰이다. 하지만 <발키리>는 그 비극을 잉태한 주체의 몰락을 직접적으로 갈망하듯 재현한다. 동족의 비극을 기획했던 자들의 내부적인 몰락을 기획한다. 비극을 묘사하는 방식으로서의 간접적 고발이 아니라 비극의 발원지에서 펼쳐지는 자기 모순을 통해 정신병적인 체제를 고백하듯 그린다. 더 이상 과거를 동정하듯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극복으로 나아간다. 일종의 야심이 담겨있다. 더 이상 유태인의 비극을 그리는 추모제가 아니라 비극을 기획한 적의 심장부를 겨눈 직접적인 가해를 꿈꾼다.
전쟁에서 패배한 뒤 전범으로 기록되지 않고자 했던 이들은 정치적으로 승리함으로써 자신을 보존하려 했다. 전쟁의 무의미를 깨닫는 슈타펜버그만이 비정치적 사명을 위해 바삐 움직인다. 그리고 그의 결단과 행위를 지켜보는 이들은 하나같이 갈대처럼 흔들린다. 그 와중에도 정치적 이득을 계산하고 망설인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비정치적인 인간이 정치적인 결단을 종용한다. <발키리>의 성과는 그 아이러니한 지점에서 발생한다. 지나친 감정을 요구하는 결말이 불합리한 감상을 부여하는 건 그 때문이다.
드라마틱한 페이소스를 부화시키려는 막판의 시도가 지속적인 서스펜스의 리듬을 흐트러뜨린다. 섬세하게 간격을 유지한 채 심리적인 기저에서 찬찬히 흐르고 불거지던 긴장의 구조적 흐름이 허망하게 급류된다. 특히 너비보다도 깊이에 치중하던 <발키리>의 서스펜스 구조가 양적으로 팽창하는 감정적인 과잉 상태에서 마무리된다는 점은 여러모로 아쉽다. 그건 단지 결말이란 정보의 개방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지속적으로 유지하던 온도가 변했기 때문이다. 일정한 음역 대를 규칙적으로 연주하던 오케스트라가 마지막 악장에 다다라 갑작스럽게 고음역대로 음을 집중시키는 것처럼 불안정하다. 그건 어디까지나 <발키리>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무마시키기 위해 극 말미에 다다라 지나친 무리수를 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브라이언 싱어는 자신의 정치적 승리를 위해 영화적 패배를 방조한 셈이다. 오로지 슈타펜버그만이 비정치적인 인물처럼 묘사되지만 슈타펜버그조차도 비정치적 태도로 정치를 완수한다. 결국 휴머니즘은 무색해진다. 시대적인 정신질환을 진단하던 영화가 뒤늦게 인간미를 설득하는 건 어딘가 무력한 일이다. 정치적 승리를 원했던 패배자에게 숭고함을 부여할 때 그것은 명예가 아니라 일종의 모욕적 미화로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