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맥어보이는 화려한 스타이기 보단 현실적인 사람이다. 그에게 유명세란 그저 거추장스러운 짐이다. 그는 직업 연기자의 삶을 꿈꾸고 있다. 연기로 삶을 사는, 이상적인 현실주의자인 것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중등학교 재학 시절, 제임스 맥어보이는 신부가 되길 마음먹었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서가 아니었다. “아프리카에 가서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일곱 살의 나이에 부모의 이혼을 경험한 맥어보이는 여동생과 함께 글래스고 외곽의 드럼채플에서 자랐다. 실업자와 범죄자가 넘쳐나는 드럼채플의 거친 분위기 속에서도 자상하고 엄격한 외조부모는 맥어보이를 밝고 건강하게 보살폈다. 하지만 집을 벗어나서 만큼은 항상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비좁은 세계의 폭력을 경계하며 자란 아이가 더 넓은 세계를 동경하는 건 어쩌면 본능이다. 맥어보이는 독립에 대한 야심이 컸다. “위험한 지역에서 자라게 되면 나이가 들면서 현실이 그런 야심을 두들겨 부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의 말이다.
맥어보이의 감춰진 끼가 드러난 건 14세 무렵이었다. 당시 두 선생님의 권유로 밴드를 결성하게 됐고, 소위 노는 물이 달라졌다. 옷차림이 달라졌고, 평소에 말도 걸지 못했던 아이들과 친구가 됐다. “내게 쓸만한 상상력이나 창조력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16세가 되던 해에 그에게 진짜 꿈을 안긴 사건이 일어났다. 배우 데이비드 헤이먼이 연기 강연을 하기 위해 학교를 찾은 것. 학생들 대부분이 심드렁해있는 사이, 맥어보이는 완전히 그의 말에 매료됐다. 그리고 헤이먼을 찾아가서 묻는다. 자신에게 기회를 줄 수 없느냐고. 6개월 후, 맥어보이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헤이먼이 제작하는 영화의 단역 오디션 참여를 알리는 것이었고, 맥어보이는 기회를 잡았다. 그는 훗날 회상했다. “나는 쓰레기였다.” 이는 결국 그가 왕립 스코틀랜드 노래 연기 학교에 입학을 결심하는 계기가 됐다.
드라마 스쿨을 졸업한 맥어보이는 무대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조 라이트가 그를 발견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점차 브라운관과 스크린 등장횟수가 늘었고, 폴 애보트가 만든 두 편의 TV시리즈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와 <셰임리스>로 확실한 잔상을 남겼다. 9살 연상인 아내 앤 마리 더프와의 만남을 주선해준 <셰임리스>는 몇 가지 수상 경력을 쥐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2005)에 참여하기 위해서 뉴질랜드 촬영장까지 날아갔다. 그가 선택한 건 반인반수의 파우누스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다.” <윔블던>(2004) 촬영 당시, 맥어보이는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에 출연한 버나드 힐에게 헬름계곡 전투에 관해서 몇 번이고 묻고 또 물었다. 그는 판타지 광이다. 하지만 그는 다분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배우가 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특별히 그 분야에 지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그저 시작하니까 하나에 그 다음이 따라왔다. 연기가 죽을 만큼 재미있다는 걸 그렇게 알게 됐지만 직업으로서 진지하게 생각하기까진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맥어보이에게 연기는 일종의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가 연기한 캐릭터 대부분에 그런 성향이 반영돼 있다. 멀쑥한 이웃 청년처럼 보이는 맥어보이에게는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잡아 끄는 구석이 있다. 맥어보이의 도약을 위한 구름판 역할을 해낸 <라스트 킹>(2006)의 게리건은 마치 그를 위해 준비된 캐릭터처럼 보였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맥어보이와 게리건 사이에는 공통분모가 적지 않다. 눈을 감고 지구본을 빙빙 돌려 손가락으로 짚은 우간다행을 택한 신출내기 의사의 혈기는 직업의사와 아프리카 봉사를 꿈꿨던 맥어보이의 과거를 연상시킨다. 무엇보다도 게리건은 시작과 끝의 분위기가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라스트 킹>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바로미터다. 맥어보이는 그 역할을 해냈다. 혈기왕성한 청년의 유쾌한 미소가 점차 당혹감으로 창백해질 때, 불길한 예감은 현실화된다. 기본적으로 어느 독재자에 관한 고발극인 이 작품이 한 청년의 뼈저린 성장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맥어보이의 그런 표현력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어톤먼트>(2007)의 로비나 <비커밍 제인>(2007)의 톰처럼 맥어보이의 캐릭터들은 비천한 신분이나 상황을 긍정적인 태도로 견뎌내곤 한다. 실제로 그는 어려서부터 긍정적인 성향이 강했다. “항상 어떻게든 다 잘될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누구에게 의지할 필요 없이 행복해질 거라고.” 유년시절의 불우한 환경을 견뎌내기 위한 반대급부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런 긍정적인 인물이 강한 비극에 쓰러질 때 더욱 강력한 페이소스가 형성된다. 애초에 비극적인 예감을 담보로 미소를 짓던 캐릭터들이 끝내 그 현실에 매몰될 때 그만큼 비극적인 것이다. <어톤먼트>와 <비커밍 제인>은 신분차가 빌미가 되어 이루지 못한 로맨스라는 공통점이 있다. 맥어보이의 미소는 그 로맨스의 상실감을 더욱 강하게 증폭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원티드>(2008)에서 직장 스트레스로 신경쇠약 증세마저 보이던 웨슬리가 정체성을 깨닫고 사무실을 박차고 나와서 킬러로 변모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강력한 쾌감이다. 이는 이 배우가 지닌 극단의 양면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그는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 캐릭터가 겪는 이후의 삶을 납득시키는 역할을 해내기도 한다. <스타트 포 텐>(2006)은 어려서부터 퀴즈쇼를 동경하던 소년이 값비싼 실수 끝에 교훈을 얻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근작인 <음모자>(2010)와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2011)에서는 각각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한 이상적인 패배자로 등장한다. 링컨 암살 공모 누명을 쓴 여인의 변호를 맡게 된 남북전쟁 영웅 에이컨과 돌연변이들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 인간과의 화합을 시도하지만 분열과 갈등으로 붕괴되는 조직의 리더 자비에의 영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닮은 통증이 느껴진다.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는 맥어보이에게 이상과 현실의 양면을 모두 충족시켜주는 결과였다. 유년시절 즐겨보던 만화 속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상적이며 그의 대출금을 갚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현실적이다. 그는 말한다. “스릴과 재미를 기준으로 일을 고를 수 있다니 적어도 지금의 나는 운이 좋다. 영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앞일을 누가 알 수 있나.” 확실한 건 지금 맥어보이가 수배 물망에 활발하게 오르내리는 배우라는 사실이다. 직업배우의 정체성이 공고한, 이상적인 현실주의자가 세계적인 스타로 등극한 것이다.
링컨 대통령을 지지하는 북군의 승리로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 미국에서 승리에 도취된 북부인들의 분노를 부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연극을 관람하던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 초유의 대통령 암살을 겪게 된 북부인들은 암살에 가담한 용의자들을 추적해서 체포하고 관련자들을 색출해내고 재판석에 앉힌다. 그 가운데에는 용의자들의 아지트를 제공하고 그들을 후원했다는 혐의를 얻었으나 이를 부인하는 여인, 메리 서랏(로빈 라이트)이 자리하고 있었다. 변호사 출신으로 전쟁에 참전한 북군 장교 프레데릭 에이컨(제임스 맥어보이)은 친분이 있는 변호사 출신의 장관 리버디 존슨(톰 윌킨슨)의 요청으로 그녀의 변호를 맡게 된다. 덕분에 링컨의 암살자를 변호하게 됐다는 차가운 시선을 얻게 된 그는 개인적인 신변의 어려움을 겪어나가면서도 그녀의 주변을 조사하던 중 심각한 의문을 품게 된다.
링컨 암살 사건 이후, 그 암살자들을 법적 제도로서 처리하는 과정을 그린 <음모자>는 법정을 배경으로 두고 있으나 법정 스릴러로서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물론 죄의 유무를 가리고자 고군분투하는 젊은 변호사 에이컨이 거짓 증언을 가려내고, 북군 정부의 일방적인 처벌적 음모를 분쇄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은 흥미롭다. 그리고 이는 법정 스릴러로서의 서스펜스보다도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한 인물의 노력에서 새어 나오는 숭고함과 편견이 섞인 관점으로부터 벗어나서 객관적인 시각을 회복하게 되는 인물의 변화와 성장을 지켜보는 과정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흥미를 유발시키는 방아쇠는 바로 진실의 여부에 주목하는 영화의 관점 자체에 있다. 뒤집기 어려운 결과를 향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이의 행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서스펜스가 된다.
<음모자>는 이미 정해진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사건에 얽힌 진실 그 자체를 조명해내는 사실적 진술에 전력을 쏟는 역사물이다. 남북전쟁 당시의 풍경을 생생하게 재현해내는 것을 시작으로 그 시공간을 장악하고 있던 일방적인 관점과 그 관점에서 발전된 광기적 현상에 초점을 맞춰낸다. 미국 최초의 여자사형수이기도 했던 메리 서랏이 누명을 쓰고 사형대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정해진 결과를 재현하고 있는 이 영화가 법정 스릴러로서의 장점을 얻을 수 없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특별한 장르적 특성보다도 보편적인 가치를 논하는 이 영화는 그만큼 정직한 문법과 성실한 기술로서 뚜렷한 형태를 완성하고, 묵직한 무게를 얻어낸다.
무엇보다도 실화의 재현에 주목하고 있는 이 영화가 흥미를 부르는 건 그것이 단순히 그 시대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녀사냥에 가까운, 법치적인 제도를 통해서 이루는 반법치적인 처벌은 <음모자>가 재현하는 그 시대의 전후로도, 미국 이외의 수많은 땅 위에서도, 전세계적으로 종종 발견되곤 하는 인류의 부조리한 역사적 단면에 가깝다. 대의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권리를 묵살하고, 국가적 명분을 위해서 인간 본연의 가치를 무시하는 행위는 인류가 쌓아 올린 역사 안에서 거듭 발견돼 왔다. 실존인물에 대한 서사와 실제적인 음모론의 풍경을 묘사해온 바 있는 로버트 레드포드는 <음모자>를 통해서 또 한번 거대한 명분에 짓눌려야 했던 어느 개인의 비극적인 역사를 들춰낸다. 특별한 기교보다는 우직한 정면승부처럼 나아가는 이 작품은 시대와 사건을 관찰하는 작가의 관점과 시선을 통해서 나름의 멋을 얻어낸다. 연륜과 패기, 이 빤한 수식어가 잘 맞아떨어지는 로빈 라이트와 제임스 맥어보이의 조합은 어쩌면 이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준수한 볼거리라 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