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되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그것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처럼 따져 묻지 않는다. 그건 마치 누군가의 아들이나 딸이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실 대항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이 공명정대하고 명확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따져 물어야 한다. 하지만 역시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피곤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바로잡겠다고 나설 때엔 그만한 각오가 필요한 법이다. 어쨌든 아나키스트, 즉 무정부주의자란 말은 있어도 무정부인, 비국가인이란 말은 없지 않은가.
<남쪽으로 튀어>는 오쿠다 히데오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둔 작품이다. 그리고 원작처럼 어느 아나키스트 아버지와 그의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소설과 달리 아들의 1인칭 시점 대신 객석의 시점과 동일한 3인칭 시점으로 영화를 목격하게끔 만든다. 국민 같은 거 하지 않겠다며 주민등록증은 찢어버린지 오래이고, 당연히 세금도 내지 않는 최해갑(김윤석)은 <남쪽으로 튀어>의 핵심이다. 그는 이 영화가 존재하도록 이끄는 필요조건 같은 존재다. 무정부주의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연출하는 그는 한량과도 같지만 불의 앞에선 불처럼 뜨겁다. 그럼에도 최해갑 못지 않은 운동권 경력을 자랑하는 그의 아내 안봉희(오연수)는 그의 이상을 응원하는 강력한 아군이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이런 면모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하지만 미워하진 않는다.
<남쪽으로 튀어>는 일종의 계몽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 같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우화다. 최해갑의 삶은 객석을 찾은 관객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생경한 태도에 가까울 게다. 이는 단순히 캐릭터가 지닌 고차원적인 이상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태도로서 드러나는 삶의 방식이 그렇다. 누구나 불만을 가질 수 있지만 결코 실행할 수 없는 행위들을 최해갑은 한다. 불합리한 시스템의 오류를 순응하며 편하게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달아난다. 엄밀히 말하자면 최해갑이 선택하는 삶의 방식이란 자립에 가깝다. 투쟁이나 싸움이라기 보단 체제로부터의 독립이자 현대적인 사회제도로부터의 자립을 의미한다.
<남쪽으로 튀어>는 사실 그러한 삶이 행복하다고 설득할 수 있다면 보다 나은 영화다. 하지만 영화가 그럴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때때로 그러한 삶이 국가관에 길들여진 대부분의 삶보다 나아 보이고 행복하게 다가오는 풍경들이 목격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태도를 제시하고 권유하기 보단 일종의 전시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치열한 현실감보단 현실성을 염두에 두고 그린 이상에 가까워 보인다. <남쪽으로 튀어>가 계몽적인 영화라기 보단 우화에 가깝다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영화는 현실에 밀착하는 대신 현실을 연상시키는 어떤 상황들을 수집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기워 넣는다. 수집된 상황들은 대부분 권력화된 정책과 제도 안에서 발생하는 갖은 불합리들이다. 최해갑은 이에 저항한다. 그 저항은 대부분 통쾌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영화는 웃고 있지만 사실상 씁쓸한 이야기다. 영화는 나름대로 긍정적인 인상을 유지하지만 영화가 전시하는 비극의 강도는 사실상 현실의 파괴력을 따라잡지 못한다. 쉽게 말하자면 <남쪽으로 튀어>는 현실보단 이상으로 기운 영화다.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캐릭터의 결기를 지켜보는 재미는 유쾌하지만 사실상 영화가 제시하는 청사진이란 그리 희망적인 인상이 아니다. 현실에서 얻어지는 무력감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감상 또한 영화와 완벽하게 밀착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쪽으로 튀어>는 대한민국 국민 엄밀히 말하자면 서민들의 불만과 분노의 뿌리를 살피는 진단으로서 유효하다. 좀처럼 명확한 출처를 규정하기 어려워서 막연하게 분노를 삭히고 현실에 수긍하듯 살아가는 당신에게 어떤 근거들을 제시한다. 선동하기 보단 자각하게 만든다. 물론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자각해온 이들에겐 빤한 난장처럼 보일 가능성도 농후하지만.
확실히 캐릭터를 보는 재미가 쏠쏠한 영화다. 범상치 않은 존재감을 지닌 아나키스트 최해갑을 연기하는 김윤석의 캐릭터 소화력과 담담하고도 결연하게 최해갑을 내조하는 안봉희를 소화해내는 오연수의 의외성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역 배우들의 기똥찬 연기는 물론. 이처럼 저마다 살아있는 캐릭터들은 영화가 다루는 날선 소재와 논조를 유쾌하게 중화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빨래>는 평범하듯 비범한 뮤지컬이다. 심심찮게 터져 나오는 유머와 경쾌한 넘버가 인상적인 뮤지컬이지만 궁극적으론 가난한 사랑노래라 마음 한 부분이 애잔해진다. 사회의 밑바닥을 이루는 빈민층들은 저마다의 꿈을 접고 접어 달동네 한 켠 작은 방에서 또아리를 틀 듯 비좁게 살아간다. <빨래>는 그들의 삶을 단순하듯 진솔하게 묘사하며 유쾌하듯 구슬픈 멜로디로 노래한다.
청운의 꿈을 품고 강릉에서 상경했던 나영과 돈을 벌기 위해 몽골에서 입국해 불법체류 중인 솔롱고는 서울 생활 5년 차 만에 기어들어간 달동네 옥상에서 빨래를 널다 마주친다. 강릉에서 올라온 나영에게도, 몽골에서 들어온 솔롱고에게도, 서울은 그저 이방인의 땅처럼 무심하고 차가울 뿐이다. <빨래>는 그들이 만나 사랑을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는 로맨틱한 뮤지컬이다. 하지만 그것을 온전한 낭만에 기대어 설명하지 않으며 그 결심을 단순히 젊은 날의 치기처럼 가볍게 묘사하지 않는다. <빨래>는 대사를 통해 곧잘 ‘힘내라’는 격려를 던지곤 하는데 이로부터 이 뮤지컬의 힘이 전해지는 느낌이다. 지극히 상투적인 인사처럼 느껴질 만한 이 세 음절의 언어는 가난과 불행 속에서도 꿋꿋이 삶을 지탱하는 이들간의 격려로서 당위를 얻고, 결국 객석의 관객에게마저도 힘을 보탠다.
두 주인공인 나영과 솔롱고 외에도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욕쟁이 주인할매. 이 뮤지컬에서 웃음과 눈물이라는 감정적인 너비를 보장하는 캐릭터이자 결정적인 추임새로서 박혀있는 그녀는 두 주인공보다도 <빨래>에서 가장 핵심적인 공헌도를 책임지는 인물이다. 특히 <빨래>는 주인공보다도 조연들의 연기가 더욱 두드러지는 뮤지컬이기도 한데 욕쟁이 주인할매를 연기하는 이정은과 함께 구씨를 비롯해 남자 조연 캐릭터 대부분을 소화하는 정문성, 이영기 두 배우의 연기 또한 꽤나 반갑고 정겹다. 특히 이 세 배우는 대학로 원더스페이스에서 공연하던 원년 멤버로서 꾸준히 활약하고 있다는 점을 눈 여겨 볼만하다.
원년 라인업 당시에도 나영 역을 맡았던 주연 여배우의 성량이 약간 부족했던 점이 아쉬웠던 것처럼 새로운 캐스팅에서도 마찬가지의 결핍을 느끼게 된다. 기본적인 음색은 곱지만 고음 처리가 종종 불안하다. 무엇보다 이번 라인업의 변화는 임창정이라는 스타급 배우와 홍광호라는 뮤지컬 스타의 가세인데 전자의 공연을 봤으므로 후자 쪽의 평은 어렵겠다. 다만 가수 출신이며 연기자인 임창정은 나름 나쁘지 않다. 특히 도올을 패러디한 서점 싸인 씬의 재치와 팬서비스 차원의 실제 관객동원 싸인은 아이디어가 괜찮다. 스타 마케팅을 잘 활용한 결과물이다. 다만 배우의 연기와 무관하게 이처럼 군무적인 형태의 연출이 행해질 때 시선이 어느 개인에게 집중된다는 건 심리적으로 피할 수 없는 아킬레스건이 아닐까. 대부분이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무대 배우 가운데 독보적인 네임밸류를 지닌 배우가 존재한다는 건 묘하게 전체적인 호흡을 망각하게 만드는 자질이 된다. 좋은 작품의 이름값을 더욱 알릴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스타의 기용은 효과적이나 관객의 시야를 제한할 수 있다는 점은 한편으로 고민할만한 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또한 <빨래>는 원더스페이스 공연 당시 좁은 무대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세트가 인상적이었는데 이는 좀 더 무대가 넓어져 그런 묘미를 관찰할만한 구석이 경감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 기능성을 계승하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노래가 꽤나 괜찮다. 뮤지컬이 귀에 감기는 넘버를 만든다는 건 분명 성공적인 일이며 <빨래>는 그 방면에서 괜찮은 성과를 거둔다.
<빨래>는 분명 좋은 뮤지컬이다. 적절한 너비와 깊이를 갖추고 있다. 엄청난 미사여구를 동원할만한 업적의 반열까진 아니라도 대중적 공감대를 아우르는 주제의식과 소재를 착취하지 않고 진심이 담긴 배려가 인상적인, 누군가에게 권할 만큼 좋은 작품으로 손색없다. 기능적으로 탁월하며 정서적으로 원숙하다. 단지 구색을 맞춘 희망이 아니라 진짜 희망을 갈구하는 이들의 꿈이 강렬하게 와 닿는다. 이 가난한 사랑노래를 응원하고 싶은 건 그 때문이다. 그 사랑엔 낙관보다도 비관이 어울리지만 응원하고 싶은 진심을 부른다. 돈으로 사랑을 사고, 재물이 행복을 대변하는, 낭만이 사라진 시대에서 낭만을 꿈꾸게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닫게 한다. 이 막막한 도시에서 살붙이고 살 수 있는 사람 있다는 게 얼마나 힘이 된다는 것을. 그러니 우리 모두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힘내자. 근심 걱정일랑 매일같이 빨고 새롭게 살아가자. 자기 냄새를 풍기며 살아가자. 사람답게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