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범한 시작과 달리, 벤 애플렉은 소모적이고 낭비적인 경력 속을 겉돌았다. 하지만 재능은 그가 망가지는 것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야 비로소 그는 진정한 삶의 궤도에 오르고 있다.
두 살 차이가 났음에도 벤 애플렉은 맷 데이먼과 유년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부모의 이혼과 아버지의 알코올 의존증을 지켜보던 어린 애플렉이 데이먼을 만난 건 다행이었다. 보스턴에서 레드삭스 팀의 저지를 입으며 우정을 쌓아온 두 사람은 서로에게 배우로서의 꿈을 고무시키는 대상으로 자리하며 성장해왔다. PBS의 미니시리즈에 출연한 애플렉이 아역배우로서 이른 경력을 쌓았지만 그 이후에도 그는 데이먼과 같은 고등학교를 진학하며 배우로서의 담금질에 동행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스쿨타이>(1992)로 동시에 영화계에 진입한다.
애플렉과 데이먼의 공동각본작이자 공동출연작인 구스 반 산트의 연출작 <굿 윌 헌팅>(1997)은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보다 남다른 작품일 수 밖에 없다. 타고난 천재였으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된 교육도 받을 수 없었던 청년 윌과 그의 자기 방어적 오만과 결핍적인 심리를 치유하는 심리학 교수 션의 관계가 두드러진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중 하나는 애플렉의 몫이었다. “내 생애 최고의 날이 언제인지 알아? 내가 너희 집 골목에 들어서서 네 집 문을 두들겨도 네가 없을 때야. 안녕이란 말도 없이, 작별의 인사도 없이, 단지 떠났을 때.” 공사장에서 맥주를 홀짝이던 척키가 자신의 재능이 놓일 자리를 명확하게 분간하지 못하는 윌에게 던지는 이 대사들은 거친 만큼 심금을 울리는 것이었다. 작품은 큰 성공을 거뒀고, 두 사람의 손에는 오스카 각본상이 쥐어졌다.
<굿 윌 헌팅>은 두 사람의 경력에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준 작품이기도 했지만 두 사람이 비로소 홀로 자신의 경력을 쌓아나갈 출발점을 만들어준 작품이었다. <굿 윌 헌팅>이후로 애플렉은 마이클 베이의 SF블록버스터 <아마겟돈>(1998)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이클 베이의 작품답게 평단으로부터 융단폭격에 가까운 비아냥을 들었지만 역시 전세계적인 흥행성적을 기록한 이 작품은 애플렉에게 할리우드 흥행배우라는 수식어를 안겼다. 다소 심심하게 들리는 이 훈장은 그의 입지가 가파르게 변하고 있음을 알리는 바로미터였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로도 말이다.
<포스 오브 네이처>(1999)부터 <서바이빙 크리스마스>(2004)까지, 애플렉이 출연한 수많은 작품 가운데 애플렉에게 배우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부여한 작품은 현저히 드물다. 일찍이 애플렉과 두 번의 작업 경험이 있는 인디영화 감독 케빈 스미스의 <도그마>(1999)에서 맷 데이먼과 의기투합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작품들은 범작 혹은 그 이하의 수준에 머물렀다. 마이클 베이의 전쟁 블록버스터 <진주만>(2001)이나 한때 연인이었던 기네스 펠트로우와 함께 한 로맨스물 <바운스>(2001)는 끔찍한 평가에 시달렸고, 마블 코믹스 원작의 안티히어로물 <데어데블>(2003)이나 필립 K. 딕의 소설을 원작으로 둔 오우삼의 SF액션물 <페이첵>(2003)은 그의 경력에 새롭게 찍힌 얼룩과 같았다. 역시 과거 애인 사이였던 제니퍼 로페즈와 함께 한 로맨틱 코미디 <갱스터 러버>(2003)나 <서바이빙 크리스마스>(2004)와 같은 가족코미디는 웃음거리나 다름 없는 대우를 얻었다. 2003년 골든라즈베리 시상식에서 애플렉은 <페이첵>과 <갱스터 러버>, <데어데블>까지 무려 세 편의 영화로 최악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뒤, 그 멍에를 뒤집어쓰는데 성공했다.
사실 2002년도 작품인 <썸 오브 올피어스>와 <체인징 레인스>는 애플렉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그 수많은 범작들 가운데 보기 드물게 쓸만한 경력이었다. 현실적인 정치적 스릴러였던 두 작품 속에서 공통적으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로 등장했다. 애플렉의 이력을 새롭게 반전시킨 <할리우드랜드>(2006)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실화를 통해 할리우드의 추악한 이면을 그린 이 작품에서 애플렉은 클라크 켄트에 이은 2대 슈퍼맨을 연기했지만 자살로 생을 마감한 조지 리브스로 등장한다. 이는 할리우드 스타로서 화려한 인지도를 쌓아가면서도 경력과 연기적 비난에 직면했던 애플렉의 과거를 연상시키는 대목이기도 했다. 제63회 베니스영화제 경쟁작으로 출품된 이 작품으로 애플렉은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쥔다. 자신의 본심을 감춘 정치인으로 출연한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2009)에서의 연기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이런 사례와 무관하지 않다.
일찍이 짧은 단편물을 만든 경험이 있다지만 애플렉의 연출 선언은 파격적이었다. 그가 선택한 첫 연출작은 오늘날 미국 스릴러 문단을 대표하는 데니스 루헤인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곤 베이비 곤>(2007)이었다. 의심 어린 시선 속에서 친동생 케이시 애플렉과 모건 프리먼 등을 캐스팅해서 완성한 이 작품은 완연한 극찬을 얻어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보스턴 출신인 애플렉이 지니고 있는 지역적 커뮤니티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다 매력적이다. 이는 척 호건의 범죄소설을 각색한 두 번째 연출작 <타운>(2010) 역시 관통하는 특성이다. 뉴욕을 터전으로 둔 범죄물의 장인 마틴 스콜세지의 시선을 비롯해서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와 휴머니티의 감수성을 품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철학을 연상시키는 그의 연출작들은 작품 보는 눈이 없는 배우로 취급 당하던 애플렉의 과거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사라진 소녀의 행방을 추적해 나가는 과정 끝에서 놀라운 질문을 던지는 <곤 베이비 곤>은 제도적 정의와 배치되는 인간적인 선택의 딜레마를 그리는 가운데,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유려한 시선으로 조망하는 서정적인 스릴러다. 반대로 <타운>은 늪과 같이 개개인의 발목을 잡고 있는 지역 사회 내의 범죄적인 전통 속에서 새로운 삶을 갈망하는 한 인물의 고뇌를 불안하게 응시하면서도 그 갈망을 끝내 응원하고 구원하는 하이스트 무비다. 근작인 <타운>은 장르적인 클리셰들을 적극적으로 동원한 애플렉의 자기실험에 가깝다. 이 두 작품만으로 애플렉은 거장으로서의 가능성까지 넘보는, 비범한 면모를 새롭게 덧씌우는데 성공했다.
물론 애플렉은 여전히 연기적 가능성을 인정 받는 배우다. 토미 리 존스와 케빈 코스트너, 크리스 쿠퍼 등 관록 있는 노장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컴퍼니 맨>(2010)에서 애플렉은 하루 아침에 고액연봉자에서 실업자로 내려 앉은 가장을 연기한다. 이 영화로 그는 그 동안 얼마나 소모적인 작품 속에서 낭비적으로 활용됐는가를 스스로 증명한다. 자신만만한 샐러리맨이 실업의 고통과 가장으로서의 위기를 겪다가 다시 재기해나가는 과정은 마치 애플렉의 과거와 현재의 대비만큼이나 실감나는 것이었다. 슈퍼히어로의 고뇌나 영웅적인 면모를 흉내내기 보단 실존적인 고민을 연기할 때, 애플렉은 더욱 돋보이는 배우다. 과거 그는 자신의 경력을 돌아보며 이와 같이 말했다. “내 재능들은 때때로 과용됐고 또한 오용됐다. 나로 산다는 건 쉽지 않다.” 이제 모든 것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애플렉은 다시 진정한 궤도에 오르고 있다.
서구의 제국주의가 팽배하던 20세기, 호주는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어느 식민지가 그러했듯 영국의 소유가 된 호주의 원주민들은 백인 정복자들의 하수로 전락했다. 그 과정에서 ‘빼앗긴 세대(stolen generation)’가 탄생했다. 원주민 여성과 이주백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은 백인사회로 편입시키기 위해 원주민과 격리된 수용소에서 길러졌다. 그리곤 백인들을 위한 종으로 팔려가곤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서두에 등장하는 긴 자막이 가르키는 ‘빼앗긴 세대’에 대한 사연은 이와 같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그들을 언급하고 말하려 한다. 일단은 그렇다.
166분이라는 방대한 러닝타임만으로도 서사적인 너비가 느껴진다. 서사는 전후반의 구조로 나뉜다. 두 맥락의 서사를 관통하는 건 일관된 정서다. 박애와 사랑. 휴머니즘과 로맨스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거대한 천장과도 같은 서사를 떠받드는 정서적 기둥 역할로 구축된다. 거대한 스케일의 이미지들은 빛 좋은 포장지와 같다. 화려한 이미지가 벽화처럼 영화를 두른다. 롱숏에 담긴 거대한 풍광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드넓은 평원을 스크린 가득 담아내는 절경이 호화스럽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거대한 병풍을 두른 영화다. 유채색에 가깝게 대비된 색감의 톤이 더욱 적극적인 제스처를 발생시킨다. 카메라가 비추는 모든 것은 그림이 된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절경 안에 인물을 담고 사건을 발생시킨다. 텍스트 이전에 삽화가 눈에 먼저 들어오는 책과 같다.
호주에서 목장을 경영하던 남편을 쫓아 영국에서 날아온 새라(니콜 키드먼)는 남편의 유지를 받아들여 1500마리의 소를 항구까지 몰고 가야 한다. 지체 높고 고상하기만 하던 새라가 문명의 이기를 깨닫고 로맨스에 이끌리는 과정은 전형적인 클리셰로 읽힌다. ‘몰이꾼’ 드로버(휴 잭맨)와 함께 1500마리의 소를 끌고 항구로 나아가는 여정은 서부 개척지로 나아간 영국 젊은 남녀의 모험과 로맨스를 그린 <파 앤드 어웨이>를 닮았다. 일본 전투기들의 대규모 공습이 펼쳐지는 후반부는 <진주만>을 연상시킨다. 이별남녀의 애틋한 로맨스가 전쟁의 포화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가로막히는 과정은 지극히 전형적이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거대한 엔터테인먼트에 가깝다.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면서도 정서적으로 평이하다. 풍광의 스케일은 거대한 스펙터클을 이루지만 이야기에 더해진 감정적 울림은 정해진 너비를 움직이는 메트로놈처럼 일정하다. 비극도 희극도 그 간격을 철저히 유지한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공적으로 조율된 풍경이다. 넓은 평원과 호수 위를 미끄러져 날아가는 카메라의 숏엔 전시적 욕망이 철저히 반영됐다. 측면에 밀어 넣은 인물 너머로 그림 같은 풍경을 펼쳐놓은 컷엔 좋은 밑그림에 대한 욕심이 팽배하다. 이미지에 대한 욕망 위로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이야기는 정직하게 진행된다. 그만큼 볼거리는 충분하며 이야기는 순탄하다. 휴 잭맨과 니콜 키드만의 앙상블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감흥이 얕다. 감정의 진폭이 좁다. 이미지에 눈이 돌아가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영화라기보단 화보에 가깝다. 아름다운 회화적인 색감에 담긴 이야기는 깊은 공명을 부르지 못하고 찰나를 채울 따름이다.
‘빼앗긴 세대’에 대한 이야기임을 노골적인 자막에 실어 직시했지만 성찰의 여력은 앙상하다. 빼앗긴 세대에 대한 시선이 영화의 전반을 관장하는 주제라면 모험과 로맨스는 각기 전반과 후반을 지배하는 주요소재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사선을 넘고, 사활을 걸며, 희생을 불사하지만 그 과정의 긴장감을 도출하는 기능적 효과 이상을 넘지 못한다. 반라의 원주민 캐릭터를 내세워 영험한 신비를 전시하려 하지만 기이한 현상 이상의 설득력이 없다. 되려 맥락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연의 수단으로 남용하는 동시에 백치미스럽게 타자화된다. 지나치게 안이한 태도로 캐릭터를 장치해버린 인상이다.
사랑과 전쟁, 자연과 인간, 자유와 박애, <오스트레일리아>는 거대한 대륙의 너비만큼이나 방대한 대서사를 펼쳐 보이지만 그만큼 산만하며 개별적인 요소들의 집중력도 미약하다. 풍경은 아름답고 배우들은 훌륭하며 스케일은 거대하지만 정작 감흥이 없다. 방대한 서사엔 지극히 평범한 인상으로 가득하다. 물론 구도 자체만으로도 그림이 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다양한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호강이다. 문제는 이 영화가 호주 관광청에서 만든 홍보영상이 아니란 점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것도 좋지만 어떤 비범함을 발견할 때 감흥도 커지는 법이다. 화려하고 거대한 무대와 좋은 배우들의 연기가 더해진다고 해서 항상 훌륭한 연극을 보장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모든 것이 호화롭지만 어울리는 주인을 얻지 못해서 텅 빈 집처럼 허망하다. 물론 그 호화로운 집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주인 없는 집에서 손님 노릇을 하는 것처럼 어색한 것도 없다. 값비싼 장신구도 과도하게 착용하면 제 빛을 낼 수 없는 사치에 불과하다. 영화의 모든 요소들은 저마다 반짝이지만 제 능력을 지나치게 뽐내고 싶어하는 것처럼 어울릴 줄 모른다. 비범한 것들이 저마다 지나친 빛을 내다 보니 되려 빛을 보지 못하고 평범하게 한데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