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그림을 지키기 위해 당장 자금이 필요한 만화가 정배(이선균), 성인잡지의 칼럼을 대필하며 푼돈을 버는 실업자인 탓에 동생의 집에 얹혀 사는 다림(최강희)은 거액의 상금이 걸린 성인만화 글로벌 프로젝트 공모전을 위해 손을 잡는다. 서로 의견을 교환하며 티격태격하던 남녀 사이에 점차 예기치 않았던 감정이 무르익는다. 계약적인 동료 관계가 어느새 감정적인 연인 관계로 거듭난다.
<쩨쩨한 로맨스>라는 제목의 의미는 이 두 커플이 보이는 연애양상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는 서로에게 ‘쩨쩨’해질 수 밖에 없는 대부분의 연애를 겨냥한 비유에 가깝다. 서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관계가 긴밀해질수록 서로에 대한 구속적 욕망이 높아지고 점차 갈등을 빚게 되는 연애의 양상이란 자연스레 쩨쩨하지 않고 배길 수 없다. 직접적인 물음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의심도 무언의 심통을 통해 확인하려 들기에 갈등으로 번져나갈 뿐이다. 그 과정이 거듭될 수록 진심은 휘발되어 나가고 감정은 통증으로 변모한다.
<쩨쩨한 로맨스>는 기초적으로 서로를 잘 모르던 두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지고 갈등하며 위기를 건넌 뒤, 얻게 되는 관계의 성숙을 다룬 대부분의 로맨틱 코미디들과 다를 바 없는 작품이다. 그 빤한 연애담을 품고 있는 로맨틱 코미디들이 저마다 차별화된 소재를 발굴하며 관계맺기에 새로운 경로를 설정함으로써 독자적인 재미를 어필하려 들듯이 이 영화 역시도 두 사람의 빤한 관계를 수식하는 특별한 소재의 차용을 통해 개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쩨쩨한 로맨스>는 ‘성인만화’라는 소재를 통해 풋풋할 수 밖에 없는 로맨스의 출발점을 좀 더 농밀하게 치장한다.
특히 중간중간 만화의 이미지를 빌려 ‘야한’ 묘사를 끼워 넣는 아이디어가 <쩨쩨한 로맨스>에 ‘성인용’이라는 수식어를 첨가하도록 허한다. 만화적 이미지를 빌려 묘사한 에로틱한 이미지들의 액자구성 방식은 두 인물의 관계적 진전에 대한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동시에 감상자에게 긴장감을 부여함으로써 영화의 형식적 측면에 주목할 만한 특이점을 불어 넣고 감상 자체를 자극하는 효과를 낳는다.
사실 <쩨쩨한 로맨스>는 서사적으로 유연한 작품이 아니다. 서로 각자의 사정을 지닌 남녀가 만나 같은 지점의 목표를 합의하는 과정은 일목요연하지만 이야기투르기의 기승전결을 밀고 나가는 과정에서 다소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인상이 드는 대목도 여럿 발견된다. 긴장과 위기를 뛰어넘는 결말부 역시 영화가 벌려 놓은 이야기들을 다소 안이하게 봉합해버리는 인상을 느끼게 만든다. 전반적으로 이야기의 기승전결에서 전환점을 이루는 대목들이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녹아 내리기 보단 인위적으로 조작된 상황처럼 이해된다.
하지만 캐릭터들이 이루는, 근원적으로 배우들의 화학작용에서 비롯되는 앙상블은 <쩨쩨한 로맨스>를 구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강희와 이선균의 어울림은 이 영화에서 가장 주요한 자원이나 다름없다. 언제나 그렇듯 ‘좀 떠 있는’ 최강희가 ‘눌러주는’ 이선균과 어울리며 캐릭터의 합을 이루는 과정은 <쩨쩨한 로맨스>를 보는 관객에게 분명 쏠쏠한 재미를 안기는 지점이다. 동시에 그 주변부에 놓인 조연 캐릭터들은 두 주인공이 이루는 화학작용을 탁월하게 촉매한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 안에서 배우와 캐릭터가 차지하는 중요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증명하는 대목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쩨쩨한 로맨스>는 이야기를 읽는 재미는 떨어지지만 캐릭터를 보는 재미가 쏠쏠한 로맨틱 코미디인 셈이다.
(홍보사로부터 선물 받은 포뇨 인형을 보는 최강희 씨에게) 이런 만화 캐릭터들을 좋아하나 봐요.
예. 이거 잠깐 보고 있어도 될까요? 어제 이거 봤거든요. ‘포뇨’.
어제요?
DVD 나왔길래 빌려봤어요.
애니메이션을 원래 좋아하시나 봐요.
이런 캐릭터 중에서 욕심나는 역할이 많아요. <벼랑 위의 포뇨>를 보면서는, 소스케 엄마 기억나세요? 막 차 거칠게 몰고. (웃음) 그런 엄마 캐릭터가 탐났고요. 옛날에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나오는 주인공도 탐났는데 아무래도 제 나이도 그렇고, 아무도 그걸 안 만들어줘서……(웃음)
예전 인터뷰에서 캐릭터가 끌리면 작품도 끌린다는 말을 했더군요.
지금도 그래요.
어떤 캐릭터가 주로 끌리세요?
일단 제가 봤을 때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건데요. 그래서 제가 소수의 인물을 많이 연기한 거 같아요. 결핍이 있다던가, 그런 게 매력적으로 보이니까요. 사실 <애자>도 내용은 보편적이잖아요. 어쩌면 캐릭터에 끌렸다고 볼 수 있어요. 엄마 캐릭터나 제 캐릭터나 다 세잖아요. 그런 점이 많이 끌렸어요. 그러면서도 사람들한테 공감을 줄 수 있고. 그런데 <달콤한 나의 도시>에선 오은수가 끌리지 않았어요. 그건 그냥 제 나이를 연기해보고 싶어서 선택했죠. 제 나이대의 속물이 되어가는 과정을 연기해보고 싶어서.
<애자>에서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지금 자신의 나이와 비슷하게 다다를 정도로 성장해가는 인물을 연기했습니다. 그만큼 학생시절에 어울리는 생기발랄함 같은 것들까지 표현이 되는 배우가 애자를 연기했어야 했겠죠. 아무래도 최강희 씨가 캐스팅된 건 그런 부분에서의 기대감이 반영된 것일 테고요.
그렇겠죠. 그리고 그런 묘사는 가능하지만 사실 전 그렇게 생기발랄한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묘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 봐요. 그리고 저는 그렇게 들어오는 선에 맞춰서 결정하고 따라가는 거고요.
사실 캐릭터로서의 최강희 씨는 상당히 생기발랄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관객들도 최강희 씨에 대한 이미지를 그렇게 인식하는 경우가 적잖은 거 같고요. 그런데 정작 최강희 씨는 스스로가 생기발랄한 사람이 아니라고 느끼시나 봐요.
못 느껴요. 사실 제가 가진 생기발랄함은 좀 거칠어요. 아직 제가 봐도 그렇고 남이 봐도 그렇고, 표현방법에 있어서 서투른 사람인 거 같아요. 그게 다른 사람에게 매력으로 다가갈 수 있고, 그래서 제 주변에서 저를 선택해준 사람도 있지만 아직 좀 거칠거나 서툴어서 오류가 많은 사람이에요.
그렇다면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자신과 동떨어진 사람이라고 느끼는 경우도 적지 않을 거 같은데요.
저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연기생활을 시작해서 사회경험이 거의 없어요. 그런데 저는 보통 사람들을 연기해야 하니까 제 일부의 모습을 과장해서 막 하는 거죠. 착한 역을 맡으면 제 착한 모습을 과장시켜서 연기하고, 엉뚱한 캐릭터를 맡으면 엉뚱한 연기를 하고, <달콤, 살벌한 연인>같은 경우에서도 제 숨겨진 모습을 연기했고요. 그런 것 외에 나머지는 다 다르다고 느끼죠. 그래서 경험을 많이 해보려 해요. 책을 읽기도 하고, 한 5~6년 전에는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도 해봤고요.
아르바이트요?
예. <맹가네 전성시대>끝나고.
사람들이 많이 알아봤을 텐데요.
귀찮으면 그냥 아니라고 그러면 돼요. (웃음) “최강희 씨 아니세요?” 그래도 아니라고 그러면 “닮았네요.” 그러고, 그럼 닮았다는 소리 많이 듣는다고 말하고. (웃음) 이런 분도 있었어요. “최강희 씨 보다 예쁘네.” 그럼 감사하다고. (웃음)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를 보면서 스스로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나요?
그전에는 그렇게 많이 느끼지 못했는데 <애자>보면서 느꼈어요. <애자>에는 제 모습을 과장시킬 게 없을 정도로 저와 많이 달랐으니까요. 과연 최강희가 가능할까, 스스로 자문하고 시작한 작품인데 결과를 딱 봤을 때 다르다고 느끼기도 했고요. <애자>를 보고 집에 왔는데 <달콤한 나의 도시> 재방송을 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걸 보니까 두 사람이 다른 거에요. 얼굴은 똑같이 생겼잖아요. 머리 짧은 것도 비슷하고. 그런데 너무 달라서 그때는 스스로도 놀랐죠. ‘아, 그래도 내가 헛수고 하지 않았구나’ 생각했어요.
<애자>에서는 캐릭터의 생활력이 드러난다는 점에서도 기존의 캐릭터와 다른 지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선택한 바는 없었나요?
이전까진 변화나 변신에 대한 계획은 없었어요. 제가 보여드릴 수 있는 걸 최대한 다 보여드리는 게 1번이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그렇게 보여드린 다음에 나에게 나올 게 없어서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면 이 일을 그만 해야지 그랬는데 <애자>로서 용기가 좀 생겼어요. 그러니까 <애자>가 첫 도전인 거에요. 옛날에는 저한테 있는 것 중에 지금 해볼 수 있겠다 싶은 것만 선택했지만 이번엔 다른 걸 선택했잖아요. 덕분에 자신감이 좀 생겼어요. 앞으로도 제게 있는 것만 나오는 게 아니라 저한테 없는 것도 선택해서 다양한 캐릭터를 해보고 싶어졌죠. 말 그대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이 배우라고 했을 때 지금 제가 배우랑 좀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도전이라는 단어가 확고하게 들립니다. 아무래도 스스로 어울리지 않다고 느끼는 캐릭터를 선택하기까지의 각오가 와 닿은 단어이기도 하고요.
그래요. 도전한 거 맞아요. <달콤한 나의 도시>때도 도전이었지만 <애자>는 제게 완벽히 없는 모습이니까요.
그에 앞서 말씀하신 자신감은 캐릭터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느낀 건가요, 아니면 영화를 끝내고 난 뒤에 얻어낸 감정인가요?
선택하는 데선 자신감이 있을 수 없죠. 용기가 필요하죠. 진짜 고민 많이 했어요. 제가 보여줄 수 있는 것도 많고, 멋진 역할이고, 제가 이렇게 표현하는 거 우리 엄마한테도 보여드리고 싶고, 이런 제 연기를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할 거 같아서 하고 싶은데 자신이 없는 거에요. 그런데 그 수간 안 하면 후회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든 거죠. 그래서 질러놓고 본 거에요. 그 다음에 생각하자. 그래서 그 다음부턴 그냥 노력만 열심히 했어요. 사투리도 배우고, 주변에 애자 같은 사람들 있으면 그 캐릭터의 거친 행동이나 표정을 눈에 담아놓고. 그러면서도 반신반의했죠. 이걸 흉내 낸다고 되겠어?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사람의 일상을 전부 다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일부분을 떠서 드러내는 거니까 세분화해서 표현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재미도 느꼈고요.
사실 <애자>는 모녀 관계를 다룬 신파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죠. 하지만 일반적인 신파에 비해 웃음이 많이 동원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 웃음은 대부분 엄마와의 일상적인 대면 가운데 발생하고요. 어쩌면 실생활에서의 어머니와의 관계를 많이 돌이켜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있었죠. 저도 엄마랑 툭탁툭탁 하니까요. 딸은 기본적으로 다 그래요. 아들은 덜 그러죠. 대신 아들보다 딸이 더 깊어요. 사사로운 정들, 미운 정, 고운 정,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쓸데 없이 말해서 싸우는 거. 불필요한 말 같은 거. 나가면서 괜히 궁시렁궁시렁. 애자도 그러잖아요. “절간에 돈 쳐다 바른다고 뭐 죽은 사람이 살아나길 해, 뭘 해?”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엄마 속을 건드려놓고 엄마가, “네 지금 뭐라 그랬노?” 화내면, “아무 말 안 했다.” 그러고. 그런 과정들이 남이 보기엔 웃기지만 누구나 일상적인 일이죠. 서로 사랑하기도 모자란 판에 굳이 서로를 자극한단 말이에요. 그게 우리나라식 모녀 관계의 특징 같아요. 자극해놓고 미안해하기. 알고 보면 서로 제일 많이 미안해하잖아요. 저도 많이 그러거든요. 엄마가 맨날 차 뒷좌석에 타요. 애자 엄마처럼. 아무렇지 않게 ‘음.’하시면서 뒤에 딱 앉아있어요. 사모님처럼. 그럼 전 기사고. (웃음) 친구처럼 타면 되잖아요. 그래서 “엄마는 옆에 타면 되지, 왜 맨날 뒤에 타?” 툭 던지죠. 사실 이것도 그냥 가면 되는 건데 꼭 그렇게 돼요. 부모님들은 항상 말해주지 않는 게 많으니까 뭔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긴 해요. 어쨌든 엄마는 아직도 항상 뒤에 타요. (웃음)
<애자>에서처럼 앞자리가 무서우셔서 그런 건 아니겠죠?
그렇진 않으세요. (웃음) 그리고 가만히 앉아계시면 괜찮은데 막 다 뒤지고, 쓰레기 정리하고, 이러면 진짜 또 막 신경 쓰이는 거에요. 난 그냥 이렇게 편한 게 좋다고, 내가 치울 거라고 해도 엄마는 다 치우고, 그렇게 치우고 나면 내가 뭔가 찾으려 보면 또 없어지고. 그렇게 투덜투덜하는 게 영화에서 좀 과장되게 나타나는 거죠. 사실 전 애자보다 착해요. (웃음) 그리고 저도 공감이 가는 그런 모습이 일반 사람들에겐 더 공감이 가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리고 약간 겸연쩍잖아요. 영화에서 엄마랑 딸 얘기 나올 때 너무 착한 딸 나오면 좀 그렇잖아요. 그런데 <애자>는 보러 와도 일단 자신감이 생긴단 말이에요. 내가 쟤보단 나으니까. (웃음) 그러니까 좋을 거 같아요. 피부로 드러나는 감정들이 좋은 거 같고요. 진지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희 누나에게 엄마랑 같이 보라고 했더니 못 보겠다고 하더라고요.
왜요? 쑥스럽다고?
찔릴 거 같대요.
아~~! (웃음) 엄마랑 딸이랑 보면 좀 그럴 거 같긴 하죠. 그런데 저희 엄마나 저희 엄마 또래 정도 되시는 배우 분들도 <애자>를 많이 보셨는데 다들 자기 엄마 생각난대요. 그래서 괜찮은 거 같아요. 그 연세에도 자기 엄마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성장기 시절의 엄마, 자기가 못해줬던 엄마, 이런 모습들.
밖에서는 다들 어른이지만 막상 집에 들어가서 엄마 앞에 가면 다들 애가 되는 것 같아요. 엄마도 때때로 자식 앞에선 애처럼 투정 부리시는 거 같고요.
우리가 지금은 이렇게 점잖게 있지만 집에 들어가면 정말 누가 볼까 봐 창피하잖아요. (웃음) 별거 아닌 걸로 막 싸우고. 그런 가족간의 비밀은 누구나 있는 거 같아요. 그만큼 가까운 관계니까.
이전까진 어머니께 방송에 나오는 것조차도 귀띔해드리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애자>는 처음으로 어머니께 보여드리고 싶어서 선택한 영화라고 말씀하셨더군요.
대본 선택할 때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애자>를 통해 딸로서의 진심을 담아서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나 봅니다.
맞아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요.
예. 예전에 돌아가셨죠.
그런 점에 있어서는 애자와 최강희 씨 사이에 닮은 점이 있다고 느꼈어요. 애자 역시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었으니까요.
아, 그러네요?
그런 부분에서 캐릭터와 모종의 공감대를 이룬 적도 있었을 거 같습니다.
초반에 애자가 엄마를 진짜 싫어하잖아요. 엄마도 애자가 보기도 싫다고 하고요. 그런데 엄마와 누워서 화해할 때가 많이 생각났죠. 제가 엄마를 생각하면서 찍기도 했지만 그 부분만큼은 저희 아빠가 많이 겹치는 유사 경험이 있거든요. 제가 청소년드라마 <나>를 찍던 스물한 살에 아빠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두 달 정도 아프셔서 아빠 곁을 지켜야 할 때가 있었죠. 영화에서 엄마랑 애자가 병원에서 탈출해서 회 먹으러 나가잖아요. 그런 것처럼 저도 병원에서 몰래 아빠를 빼내서 바람 쐬고 그런 적이 있었거든요. 그러면 안 됐는데. 사실 아빠랑 되게 어색한 사이였어요. 그런데 아빠가 돌아가실 때가 가까워져서 그러셨는지 몰라도 저한테 병원 침대에 올라와서 같이 자면 안되겠냐고 하시는 거에요. 전 너무 싫었죠. 지금 거기에서 병수발 드는 것도 싫었는데. 좋아하는 관계도 아니고, 아빠를 잘 알지도 못해서 어색한 상황에서 그러고 있으니까. 그런데 거기서 아빠랑 같이 자면서 처음으로 대화도 해보고 아빠가 미안해하는 만큼 저도 미안해하다 휠체어를 타고 같이 나왔어요. 그렇게 화해한 거죠. 그러면서 하루 동안 좋은 추억을 만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 기억이 없었다면 아빠에 대한 기억도 달라졌겠죠.
부모자식은 아무리 미워도 끊을 수 없는 사이 같아요. 영화에서 엄마가 애자한테 사고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만약 엄마가 심각하게 잘못해서 집안이 아주 큰일을 당했고 그걸로 인해서 엄마와 관계를 의절하겠다 결심하더라도 그런 결심은 한번에 무너질 수 있을 만큼 지울 수 없는 관계인 거 같아요. 사실 제가 우리엄마를 생각하고 대입시키면서 연기에 몰입하려고 하진 않았어요. 아빠를 특별히 생각하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대기하면서 눈물이 많이 났던 거 같아요. 우는 신이 아니었는데도 그냥.
지금은 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밖에 없지만 언젠가 엄마가 된다면 엄마로서의 입장도 더욱 잘 알게 되겠죠. 나이가 더 든다면 엄마를 연기할 날도 올 거고요. 막연한 질문이지만 한번이라도 엄마라는 역할을 연기하는 자신에 대해서라도 생각해 본적 없나요?
없어요. 못할 거 같아요. 새댁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웃음) 그건 제가 할 수 있을 때 할 거 같아요. 애자도 할 수 있을 때 한 거니까요. 상상도 안 되고.
도저히 가늠할 수 없나 보죠.
예. (웃음)
대부분 최강희 씨를 말할 때 4차원이라는 수사를 동원합니다. 본인이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한 말을 듣게 됐을 때 기분은 어떤가요?
저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런 짓을 했으니 그런 말을 듣나 싶어요. 오해할 수 있겠다 생각하죠. 그리고 나쁘게 부르는 건 아닌 거 같고, 귀엽게 봐주시는 거 같아서 다행이고요. 지금은 제 스스로 그런 이미지를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쉽게 우울해지는 성격이라고 들었습니다. 혼자 있을 땐 생각도 많아진다고 들었고요.
저는 혼자 있을 때 생각을 많이 하고 그만큼 우울해지는 것 같아요. 우울한 감성을 좋아해서 즐기는 편이기도 하고요. 등 따시고 배부르면 아무 생각도 안 나잖아요. 그럼 약간 섭섭할 때도 있죠. 그래서 그런 순간을 즐기고 싶어요. 앞으로 다시 또 못 올지도 모르는 순간이잖아요. 물론 힘들었던 때로 돌아가긴 싫죠. 하지만 그 순간은 그때뿐이고 그때에만 얻을 수 있는 감성들이 있으니까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빨리 누릴 수 있는 감성들은 미리 누려놓자고. 지금처럼 깨끗한 집이 아니라 옛날에 단칸방 같은 곳에 모여 살면서 다같이 잠자고 그럴 땐 좀 싫었죠. 그래도 그 때 맡았던 냄새나 온기는 잊을 수 없단 말이에요. 지나고 나면 다 소중한 거 같아요.
어려운 과거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되니까요.
대신 돌아가긴 싫죠. 그러니 그것도 누려야 할 때 누려야 하는 것 같아요.
개인적인 생각이 많은 만큼 혼자만의 공간에 대한 애착도 클 것 같습니다.
저 작업실 생겼어요. 친구 작업실에서 한 평만 빌려서 제가 꾸며놨거든요. 그 한 평에 텐트를 쳐 놓은 적도 있었고요. 지금은 TV를 갖다 놓고 DVD를 가득 쌓아놨어요. 제 공간이 생긴 거죠.
무엇을 위한 공간일까요?
(한참 생각하다가) 그러게. (웃음) 그냥 상징적으로 좋던데요. 제 공간이 있다는 게.
그냥 그 누구에게도 구애 받을 필요 없는 한 평짜리 자유군요. (웃음)
전 독립해서 살 생각이 추호도 없는 사람이에요. 엄마가 나가라 그래도 싫은 사람이거든요. (웃음) 그냥 엄마랑 계속 사는 게 좋고, 계속 살고 싶고, 그러면서도 개인공간은 갖고 싶잖아요. 그래서 그냥 내 공간이 있다는 게 좋아요. 그냥 갈 데가 있다는 거? 월세인데요, 한 평에 15만원. (웃음)
주변에 친한 분들이 몇 분 있잖아요. 몇 달 전에 압구정CGV에서 김숙 씨와 송은이 씨와 함께 있는 걸 우연히 본 적이 있어요.
제가 누구와 같이 있는 걸 본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분들과 목격될 가능성이 커요.
누구나 자신에게 편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 건 당연하지만 최강희 씨는 편애하는 지인들도 정해져 있을 것 같습니다.
그냥 정하는 건 아닌데 편한 사람만 만나다 보니까 반복적이에요.
최강희 씨에게 편한 분들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저희 언니들하고 만나면 진지한 대화를 아예 안 해요. 속 얘기를 잘 안 하죠. 그냥 만나서 노는 거에요. 그게 너무 좋아요. 속마음 물어보고 안 그래요. 제 힘든 얘기하면 개 무시당하고 막 놀려대거든요. 공감해주고 위로해주는 그런 집단이 아니에요. 그래서 좋아요.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면 답답해지진 않나요?
사실 잘 털어놓기도 했고, 예전에 털어놓는 사람도 있었어요. 언니들은 놀려서 안 하고. (웃음) 그런데 점점 못하겠어요. 자꾸 털어놓다 보면 말이 다른 데서 자꾸 이상하게 변하니까요. 추측이 많은 사람들은 제가 말을 안 했겠거니 생각하시는지 제가 하지도 않은 행동조차 앞서서 고민해주는 경우도 있고, 그런 게 조금 걸려서요. 그래서 요즘은 잘 얘기하지 않아요. 그래서 미니홈피를 많이 좋아해요. 알듯 모를 듯 음악으로 대신 얘기할 때도 있고 그래요.
고민을 직접적으로 공유하기 보단 간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덜어내는 게 편한가 봅니다. 우울한 감수성이 짙은 음악도 좋아하는 것 같더군요. 직접적인 대화보단 그런 매체에 감정을 담아서 흘려 보내는 것에 익숙하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맞아요. 해소가 돼요. 나름대로 공유도 되는 것 같고. 그리고 종교.
종교요?
기독교를 믿는데요. 요즘 자꾸 통일교라는 사람이 많아서, 4차원이라고 생각하셔서 그런지 최강희 통일교가 검색어에 뜨는 거에요. (웃음) 그런데 기독교고요. 매주 교회에 가요. 저는 원래 눈물이 별로 없는 편이에요. 친구들하고 그런 진지한 얘기도 잘 안 하고요. 그런데 교회 가서 한번씩 비워내는 거 같아요. 욕심도 비우고, 화내보기도 하고. 만약 그런 신앙이라도 없었으면 꽤 갑갑했을 거 같아요.
교회는 언제부터 다녔나요?
원래 어렸을 때부터 다녔어요. 그런데 지금은 같이 다니는 사람이 많아져서 더 열심히 다녀요.
원래부터 독실했던 건가요, 아니면 어느 순간부터 종교를 통해 마음이 편해진다는 걸 느낀 건가요.
예나 지금이나 저는 항상 제가 어느 곳에서 무얼 하든 저를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어떤 여자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장면이 나오는 공익광고를 봤는데 리와인드로 진행되는 광고였어요. 자전거가 점점 뒤로 가다가 갑자기 여자가 교복을 입고, 어느 순간 더 어려져서 초등학생, 유치원생이 되더니 어느 순간 뒤를 딱 보면 엄마가 손을 잡고 있는 거에요. 항상 뒤에 있었다는 거죠. 전 제 엄마랑 보이지 않는 신이 제게 그랬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많이 우울하지 않았던 거 같고. 제가 어떻게 살아도 나쁘지 않게 사람 흉내를 내면서 살 수 있는 건 엄마가 저를 위해 기도해준 탓이라고 생각해요.
나름대로 긴 경력을 유지하며 배우로 살아오고 있어요. 배우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가요?
좋아요. 제 성격에 해소도 많이 되고요. 그러니까 해소라 하는 건, 사실 제가 그 사람을 웃길 수 있는 사람은 아니더라도 연기로 이 사람을 웃기면 이 사람이 웃기로 되어있고, 울고 싶은 적은 없어도 울어야 하는 연기가 있다면 속을 끄집어내서 한번 울 수도 있고요. 그런 부분에서 제가 해소되는 것 같아요. 제가 지금 당장 잘할 수 있는 게 연기이기도 하고요. 어떻게 굴러오다 보니까 아직 여기 있는데 사실 <애자>하면서 연기를 때려 칠까 했던 적도 있었어요.
왜요?
잘 안 되는 거 같아서요. 그래서 고민했죠. 내소사 신에서, 엄마랑 싸우는 장면 찍을 때 아침에 찍고, 해질 때 즈음에 다시 찍을 기회가 있었어요. 그 동안 쉬어야 되는데 쉬면서 꼼짝달싹할 수 없는 거에요. 밥을 먹을 수도 없고. 앞에 부분에서 잘한 건지 도통 모르겠다 싶은 거에요. ‘내가 이걸 잘 표현하고 있는 건가’ 싶고, ‘이건 너무 어려운 직업이구나’ 생각이 들어서 ‘끝나고 다른 걸 알아볼까, 내가 뭘 잘하나’ 생각해봤는데 잘 하는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거에요. 보니까 그나마 제가 할 줄 아는 것 중에서 연기를 제일 잘 해요. 그래서 죽기 살기로 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 열심히 찍었죠.
예전엔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나요?
한번도 없었죠. 아니, <달콤한 나의 도시>때 한번. <달콤한 나의 도시>때부터 전 사춘기였던 거 같아요. 제 나이 때 역을 맡으니까 오히려 되게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거에요. 제가 어디 속해있는지도 모르겠고. 연예인인지, 배우인지, 어른인지, 중간인지, 다 헷갈렸어요. 연기도 기술인지, 순수함인지, 다 섞여버려서 혼란스러웠죠. 그래서 그때 한번 욱해서 고민했던 적이 있는데 아마 당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을 거에요. 당장 때려 칠까 했는데 돈이 없어서 못하고 있다고. 그런데 지금부터 하는 건 제 선택이에요. 이게 참 좋은 직업이구나 깨달았으니까요. 좀 더 얘기하자면 주변 친구들을 우연히 만나서 얘기하다 보면 다들 고민이 많더라고요. 다른 걸 하고 싶어도 현실상 모아둔 돈이 없으니까 다른 걸 할 수 없고,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다 해도 회사원이니까 섣불리 뭘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그래서 나는 참 좋은 직업을 갖고 있구나 싶어졌어요. 할 줄 아는 걸 좋아서 하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참 다행이다 싶었죠.
98년도에 <여고괴담>으로 스크린에 데뷔하셨죠. 그 전에 95년도부터 청소년드라마로 연기를 시작했고요. 그 당시에 자신의 모습은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더 좋아요. 더 맘에 들어요! (웃음) 연기는 좀 못했는데요. 잘했던 건 지금보다 더 잘했어요. 아무 것도 없는 순수한 진정성 같은 거, 그런 건 다시 하래도 못할 걸요. 그건 그때만 가능한 거 같아서 지금도 저는 그것들이 너무나 소중해요. 지금도 분명 지금뿐일 거에요. 나중에 연기를 더 잘한다 그래도 이렇게 마음을 달고 살 순 없을 거에요.
예전 생각은 자주 하시나요?
저는 작년에도 데뷔작을 다시 봤어요. 저는 작품을 모으는 타입이 아니라서 하나도 가진 게 없어요. 그래서 제가 자료를 가진 게 없어서 팬들한테 동냥해서 봤지만 볼 때마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빛난 시절이란 생각이 들어요. 지금도 저한테 되게 소중한 것이라 의심치 않고요.
큰 욕심은 없어도 작은 집착이 커 보입니다.
집착이 너무 크죠. (웃음)
언젠가 <애자>를 다시 보게 될 날도 오겠죠.
그럴 거 같아요. 사실 전 엄마보다는 제가 빨리 죽었으면, 아니, 같이 죽었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저보다 먼저 가실 거 아니에요? 그런 생각하면 겁나요. 그게 너무 무서워요. 가끔씩 전 그래요.
아무래도 엄마가 최강희 씨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 생각되는 만큼 애착도 대단하겠죠.
집착해요. (웃음) 지금 <애자>얘기 하시니까 느끼는 건데 나중에 <애자>를 다시 보게 되면 되게 슬플 거 같아요. 지금부터 잘 해야겠어요.
<애자>를 지난 최강희 씨에게 남은 변화는 무엇인가요?
용기가 좀 생긴 거? 자신감이 좀 생긴 거? 그리고 엄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좀 많아진 거. 그리고 관객 분들도 이런 기회를 얻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애자>가 줄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는 거 같거든요.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 기회가 있을 때 해야 된다는 거?
편모 아래 자란 딸은 어려서부터 제 어미 속을 썩이는데 이골이 났다. 남다른 글솜씨로 작가를 지망하는 애자(최강희)는 공부도 잘하지만 땡땡이도 잘 치는, 고무공처럼 튀는 아이다. 비만 오면 학교는 나 몰라라 부산 앞바다로 뛰쳐나간다. 출석일수가 모자라 졸업을 할 수 없다는 선생님의 경고에 엄마(김영애) 속만 까맣게 탄다. 애자 역시 저보다 제 오빠에게 극진한 정성을 쏟는 어머니가 야속하기만 하다. 공부도 못하는 제 오빠는 유학까지 보내주면서 유학 가고 싶다고 보채는 자신에겐 되레 역성인 엄마가 미덥기만 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성년이 돼서도 애자는 여전히 엄마 속을 태운다. 시집갈 나이가 지났는데도 좀처럼 시집갈 생각은 없고 작가가 되겠다며 허송세월만 보내는 것 같은 딸래미를 보는 엄마는 속이 탄다.
예나 지금이나 애자는 엄마에게 ‘눈엣가시 같은 년’이다. 하지만 눈엣가시 같아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자식’을 나 몰라라 할 순 없다. 평행선과 같은 거리감을 두고 좀처럼 다가서지 못하는 모녀는 특별한 계기와 함께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여나간다. 서울에 홀로 사는 애자가 잠결에 엄마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다 엄마의 앓는 소리를 듣게 된 후, 득달 같이 엄마가 사는 부산으로 내려가게 될 때, 애자의 마음에 침잠(沈潛)해있던 진심이 동요를 일으킨다.
<애자>는 좀처럼 서로의 본심에 접근하지 못하던 모자의 오랜 갈등 속에 잠재돼있던 애틋한 속내를 드러내고 이로써 심금을 울리는 가족 신파다. 서로에게 모진 말을 던지며 뒤돌아 서다가도 다시 서로를 향해 뒤돌아보게 되는 가족의 진심을 비춘다. 모정을 연출하고 죽음으로 방점을 찍는 <애자>는 분명 강력한 파토스를 전달하고 마는 영화다. 비극적 피날레를 예감하게 만드는 중반부부터 페이소스를 축적해나가다 그 끝에 다다라 어김없이 강력한 신파적 에너지를 분출한다. <애자>는 분명 모정과 죽음을 가로지르며 눈물로서 방점을 찍는 영화다. 켜켜이 쌓아나간 감정의 둑을 무너뜨린 뒤 눈물의 방류를 요구한다.
그렇지만 <애자>는 주체할 수 없는 페이소스를 넘쳐내며 관객을 비극적 심상으로 밀어 넣는 최루성 신파와 거리를 둔 작품이다. 애자의 학창시절을 발랄하게 묘사하는 도입부처럼 <애자>는 심심찮게 캐릭터의 개성을 적극 활용한 가족적 코미디를 연출하며 신파를 가늠하기 어려운 생기를 감지하게 만든다. <애자>는 가족코미디와 멜로드라마를 이어 붙인 영화처럼 전후반부의 양상이 다른 작품이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온도차는 신파적 형태로 귀결되는 <애자>의 전반적인 감정이 절제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는 동시에 전후반부의 감정적 대비 속에서 결과적인 감정을 더욱 짙게 물들이는 보색적 효과를 낳는다. 물론 때때로 상황에서 지나치게 엇나가는 코미디가 안일하게 동원되어 감정의 수순을 방해하는 경우가 눈에 띄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애자>가 연출하는 웃음과 눈물의 수위는 안정적인 편이다. 무엇보다도 색채가 다른 두 정서의 융화를 통해 결정을 이루는 클라이맥스가 감정적 자극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상황적 이해를 더한다는 점에서도 탁월하다.
<애자>에서 중요한 건 비극의 주체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그 연민을 깨닫는 이의 변화다. 고통을 맞이하는 자에 대한 동정만큼이나 이를 지켜보는 자가 뒤돌아 흘리는 눈물의 심정이 마음을 울린다. 엄마와 원수처럼 지내던 딸이 엄마의 죽음을 직감하고 그 삶을 좀 더 연장하려 할 때, 모녀는 자신의 마음 속에 묵혀둔 진심을 일거에 방출한다. 무엇보다도 결말부에서 죽음을 묘사하는 형태는 <애자>에서 가장 인상적인 면모다. 죽음을 통해 궁극적인 감정적 고양을 이루는 <애자>는 죽음을 선택하는 방식을 통해 비범한 면모를 드러낸다. 감정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과감한 선택을 이행한다. 누군가의 생을 이어나가기 위해 애쓰는 자는 그 삶이 계속되는 동안 끝을 체감할 수 밖에 없다. <애자>는 죽음에서 모든 감정을 방출하기 보다 그 순간을 이겨내고 그 너머의 삶을 비춘다. 엄마의 빈 자리에서 슬픔을 이겨내고 제 삶을 채워나가는 딸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본다.
누군가의 자식이자 누군가의 부모가 될 모두에게, 좀 더 범위를 좁히자면 누군가의 딸이자 누군가의 엄마가 될 여자들에게, 엄마란 이름은 쉽게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고 마는 것이다. 마음에 없는 말을 던지고, 뒤돌아 후회하는 건 대부분의 부모와 자식 사이를 채우는 관성적인 버릇과 같다. 특히 가족을 위해 헌신하면서도 정작 당신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한국적 모정을 공유하고 있을 이 땅의 대부분은 <애자>와 같이 모성애를 담은 영화의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당할 수 밖에 없다. 엄마는 신파다. <애자>는 그런 현실적 감정을 스크린에 옮겨 담는다.
무엇보다도 두 배우의 어울림은 <애자>를 빛내는 가장 큰 수훈이다. 추와 같은 무게를 얹는 김영애와 풍선처럼 분위기를 띄우곤 하는 최강희는 <애자>에서 적절한 균형을 이룬다. 갈등과 화해로 나아가는 모녀의 감정적 소통은 두 배우의 앙상블을 통해 진심을 확보한다.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이야기를 하는 동시에 감정의 진전 역시 예상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애자>에서 중요한 건 그 뻔한 이야기에 얼마나 진한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캐릭터의 관계변화를 통해 현실성을 얻고 진정성마저 확보하는 <애자>에서 두 배우는 확실하게 제 임무를 수행했다.
방금 홍보사 직원분과 대화하는 걸 듣게 됐는데 예능프로에 출연하셨다는 거 같더군요.
예. <야심만만>. 내가 그런 데도 다 출연하고, 이런 일도 있네요. (웃음) 나이 얘기가 나오길래 나는 몇 년 있으면 연금 나온다 그러니까 다들 넘어가더라고요. (웃음) 사실 저는 쇼크를 줄이기 위해서 계속 스스로 입력시켜요. 곧 60이다, 이렇게.
예능프로에 출연하는 모습은 뵌 적이 없었던 거 같은데요.
처음이에요, 처음. 만약 제가 일기라도 썼다면 일기장에 적어둘 텐데 일기를 안 써서. (웃음)
시사회 무대인사 때 많이 긴장돼 보이시던데요.
너무너무 긴장됐어요. (웃음) 제가 요즘 청바지를 많이 입고 다녀서 굽이 낮은 신발을 많이 신어요. 그런데 오랜만에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걷는데 막 넘어질 거 같더라고요. 그리고 원래 잘 떨어요. 사람 있는 곳에 갈 때 좀 많이 긴장해요. 카메라는 안 무섭지만 사람은 좀 무서워해요. 시사회 무대에 나가는 것도 처음이었고, 그렇게 많은 기자 분들 앞에 서보는 것도 처음이었거든요. 그리고 3년 만에 연기를 하는 거잖아요. 3년 만에 카메라 앞에 서는 것도 떨렸는데 그 많은 기자 분들 앞에서 시험치고 시험점수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거 같아서 너무 무섭더라고요. “쟤 연기 왜 저래?” 이런 소리 들을까 봐.
선생님 정도의 오랜 경력이면 그런 자리에 서는 것쯤은 대수로운 문제가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본인에겐 떨리는 순간이었나 보네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나 봐요. 그런데 안 그래요. 아이 낳을 때마다 힘든 건 마찬가지에요. 작품도 똑같아요. 그 인물이 나한테 들어올 때까지, 내게 익숙해질 때까진 굉장히 많이 고통스러워요. 다른 욕심은 없어도 이건 있어요. 내 자존심. 김영애 그러면 “그래, 연기 잘 하지.” 이런 칭찬을 듣고 싶어요. 예를 들어서 <애자>에서도, “그래, 엄마는 김영애니까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 이런 칭찬 듣고 싶은 거죠. 적어도 제가 하는 역할만큼은 제가 최고라는 소릴 듣고 싶어요. 그리고 그걸 제 자신도 인정할 수 있어야 되고 남한테도 인정받고 싶죠. 그게 좀 강해요.
홍기선 감독님께서 그러셨죠. <애자>의 어머니 역할은 처음부터 김영애 씨 몫이었다고요.
그건 아니었어요. (웃음) 찍다 보니까 저한테 정들어서 그렇게 마음이 바뀐 거지 처음엔 아니었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찍으면서 그러더라고요. “야, 엄마 아니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어.” 그런 거죠. 지금 와서 보니까 김영애가 아니고선 생각이 안 된다는 거죠. 모든 사람들에게 바로 그런 말을 듣고 싶어요. “그래, 김영애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 칭찬을 들어야 비로소 만족할 수 있는 건가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족하긴 쉽지 않죠. 어려워요. 저는 모니터 잘 하지 않아요. 모니터 잘 하지 않는 배우로 알려졌거든요. 모니터 하기 싫어요. 제 연기가 만족스럽지 않으니까. 왜 얼굴이 저렇게 밖에 안돼. 저 정도 깊이 밖에 없어. 자꾸 이렇게 되요. <애자>도 1차 편집본 봤을 때 굉장히 실망했어요. 좀 더 폭넓고 깊이 있는 표현이 나올 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까 한심했죠. ‘야, 여태 60여 년을 살아오고서도 너한테 나타나는 게 그것밖에 안되니’ 싶더라고요.
<애자>에서도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많았나 보네요.
그럼요. 만족스러운 부분이 얼마나 되겠어요. 단지 내가 어떻게 했던 지간에 칭찬이 듣고 싶은 거죠. (웃음) 그래도 그게 제 능력이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 그 다음은 능력 밖이니까 포기해야죠. 그래서 그렇게 떨리는 거고, 평가 받는다는 게 무서워지는 거에요.
3년 정도 연기를 중단하셨던 공백이 끼치는 영향이 있던가요?
처음에는 집중력이나 순발력이 많이 떨어지고 예전 같지 않아서 굉장히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한달 동안 굉장히 많이 힘들었죠. 눈 혈관도 터지고, 체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원체 힘들었던 시간이기도 했고. 그 감각을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영화적인 시스템이 과거에 왕성하게 활동하시던 때와 많이 달라졌잖아요. 이번 <애자>현장에서도 많은 차이를 느끼셨을 것 같은데요.
요즘 젊은 주연 배우들이 영화를 하고 나면 텔레비전을 많이 기피하죠. 왜 그런지 이해가 갔어요. 일단 영화는 작품이 완전히 나와있는 상태에서 제작되지만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같은 경우는 쪽대본 들고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잖아요. 한국영화가 모든 시스템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해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한국영화가 하는 영화들마다 손님이 많이 들어서 계속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오랜만에 영화에 출연한 만큼 현장 분위기를 느끼는 것도 오랜만이었을 것 같은데요. 어쩌면 그 새로운 분위기를 통해 신선한 자극을 느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예. 그랬어요. 그래서 행복했고요. 난 우리 감독님을 참 잘 만난 것 같아요. 자칫하면 제가 구닥다리 배우처럼 될 수 있었던 부분을 참 많이 다듬어줬죠. 신인 감독이지만 많은 걸 집어줬어요. 제가 감각을 찾는데 굉장한 도움이 됐죠. 강희처럼 마음이 통할 수 있는 후배를 만나서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던 거 같고요.
최강희 씨처럼 김영애 씨도 젊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이 얼마나 돌이켜지실진 모르겠지만 그런 젊은 배우들을 보면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이켜보는 경우는 없나요?
그런데 환경이 너무 다르니까. 저는 몇 십 년 동안 혼자서 대본보고, 의상 구하고, 현장 가고, 메이크업까지 다 했어요. 그 당시엔 누구나 다 그럴 수 밖에 없었고. 지금은 제작 분위기가 너무 좋아졌잖아요. 나 혼자 옛날 생각이나 한다고 뭐가 되는 것도 아니니까, 세상이 변하면 변하는 대로 세상을 따라가면 되죠. 가끔 과거 얘기하는 분들 많잖아요. 그런데 사실 저는 제 성격 탓이기도 하겠지만 옛날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아요. 지나간 얘기 별로 안 해요. 이젠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앞으로 내 인생에 어떤 일들이 있을 건가가 궁금하지,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아요. 심지어 전 제 작품을 하나도 소장하고 있지 않아요. 심지어 사진도 별로 정리해놓은 게 없어요. 그런 건 흥미가 생기지 않아요.
1971년에 데뷔한 이후로 지난 38년간,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수많은 족적을 남겨오셨는데요. 특히 7~80년대엔 정말 많은 영화에 출연하셨잖아요. 1년에 4~5편씩 나온 경우도 있고요. 엄청난 다작배우였던 시절이 있습니다.
제가요? 전 기억 잘 못해요. (웃음) 제가 주인공을 무지 많이 하긴 했죠. 그런데 기억나는 건 몇 작품 밖에 없어요. <설국>하고 <겨울로 가는 마차>?
임권택 감독님 작품에도 3편이나 출연하셨죠.
<왕십리>도 했고, 그랬었어요. 그랬네.
고영남 감독님 영화에도 여러 번 출연하셨더군요.
고영남 감독님은 특히 절 예뻐하셨어요. (웃음)
78년도에 개봉된 <절정>으로 영화기자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맞아요. 너무 오래 전 일이지만 그때 영화에서 갈비뼈가 다 드러나게 몸을 있는 대로 웅크렸던 기억이 나네요. 가슴 보이는 게 뭐 그리 부끄럽다고 힘들어했는지 몰라. 사실 제 가슴이 좀 약한 편이거든요. (웃음) 물론 그때는 그런 게 굉장히 큰일이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그 외에 좀 야한 영화도 꽤 했었어요. 베드신 있는 거. 그러다 아이를 낳았고 아이가 크면서 비디오샵이 한참 유행했죠. 아이가 2~3살 때, 걔 손을 잡고 만화영화를 빌리러 다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에요. ‘얘가 커서 엄마가 야하게 나오는 그런 영화를 보면 어떻게 하지?’ 사실 그런 생각 때문에 그때부터 갑자기 영화를 끊은 거에요.
아무래도 어머니 입장에서는 걱정이 될만한 일이겠죠.
지금 생각해보면 별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닌데 말이에요. 작품에 대한 자신만 있다면 대단한 일은 아니죠. 이건 예술에 속하는 분야고, 엄마 일이라고, 이렇게 설명하면 되는데 그때는 거기까지 생각이 갈 수 없었죠. 하여튼 아이가 이 영화를 보면 안되겠단 생각만 들었어요. (웃음)
세월을 보내고 나니 지난 시절에 느꼈던 어려움이 작게 느껴질 때가 있으시나 봅니다.
지금은 이제 그렇게 대단한 일도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에요. 모르겠어요. 폭풍을 헤치고 나오면 웬만한 작은 파도는 무섭지 않잖아요.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사실 작년 동안 개인적인 신변에 큰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경험들도 힘들었던 당시를 지나 지금에 이르게 되니 다르게 보이는 지점이 있을 것 같은데요.
전 작품을 할 때마다 힘들다고 느끼는 건 매번 똑같아요. 그리고 굳이 연기를 떠나서라도 사람이 살아가며 겪는 어려움이나 힘든 시간들을 헤치고 나오면 그게 다 나를 키우는, 나를 더 깊이 있게 만들어주는, 내 폭을 넓혀주는 거름이 되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해요. 젊어 고생은 돈으로 사서라도 한다고 하잖아요. 그런 믿음이 있어요. 힘든 결혼을 해서 오랜 시간 힘들게 살았고, 또 한번의 결혼을 했죠. 그리고 최근 2년 동안 두 번의 큰 일을 겪으면서 정말 힘들었어요. 지옥 같았죠. 지옥이 다른 게 아니고 이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힘든 시간을 넘겼지만 그런 것들이 지금 와서 보면 좀 더 나를 겸손하게 하고, 더 너그럽게 만든 게 아닌가 싶어요. 나를 둥글게 만들고, 또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이 더욱 감사하고 행복하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라는.
아까 말씀하신 대로 90년대 이후로는 영화 출연 편수가 현저하게 급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영화는 안 한다고 소문이 났대요. 사실 그건 아니거든요. 단지 제가 너무 바빠서 영화까지 눈을 돌리기엔 시간이 없었을 뿐이에요.
영화제작 환경변화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예전 영화 풍토는 제작 시스템을 비롯해서 모든 것들이 지금하고 많이 달랐죠. 그런데 그런 것들이 제 성격하고도 잘 안 맞았나 봐요. 제가 굉장히 낯을 가려서 사람을 잘 못 사귀거든요. 40년 가까이 이 일을 하면서도 이쪽에서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은 별로 없어요. 5사람도 안 되니까요. 제가 얼마나 폐쇄적인지 아시겠죠? 그래서 만났다가 몇 달 있다 헤어지고, 또 새로운 사람 만나고, 이런 환경에 적응이 어려웠어요. 그래서 영화를 멀리 하게 됐고 텔레비전을 바쁘게 하게 되니까 영화까지 넘볼 여유가 없더라고요.
연기적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배우라는 일도 사람과 부딪히는 일이니까요. 그 환경에 익숙하지 않으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그만큼 그걸 극복하는 게 중요했을 것 같고요.
저는 드라마도 하는 사람하고만 많이 해왔어요. 제가 좀 틀에 매이거나 구속당하기 싫어하는 편이기도 하고 굉장히 폐쇄적이라 사람을 사귀기 어렵거든요. 제가 상처를 워낙 많이 받기 때문에 남한테 상처받는 게 두려워서 아예 사람 만날 생각을 안 해요. 그러니까 카메라 렌즈 안에선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연기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실제 자신의 모습과 차이를 느낀 적이 있나요?
그런데 모든 인물은 김영애에서 출발해요. 다른 배우들도 그렇겠지만 제가 하는 모든 역할엔 제가 들어있어요. 다만 그게 얼마만큼의 부분을 차지하느냐의 문제겠죠. 그래서 배우들마다의 색깔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고두심 씨가 임백무를 연기했다면 저와 또 다르게 표현됐을 거에요. 김자옥 씨가 했으면 또 달랐을 거고요.
일단 <애자>를 보는 어떤 관객이라도 자식으로써 어머니를 생각하게 될 것 같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른이 된 후에도 엄마 앞에서는 어리광을 부리게 되는 것 같아요. 결국 엄마 앞에서는 다 애인 거죠. (웃음)
누구나 다 누군가의 자식이고 여자라면 누군가의 딸이거나 엄마니까요. 그리고 우리 감독님이 시나리오부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부분들을 예리하게 잘 집어냈어요. 사실 저는 VIP시사회 때 영화를 처음 봤거든요. 그런데 제대로 볼 수가 없었어요. 편집순서를 바꿨다던지, 속으로 ‘어머, 왜 저건 잘려나갔지? 원래 다음 대사는 뭔데’ 이런 생각만 하다 보니 몰입할 수 없었죠. (웃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감독님이 누구보다 예뻤어요. 사랑스럽고. (웃음)
최종 편집본은 그때 처음으로 보신 건가 보죠?
예. 그 전엔 편집 방향도 정해지지 않았을 때 1차 편집된 미완성본을 40인치 모니터로 봤죠. 기술 시사는 전날 새벽 2시에 했대요. 그날 오전부터 계속 스케줄이 있었으니까 그건 볼 수도 없었죠.
아무래도 시나리오가 만족스러웠으니까 영화를 선택하신 거겠죠?
시나리오를 받았을 땐 제가 굉장히 힘들었던 시간이었어요. 그때는 그걸 벗어나지 못했었죠. 이혼 사실도 알려지지 않았을 때 선뜻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그저 그 시나리오가 너무 재미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거죠.
어쩌면 어머니로서의 공감대도 작품 선택에 일조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너무나 잘 알 수 있고, 그만큼 쉽지만 내 이야기 같았어요. 제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작품성도 있어야 하지만 재미도 있는 이야기에요. 이 시나리오는 그 두 가지 면에서 모두 저한테 괜찮다고 생각하게 해줬어요. 이걸 제대로 표현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좋은 영화가 나올 거라 판단했죠.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라고 느꼈던 장면이 있습니다. 부산에 내려온 애자와 어머니가 TV를 보고 같이 앉아있다가 티격태격하게 되고 결국 애자가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가버리잖아요. 그때 짐 싸서 방을 나가는 애자에게 어머니가 한마디 하죠. “김치 가져가, 이년아!” (웃음)
그게 우리가 너무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잖아요. 저희 어머니도 그러셨고. 그런데 어떻게 남자가 그런 걸 쓸 수 있었나 몰라요.
남자라서 모녀간의 정에 대해 완전히 이해한다 말할 수 없지만 <애자>는 모녀 간의 정서를 잘 표현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일 가깝고 닮아있으면서도 원수 같은 관계죠. (웃음)
아무래도 아들보단 딸이 어머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입장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나이 들면 딸하고 엄마가 더 친해져요. 동질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실 작품 속에서 어머니라는 캐릭터를 연기하시기 이전에 이미 실생활에서 어머니로서 살아가고 계시죠. 그래서 아무래도 어머니로서 느끼는 감정이 캐릭터의 감정으로 이입되는 느낌을 얻은 경우는 없으셨을지 궁금하네요.
저는 연기할 때 그렇지 않아요. 오직 그 상황만 생각하죠. 지금까지도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에요. 제 개인적인 감정을 연기에 담지 않아요. 단지 김영애가 표현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하죠. 물론 촬영하는 기간 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요. 우리 엄마한테 나는 이렇게 했다고, 강희하고 수다를 참 많이 떨었죠. 마음은 그런데 실제론 잘 안 된다고. 강희도 저한테 하는 것처럼만 하면 자기 엄마도 좋아하실 거래요. 하지만 잘 못하잖아요. 강희뿐만 아니라 다 그래요. 그런 얘기는 많이 했죠. 하지만 연기할 때 저는 오직 최영희로 돌아가서 그것만 생각해요. 연기하는 순간엔 그런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갈 여지가 없어요.
영화 외적인 감정은 철저히 배제한 상태에서 연기에 몰입한다는 말씀 같습니다. 그만큼 쉬운 일은 아닐 거란 생각도 드는데요. 아무래도 무의식적으로 투영될 수 있는 감정을 가려낸다는 건 그만큼 냉철한 감각이 요구되는 일일 테니까요.
제가 다른 사람 앞에서 제 실제 이미지보다 훨씬 단단해 보이거나 강해 보이는 건 제가 제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제가 연기를 제쳐두고 비로소 김영애로 돌아가는 건 오직 저 혼자 있을 때니까요. 정말 힘든 시간에 새벽 2~3시쯤 잠도 못 자고 서럽게 울었던 적이 몇 번 있었어요.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혼자 있을 때는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해요. 그때 비로소 나로 돌아온 거죠. 그 외에는 제 속을 잘 안 들어내고 잘 안 들켜요. 그러니까 생각보다 단단해 보이나 봐요. 그리고 제가 좀 이지적인 이미지로 보인다면서요. (웃음) 사실 전 자식을 걱정시키는 철없는 엄마 쪽에 가까워요. 많이 사랑 받길 원하고, 보호받길 원하고, 굉장히 여리고 상처도 잘 받죠. 그런 저를 잘 내놓지도 않고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기 어려운 편이신가 봐요.
예. 그래서 어리광도 잘 안 부리죠.
갑자기 <황진이>에서 연기하셨던 임백무가 생각나네요. 임백무는 겉으로 독하고 강한 이미지의 캐릭터지만 실은 아픈 사연을 홀로 감당해내는 처연한 캐릭터니까요.
상처가 쌓인, 말하자면 딱지가 두껍게 앉은 사람이잖아요. 예술에 대한 고집도 강하죠, 일에 있어서 완벽함을 추구한다는 점은 저와 많이 닮았어요. 사실 저는 그 인물이 참 싫었어요. 연기하면서 정말 지긋지긋하다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우리 아들이 그 여자가 엄마하고 제일 많이 닮았다고 해서 좀 놀랐죠. 저는 제가 완벽해지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한테도 그걸 요구해요. 예를 들자면 우리 아들한테도 그래요. 그렇게 하기를 원해요. 그렇게 여러 가지 면을 가지고 있는 거 같아요. 제가 사람을 많이 사귀지 못하는 것도 제가 상처받는 게 무서워서 그런 거에요. 그 상처가 굉장히 오래가고 깊게 가니까요.
1971년에 MBC공채 3기 탤런트로 연기자라는 이름을 얻으셨고, 1973년에 <수사반장>으로 데뷔했습니다. 그런데 연기자라는 직업에 흥미를 갖게 된 경위가 궁금하네요.
(웃음)
?
아니, 갑자기 좀 어이없는 생각이 나서요. 저는 공부가 하기 싫어서 상업학교 원서를 냈고 부산여상을 갔어요. 원래 아버지께선 저한테 사범대학에 가서 선생님이 되라고 하셨죠. 학교 다닐 때 성적은 잘 나왔거든요. 국민학교 때부터 줄곧. 저는 한 2~3일 반짝 공부하면 성적은 상위권에 속할 정도로 잘 나오는 편이었거든요. 10등 밖으로 떨어져 본적은 별로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얼마나 당돌하면 부모 몰래 상업학교 원서를 냈겠어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가라고 하셔서 집에서 쫓겨났고 집에 들어갈 수 없어서 한달 간 이모 집에 있었죠. 고등학교 졸업하고 1년 동안 부산 TBC총무부에서 직장생활을 했는데 너무 재미없고 힘들었어요. 그래서 다시 대학교를 가야겠다 싶어서 재수하려고 하다가 배우가 된 거에요. 탤런트를 뽑는다면서 친척언니가 너 예쁘장하게 생겼으니까 배우 한번 해보라고 원서를 사 오셨고 지원하게 됐는데 정말 돼버렸죠. (웃음) 전 그때까지도 그저 월급 주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연만 들어보면 애자가 생각나는데요.
좀 대책 없었죠. 고집 세고, 멋대로고, 적당히 영리하고. 사실 제가 이마가 넓어서 콤플렉스가 있거든요. 그런데 아버지가 무서워서 항상 단발머리로 이마 싹 올려서 머리에 핀 꽂고 다니고, 그런 부분에서는 어긋나본 적이 없었지만 마음 속은 제 맘대로였죠. 이미 그 때부터 결혼 안하고 애만 낳아서 살면 어떨까 생각도 해보고. (웃음) 전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장래 희망하면, 현모양처. (웃음) 그러면서도 사춘기 때 아버지가 너무 싫어서 야단치면 눈 똑바로 뜨고 앉아서 대들고, 맞아도 도망가지도 않고. 그래서 엄마, 할머니 속을 엄청 썩혔죠. 부모 입장에서 보면 정말 다루기 힘든 아이 있잖아요. 제가 좀 그랬어요.
아버지께서 엄하셨던 만큼 충돌도 잦았겠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꽉 막힌 분이셨어요. 학교 다니기 전까지 저는 소설책만 너무 좋아하고 천자문은 안 읽는다고 종아리를 맞고 다녔었죠. 한글을 떼고 나서부터 동화책을 그렇게 좋아했고요. 옛날엔 집에 책이란 게 없었어요. 제가 51년생인데 50년대에 전쟁 끝나고 무슨 책이 있었겠어요. 문방구에 몇 권 걸려있는 게 다였죠. 그래서 학교 끝나면 맨날 문방구 앞에 가서 조금한 게 턱 치켜들고 그걸 보고 있었어요. 주인 아저씨가 불쌍하게 보셨는지 그냥 올라와서 읽으라고 할 때까지. 그럼 쪼그리고 앉아서 그걸 보는 거에요. 그 정도로 책을 좋아했어요. 아버지께서 항상 우리를 6시 전에 깨우시고 마당에서 보건체조를 시켰어요. 그리고 나서 방에 들어가서 몰래 소설책을 봤죠. 타고 난 것도 있겠지만 어쩌면 저를 배우로 만든 건 제가 20년 동안 읽었던 책이었던 것 같아요. 거의 소설만 읽었어요. 이제 지금에 와서 알게 된 거지만 소설을 많이 읽으면 좀 현실감이 떨어지게 되는 것 같아요. 배우도 월급 주는 직원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웃음)
아버지께서도 부산 출생이셨나요?
예. 저도 스무 살까진 부산에서 살았고요.
부산 남자 분들이 좀 무뚝뚝하잖아요.
무뚝뚝하고 굉장히 권위적이에요.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한번도, “너 이거 한번 먹어라” 소리해보신 적 없어요. 원체 외동아들로 귀하게 자라서 받을 줄만 알았지, 주는 방법을 모르기도 했고. 어쩌면 기질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전 우리 엄마가 불행하게 살다 돌아가셨다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어머니에 대한 뒤늦은 연민이 깊게 자리잡았나 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엄마한테 참 못되게 굴었어요. 나이 들면서 엄마를 많이 걱정하고 제가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면서도 말은 늘 퉁명스럽고. 어쩌다 전화오면, “(격양된 어조로) 나 바빠! 빨리 얘기해!” 이랬으니까. 그래서 우리 엄마가 사근사근한 제 친구들을 굉장히 부러워했어요. 저도 제 친구 엄마들한텐 사근사근했죠. 문제는 우리 엄마한테 못했던 거죠.
그런데 그렇게 엄한 아버지 입장에서는 배우를 한다는 것 역시 용납될 수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말도 안 됐죠! 그런데 저희 고모님께서 저를 아버지께 데려가셔서 말씀해주셨어요. 내가 데리고 있을 테니까 한번 맡겨보시라고, 그랬어요.
친척 분들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군요.
그러게요.
그런데 소설을 좋아하셨다면 혹시 작가를 지망한 적은 없었을까 싶은데요.
그렇진 않았지만 학교에서 몇 번 상은 받았어요. 글짓기 같은 데서.
정말 애자랑 닮은 점이 너무 많은데요. (웃음)
다만 저는 애자처럼 술 먹고 다니거나 그런 건 없었죠. 우리 아버지는 학교 끝난 지 1시간 안에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막 학교에 전화하고 그랬어요. 도서관에서 책 봤다 해도 집에서 공부하면 되지 왜 도서관에서 책을 보냐고 뭐라고 하시고. 전 정말 속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어쩌다 남학생이 쫓아오면 네가 행실을 어떻게 하고 다녔으면 그렇게 틈을 봐서 쫓아오냐고, 저만 욕먹고 맞고 그러다 보니까 우리 아버지가 너무너무 싫었어요.
예쁜 게 죄죠. (웃음) 여전히 젊은 시절의 미모가 곱게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친척 분이 배우를 권했던 것도 그 미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옛날에는 연기력 같은 거 논하지 않고 얼굴이 좀 예쁘장하면 배우 하라는 말 많이 했어요. 어려서부터 전 아이들한테 예쁘단 소리 잘 안 해요. 제가 스스로 예쁘다고 하면 낯 두꺼운 얘기가 되겠지만, (웃음) 사실 제가 그런 소릴 정말 많이 듣고 자랐거든요. 아무래도 어려서부터 그런 소리를 듣고 자라서 그런지 자만심 같은 게 생기는 거 같아요. 그래서 전 아이들한테 그런 얘기 잘 안 해요.
정말 막연하게 배우가 된 셈인데 막상 연기를 시작하게 된 이후에 현장에서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궁금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학교 다닐 때 영화 본 거라곤 순전히 딱 한 편, <푸른 하늘 은하수>(1986)밖에 없었는데 제가 배우를 하겠다니 얼마나 황당해요. 그런데 저는 장녀라서 책임감이 강해요. 공부를 그렇게 하기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어느 정도 상위권 수준으로 점수를 올려놨던 건 아버지가 무서워서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한 탓도 있었죠. 그것도 제가 가진 어떤 책임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일단 뭔지도 모르고 월급 주는 일이라 생각해서 배우가 됐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도로 보따리 싸서 부산에 내려가야 한다면 창피한 일이잖아요. 어떻게든 여기서 붙어있어야 되니까 누구보다 열심히 했죠. 엑스트라를 하더라도 말이에요. 사실 배우가 뭔지 알고 내가 정말 이걸 해야겠다 했던 건 연기를 시작한지 5년이 지난 뒤였어요. 그때서야 비로소 배우가 어떤 건지 알기 시작한 거죠.
연기를 시작한 이후로 5년 뒤에서야 연기자로서 자각했다고 하셨죠. 계기가 궁금합니다.
그냥 하다 보니까 이게 제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일이 재미있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운명을 믿어요. 팔자 같은 걸 믿거든요. 사람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해져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단지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죠. 일단 돈은 행복의 척도와 무관하다고 생각해요. 하루 세끼 라면만 먹으면서도 ‘그래. 나는 라면이라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이럴 수 있고, ‘나는 왜 라면 밖에 못 먹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행복의 척도는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타고난 운명을 믿어요. 아마 태어날 때 제 운명이 이렇게 정해져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죠.
배우가 된 과정도 운명적이란 말에 어울리네요. (웃음)
너무 어이없죠? 그래서 사실 제가 이런 얘기 잘 하지 않아요. (웃음) 왜냐면 정말 죽기 살기로 배우가 되려는 사람에겐 모욕이 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당시 김영애 씨가 배우로 발탁된 건 김영애 씨의 가능성을 본 사람이 분명 있었기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드는데요.
1970년 10월 달에 입사해서 1971년부터 작품을 했으니까 스무 살에 시험을 봤고 스물 한 살부터 연기를 시작한 거죠. 그때는 로션도 바르지 않을 때였죠. 나중에 들었지만 그때 전 사투리도 썼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뽑힌 건 카메라 페이스가 너무 신선했기 때문이래요.
젊은 시절엔 날카롭고 예민해 보이는 인상이라 캐릭터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측면이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살도 붙었고 늙어서 얼굴이 쳐지거나 주름이 져서 그 날카로움이 좀 깎였지만 예전엔 더 심했죠. 그래서 예전엔 제 얼굴이 참 싫었어요. 연기를 하면서 충분히 얼굴로 감정이 표현됐을 거라 생각하는데 막상 보면 너무 날카롭고 뾰족해서 만들어 놓은 얼굴 같기만 한 거에요. 그런 느낌이 너무 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결국 그 얼굴을 마음에 들어 했던 분들이 김영애 씨를 자신의 작품에 선택했고, 계속적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90년도까지 정말 많은 영화를 찍었던 것일 테고요.
예전에는 보름 만에 만든 영화도 있었어요. <비련의 홍살문>(1979)같은 영화가 그랬죠. 당시엔 스크린 쿼터가 있어서 우수한 국내영화를 하나 만들면 외화를 수입할 수 있게 허가해줬거든요. 그래서 예산도 많이 들이지 않고 보름 만에 찍고 그랬죠. 제가 3박4일을 한숨도 안자고 영화를 찍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많은 밤을 셌던 기간이에요. 저는 굉장히 예민해서 어릴 때부터 방이 바뀌면 잠도 못 잤어요. 낯설면 화장실에 못 가니까 아무 것도 안 먹고 귤 통조림 같은 거나 한두 개 먹고 견뎠죠. 기억나는 게, 한 겨울 산속에서 3박4일간 잠도 안 자고 촬영하다가 밥 먹으러 내려갈 시간이 없어서 밥을 날랐던 때가 있었어요. 구르마 같은 데 앉아서 다 식은 얼음 같은 밥을 먹는데 사람 것인지, 짐승 것인지, 무더기로 쌓인 똥이 아래에 보이는 거에요. 그런데 제가 그걸 보면서도 밥을 먹고 있더라고요. 그냥 ‘저게 여기 있구나’ 그러면서 먹었어요. 저한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죠. 잠을 그렇게 3일 이상 못 자니까 그냥 말갛게 된 느낌? 그나마 그때는 젊었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몰라요.
<달려라 울엄마>의 방영이 종료되고 연기를 그만 두겠다 선언하셨던 적이 있었죠. 아무래도 사업적 이유가 일차적이었겠지만 젊었을 때 그렇게 힘들게 매진했기 때문에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아닐까요?
그건 아니에요. 그때 제가 연기를 중단한다고 그랬던 건 두 가지 이유였죠. 첫째는 두 가지 일을 병행할 수 없기 때문이었어요. 두 가지 중 한 가지만 선택해야 했죠. 연기는 저 혼자 그만 두면 돼요. 하지만 그 때 이미 회사직원은 7~80명 정도나 있었던 때였고 김영애 보고 ‘참토원’에 들어온 7~80명의 직원을 제쳐두고 난 이제 힘드니까 그만하겠다 할 수 없었어요. 그때는 그게 너무 힘들고 싫었지만 처음으로 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대한 책임감이나 사명감을 느껴서 그렇게 결정한 것이기도 했고요. 회사가 그렇게 커진 만큼 회사 일에 매달리다 보니까 연기를 제대로 할 수도 없었죠. 제가 제일 싫어하던 짓, 연기를 부업으로 삼는 짓거리를 어느 날부턴가 내가 하고 있더라고요. 게다가 나로 인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스케줄에 피해를 받게 되고, 마음은 콩밭에 놔두고 몸만 와서 대본보고 있고. ‘똥배우’라는 말이 있어요. 우리가 하는 말은 아니고 제작 분야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인데, 어떤 배우를 욕하거나 흉할 때 쓰는 말이죠. 그런데 정말 이러다간 제가 그렇게 불리겠다 싶었죠. ‘쟤 왜 저래’ 소리 들을 거 같더라고요. 또 한 가지는 그때 남편이 제가 배우로 활동하는 걸 너무 싫어했어요. 그래서 연기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어요. 계속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죠.
20대 초반부터 주연급 여배우로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자연스레 어머니 역할을 계속 맡고 계십니다. 어쩌면 그 사이에 스스로가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 때가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상실감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고요. 그걸 극복해야 하는 시절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많은 걸 포기해야 되는 일이에요. 그냥 주어진 걸 따라갈 수 밖에 없는 일이죠. 그러지 못하면 상처받아요. 그게 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나 혼자 우긴다고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결국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리고 기다려야 해요. 그래도 전 운이 좋았던 게 그냥 누구 엄마에 그치지 않고 돋보이는 역할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파도>나, <형제의 강>, <야망의 전설>같이, 누구의 엄마에 그치지 않고 제 목소리를 많이 낸 배우에요. <황진이>도 그렇고, <달려라 울엄마>도 좋았죠.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노력도 많이 했고, 한편으로 감사하죠.
지난 38년 동안 배우로 살았습니다. 여전히 배우로서 얻고자 하는 욕심이 남았나요?
한 가지. 어떤 작품에서건 ‘아, 정말 좋은 배우다’, ‘이건 딱 김영애다’, ‘김영애만이 할 수 있다’라는 말을 듣는 것. 단지 그거에요. 어떤 배역을 하고 싶다는 욕심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