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대회에서 번번히 4등만 하는 아이가 있다. 그리고 아이가 터치패드에 손을 대고 전광판에 등수가 발표될 때마다 엄마는 매번 속이 터진다. <4등>은 그런 아이와 엄마 사이의 갈등이 주범이 되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아이가 메달을 따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
발음할 정도로 간절한 엄마는 수소문 끝에 능력 있는 수영 코치를 소개 받고 아이에게 1:1 훈련을 사주한다. 그리고 아들이 코치로부터 매질을 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묵과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수영 코치는 "네가 미워서 때리는 게 아니거든"이라며 매질의 부채를 덜어내고, "내가 볼 때 넌
할 수 있는 아이야. 그런데 네가 집중하지 않잖아"라며
매질의 책임을 떠넘긴다. 그 과정에서 아이에게 재미있었던 수영은 사라지고, 오로지 1등을 해야만 할 수 있는 수영의 과업만이 남는다.
첫째 아들이 수영대회에서 입상하길 기도하고, 둘째 아들이 좋은 대학에
가길 기도하고, 남편이 건강하길 기도했다는 엄마에게 아들은 묻는다.
"엄마는?" 그러자 어머니가 답한다.
"엄마는 없어." 내 자식이 잘되는 것이 행복이라고 곧잘 말하는 엄마들은
이런 헌신이 스스로와 자식 모두를 얼마나 불행하게 만드는지 깨닫지 못한다. 아들의 행복을 위해서 열심히
헌신한다는 다짐이 자신과 아들의 관계를 얼마나 헐겁게 벌리는지 알지 못한다. 자식을 위한다는 삶이 사실상
자신을 위한 욕심이란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영을 그만 두겠다는 아들을 향해 "우리 메달 따기로 했잖아!"라며 윽박지른다. 아들이 원하지 않았던 메달을 종용했던 엄마는 그 욕망에 아들을 끼워 넣으며 우리로 위장하고 강요한다. 정말 불행한 일이다. 아들이나, 엄마나, 태어난 게, 낳은 게, 죄다. 이런 업보가 따로 없다.
이는 한국사회라는 단면이 일그러져 왜곡된 일상이다. 문제는 이렇게
왜곡된 일상이 개별 가정의 문제처럼 파편화된 덕분에 이를 한번에 포괄하기가 어렵고 거시적인 문제의식으로 구체화시켜 풀어나갈 수 있는지, 알 길이 없다는 점이다. 탈출구도 보이지 않지만 점차 거대해지는
문제의 장벽. 그런데 <4등>은 이 불행한 장벽을 조명할 뿐 직접적으로 들추는 작품은 아니다. 거시적인
주장보단 미시적인 물음을 던지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묻는다.
"엄마는 내가 맞아도 1등만 하면 좋겠어?"
이에 엄마는 답하지 못한다. 그저 운다. 실제로
엄마는 아이가 맞아도 1등을 한다면 행복할 것이라고, 행복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의 물음은 엄마를 울린다. 아이도, 엄마도,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대답은 없다.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명제의 그늘 아래에 선 엄마는 옆집의 철수보다 뒤쳐지지 않도록, 옆자리의 영희보다 뒤떨어지지 않도록
자식의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 최선이 과연 행복한가?
더 나은 대학을 가고, 더 나은 직장을 잡고, 더
나은 배우자를 만나고, 더 나은 노후를 준비하고, 이렇게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지옥 같은 오늘을 견딘다. <4등>이
아이의 질문 앞에서 엄마의 답변을 눈물로 지운 건 바로 그런 사회를 깊게 공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아이의 문제도, 엄마의 문제도 아니다. 어느 한 가정의 중력에서
발생한 무간지옥이 아니다. 개인의 행복이 더 나은 미래에 놓여있다고 훈육하며 끝없는 현재진행형의 고행을
종용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우린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는 불행한 처지로 내몰린다. 그것이 얼마나
불행한지도 망각한 채. 그런 망각을 통해 2등의 행복은 둔화되고, 4등의 불행은 증폭된다. 1등을 제외하면 모두가 불행한 세상이다. 하지만 결국 대부분은 1등이 진짜 행복한 것인지 알 길도 없이 불행하다. 정말 누군가 행복하긴 한 걸까.
수영신들이 상당히 유려하고 신비롭다. 수영장의 밑바닥에서 전체 레인을
앙각으로 올려다 보며 광각으로 넓게 벌려 촬영된 숏에서 각자의 레일을 유영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어딘가 초현실적이다. 손을 뻗으며 빠르게 물을 가르고 나아가는 아이와 수평의 높이에서 동일한 속도로 움직이는 숏에선 유연한 리듬감각이
느껴진다. 그리고 수영 신에서 다단한 시점을 배려한 교차 편집을 통해 인물들의 심리를 수집해 나가는데
아이들의 경기를 지켜보는 수많은 부모들의 표정만으로도 이 영화의 주제의식이 찰랑이는 인상이다. 자기
의도를 잘 관철시켰고, 결과적으로 잘 통제한 결과물이다. 한편
훈련 중 레인을 따라 수영하던 아이가 레인을 무시하고 수영장 바닥으로 길게 뻗은 빛을 따라 유영하는 시퀀스와 늦은 시간 레인이 풀어지고 드문드문
빛이 떨어진 수영장의 물 속을 무중력의 우주처럼 포착한 시퀀스는 실로 환상적이었다. 특히 1인칭 시점숏을 활용한 결말부는 대단히 흥미로웠다. 이 영화가 품은
결과적 물음은 그 시점의 주인공이었던 아이가 입수를 하면서 관객의 시점으로 남겨진다. 이 영화는 역시
질문을 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답은 영화 속 인물이 아니라 영화 밖의 우리가 쥐고 있다는 것을 흥미롭게
각성시킨다.
자연스러운 생활 연기 덕분에 극적인 재미가 상당하다. 대단히 무겁게
풀 수 있는 소재의 수면 위로 웃음기가 지속적으로 찰랑거리는 것도 그 덕분이다. 개인적으론 <미생>의 천과장 역을 맡았던 박해준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껄렁껄렁하면서도 막무가내로 인생을 탕진하듯 살아가는 왕년의 탕아 연기를 펼치는데 대단히 어울린다. 걸쭉하면서도 뾰족하게 사투리를 구사하는데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또한
그 탕아의 청소년 시절을 연기하는 정가람도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 뻔뻔해 보이는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좋아하는데 그런 타입이었다. 또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역배우인
유재상은 그 나이 또래가 가질 법한 엉뚱함과 영롱함을 자연스럽고 당차게 표현해낸 것 같다. 아마도 감독의
디렉션과 편집술이 상당히 유효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연기가 통제되지 않은 것마냥
자연스러운 모습에서 감독의 현장 통솔력이 좋았으리라 판단하게 된다. 캐릭터 연기와 연출 면에선 전혀
흠잡을 구석이 없다.
<4등>은 매년마다
국가인권위원회와 관련해 기획되는 작품 중에서도 개별적인 완성도가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독창적인 플롯 안에서 자연스럽게 제 목소리를 낸다. 공적인 기획 의도를 관통하면서도 유연한
표정과 독립적인 감각을 드러내는 재능이 여실히 돋보인다. 정말 좋은 작품이다. 개인적으론 올해 개봉된 한국영화 중에선 <동주> 이후로 만난 두 번째 수작이라 장담해도 거리낌이 없는 작품이다. 특히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들에겐 많은 생각을 안길 것 같다. 꼭 봤으면 좋겠다. 지금 시대의 엄마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무슨 생각을 할지, 나는
너무 궁금하다.
한 여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 실종된 여자가 발견됐다. 흐르는 강물 안에서 머리만 덩그러니 남겨진 채로. 국정원 경호실장이자 그녀의 약혼자인 수현(이병헌)은 결심한다. 그녀가 당한 모든 것을 그 놈에게 되돌려주겠노라고. 그리고 수현은 비로소 놈을 만난다. 연쇄살인마 경철(최민식) 앞에 수현이 나타난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악마가 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뒤바꿔가며 상대를 파멸시키기 위한 게임을 거듭해 나간다.
사실 이런 류의 이야기, 즉 복수를 그리는 여타의 스릴러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악마를 보았다>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과율을 통해 구동되는 장르적 형태의 스토리텔링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는 단순히 스릴러 영화의 컨벤션으로 규정될 수 없는 불균질한 기질들로 ‘치장’된 작품이다. 극의 시작부터 후더닛 구조에 대한 미스터리 자체를 포기해버린,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해버린 <악마를 보았다>는 그 관계를 이루는 두 캐릭터, 그리고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두 배우의 표정과 가학적인 행위를 통해 장르적(이거나 말거나 애초에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는) 스토리텔링의 동력을 밀고 나가(려)는 영화다.
개봉 전부터 제한상영가 판정 문제로 도마 위에 오른 <악마를 보았다>에서 가장 부각되는 건 아무래도 폭력성의 강도일 것이다. 일단 <악마를 보았다>가 묘사하는 폭력의 수위는 특정한 장르물에 단련되지 않은 관객들이 손쉽게 견뎌낼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감상의 결과값은 단지 그 폭력의 물리적 전시만으로 얻어지는 결과적 감상은 아닌 것 같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묘사되는 폭력은 대단한 물리적인 질량감을 자랑하지만 그 폭력성을 더욱 깊게 체감하게 만드는 건 그 물리적 폭력을 간접적으로 체감하게 만드는 관객을 구석으로 몰아 넣는 심리적 압력이며 그 압력의 여백을 채우는 허무가 보다 강한 절망을 체감하게 만든다.
폭력이라는 행위를 묘사하는 방식도 가혹하지만 그 폭력으로부터 유린당하는 대상이 느끼는 수치감과 모욕감,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무화시켜버릴 만큼의 거대한 폭력에 압사당한 개인의 무력감이 극렬하게 전이된다. 사실 이 폭력성의 체감을 극대화시키는 건 배우들의 연기다. 짐승과 같이 동물적인 욕망과 본능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연쇄살인마를 연기하는 최민식과 살해당한 자신의 약혼녀에 대한 복수를 위해 역시 무자비한 폭력적 행위를 불사하는 냉혈한의 면모를 선보이는 이병헌의 연기는 영화에서 정서적 온도차의 극단적인 대비를 이룸으로써 폭력적 심도와 너비를 극대화시킨다. 짐승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인간성이 결여된 듯한 연쇄살인마 경철과 그 폭력성에 맞서서 보다 강한 폭력을 구사하며 상대를 구석에 몰아가는 수현은 양극단에서 영화의 폭력성을 극단적으로 증폭시켜 나간다.
<악마를 보았다>는 일종의 게임이다. 짐승 같은 인간을 대면하게 된 어느 사내는 스스로 악마가 되어 자신의 분노를 상대에게 완전히 방출해내려 하지만 좀처럼 비워지지 않는 분노는 되레 허기처럼 채워지고 그 끝에 남겨진 건 파괴적인 절망에 가깝다. <악마를 보았다>는 마치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의 하드보일드적인 복기이자 선문답처럼 보인다. 스릴러라는 장르적 양태에서 시작되는 <악마를 보았다>는 극단적인 폭력을 전시하며 장르적인 긴장에서 발생하는 쾌감과 거리를 벌린다. 특히 <악마를 보았다>는 극의 진행과 함께 초현실적인 시퀀스로 캐릭터들을 몰아넣으며 장르적 리얼리티라는 인력을 철저하게 거부해 나간다. 이는 마치 폭력에 대한 거창한 철학으로 위장된 가학과 피학에 대한 실험극처럼 보인다. 단지 폭력이라는 행위 자체의 발생을 포착한다라는 인상을 벗어나 어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과감한 폭력들을 거듭해서 연출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력하게 부여한다.
이는 <악마를 보았다>에서 양날의 검이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어떤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 극단적인 폭력의 시각적 체감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말 그대로 어떤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폭력을 거듭해서 보고 있다라는 직감 때문일 것이다. <악마를 보았다>가 전달하는 폭력의 위력은 가학자에 대한 공포보다도 피학자가 느끼는 모욕으로부터 깊게 체감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폭력이 체감되는 방향 이후로 무엇이 진전되고 있느냐는 것. <악마를 보았다>는 어느 개인의 복수를 빌미로 인간성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동시에 제도적 체계에 대한 강렬한 불신을 던진다. 다만 그 포장이 지나치게 비범하다. 단적인 예로 중반부의 산장신은 온전히 리얼리티로부터 이탈해버린 듯한 부조리극의 무대 위에서 연출되고 있으며 이는 이 영화가 제기하는 모든 물음들을 선문답의 영역으로 띄워 보내고 있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남는 건 단지 폭력을 치장하는 극단적 이미지뿐이다. 극단적인 폭력의 연출은 문제가 아니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어쩌면 이 현실 어딘가 누군가에게 예기치 못하게 벌어질 수 있거나 혹은 이미 벌어진, 끔찍한 예언이자 재현일 수 있다. 다만 그 이미지들이 뭔가 대단한 어떤 의미의 담보처럼 전시되고 있음에도 결과적으로 그 결과치에 다다르지 못한다면 그것을 지지할 수 있을까. <악마를 보았다>를 비범하게 포장하는 대사와 표정들은 그 결말에 다다라서 완벽하게 휘발되고 말 것들에 불과하다. 악의로 가득한 이 영화는 극단의 폭력을 구사하고 있지만 폭력에 대한 지독한 혐오를 품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아이러니를 전시할 뿐, 자신의 아이러니에 답하지 못한다. 그 지독한 폭력들을 버티게 만든 영화 뒤에 남는 게 고작 허세 가득한 선문답적인 허무라니, 이런 낭비적인 복수가 어디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