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고은은 지난 3년 동안 다섯 편의 영화를 촬영했다. 그 중 세상에 공개된 건 단 두 편뿐이었다. 아직도 보여줄 것이 훨씬 많다는 말이다.
“벌써 세 번째네요!” 그렇다. 김고은의 말처럼 벌써 세 번째 만남이다. 데뷔한지 3년 남짓한 배우와 3년 사이에 세 번을 만났다는 건 배우를 인터뷰하는 업을 지닌 입장에서도 잦은 경험은 아니다. 그리고 배우의 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점에선 흥미로운 일이다. 1년여 만에 만난 김고은은 예전보다 자주 웃는 것 같았고, 능청스러워진 느낌마저 들었다. 뜬금 없는 말도 했다. “요즘 ‘멍청 바이러스’에 걸린 거 같아요. 단어도 잘 생각나지 않고, 확실히 예전보다 횡설수설하지 않아요?” 나는 그냥 조금 신중해진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멍청 바이러스라는 게 요즘 유행하는 단어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고은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짜 있대요.’라고 답했다. 뭐, 그랬다.
배우 김고은의 마지막 족적은 작년 3월에 개봉했던 <몬스터>였다. <은교>에 이은 두 번째 작품이었다. 지난 1년여 동안 배우 김고은이 사라진 건 그녀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김고은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절로 기억될만한 한 해를 보냈다. 이미 두 편의 영화 촬영은 완료됐고, 영화 한 편의 크랭크업을 앞두고 있다. 나름대로 꾸준히 제 발을 내딛고 있었다. 3년 전, <은교>를 통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린 김고은은 꾸준히 작품에 그 이름을 걸어왔다. <은교>를 통해 심상치 않은 가능성을 인정 받은 그녀는 냉혹한 살인마와 맞서는 소녀 김복순을 연기한 <몬스터>를 통해 악착 같이 몸을 내던지면서도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며 범상치 않은 인상을 이어갔다. 그런 김고은의 차기작을 기다린다는 건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고려 무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협녀: 칼의 기억>은 흔한 시대극이지만 국내에서 보기 드문 무협극이기도 하다. 촬영 기간만 7개월이었던 이 영화를 위해 김고은은 1년 가까이 ‘검아일체’의 생활을 하며 부모의 복수를 갈망하는 젊은 여검객 설희로 분했다. “와이어 테스트는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재미있었고요. 자신감도 생겼죠. 나중에 후회했어요. 와이어 액션을 위해 하네스라는 걸 착용해야 하는데 그걸 입고 몇 시간만 있어도 어깨에 산을 얹는 느낌이 되거든요. 테스트 때 잘할 수 있겠다는 인상을 심어준 덕분에 7개월 내내 힘들었죠(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고은은 와이어 액션신의 90% 이상을 직접 소화해냈다. <차이나타운>을 통해 동시대를 돌아온 그녀는 불운한 유년시절을 지나 범죄조직의 그늘에서 자란 일영이란 여성을 연기했다. 기존에 김고은이 연기한 역할들과 달리 상당히 내성적이고 감정을 절제하는 인물이다. “일영이는 굉장히 정적인 아이에요. 그래서 감정 변화가 아주 살짝 나타나기 때문에 그 미세한 감정선을 놓치면 끝나겠구나 싶었죠. 그래서 촬영장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감독님과 이야기도 많이 했어요.”
김고은은 두 영화를 통해 각각 전도연과 김혜수와 같은 톱여배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대단한 선배님들과 함께 한다는 건 꿈 같은 일이었죠. 존경해왔던 이들과 호흡을 맞출 수 있다는 건 감동적인 일이에요. 그만큼 열심히 하려고 했고요.” 겸손한 말이다. 그녀는 단순히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 함께 이름을 올린 게 아니라 두 작품에서 주요한 감정선을 책임지고 있다 해도 좋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는 지금 김고은이란 젊은 배우가 어떤 기대감을 자아내는가를 가늠하게 만든다. 물론 연기 경력에 비해 매번 만만찮은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점에선 개인적인 부담감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김고은도 그만한 각오가 필요함을 알았다. “욕심이 난다고 해서 다 할 순 없죠. 저보다 이 역할을 더 잘하는 사람이 있는데 제가 할 순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역할을 맡았다면 최소한 그 역할은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시작해야죠. 그래도 한계에 부딪힐 수 있지만 그래야 치열하게 노력할 수 있어요.” 자기 재능을 밑천 삼아 얻어낸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간과하지 않았다.
“연기를 하면서 희열을 경험하면 쉬지 않고 연기만 하고 싶어져요. 그런데 좀 쉬면서 하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되니까 조심할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에 한 선배님께서 ‘연기하는 게 재미있냐’고 물어보셔서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부럽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곤 ‘그 마음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좋아하는 것도 결국 일이 되면 언젠가 지칠 수밖에 없나 봐요. 저는 너무 빨리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난 해 <차이나타운>의 촬영을 끝낸 뒤 김고은은 한동안 무기력한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지난 해에 촬영장에서 보낸 시간만 9개월이었다. 재충전이 필요한 시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성난 변호사>의 촬영을 마치고 잠시 쉴 계획이었지만 오는 3월에 크랭크인되는 영화에 출연을 결정했다. “할머니와 손녀의 얘기인데 공감하는 부분도 있고, 제가 잘 표현할 수 있을 거 같아서요. 할머니와 함께 6년째 살고 있거든요. 저한테는 너무 소중한 사람이니까, 이 작품을 통해 제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나중에 그럴 기회가 또 올지 모르니까요.” 그러니까 자신이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작품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해내고 싶은 작품을 선택했다는 말이다.
김고은은 올해로 스물다섯 살이다. 할 수 있는 것을 해내는 것도 좋지만 하고 싶은 것도 많을 나이란 말이다. 그녀는 여느 20대처럼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한다. 마음이 내키면 혼자서도 노래방을 찾을 정도라고 한다. 아무래도 김고은이란 배우를 안다는 것과 김고은이라는 사람을 아는 건 분명히 다른 맥락일 수밖에 없다. 그녀 역시 일찍부터 스스로에 대한 호기심을 품고 살아왔다. 그래서 꾸준히 써온 일기는 그녀에게 있어서 김고은에 대한 보고서나 다름없다. “일기 속의 나는 솔직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시간이 지난 뒤 일기를 보면 ‘그때 내 감정이 이랬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죠. 그렇게 나란 사람을 이해하게 돼요. 사실 고등학교 때부터 스스로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질문하곤 했거든요. 다이어리를 보면 그때마다 정의가 다 다른데, 굉장히 다양한 면모를 지닌 것 같아요. 확실한 건 정말 웃기죠.” 그녀는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었다. “사실 커피가 맛있지 않은 사람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커피가 맛있다고 하고, 테이크 아웃잔을 들고 다니는 게 멋있다고 느껴지면 어느 순간부턴 커피 맛을 안다는 게 멋있게 보일 수 있잖아요. 그러면 결국 커피가 맛있다고 느껴버릴 수 있죠. 그런 외부적인 자극으로부터 자유로운 진짜 나는 정말 어떤 사람일까 궁금할 때가 있어요.” 물론 김고은의 일기장을 살펴보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알 수 있겠지만 그럴 순 없는 노릇이었다.
확실한 건 그녀가 코미디물에도 관심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배우로서 긴 여정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 또한 체감한다는 사실이다. “체력이 약하면 현장에서 죄인이 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이젠 몸 관리도 하려고요. 다들 그러잖아요. 좋을 때 관리해야 한다고. 생전 챙겨 먹어본 적 없는 비타민도 주문해서 먹고 있어요.” 사실 스물다섯 살은 비타민보단 연애에 관심이 많아야 하는, ‘호애시절’ 아닌가. “남의 연애사에 관심 갖는 거 아니에요!” 김고은이 잘라 말했다. 그리고 크게 웃었다. 막 뚜껑을 딴 사이다처럼 청량한 웃음이었다. 그녀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멍청 바이러스’가 생각났다. 검색을 해본 뒤 새삼스레 그 표정이 떠올랐다. ‘진짜 있대요.’ 거짓말 같아서 다시 한번 스마트폰을 들여다 봤다.
(ELLE KOREA FEBRUARY 2015 NO.268 'ELLE 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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