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과 소녀의 과도기에 자리한 듯한 한 여자가 어느 저택을 뒤로 한 채 덧없이 걸음을 옮겨 나간다. 어디론가 바쁜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한 언덕에 멈춰선 뒤, 황망한 얼굴로 세상을 응시하다 이내 영문을 알 수 없는 울음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이윽고 한껏 습기를 빨아들인 먹구름으로부터 매서운 비가 쏟아지고, 그녀는 ‘폭풍의 언덕’을 벗어나 비를 피해 어디론가 걸음을 옮긴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대신 정처 없이 나아가던 그녀는 외딴 집의 불빛을 발견하고 대문 앞에 다다라 문을 두들긴다. 이를 발견한 한 남자는 그 여자를 집 안으로 들이고 두 여동생과 함께 그녀의 기운을 북돋아준 뒤, 이름을 묻는다. 그리고 그녀는 답한다. “제인 에어” 그녀가 제인 에어다.
<제인 에어>는 여동생인 에밀리 브론테와 함께 영국의 고전적인 여류 소설가로 꼽히는 샬롯 브론테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이 투영된, 기독교와 남성성으로 무장한 세태 속에서 여성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며 성장한 한 여성의 진보적인 삶을 다룬 이 작품은 수세기를 걸쳐서 숱하게 출판됐으며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통해서 여러 판본으로 재생된 바 있다. 이는 곧 캐리 후쿠나가가 연출한 <제인 에어>가 그 가운데서 가장 근래에 제작된 판본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단지 또 한 번의 재현을 뛰어 넘는 <제인 에어>의 새로운 현시에 가깝다.
전체적으로 원작의 서사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 작품은 사실 원작소설의 서사적 줄기를 추출해서 최대한 잔가지를 쳐내버린 상태로서 스토리텔링을 다듬어낸 축약판에 가깝다. 하지만 원작과 영화의 부피차를 염두에 둘 때 이것이 불가피한 선택임을 감안한다면 영화가 성공적인 결과물을 완성해냈다고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순행적인 원작과 달리 서사의 중후반부 즈음을 먼저 재생시킨 뒤, 플래시백의 시동을 거는 이 영화의 서사적 선택은 결국 사연의 전후를 완전하게 가리고 그에 따르는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으로 감상을 유도하는데 적합하다. 이는 단지 모두가 알거나 익숙한 원작의 서사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형태적 의미만을 염두에 둔 결과가 아니다. 이러한 서사적 호기심은 영화가 연출하는, 미스터리한 연출과 연결되어 영화에 묘한 서스펜스를 불어넣는다.
이는 <제인 에어>의 본질적인 줄기가 되는 로맨스를 언급하는 방식 안에서도 효과를 발휘한다.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에 대한 호감과 열정만으로 다가서는 남녀, 제인 에어(미아 와시코우스카)와 로체스터(마이클 파스벤더)의 관계적 긴장은 이러한 외부적인 서스펜스를 화려한 장식처럼 걸치며 진실한 감정의 응축에 일조하고 이는 로맨스라는 감정적 덩어리를 보다 쉽게 인식시키는 촉매로서 작동한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낭만적인 로맨스에 예기치 못한 반전적인 진실에 가 닿는 광경에서 이런 효과는 보다 극대화된다. 이는 원작이 지닌 고딕 로맨스의 형태에 가장 잘 근접한 형태라 이해되며 원작이 품고 있던 절실한 로맨스의 감정을 역시 보다 탁월하게 살려낸 영화적 해석이라 할만하다. 시대로부터 풍겨져 나오는 부조리한 광기를 세심하게 포착하고 인물의 감정과 행위에 섬세하게 이입시킨 뒤, 미스터리한 상황 속에 밀어 넣어진 인물의 혼란과 착시적인 시행착오들을 유려한 기승전결의 멜로드라마로 담백하게 풀어낸다. <제인 에어>는 조 라이트의 <오만과 편견>과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영국 고전 로맨스의 새로운 판본이자 효과적이면서도 독창적인 패기가 자리한 고전 각색물이라 할만한 수작이다.
풍요로운 광량을 입은 자연친화적인 풍광으로 생동감 있는 숨결을 불어 넣고 고전적인 품위를 걸친 인물들의 행위로서 품격을 전시하는 <제인 에어>는 이런 기반을 무대로 밟고 선 인물들을 통해 가장 본질적인 드라마의 감정선에 주목해 나간다. 무엇보다도 미아 와시코우스카가 연기하는 제인 에어는 이 영화의 핵심이자 주축이다. 유년시절부터 삶의 부침을 견디며 성장해야 했던 제인 에어가 희망과 절망의 질곡을 건너 진정한 사랑의 결실을 맺기까지의 험난한 과정을 대변하는 그녀는 또렷한 자태와 투명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롤타이틀을 확고하게 구축해낸다. 또한 낭만과 비극 사이에 선 ‘차가운 도시 남자, 하지만 내 여자에게 따뜻한’ 로체스터를 연기하는 마이클 파스벤더는 캐릭터의 특성과 함께 자신의 매력까지 어필하는데 성공한 인상이다. 그 성공적인 성장세만으로도 만족스러운 감상을 부르는 제이미 벨도 눈여겨볼만하다. 이러한 자질의 융화를 이끌어낸 캐리 후쿠나가 역시 이 작품을 통해 새로운 계기를 다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 라이트의 인상적인 데뷔작 <오만과 편견>을 연상시키듯 그는 <제인 에어>를 통해 고전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마음껏 과시해냈다.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살아나간 여인의 초상처럼 당돌하지만 선명하게, 이 오래된 연인들의 사연을 현대에 복원해내는 수준을 넘어서 탁월하게 재증명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