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 소프틀리>는 오바마의 연설로부터 시작된다.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아니라 2008년 부시 정권 말기에 공화당의 대선 후보 존 맥케인과 경합을 벌이던 민주당 대선 후보 오바마 말이다. 그리고 영화가 이어지는 내내 조지 부시 미국 전대통령이나 오바마, 미국 전 재무부 장관 헨리 폴슨과 같은 정치인들의 연설이나 발언이 심심찮게 귀를 파고 든다. 만약 당신이 브래드 피트가 출연하는 하드보일드한 킬러물 정도를 예상하고 상영관을 찾은 관객이라면 이미 예사롭지 않은 오프닝 시퀀스만으로도 기대가 빗나갔다는 예감이 들지도 모를 일이다.
브래드 피트의 베니스 남우주연상 수상작인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을 연출한 감독 앤드류 도미닉은 조지 히긴스의 1974년작 범죄 소설 <코건의 거래 Cogan’s Trade>을 모티프로 <킬링 소프틀리>를 구상했다고 한다. <코건의 거래>와 <킬링 소프틀리>의 이야기 줄기는 유사하다. 보스턴의 도박장에 들이닥친 강도로 인해서 얻은 손실의 책임자를 가리기 위해서 갱단은 전문적인 해결사 즉 킬러를 고용한다. 문제는 이미 한차례 그 강도질을 벌였다가 용서받았던 이가 갱단 내부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해결사로 고용된 킬러 잭키 코건(브래드 피트)의 논리는 이렇다. 도박장을 턴 강도에게 책임을 묻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사태가 반복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이가 있다는 것.
<킬링 소프틀리>의 서사는 2008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경제가 붕괴된 부시 정권 말기의 미국 사회다. <코건의 거래>가 발표된 시기는 미국 경제 공황의 여파가 한창이던 1974년이다. <코건의 거래>가 <킬링 소프틀리>만큼이나 경제적인 위기 상황을 직설적으로 가리키는 작품처럼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원작과 영화는 킬러물이란 장르적 속성을 공정한 거래와 자본주의적인 계급 사회를 은유하는 그릇으로 삼고 있다. 무엇보다도 <킬링 소프틀리>는 확실히 그렇다. 코건은 도박장을 턴 범인만큼이나 그 범죄 행위를 따라 하게 만든 주범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한다. 경제 위기 발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경제범들이 제대로 된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평가됐던 지난 서브 프라임 사태가 연상되지 않나?
오바마와 부시를 비롯한 정치인들의 연설이나 발언들은 영화의 극적인 상황을 입체적으로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처음으로 인물이 등장하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미국인의 비전을 웅변하는 오바마의 대선 출마 캠페인 연설이 오버랩되는 것부터 영화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형태나 인물의 행위와 맞물릴만한 음성이 마치 주석처럼 따라붙는다. 이는 은유인 동시에 장치적인 위트다. 킬러들의 행위가 자본주의 국가의 행태와 유사하게 어울려 보이도록 설계된 은유인 동시에 인물의 행위를 반어적으로 설명하는 위트의 장착에 가깝다. 이를 테면 카페에서 코건이 남겨놓은 팁을 가로채려는 뚱뚱한 하수인에게 “팁을 내려놔. 이 멍청하고 무능력한 돼지야”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TV 속의 부시는 말한다. “미국의 노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고 유능합니다.”
물론 <킬링 소프틀리>는 하드보일드한 영화다. 도박장 강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레이 피오타가 연기한 마키가 갱단에게 떡이 되도록 맞는 신에서 1인칭과 3인칭을 오가는 시점숏을 통해 사실감 있는 구타 장면을 감상하게 만드는 등 생생한 폭력성을 체감할 수 있는 신이 더러 존재한다. 반면 고속촬영을 통해서 그 폭력성에 극단적으로 반할 정도로 우아하게 완성된 코건의 총격 암살 신은 아이러니할 정도로 우아하다. 흥미로운 건 이 폭력적인 장면의 대립적인 체감이 코건의 의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암살을 생각했을 뿐, 린치를 가하며 책임을 규명하길 원하지 않았던 마키의 구타 신이나 직접 암살을 시도할 의사가 없었던 최후반부의 살인 신의 사실적인 폭력성과 반대로 그가 스스로 계획하고 주도한 중반부의 총격 살인 신은 그야말로 ‘소프틀리’하게 묘사된다. 그가 킬러로서 추구하는 타이틀처럼 말이다. 영화 곳곳에서 들려지는 반어적인 BGM도 흥미롭다. 조니 캐쉬, 케니 레스터 등 평온한 감성이 깃든 고전 팝들이 극의 분위기와 대비될 때 발생하는 아이러니는 지독한 농담 같기도 하다.
브래드 피트의 레더 재킷과 대비될만한 수트 착장으로 일관된 리처드 젠킨스를 비롯해서 제임스 갠돌피니와 레이 피오타 등의 기라성 같은 배우들은 물론 극 초반을 이끄는 스쿳 맥네어리와 벤 멘델슨 콤비 등 배우들의 열연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그 끝에 다다라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는 브래드 피트와 리처드 젠킨스의 관계는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사회를 채운 화이트 칼라와 블루 칼라의 대비적 상징으로 읽히는데 결말부에 다다라 명확하게 정리되는 브래드 피트의 대사를 통해서 이 영화에 첨언된 정치적 코멘트들의 역할이 명징하게 와닿는다.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사가 울려 퍼지는 바에서 펼쳐지는 엔딩신은 인상적이다. “저 자식은 우리가 한 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지. 하지만 난 미국에서 살고 있어. 미국에선 저마다 자기 앞가림을 해야 한다고. 미국은 국가가 아니라 그냥 비즈니스지. 그러니까 내 돈을 뱉어내!” 그러니까 이 영화는 미국 영화다. 미국을 까는 것도, 지지하는 것도 아닌, 미국이란 비즈니스 브랜드 그 자체에 관한.
“내 이름은 빅터 매이너드(빌 나이), 나이는 54세, 직업은 청부 살인업자, 커피 한 잔 하겠소?” 소음기 달린 총의 방아쇠를 주저하지 않고 신속하고 정중하게 당기는 남자, 매이너드는 명문 킬러 가문의 후손으로 타겟을 놓친 적 없는 프로이자, 미혼의 싱글남이다. 그리고 어느 날, 한 여자에 대한 청부살인 청탁을 받게 된다. 그 여인의 이름은 로즈(에밀리 블런트), 부동산 업자로 위장한 갱단 두목에게 가짜 렘브란트 자화상을 팔아 거액을 챙겼다. 그녀를 죽일 기회를 엿보며 미행하던 매이너드는 번번이 기회를 놓치고 주시하던 중, 제멋대로인 그녀를 살해한다는 것에 대해서 저항감을 느낀다. 심지어 그녀를 구하려다 죽을 위기에 빠진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작스럽게 등장한 청년 토니(루퍼트 그린트)가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한다.
1993년에 제작된 동명의 프랑스 영화를 리메이크한 <와일드 타겟>은 ‘말괄량이 길들이기’에 나선 ‘레옹’의 사연을 그린 듯한 로맨틱 코미디다. 목표물을 사랑하게 된 킬러, 킬러가 사랑한 말괄량이 그리고 순진한 청년, 이 세 캐릭터가 뒤엉켜 이루는 좌충우돌의 전복적 상황과 끝 모를 사연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자기 생활에 엄격하며 결벽이 있는 중년의 킬러와 밥 먹듯 소매치기를 하고 무책임하게 주의를 벌려놓는 여인 그리고 때때로 모자라 보일 정도로 순진하지만 킬러를 꿈꾸는 청년, 저마다 뚜렷한 성격을 지닌 세 인물이 같은 배를 탄 운명이 되어 벌이는 우여곡절의 항해는 우스꽝스러운 가운데서도 귀엽고 훈훈한 감정을 발화시킨다.
영국 배우의 관록을 대변하는 빌 나이를 비롯해서 스타로 떠오른 신예 에밀리 블런트와 루퍼트 그린트 그리고 <셜록>을 통해서 보다 확실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마틴 프리먼까지, 실력 있는 영국 배우들로 채운 캐릭터들은 영화에 다양한 감정을 채색하고, 영화는 이로써 감상적인 흥미를 확장해낸다. <와일드 타겟>은 비범한 야심작이라기 보단 깜찍한 소품에 가깝다. 로맨틱 코미디가 줄기를 이루는 가운데, 액션과 스릴러의 잔가지가 쏠쏠하게 영화를 장식한다. 엉뚱하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이야기의 예상범위를 곧잘 벗어나곤 하는데 때때로 스토리텔링의 논리를 어긋나게 만드는 우연적인 상황이 발견되긴 하나 그마저도 위트로 연결된다. 그 모든 요소가 깨알 같은 애정을 부르는, 깜찍한 로맨틱 코미디다.
개인적으로 내추럴 본 킬러 스타일의 캐릭터들이 프로페셔널하게 자기 영역을 구축하고 보전하는 액션물을 좋아하는데, 이 영화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호감이 간다. 국제 정세에 관한 음모론적 실화가 바탕이 된 영화란 점에서 때때로 똥폼을 잡지만 순정마초 제이슨 스타뎀의 폭풍간지를 비롯해서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구심점을 잡는 가운데, 제 기능에 충실한 액션 신이 제대로 된 밑천을 마련한다. 취향을 탈 가능성은 있지만, 자신에게 꽂힐 기대감을 충족시킬만한 액션물로서의 자력을 갖춘 영화.
<킬러들의 도시>는 의뭉스럽게 전진하는 영화다. 인과관계의 원인을 가리고 전사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는 와중에 백치미적인 대사에서 비롯된 유머가 분위기를 띄운다. 그럼에도 좀처럼 품위가 훼손되지 않고 정체 모를 상실감이 묵직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영화의 감춰진 속내가 차근차근 드러나는 과정 한편에서 또 다른 인과관계로 작동할 주변 환경과의 구조적 연계가 디테일하게 구축된다. 흡사 ‘가이 리치’스러운, 우연적인 관계의 교차를 통한 필연적 사건의 재구성처럼 보이기도 하나 남발된 양상이 아니며 차기 장면에서 드러나는 반전적인 상황이 항상 예측 범위를 극복하고야 만다. 일반인으로서 쉽게 이해하기 힘든 젠틀한 영국 킬러들의 프로페셔널한 규약은 때때로 웃음의 매개체가 되지만 이는 중후한 느와르적 프라이드를 연출하며 비범한 정서를 끝내 이루고 만다. 궁극적으로 <킬러들의 도시>는 죄책감을 속죄하는 자와 이에 보혈을 내리는 자, 그리고 그 보혈을 요구하는 자에 대한 사연이다. 유머가 발생하나 천박하지 않고 전통적 도시의 풍광만큼이나 고풍적인 정서를 연출한다. 중세의 흔적이 보존된 브리주를 관조적인 시야로 바라보는 카메라 너머의 풍경과 어울리는 캐릭터들의 능숙한 연기는 하나의 관건이다. 생소한 도시는 유배지가 되고, 무덤이 되며 재생의 도피처가 된다. 비범하게 재기발랄한 성찰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