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흐트러진 머리와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커다란 눈에 가득한 애수. 고독한 한 마리 늑대처럼 나타나 전세계적인 팬심을 자극한 세바스찬 스탠은
우직하면서도 유연한 남자다.
마블 유니버스는 21세기 배경의 신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유럽의 신마저 뉴욕을 밟게 만든 이 맹랑한 세계관은 실제 도시를 배경에 두고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감상에 활력을 더한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2014)를 통해 마블 유니버스로 확실하게 착륙한 세바스찬 스탠 역시 이런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코믹북에 기반을 둔 영화는 신화이지만 어떤 면에선 사람들이 논의하길 바라는 지점보다 더
많은 부분이 현실적으로 반영돼 있다.” 그렇다. 그에게 있어서 마블 유니버스는 진짜는 아니되 진짜를 겨냥하는 세계다. “많은 재향군인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사회에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모른다. 사회는 더 이상 기존과 같은 방법으로 그들을 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속한 사회를 이해하는 것, 그것이 이번 작품에서 이
캐릭터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다. 그는 그 사회에서 어떻게 적응해나갈까?” 여기서 ‘이번 작품’은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를
의미하고 ‘이 캐릭터’는 당연히 스탠이 연기한 버키다. 그리고 그가 남긴 물음표에 대한 답은 마블 유니버스의 차기 라인업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될 거라고는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다.”겸손함이 느껴지지만 스탠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알게 된다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버키는 루마니아를 배경으로 처음 등장한다. 사실 세바스찬 스탠은 흑해 연안의 항구 도시 콘스탄차에서
태어난 루마니아 출신 배우다. 하지만 그는 여덟 살의 나이에 루마니아를 떠나 오스가십트리아의 빈으로 건너갔고, 열두 살이 되던 해엔 미국으로 건너갔다. 어린 시절의 스탠에겐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스탠의 내면을 강인하게 다듬어주는 계기가 됐다. “우리 가족이 세 나라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무엇을 기대해야 하고, 어디로
다다를 수 있는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내 앞에 어떤 길이 펼쳐지든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여겼다. 믿음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스탠이 처음으로
연기에 발을 들인 건 처음으로 국경을 넘어 당도한 빈에서였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오디션장에서
첫 역할을 얻었다. 루마니아의 노숙자 아이들 중 하나였다. 이
경험을 통해 어린 스탠은 배우라는 길에 흥미를 느꼈다고 말한다면 근사한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전철 안에서 촬영한 단편이었는데 도무지 좋아할 수 없었다. 세트장
안에서 긴시간 동안 기다린다는 건너무
지루했다.”그리고 두 번째로 국경을 넘어 정착한 미국 뉴욕에서 그가 배우를
꿈꾸게 됐다는 말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근사한 계기가 찾아온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첫 해에서야
연기를 좋아하게 됐다. 청력 장애가 있었음에도 학교 연극을 모두 책임지던 친구가 있었다. 장애에도 좌절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사실상 나를 도전하게 만들었다.”그렇게 고등학생 시절부터 배우라는 꿈을 품고 오디션에 참가하며
청사진을 그려온 스탠은 뉴저지의 예술학교에 진학하고, 1년간 영국에 있는 극단을 찾아가 연기를 수학하기도
했다. 하지만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선 긴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스탠은 수많은 오디션장을
전전하면서 수없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오디션장에서 마셔왔던 숱한 고배 끝에 맛본
성취가 자신을 키운 자양분이 됐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일들을
돌아보면 굉장히 힘들고, 고통스럽고, 마음 상하는 일이었지만
거기엔 놀라운 것도 있었다.” 그는 2년 동안 한 캐스팅 감독 앞에서 10번이 넘는 오디션을 치렀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는 비로소 그 캐스팅 감독에게서 합격 통보를 받아냈다.
“한 번도 붙지 못했지만, 그 캐스팅 감독님과 연결될 수 있을 때마다 오디션을 봤다. 그랬더니 다음 번엔 나를 기억하더라." 어쩌면 이런 근성이야말로 스탠이 지닌 진짜 재능일지도 모른다.
스탠은 TV시리즈 <가십걸>과 <킹스>에 출연하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조금씩 얻어나갔고
조나단 드미가 연출한 <레이첼, 결혼하다>(2008)나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블랙 스완>(2010)과 같은 준수한 영화에도 이름을 올리며 경력을 확장했으며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를 통해 대중적인 얼굴로 거듭났다. 그런데 전작인 <퍼스트 어벤져>(2011)를 통해 마블 유니버스의 궤도에 진입했다는 사실은 되레 뒤늦게 주목을 얻었다. 당연한 일이다. 캡틴 아메리카가 되기 전 연약한 청년이었던 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를 돕는 버키 반즈는 캡틴의 전우이자
스티브의 절친으로 거듭나지만 영화의 결말부에 다다라 죽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얼굴을 두건으로 가린 채 등장하는 윈터 솔져의 정체는 영화가 공개되기 전까진 철저히 봉인된 상태였다. 물론
원작을 충실히 따라잡은 코믹북의 팬이라면 그의 전사를 명확히 짚고 있었겠지만 일반적인 관객 입장에선 윈터 솔져가 버키일 것이란 예감을 쥐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속편에서 테러 집단의 세뇌를 받고 캡틴 아메리카를 공격하는 빌런 ‘윈터 솔져’로 부활한 버키는 캡틴 아메리카가 던진 비브라늄 방패를
맨 손으로 잡아내는 장면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를 통해 마블 유니버스는 새로운 동력을 확보했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의 대립을 그린다는 점에서
강력한 이벤트였다. 하지만 그 이벤트를 폭발시키는 버튼은 바로 버키다.
세계적인 기대감을 모으는 볼거리에서 가장 강력한 갈등을 유발하는, 그야말로 시리즈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작품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존재감을 과시한 덕분에 세바스찬 스탠의 인지도는 만월처럼 차 올랐다.
그러나 스탠은 대학시절의 은사이자 멘토로 꼽는 래리 모스의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배역을 얻고 인물에 공들이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데서 시작해라'라고
말했다. 결과보다 경험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경험을 점차 늘려나가고 있다. 리들리
스콧의 <마션>(2015)에 출연했던 스탠은 <더 브론즈>(2016)라는 코미디 영화를 통해 새로운
모습을 선보인다. 또한 J.K.시몬스와 맨디 무어가 출연하는
또 다른 코미디물 <아임 낫 히어>(2017)의
출연 계약을 마쳤고, 평소 흠모하는 배우로 꼽던 짐 캐리가 제작하는
TV시리즈에서도 등장할 예정이다. 버키의 여정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세바스찬 스탠 역시 현재진행형의 배우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자신의 좌우명을 따라 걸어왔다. "만약 이 일이 잘되면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보겠다.” 다행히도
이 좌우명은 스탠에게 잘못된 길을 가리키진 않은 것 같다. 그러니 멈추지 않을 것이다. 보다 즐겁게, 더욱 사랑하면서.
성조기 문양의 슈트를 입은 미국산 슈퍼히어로라니, 20세기 후반 즈음까지 유효했던 ‘인디펜던스 데이’ 필이 충만한 시절에나 가능했을 듯한 팍스 아메리카나 히어로물이 아닐까 의심한다면 그 의심이 틀린 것은 아니다. 사실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는 이름만으로도 딜레마이자 아이러니다. 미국적 영웅주의를 대변하는 듯한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름의 상징성은 되레 미국의 영웅주의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관한 지침을 행동으로써 증명하는 도덕적 헌신으로 역전된다. <퍼스트 어벤져>는 미국산 슈퍼히어로들의 원조격인, 바로 그 ‘캡틴 아메리카’에 대한 영화다. 물론 온전히 ‘캡틴 아메리카’만을 위한 영화인 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에 맞선 미국과 연합군을 이끈 캡틴 아메리카의 탄생과 활약상을 그린 <퍼스트 어벤져>는 이 오래된 영웅의 낡은 면모를 새롭게 단장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내기 보단 복고적인 영웅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정면승부를 감행한다. 그리고 굴하지 않는 의지로 악의에 맞서고, 강단 있는 헌신을 갖춘 인물의 진지함이 ‘캡틴 아메리카’라는 히어로로서의 자격과 연결될 때, 그리고 그러한 인물이 이런 소망을 스스로 심각하게 어필할 때, 영화의 이러한 태도는 전략이라기 보단 필요에 의한 결과였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촌스럽게 보일 수 있는 구시대의 영웅을 현시대에 재현하겠다는 기획은 그 시대의 감수성, 더 정확하게는 구시대적인 복고물의 특성을 반영한 영화의 전략을 통해서 성공적인 제작으로 나아갔다.
<퍼스트 어벤져>는 여느 슈퍼히어로물들, 특히 최근 <어벤져스>의 제작과 함께 급물살을 탄 마블의 히어로물들과 비교해도 액션 시퀀스의 빈도가 약해 보인다. 영화는 캡틴 아메리카라는 히어로의 기원과 활약상, 그리고 그가 긴 세월을 넘어 오늘날을 현대 21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어벤져스의 일원이 되기까지의 서사를 기술하는데 집중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는 캡틴 아메리카와 대적한 악의 세력, 즉 레드 스컬과 같은 악역 캐릭터가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이지 못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경향이 캡틴 아메리카의 활약을 지켜보는 재미 또한 반감시키는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퍼스트 어벤져>는 분명 액션보다는 캐릭터의 고뇌와 운명적인 서사가 주를 이루는 드라마에 가깝다. 특히나 이 영화에서 액션보다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건 멜로다. 이는 앞으로 이어질 <어벤져스>에서도 캡틴 아메리카라는 히어로에게 결핍과 고독을 부여하는 주요한 요소로 작동될 것이다.
<어벤져스>로 가는 징검다리와 같은 근래의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슈퍼히어로물들이 하나 같이 독립적인 아이덴티티보다도 거대한 이벤트를 위한 전야제 성격의 도구로 매몰되는 인상을 보였던 것처럼 <퍼스트 어벤져>도 그런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어벤져스>를 위한 예고편으로서의 기능이 노골적인 이 작품은 동시에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의 당위를 설득해내고 그 캐릭터가 지닌 능력을 전시하는 프리퀄로서의 기능으로도 부족함이 없다. 또한 <어벤져스>의 마지막 떡밥, 즉 <아이언맨>시리즈의 토니 스타크의 선친인 하워드 스타크가 등장하고, <아이언맨2>에서 등장하는 슈퍼 쉴드를 들고 싸우는 캡틴 아메리카의 모습, 그리고 <토르>의 쿠키에서 등장했던 코스믹 큐브까지, 이 모든 조각들을 하나씩 수집해나가며 <어벤져스>를 기대하고 있을 어떤 관객들에게 <퍼스트 어벤져>는 또 한번의 유효한 이벤트다. 특히 엔딩 크레딧 이후에 공개되는 <어벤져스> 맛보기 영상은 이 모든 징검다리의 여정 끝에 다다른 건너편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마블 히어로 규합을 위한 마지막 영웅 결의, 이 정도 떡밥은 물어야 제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