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1997년이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타이타닉>이 전세계 최고 흥행영화 순위의 첨탑에 오른 것이 말이다. 그런 <타이타닉>을 비로소 정상에서 끌어내린 건 <아바타>(2009)였다. 또 한번 제임스 카메론이었다. 하지만 그 흥행 이전부터 <아바타>는 도마 위에 있었다. 제임스 카메론의 복귀작,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소요된 3D영화 등, 기대와 의심을 가로질러 모든 언어가 <아바타> 앞에 정렬하듯 모여드는 것마냥 그랬다. 어쨌든 뚜껑이 열렸다. <아바타>의 판도라 행성은 거대한 가상의 세계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그건 완벽하게 3D영화라는 세계관에 복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맞춤형 세계였다. 광대한 대자연의 장관이 그 자체로 스케일 있는 원근감을 마련하고, 실사와 CG애니메이션 기법이 혼재된 캐릭터 전환으로 CG애니메이션에서 보다 탁월하게 구현되는 3D영상의 장점을 끌어올린다. 특히 LED에 가까운 높은 조도로 밝혀진 판도라의 야경은 장관의 레이져쇼다. <아바타>는 3D영화를 위해 마련한 총아였다.
<아바타>의 성공 이후, 불과 2년여 만에 상영관의 풍경뿐만 아니라 영상 산업의 패러다임이 변했다. 3D안경을 끼고 눈의 수평을 조절하며 스크린을 응시하는 것이 어느 새 영화를 보는 하나의 방식이 됐다. 영상 디스플레이 시장에서는 3D제품 출시가 하나의 유행처럼 번졌다. <아바타>의 엄청난 성공은 3D라는 플랫폼에 대해서 반신반의하던 영화계뿐만 아니라 영상 디스플레이 업계를 위한 복음이 됐다. 21세기 대부분을 3D영화 제작에 매진해온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이런 급진적인 변화에 충격을 받고 알코올 중독자가 돼서 할리우드 길바닥을 뒹굴고 있다더라 한들 이상하지 않을 만한 혁신이었다.
<아바타>에 이은 드림웍스의 야심작 <드래곤 길들이기>(2010)가 큰 호평을 받을 때만 해도 3D영화는 기꺼이 지갑을 열만한 물건처럼 여겨졌다. 문제는 그 이후다. 그 성공에 고무되어 생산된 3D영화들이 대부분 그러한 기대감을 배반했기 때문이다. 3D영화는 두 눈을 지닌 사람처럼 두 개의 렌즈를 지닌 특수 카메라를 이용해서 촬영된다. 고가의 특수 장비와 정교한 촬영술이 요구되는 만큼 많은 시간과 대자본이 요구된다. 이런 수고와 투자를 덜고자 일반적인 카메라로 촬영한 뒤, 기계적인 방식으로 상을 분리시킨 3D 컨버팅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일반상영관보다 비싼 티켓값을 치르고 안경까지 끼는 수고를 감안하면서 시각적 피로도를 견뎌냈음에도 ‘무늬만 3D영화’들은 배신감만 안겨줬다. 특히 2011년, <그린 호넷> <걸리버 여행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 등 3D영화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평면적인 블록버스터들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하며 티켓가만 올려대고 있다는 비아냥을 얻었다. 카메론마저도 이 ‘짝퉁’들의 득세에 불만을 토로할 지경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3D영화에 주목하는 스티븐 스필버그나 마틴 스콜세지와 같은 할리우드의 장인 감독들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에르제의 고전 만화를 퍼포먼스 캡처 기술을 동원한 3D 애니메이션으로 완성한 스필버그의 <틴틴: 유니콘호의 모험>(2011)은 3D영화라는 플랫폼의 가능성을 극대화시킨 사례다. 영화의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롱테이크 추격신은 단연 백미다. 실사 촬영으로 따라잡기 힘든 동선을 인물의 표정까지 생생하게 포착하는 퍼포먼스 캡처의 디테일과 CG로 구현된 가상적인 스케일로 포착해내고, 3D를 통해 생생한 현장감을 입혔다. 스필버그는 말한다. “모든 영화가 3D일 필요는 없다. 3D로 촬영될 이유가 없는 이야기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3D 안에서 완벽해지는 영화들이 있다.” 브라이언 셀즈닉의 인기 동화 <위고 카브레>를 각색한 3D영화 <휴고>(2011)로 큰 호평을 얻은 스콜세지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스필버그에게 동의한다. 항상 나는 3D에 관심이 있었고, 그것이 <휴고>를 위한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할리우드의 두 거장의 말에는 뼈가 있다. 3D는 개척할만한 영화적 기법이라는 것, 하지만 3D가 모든 영화를 위한 대안은 아니라는 것. CG의 발달이 장르의 발전으로 통했듯이 3D영상의 발전 또한 새로운 표현력의 가능성을 여는 문이 될 수 있다. 그렇게 하나의 표현 기법으로서 정착될 때 보다 긴 생명력을 얻어낼 수 있다.
최근 조지 루카스 감독의 <스타워즈 에피소드1: 보이지 않는 위협>이 3D영화로 재개봉됐다. 이 스페이스 오페라가 3D의 가면을 쓰고 부활하는 광경은 최근 3D영화를 둘러싼 어떤 경향을 대변한다. <타이타닉> <탑 건>과 같은 할리우드 고전 블록버스터나 <라이온 킹> <미녀와 야수>와 같은 디즈니 클래식 애니메이션들이 3D로 변환되어 개봉되는 중이다. 클래식의 입체적 발굴이라 할만한 이런 경향은 앞으로 3D영화의 향방을 가늠할만한 새로운 화두다. 현대적인 기술이 과거의 영광을 재조명한다니, 3D영화의 진로 개척은 여전히 진행 중인 것이다.
한국에서도 3D영화에 대한 관심은 뜨겁다. <아바타>의 흥행은 한국산 3D영화 제작이라는 열망을 부추겼다. 하지만 제작 의사를 밝힌 몇 편의 3D영화가 증발되거나 답보적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지난 해 국내 최초 3D 블록버스터라는 수사 아래 <7광구>가 공개됐다. 이는 뼈저린 교훈을 남겼다. 시행착오의 한 단면이라 이해할 수도 있지만 무모하게 전세계적인 유행에 편승한 악수는 산업적인 재앙으로 축적됐다. 중요한 건 결국 ‘3D영화’가 아니었다. 비싼 티켓을 결제하고 안경까지 걸치며 눈의 피로까지 감당해야 하는 관객들은 점차 ‘3D’가 아닌 ‘영화’를 주목하기 시작한다.
과거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 반짝했던 3D영화 붐과 달리 지금의 유행은 일시적인 현상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3D영화를 위한 디스플레이가 개발되고, 보다 진일보한 영상 기술이 그 진화를 뒷받침하고 있는 산업적 논의 안에서 3D영화는 더 이상 미래의 영화가 아닌 현재의 영화다. 심지어 3D라는 시각적 극치를 넘어서 오감을 자극하는 4D까지 등장한 지금, 영화는 단지 숨죽이고 봐야 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중요한 건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을’이다. 관객들은 영화가 보여줄 그 무엇을 기대하며 상영관에 들어선다.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의 달리는 기차 영상을 본 대중의 열광이 동력이 되어 여기까지 왔다. 영화의 역사란 결국 움직이는 영상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라는 고민을 연료처럼 태우며 달려온 것이다. 관객이 보고 싶어하는 혹은 열망할만한 것, 3D영화의 미래 역시 그 고민을 태우며 달려가야 한다.
제주도 남단 7광구에 위치한 석유시추선 이클립스 호의 시추 대원들은 석유를 시추하기 위해 심해의 밑바닥을 긁고 파 들어갔다. 하지만 1년 여간의 노력 끝에도 석유는 나오지 않고, 막대한 자본이 투여되는 사업인 만큼 본사의 압박도 심해진다. 결국 철수 명령이 내려진 가운데, 7광구에 대한 애착이 강한 차해준(하지원)은 이에 반발한다. 그리고 철수를 지휘할 새로운 캡틴으로 7광구에 온 안정만(안성기)은 대원들에게 석유 시추를 위한 유예 시간을 끌어보자고 제의한다. 안정만과 함께 철수를 보류한 여덟 명의 대원들은 다시 한번 석유 시추를 계획하지만 뜻밖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어두운 심해는 미지의 우주 공간이 전하는 고립감을,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자리한 섬과 같은 석유시추선은 우주에 떠있는 우주선의 폐쇄적 공포를 연상시킨다. <7광구>는 분명 <에이리언>을 위시한 여타의 괴물 영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하지원이 연기하는 차해준은 <에이리언>에서 시고니 위버가 연기하는 리플리의 아바타와 같다. 맞다. 짝퉁이라면 짝퉁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여전사가 등장해서 괴물과 맞서는 액션 영화 하나 즈음 있으면 어떤가. 심해 속에서 나타난 미지의 괴물이라는 설정은 대부분의 괴물 영화들이 지니고 있는 클리셰다. 봉준호의 <괴물>도 그러했듯이 <7광구>가 빤한 게 아니라 원래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기시감이 선명하다. 중요한 건 이를 특별하게 수식할 논리적인 디테일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7광구>의 모든 서사는 완벽하게 낭비적이다. 괴물이 등장하기까지 30여 분의 러닝타임이 흘러가는데, 이 시간이 이 영화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해내는 것인지가 또렷하지 않다. 아니, 아무 것도 못한다. 누가 뭐래도 <7광구>의 주연은 괴물이(어야 한)다. 복선 노릇을 하는 오프닝 시퀀스를 지나 본 서사가 시작되고 30여 분간 이어져 나가는 도입부의 서사는 마치 주연배우가 등장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보겠다며 무대로 떠밀어낸 조연 배우들의 난장과 같다. 여덟 명의 캐릭터가 등장하고, 관계도가 그려진다. 그게 끝이다. 물론 영화는 나름의 인과와 복선을 준비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저 괴물이 나오기까지 시간을 버틸 뿐이다. 갈등은 존재하나 이유는 알 수 없고, 캐릭터들은 하나 같이 민폐거나 생각이 없다.
심해괴물이 등장했다. 때때로 그럴 듯하다. 완벽한 퀄리티로 구현된 결과물이라고 칭할 수준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봐줄 만한 상황은 된다 할 수 있을 만한 이미지는 나온다. 심해괴물이 날뛰는 동안 사람들은 괴물의 흔적을 수색하거나 맞닥뜨려 죽을 고비를 넘기거나, 혹은 죽거나, 당연한 수순을 건넌다.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살아남는다. 당연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 당연한 것 외에 어떠한 특별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냥 괴물이 나온다. 그리고 싸운다. 혹은 도망친다. 그러다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서 끝내 괴물을 물리친다. 딱히 독창적이라 말할 수 없는 크리처의 디자인은 둘째치고, 괴물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노동처럼 피곤해 보인다. <7광구>에는 클라이맥스가 없다. 그저 널뛰기하듯, 죽고 살아나는 괴물로 인한 시퀀스와 시퀀스의 접합만이 끊임없이 이어질 뿐이다.
중구난방으로 머리를 든 캐릭터들의 부조화와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낭비적인 드라마, 그리고 과잉된 액션 연출과 날뛰는 괴물보다도 정신 사나운 내러티브의 무절제. <7광구>는 흡사 LA빌딩을 감싸고 올라가는 이무기가 근사해 보일 거라는 어떤 영화와 같이 단발적인 아이디어로부터 대책 없이 확장과 확대만을 거듭해온 허풍선 같은 영화다. 심해에서 올라온 괴물로 인해 석유시추선의 대원들이 사투를 벌인다. 이 한 문장의 시놉시스 이상의 무언가가 없다. 특별할 것 없는 이미지와 안이한 스토리로 피와 살을 이룬 허약한 영화 앞에서 남는 건 무기력한 감상뿐이다. 한국 최초의 ‘3D 액션 블록버스터’라는 캐치프레이즈도 민망하다. <7광구>의 3D는 입체영상이 아니라 노동의 그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시도는 중요하다. 하지만 모든 시도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실패한 시도는 그만한 비판을 견딜 때 비로소 성과가 된다. 원숙함과 단단함을 요구하는 비판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시도의 순기능이기도 하다. 그리고 <7광구>는 지금 그러한 비판을 견뎌내야 할 시점의 영화인 것 같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기시감은 대부분 <에일리언>의 그것이다. 미지의 우주가 심해로, 폐쇄적 공포를 야기시키는 우주선을 해양 한가운데의 섬과 같은 석유 시추 기지로, 심지어 시고니 위버는 하지원으로. 우리도 여전사가 등장하는 그럴싸한 괴수물 하나 있으면 어떤가. 문제는 역시 완성도다. 나름대로 웰메이드 블록버스터를 지향했겠지만 현실은 LA빌딩을 감싸고 올라가던 이무기 등장하던 어떤 영화와 그 영화 감독의 야심이 떠올랐다. 즐길만한 서스펜스가 발견되는 몇몇 시퀀스는 존재하나,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낭비적인 드라마, 중구난방으로 머리를 든 캐릭터들의 부조화까지, <7광구>에서는 날뛰는 괴물보다도 정신 사나운 내러티브의 무절제가 성가시게 눈에 띈다. 심지어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이나, 날뛰다가 공격을 받고 죽을 듯 살아나서 또 날뛰는 과정을 반복하는 괴물이나, 노동하듯 피곤해 보인다. <7광구>의 3D는 입체영상이 아니라 노동의 3D를 의미하는 것이었던가. 비꼬는 말이 아니다. 보는 내내 이상했다. 안경은 왜 준걸까. 분명 3D영화라 했는데, 안경 없이도 대부분의 장면을 볼 수 있는 3D영화라니. 안경을 끼는 수고스러움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더냐. 시도는 필요한 일이다. 그 가치는 인정받아 마땅하다. 여기서 시도가 인정받는다는 것은 단지 그 시도를 고무시키기 위한 칭찬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시도 그 자체의 순기능으로서 인정받는다는 건 보다 나은 원숙함과 단단함을 요구하는 비판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7광구>는 지금 칭찬보다 비판을 견뎌내야 할 시점의 영화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