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웃 타임>의 주인공 팀(돔놀 글리슨)은 여자에게 지극히 인기가 없는 남자입니다. 하지만 진실된 사랑을 꿈꾸는 남자이기도 하죠. 그런 팀은 만 20세가 된 날 아버지(빌 나이)로부터 “우리 가문의 남자들은 만 20세가 되면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는 비밀을 전해 듣습니다. 그리고 팀은 이 능력으로 여자를 사로잡겠다고 다짐합니다.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이란 여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시간으로 여기는 거죠. <어바웃 타임>이 시간여행을 다루는 방식이란 이처럼 사소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목이 ‘타임’이란 단어를 동원하고 있는 건 단지 시간여행을 다루고 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팀은 자신의 시간을 거듭 되돌리며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고 더 나은 기회를 얻는 방향으로 삶을 가다듬으며 자신이 꿈꾸던 미래로 나아갑니다. 사랑스러운 여인 메리(레이첼 맥아담스)를 만나서 그토록 꿈꾸던 연애를 하고 가정을 꾸립니다. 이처럼 순조롭고 평탄한 과정은 그가 아버지가 되는 순간부터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시간을 되돌려서 자신의 행위를 수정하고 다른 결과로 나아갔을 때 발생하는 오차는 그 시절에 존재하지 않았던 자식의 존재 여부에 변수를 만들어버린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죠.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는 순간부터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너무나 간단하게 되돌릴 수 있는 것이라 믿었던 시간의 무게가 비로소 느껴집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에 대한 절실함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우린 시간 속에서 이별과 상실을 경험합니다. 피할 수 없죠. 그 덕분에 추억을 품을 수 있다는 건 시간이 낳은 아이러니일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그 지난 시간들이 언제나 오늘이었고, 지금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바웃 타임>이란 제목은 그 지금에 깃든 모든 순간들을 의미합니다. 결국 <어바웃 타임>은 돌아가고 싶은 과거보다도 소중한 지금에 대한 송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바웃 타임>을 완벽한 영화라고 말할 순 없지만 당신이 사랑할만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그래서입니다. 완벽하지 않았던 과거를 그리워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대문호 코맥 매카시가 쓰고 거장 리들리 스콧이 연출한 <카운슬러>를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리들리 스콧이 연출하고, 마이클 패스벤더와 카메론 디아즈, 하비에르 바르뎀, 브래드 피트, 페넬로페 크루즈가 출연하는 영화가 있다니,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카운슬러>라는 영화를 기대한 건 살아있는 현대문학의 거장 코맥 매카시가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집필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코맥 매카시는 대단히 하드보일드한 문체를 구사하며 황량한 풍경에 황폐한 정서를 담아내는데 능하면서도 대단히 비정한 여운을 남기는 작가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 대부분을 좋아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건 미국 서부시대의 야만을 관통한 <핏빛 자오선>이다.
단언컨대 <카운슬러>만큼 비정한 작품을 보기도 힘들 거다. 이 영화는 당신이 ‘설마 그렇게까지?’라고 생각하는, 혹은 이상의 결말로 나아간다. 일말의 자비심도 없다. 그것이 이 영화를 비범하다고 여길 수 있게 만드는 핵심이기도 하지만 <카운슬러>는 날카롭지만 핵심을 찌르는 영화처럼 보이진 않는다. 이 영화엔 대단히 중후하고 의미심장한 대사들이 등장하는데 궁극적으론 설계돼 있다고 하는 것이 맞다. 예를 들자면, 이 영화를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카메론 디아즈가 연기하는 말키나의 대사. “정확한 사실엔 온도 따윈 없는 거야.” 이 대사에 빗대어 말하자면 <카운슬러>는 온도가 없는 영화 같다. 영화 자체가 어떤 감정을 품도록 유도하지 않는다는 말. 물론 강렬한 서스펜스와 스릴이 예감되는 스토리의 복선과 파괴적인 이미지들이 존재하는 영화다. 덕분에 영화적이라기 보단 문학적인 비범함이 느껴지는 대목이 많다. 감정의 발화점이 존재하지만 끊는 점이 없다. 밑바닥에서부터 서서히 가열되는 열기가 느껴지지만 서서히 끓어오르기 보단 순간적으로 증발해버리는 듯한, 액화가 아닌 기화되는 느낌의 영화랄까. 영화는 파괴적인 이미지를 묘사하지만 그 이상으로 참담한 심정으로 가닿는 건 단지 그 이미지 때문이 아니다. 한치의 자비심이 느껴지지 않는 비정함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다는 와닿는 순간들이 너무나 평범한 낯빛으로 칼을 찌르듯 밀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비정함 자체가 일상 같아서 그 세계에서 두 발 딛고 살아남는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은 두려움이 <카운슬러>에 있다.
그리고 이 비정한 세계관을 굴려나가는 배우들은 스크린과 객석의 거리감을 좁혀서 관객의 목을 쥐는 듯한 박력과 긴장을 주입하는데 특히 감정이란 것을 온전히 추출해낸 듯한 말키나를 연기하는 카메론 디아즈가 대단히 인상적이다. 다만 <카운슬러>는 리들리 스콧의 영화라기 보단 코맥 매카시의 영화처럼 보이는데 그래서 영화보단 문학으로서 보다 인상적인 순간들이 엿보인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풍광들은 영화의 직접적으로 묘사로 소품화되기 보단 소설의 구술을 통해서 상상할 때 보다 인상적일 것도 같다는 감상이 남는다. 덕분에 코맥 매카시의 원작 시나리오가 굉장히 보고 싶어진다. 리들리 스콧보단 코맥 매카시의 인장이 강해 보이는 작품이랄까. 어쨌든 <카운슬러>를 보고 나면 멕시코라는 나라의 근처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완벽하게 휘발될지도 모른다. 길을 가던 남자와 툭 부딪혔더니 목을 죄어 들어오는 올가미가 걸려들어와 목이 날아갈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한숨이 절로 나와서 땅이 꺼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