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잘 만들어줘서 고마운 영화가 있습니다. <소원>이 그렇습니다. <소원>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그것도 끔찍한 실화이지요. 비극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기획된 영화들은 그 현실을 담보로 삼아서 관객의 공분을 이끌어내고 소비하기 쉬운 형태로 기획되곤 합니다. 영화가 사건을 묘사하는 방식과 그 사건에 대한 인물들의 분노를 발화시켜서 관객들의 마음을 들끓게 만드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당사자들의 통증에 대한 공감은 쉽게 무마됩니다. 아마 당신은 그런 영화들 앞에서 여러 번 끓어올랐을 겁니다. 하지만 끓는 점을 지나면 증발하게 되는 법이지요. 그런 종류의 분노는 상영관을 나와서 쉽게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그 분노는 당사자들을 위한 위로보단 영화적 소비를 권장하는 전략에 가깝기도 합니다. 일종의 스포츠 경기에서 비롯되는 흥분과도 유사합니다.
<소원>은 주인공인 소원이가 참담한 사건을 겪게 되는 과정의 전후를 살핍니다. 소원이만큼이나 그 주변인들이 어떻게 슬픔을 공유하고 아픔에 공감하며 비극을 견뎌내고 삶을 회복해나가는지 담담하게 지켜봅니다. 당사자들의 분노나 고난 자체에 감정을 이입하는데 집중하며 객석을 달구는 그 비극을 딛고 살아가고자 손을 맞잡은 이들의 표정에 온기를 담아내고자 노력합니다. <소원>이 끊임없이 눈물샘을 자극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이 너무나도 사랑스럽기 때문이죠. 덕분에 비극적인 상황이 더욱 명확하게 다가오니까요. <소원>이 좋은 영화라고 장담하는 건 그래서입니다. 스크린과 객석의 거리감을 좁히는, 그 통증이 당신 주변의 누군가의 것임을 깨닫게 만드니까요. 그 통증과 슬픔을 공유할 수 있도록 창을 열어줍니다. 그리고 깨닫게 만듭니다.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한다는 것이야말로 그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아갑니다. 서로의 손을 맞잡고 생을 다짐하는 개개인이 만들어낸 온기를 차갑게 식히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약자들을 보호해야 할 법정주의의 안이한 공정성이라는 것임을 목격하게 만듭니다. 아동성범죄에 대한 취약한 진짜 사회를 환기시킵니다.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합니다. 당신이 그 방향을 목격하고 기억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우리 이야기니까요.
지구의 구체 일부의 이미지로 가득 채워진 아이맥스 스크린의 압도적인 시각적 자극과 반비례하듯 청각적 자극을 완벽하게 말소시키는 적막함으로부터 <그래비티>는 시작된다. 우주로부터 날아온 시점숏을 통한 시각적 체험과 함께 음파를 전달할 공기가 없다는 청각적 체험이 동시에 진행된다. ‘우주를 보고 있다’가 아니라 스크린 속의 ‘우주에 포함돼있다’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 경이로운 우주의 풍광 속에 잠재된 공포가 그 신비를 목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직구처럼 달려드는 순간부터 <그래비티>가 그리는 진짜 우주를 목격할 수 있다. 무중력, 무산소, 무기압이라는 ‘무’의 바다에 빠진 한 점 같은 인간의 처절한 사투를 보고 있노라면 무기력이라는 단어의 공포가 생생하게 환기된다. 우주 그 자체가 괴물처럼 느껴진다.
<그래비티>는 몇 가지 전복적인 흥미를 던진다. 일단 탈출이라는 단어의 방향성을 뒤튼다. <그래비티>는 지구로부터 우주를 향해서가 아니라 우주로부터 지구를 향한 탈출극처럼 보인다. 그 결말부에서 <쇼생크 탈출>의 엔딩컷이 떠오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편으론 우주의 경이적인 이미지보다도 사운드 전략이 <그래비티>에서 우주를 체험시키는 방점 노릇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산소와 무기압은 직접 체험할 수 없지만 완벽한 묵음 상태를 통해서 무음 상태의 우주를 재현하는 적막함이 아이맥스 스크린을 채우는 우주의 풍경과 맞물려 진짜 우주에 떠있다는 공감각적인 체험을 극대화시킨다. 중력 안에서 완성된 영화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무중력의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배우의 움직임과 생물처럼 부유하는 카메라의 시점숏 또한 <그래비티>의 우주를 생생하게 체험하도록 유도한다. 우주라는 공간성의 신비를 벗기고 공포라는 감각을 주입하는 것 역시 뼈가 시리도록 신선하다.
열연을 펼치는 산드라 블록도 대단하지만 이 숨막히는 우주적 재난에서 산소 같은 위트를 공급하고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을 선사해내는 조지 클루니의 존재감도 형형하다. 무엇보다도 <그래비티>는 이토록 거대하고 적막한 재난이 생명과 인생이라는 두 개의 ‘생’을 구원하는 우주적인 감동으로 나아간다는 데에서 보다 훌륭한 가치를 품고 있다. 다시 그 생을 목격하고 싶다.
정유정의 문장들은 주춤거리지 않는다. 기차처럼 내달린다. 그 문장들로 끊임없이 생사의 기로를 건넌다. 죽여준다. 그리고 살고 싶게 만든다.
소설 <28>(2013)의 판매량이 10만부를 돌파했다.
놀라긴 했다. <7년의 밤>(2011)은 두 달 가까이 걸렸는데 <28>은 한 달이 채 안 됐으니까. 사실 인세관리를 남편이 한다. 10만부를 팔았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얼마가 들어오는지 잘 모른다.
괴질이 만연한 화양이란 도시에서 벌어지는 28일 동안의 이야기다.
바이러스를 다룬 재난 소설에서 28일이면 백신을 만들 수 있는 기간 아니냐는 독자도 있는데 28일만에 그건 불가능하다. 에이즈도 바이러스의 정체를 파악하고 진단 키트가 나오는데 4년이 걸렸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것들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가능한 거다. 28일은 그야말로 무기력한 시간이다. 서스펜스의 힘을 유지하기에 적당한 기간이라고도 생각했다.
<28>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2500매 정도의 초고를 한달 반 만에 썼다. 이번엔 정말 빨리 끝낼 수 있을 줄 알았지. 보충 취재 이후 도무지 글을 쓸 수 없었다. 6개월을 끙끙대다가 지리산 암자에 들어갔고 2주가 지나니 알겠더라. 애당초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2500매를 죄다 바이러스 이야기로 채운 거다. 그러니 보기도 싫었던 거다. 결국 통째로 글을 버렸다. 바이러스가 발생하고, 창궐해서 도시가 봉쇄됐다는 것만으로 정리하니까 짐이 가벼워졌다. 결국 1900매를 다시 썼다.
시점이 6개다. 3인칭 다중시점은 자칫하면 감상의 몰입을 끊어먹기 좋은 방식이다.
나는 위험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벼랑에 서는 걸 즐긴다. 치명상을 입을 수 있지만 한 단계 발전할 수도 있다. 어쩌면 <7년의 밤>부터가 시도였다. 1인칭 시점의 이야기에 액자 형태로 삽입된 소설로 다중 시점을 시도하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그래서 <28>에선 3인칭 다중 시점 6개를 돌려봤다. 독자에게 다른 각도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다양한 시점으로 시야를 넓혀줘야 했다. 두려움도 컸지만 결국 성공했을 때 얻어낼 것에 대한 욕심이 더 커졌다.
스케일을 넓히는데 효과적이긴 했다.
다중시점을 돌리면 이야기는 풍부해질 수 밖에 없다. 다만 중간에서 호흡을 끊어먹지 않는 게 중요하다. <7년의 밤>보다 더 빠르게 문장을 구성했다. 어지간한 접속사나 수식어는 빼버렸다. 문장 안의 리듬을 포기하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리듬만으로 최대한 빨리 읽히는 문단을 만들었다. 그렇게 몰아쳐서 마지막장에선 소용돌이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소설의 스케일이 커진 만큼 빈틈을 통제하는 데에도 더욱 심혈을 기울였을 것 같다.
수정 작업을 할 때 시간별로 동선을 기록하는 노트가 있다. 1번부터 6번까지 인물이 있다면 동시간대에 이 인물이 각자 무엇을 했는지 전부 기록한다. 소설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나는 알아야 한다. 그런 식으로 시간별 동선을 기록해두면 이야기를 맞물리는데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퇴고할 때는 원고를 역순으로 본다. 그럼 맥락이 끊기는 순간이 보인다.
보통 수정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되나.
<내 심장을 쏴라>는 15번 정도 고치니까 더는 못 보겠더라. <7년의 밤>은 8번 정도 봤다. 점점 짧아진다. <28>은 5번 보니까 힘들더라. 그래서 편집자한테 잘 봐달라고 신신당부했다(웃음). 보다 센 이야기를 하다 보니 탈고할 즈음 힘이 다 소진되는 거 같다. 장편은 사실 체력전이다. 운동을 많이 해야 된다.
구제역 당시 돼지 생매장 동영상을 보고 <28>을 구상했다던데.
그 가축들을 먹어온 사람으로서 충격을 받았다. 인간들의 편의나 경제 논리에 따라서 생명을 차떼기하듯이 죽이는 거니까. 동물이 화를 당하면 인간도 화를 당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고, 가축보단 반려동물이 뼛속 깊이 와닿을 거라 생각했다. 가족처럼 키우던 개에게도 같은 짓을 벌일 거라 생각했다.
‘링고’라는 개의 시점을 대변하는 게 가장 어려운 과제가 아니었을까?
아마 바이러스보다도 개에 대한 이론 공부를 더 많이 했을 거다. 개한테 입을 달아줬으니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언어를 붙여줘야 했다. 이론서부터 소설, <시튼 동물기>마저 참고했다. 다행히도 링고에게 감정 이입했다는 사람이 많았다니 그럭저럭 괜찮았나 싶더라.
키우는 동물이 있나?
동네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는 ‘캣맘’이 된지 6년째고 업둥이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는데 그 덕분인지 마음이 둥글둥글해졌다.
<28>이 미니시리즈였다면 시청자 민원이 대단했을 거다. ‘제발 이 캐릭터는 살려주세요!’라고(웃음). 자신의 캐릭터를 죽이는 느낌은 어떤가?
각자 다르다. 노수진은 간호사였던 내 개인사를 반영한 캐릭터라서 그런지 감정 이입이 됐다. 비참하게 죽는 장면을 쓰고 나선 몸이 좋지 않을 정도였다. 반대로 박동해는 어떻게 죽일까 골몰하면서 신나게 쓰고 신나게 죽였다(웃음). 반면 유혹도 있었다. 주인공인 박재형을 죽여야 할까. 하지만 처음부터 죽이기로 설정된 인물이고 얘가 희생해야만 구원을 얘기할 수 있었다. 원래 김윤주만 살아남는 거였다. 기자이니까 기록자이자 역사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전할 사람이 필요하더라. 남는 건 소방관인 한기준뿐이었다. 폭력의 마지막 종점을 피폐한 몸과 마음으로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가 필요했고, 그래서 살렸다.
작가가 아니라 킬러 같다(웃음).
이게 얼마나 신나는데! 킬러 소설도 써보고 싶다. 죽이고 싶은 사람 다 죽여보게(웃음).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2007)와 <내 심장을 쏴라>(2009) 이후 작품의 체급을 확 올린 인상이다.
두 작품은 성장물이다. 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이야기였다. 젊었을 때 운명이 나를 침몰시킨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젊은 친구들한테 세상살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사실 작가에겐 등단도 굉장히 중요하다. 나는 심사에서 11번 떨어진 뒤 앞의 두 작품으로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다. 그래서 <7년의 밤>부터는 순수한 허구의 세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다. 손을 놓지 못하고 밤새도록 보게 만드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욕망이 강해졌다.
세상과 분리된 정신병원(<내 심장을 쏴라>), 접근성이 떨어지는 댐의 호수 주변부(<7년의 밤>), 봉쇄된 도시(<28>)까지, 소설마다 공간의 역할이 중요하다.
공간 구축이 내겐 소설의 시작이다. 완전히 장악한 공간이 내 집처럼 익숙해져야 인물이 배치되고 그 인물에게 내재된 욕망이 이야기의 씨앗이 된다. 공간은 좁을수록 좋다. 날아다니는 파리 한 마리의 행보까지도 꿰고 있으려면 그게 편하니까. 사실 <28>은 넓어서 애먹었다. <내 심장을 쏴라>의 정신병원처럼 폐쇄된 공간에선 할 얘기가 엄청 많아진다. 그 갇힌 공간에 어떤 압박을 줬을 때 우리 일상에서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 튀어나온다.
그만큼 경로를 설명하는데 공을 들이는 인상이다.
영화 작업할 때 콘티를 그리듯이 나도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린다. 어떤 상황에 맞는 환경을 그려보고 인물의 동선을 체크해본다. 이런 과정을 스케치북에 완성한 다음에 글로 옮긴다.
공간의 구조와 동선이 그만큼 중요한가 보다.
그게 바로 내 소설의 디테일이다. 디테일이 구축되지 않으면 리얼리티가 죽는다.
‘화양’을 가상의 도시로 설정한 건 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보다 더 단순한 이유도 있다. 내가 길치에다 방향치다(웃음). 20년이나 산 우리 동네도 잘 모른다. 직접 도시 계획을 하는 게 편하다(웃음).
길치가 공간과 동선에 집착한다니(웃음).
그래서 집착하는지도 모른다(웃음).
장르를 다루는 ‘여류 작가’라는 면에서 주목 받는 측면도 있다.
문학적인 스승으로 생각하는 작가가 레이먼드 챈들러와 스티븐 킹이다. 사실 스티븐 킹의 소설은 장르물로만 한정할 수 없다. 나도 그런 소설을 쓰고 싶었다. 내 분야는 정통 장르 소설도, 순문학도 아니다. 경계선에 선 작가라는 얘기를 듣는 것도 결국 그런 내 성향 탓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장르적인 방식으로 형상화한다고 보면 된다.
여성 작가가 여성 캐릭터를 활용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내 이야기 자체에 여성 캐릭터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지금까지 여성 캐릭터를 강화해온 건 주변부의 캐릭터 구조를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만약 여성이 주도하는 이야기를 쓴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이야기가 될 거다. 하지만 그건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7년의 밤>의 오영제나 <28>의 박동해 같은 악마적인 캐릭터들은 어디서 소환하는가.
싸이코패스를 구상할 때 내 자신을 들여다본다. 사람의 마음엔 천국과 지옥이, 천사와 악마가 있다. 작가가 할 일은 충돌 지점을 보여주는 거다. 그 지점을 파악해서 소설에 끌어내면 캐릭터가 살아서 움직인다. ‘무엇이 그 악을 반응하고 행동하게 만들었을까? 나라면 어떨까?’ 그렇게 발전된 생각을 이론과 결합한다. 싸이코패스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 자료들을 자주 챙겨보는데 그 이론이 내 안의 폭력성과 결합되면 인물이 탄생한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의외성을 드러내는 인물들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를 받기 마련이다. 항체가 되는 상처도 있지만 지옥으로 남는 상처도 있다. 그 지옥을 보지 않으려고 대부분 자기 방어라는 문을 닫는다. 그 문은 누구도 접근해선 안 되는 성역이지만 작가는 침범한다. 그 문을 열고 지옥을 보여주는 것이 내 이야기다. 그 지옥문이 열렸을 때 인물들로부터 튀어나오는 의외성들을 관찰하고 이야기로 엮어주는 게 재미있다.
사람의 본질이 드러나는 순간을 즐긴다는 건가.
그렇다. 콘크리트처럼 퇴적된 압력이 해제되면서 튀어나오는 근본적인 본성은 평소의 모습과 다를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오영재나 박동해 같은 부류는 당신 소설에서 가장 본질적인 인물이겠다.
아마도. 완벽한 자유인이겠지(웃음).
무슨 운동을 하나?
등산도 하고, 동네 도장에서 복싱도 한다. 체력에 보탬이 되는 운동은 다한다.
규칙적인 편인가?
아침형 인간이다.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밤 10시에 잔다.
하루에 5시간만 자나?
잠을 깊게 자는 타입이다. 누우면 곯아 떨어지고 눈을 뜨면 일어난다.
집중력이 좋은 편인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땐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신경 쓰지 않는다. 보통 새벽 3시에 일어나서 4시부터 소설을 쓴다. 사건을 만들고 이야기를 진행한다. 오후가 되면 집중력이 떨어진다. 그땐 문장이나 사건 배열을 수정한다. 다음날 아침엔 새로운 이야기로 넘어간다.
주부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병행하는 건 어떤가?
남편이 외조를 잘해준다. 장도 대신 봐오고, 청소도 대신 해준다. 내가 하는 건 밥하고 요리하는 정도다. 아들은 일본 유학 중이라 노인네처럼 둘만 산다. 사실 나는 아직 아들 보러 일본에도 안 가봤다. 남편은 분기마다 한번씩 간다. 아내로서나 엄마로서나 형편 없지. 그래서 항상 시집 잘 갔다고 말한다(웃음).
<7년의 밤>을 보고 야구를 좋아할 거라 추측했다.
광이다. 어렸을 때 고교야구 당시부터 좋아했다. 지금도 굉장히 좋아하지만 어지간하면 안 본다. 봤다 하면 며칠 동안 그것 때문에 정신 없으니까. 그래서 집에 TV도 없고.
그럼 영화나 드라마도 안 보나?
고의적으로 보지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보면 머리 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를 벗어나기 힘들다. 클리셰가 씌워지면 다른 방식을 구상할 수 없다.
35세가 돼서야 직장을 그만 두고 전업작가로 나섰다.
첫 소설 <열 한살 정은이>가 2000년 8월에 나왔고 2001년 5월에 그만 뒀다. 그 기간 동안 완전히 소설에 정신이 팔려버렸다. 직장 생활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만 둬야 했다. 피해를 끼치면서 월급 받고 살 수는 없으니까.
간호대학을 진학했다. 국문과 진학 의사는 없었나?
엄마가 극구 반대했다. 외삼촌이 글을 쓰다가 요절했다. 딸이 그 길을 가는 걸 원치 않았다. 의대를 가길 원했지만 성적이 안돼서 간호대학을 갔다. 돈을 벌면 국문과에 가서 공부하려고 했는데 졸업하고 병원에 취직할 즈음 엄마가 아팠다. 장녀로서의 역할을 하다 보니까 서른이 다 됐더라. 멀리 돌아온 거다.
작가 이전엔 몇 년 일했나.
간호사 5년하고, 건강보험평가심사원으로 9년 정도? 그러니까 14년?
등단한지 6년이다. 아직 7년의 밤도 안됐다. 기승전결 중 어디까지 왔다고 생각하나.
도입은 지났고 이제 전개 단계 정도. 전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쓰고 싶은 이야길 밀어붙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복제품만 내놓을 순 없다. 독자가 느끼진 못해도 내 스스로에겐 변화가 생길 거라 생각한다.
구상 중인 소재는 없나?
어렴풋이 잡히는 이야기가 있는데 확신이 안 선다. 그래서 머리를 비우려 한다. 그러려면 몸을 혹사시켜야 한다. 9월에 히말라야 트레킹을 가는데 머리를 비우고 돌아오고 싶다.
1. 택시 기사들의 생계가 어려운 이유는 택시 기사의 과도한 사납금 때문인데 정부는 택시비를 올렸다. 그렇다면 택시비 상승이 택시 기사의 이윤으로 돌아가야 할 터인데 결국 택시 회사의 사납금 상승으로 이어졌고, 택시 기사의 생계는 여전히 팍팍하고, 서민들의 주머니만 더욱 털릴 판이다.
2. 눈 가리고 아웅하듯이 정책을 통과시킨 위정자들에게 근본적인 책임이 있다. 문제의 근본을 살피지 않고, 사실은 살필 생각도 하지 않는 자들이 손쉽게 정책을 주무르니 문제만 심화된다. 서민의 삶이라는 건 그들에겐 안데르센 동화 같은 이야기처럼 다른 세계의 현실일 뿐일지도.
3. 가끔씩 택시 기사들을 위해서 택시비를 현금으로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때마다 저 위정자들의 얼굴이 생각난다. 아마 그들이 IMF 때 가진 자들이 달러 두둑이 챙겨서 환 치기 할 때 애꿎은 서민들에게 금이빨도 떼어서 나라를 도와줘야 한다고 어르신들도 부추겼을 이들의 표정과 닮았을 거다. 정책적 오류가 불러낸 사태에서 개개인의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는 이들은 위정자들의 삶을 배려하는데 일차적으로 기여하는 이들이다. 마더 테레사의 탈을 쓴 근본주의자들의 횡포는 평화가 아니라 공포를 주입한다. 그리고 결국 모두의 삶을 악화시키고 위정자의 질서를 숭배하도록 이끌지.
4. 택시비를 현금으로 내건, 카드로 내건, 소비자가 선택할 문제로 제시한 사항이니 결정은 당사자가 할 일이다. 이에 대해서 틱틱거리는 택시 기사의 삶이 팍팍하건 말건 알게 뭐냐. 택시 기사들의 문제를 외면하자는 말이 아니라 방향을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는 거지. 문제는 근본이 개선돼야 할 사항인데 자꾸 수면만 건드리면서 자뻑하지 말라는 거다. 택시비를 현금으로 내는 것이 택시 기사의 삶의 풍요를 돕는 것이라 자뻑하는 건 거지한테 던져준 오백 원짜리로 세상을 구원했다고 말하는 것이나 비슷하다. 심지어 자기가 탄 택시가 개인 택시인지도 구별하지 못하는 주제에. 게다가 행정구역마다 차이는 있는데 택시비 5~6천원 정도는 카드 결제해도 행정시에서 수수료 변제해준다. 미안하지만 그 배려가 사실은 헛발질이었단 거야.
5. 까놓고 말하면 근본적인 관심은 없지만 그 정도 자선 의식으로 스스로를 구원하고 있는 셈 아닌가. 물론 모든 일에 사사건건 깊게 관심을 가져야만 하도록 이끄는 이 빌어먹을 나라의 피로 권하는 사회가 문제겠지만. 어쨌든 이 땅의 가장 큰 문제는 당사자가 돼서 길거리에 나앉아봐야 서러움을 공유할 줄 안다는 거다. 그리고 드라마에서나 나오던 그런 사연이 자신의 이야기가 될 확률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도 별로 인지하고 싶지 않다는 거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OECD 가입국 중에서 대한민국만큼 사회안전망이 최악인 나라도 찾기 드물다는 건 왜 아무도 몰라. 타인의 불행에 어느 정도 관심을 공유해야 하는 건 그게 나를 비롯한 가까운 누군가의 불행이 되기 너무 쉬운 사회에 앉아있기 때문이라는 거라는 걸, 이젠 좀 알만할 때가 되지 않았나.타인의 불행에 어느 정도 관심을 공유해야 하는 건 그게 나를 비롯한 가까운 누군가의 불행이 되기 너무 쉬운 사회에 앉아있기 때문이라는 거라는 걸, 이젠 좀 알만할 때가 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