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에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카운터페이터>는 분명 그 질문의 반대편에 놓여있다. 하지만 <카운터페이터>는 저 물음표를 흡수하는 답변이라기보단 튕겨내는 반문에 가깝다. 인간은 살아남는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여기에 의미를 좀 더 보태보자. 인간이라는 존엄성이 완전히 짓이겨지고 삶이 형태로써의 껍데기만으로 남겨진 순간조차도 살아남는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가? 이토록 많은 질문을 얻었지만 여전히 대답을 얻을 수 없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카운터페이터>는 답변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 나열된 질문들은 영화가 유도하는 것들이다. 영화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생존의 도구로 몰락한 인간의 삶을 통해 그 존재적 가치에 대한 물음을 끌어낸다.
해변가에 앉아 있는 사내가 보는 프랑스어 신문엔 종전을 알리는 기사가 1면을 장식하고 있다. -La Guerre est fine.(The War is over.)- 과묵한 사내의 눈엔 사연이 서려있고, 말 대신 내뿜어지는 담배연기는 흐릿한 잔상처럼 흩어져나간다. 1936년, 베를린의 술집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본격적인 사연은 독일에서 가장 뛰어난 위조지폐 제조 실력을 지닌 살로몬 소로비치(카알 마르코빅스)가 유태인이란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간 뒤, 그 곳에서 어떻게 생을 연명했는가, 에 대한 이야기를 회상처럼 담고 있다. 동시에 이는 파운드화와 달러의 위조지폐를 제조하고 적국인 영국과 미국에 유통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흔들려 했던 나치의 ‘베른하트 작전’이란 실화의 재구성이기 하다. 세계 최대의 위조지폐 사건이라 꼽히기도 하는 ‘베른하트 작전’은 유태인 수용소에 수감된 유태인을 대거 인력으로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위조지폐범으로 잡혀 유태인 신분이 탄로나 수용소로 끌려온 뒤 노역에 시달리던 살로몬은 그림 실력을 인정받아 삽과 곡괭이 대신 붓과 팔레트를 들게 된다. 그러던 중 악명 높은 작센하우젠 수용소로 이송돼 절망에 빠진 그는 자신을 체포한 헤르조그 소령(데비드 스트리쏘우)을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나치의 공작수행을 위한 위조전담반의 책임자로 복무하게 된다.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지니고 있지만 돈 안 되는 예술보단 돈 되는 불법행위에 골몰했던 살로몬에게 재능은 그저 삶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통용되는 겉치레에 불과하다. 생존 그 자체에 삶의 의미를 두던 살로몬은 수용소에서도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서 그림 실력을 드러냈고, 자신의 장기인 위조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삶을 연명하는 유용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지스탕스 출신이자 인쇄 기술자인 그의 동료인 브루거(오거스트 디엘)는 그들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에 불복함으로써 그들에게 저항하려 한다. 결국 그 사이에 놓인 살로몬은 갈등과 함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이다.
그들에게 죽음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머무는 위조전담반의 수용공간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수용소에서 유일한 안식처다. 하지만 그곳은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위배(圍排)됐을 뿐,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다. 수단으로서의 가치가 사라질 때, 그들에게 삶의 여지는 없다. 위협에 굴복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낄 찰나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다. 자신들의 저항이 종전에 좋은 영향을 끼칠 거라는 브루거의 주장은 옳은 함의를 지니고 있지만 그 선택이 전체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깊은 고민과 갈등을 부른다. 죽음과 직면한 이들은 오히려 죽음에 맞서는 것이 만만찮다. 생존과 가장 동떨어져 죽음과 대치한 순간, 생의 욕구는 더욱 강렬해진다.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도 살고 죽음의 문제가 더욱 가깝다. 나치의 체제하에서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온몸으로 체감했던 유태인들에게 그 당시 삶이란 매일같이 아득해지는 것이었을까. ‘오늘 총살되느니 차라리 내일 가스실에 가겠어’라는 살로몬의 말처럼 그들에게 삶이란 단 하루의 연장만으로도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 최소한의 단위적 연장을 통해서 삶에 대한 의지도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카운터페이터>는 최소한의 단위개념으로 몰락한 삶이 어떤 방식으로 생존의 의지를 되새기는지, 그리고 그 국지화된 삶이 어떤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되짚어나가는지를 드라마틱하게 드러낸다. 인간의 존엄성이 철저히 파괴되고 삶의 의미가 유린당하는 순간 속에서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게 만드는 건 그 와중에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욕구다.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기 전까지 가스에 대한 공포에 예민해지고, 결핵을 앓는 동료를 위해 가까스로 약을 마련한 찰나 총에 맞아 죽는 동료를 목격하는 그들의 삶에 인간의 고결한 가치관 따위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공산주의 체제의 동독을 배경으로 한 <타인의 삶>과 나치 유태인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카운터페이터>는 강압적 체제 안에서 연명하는 인간의 삶을 들춘다는 점에서 교집합을 이룬다. 하지만 전자가 짓눌린 삶을 온전히 펼쳐 원형의 가치를 복원하는 이야기라면 후자는 짓눌린 채 납작해진 삶의 처참한 몰골 안에 잔존한 일말의 가치를 들여다보는 이야기다. 그 차이는 선택의 불가피성을 통해 발생한다. <타인의 삶>이 체제를 구성하는 가해자의 깨달음으로부터 의미를 채취한다면, <카운터페이터>는 체제에 수용 당한 피해자의 행위 그 자체가 의미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자신의 삶을 이루는 공간에 은닉하는 지배자 계층인 반면, 후자는 주어진 공간 속에서 감시 당하는 피지배자 계층인 까닭이기도 하다.
자신들을 둘러싼 수용소의 벽이 무너지고 같은 유태인의 총부리에 위협당하는 그들은 자신들이 같은 유태인 수용자임을 밝히기 위해서 또 한번 사력을 다한 뒤에야 온전한 평화를 체감한다. 죽음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난 벽 너머 수용소의 모습은 그들의 삶이 어떤 공포로부터 협박당하고 있었는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벽 너머에서 문득 들려오는 총성과 절규로 굳어진 그들의 표정은 평화롭게 위장된 일상 속에 잠재된 공포를 더욱 구체화시키고 생에 대한 의지를 더욱 간절하게 끌어당긴다. 실존에 대한 의문이 발생하고 그 가치가 희미해지는 찰나에도 생존에 대한 의지는 더욱 짙게 드리운다. <카운터페이터>는 죽음에 직면했던 자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를 비출 뿐, 그에 대한 가치를 되묻지 않는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도, 기쁨조차도, 그 너머에선 부재한다. 그저 삶이 지속될 뿐이다. 추억으로 남지 못할 상흔 같은 기억을 떠안은 채 지속될 그들의 삶은 그저 살아남았다는 위안을 통해 다시 오늘을 버티며 생존해나갔을 것이다. 동시에 생의 의미는 그렇게 살아남아야만 되물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과거 미국의 동시상영관에서나 줄창 틀어대던 싸구려 B급 영화를 현대에서 재현해보겠다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야심이 짙게 드리운 <그라인드 하우스>는 시종일관 농후한 장난끼가 가득하다. <데쓰 프루프>와 <플래닛 테러>, 그리고 4편의 페이크 예고편으로 이뤄진 종합세트는 시대를 역행하는 이미지와 내러티브로 채워져 있다. 흔히 말하는 오늘날의 웰메이드 영화는 상극에 가깝다. 맥락이 무성의한 서사 구조와 시종일관 필름의 훼손도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이미지, 게다가 중간부분을 날려먹었음을 당당하게 알리는 미싱 릴(missing reel)까지, 연출된 저속함과 위장된 열악함이 가득하다. 먼저 국내에서 개봉된 <데쓰 프루프>와 마찬가지로 <플래닛 테러> 역시 고의성이 다분하게 단연 후진 완성도를 자랑한다.
<데쓰 프루프>의 짝패답게 <플래닛 테러>는 적나라한 싸구려 유희를 있는 힘껏 발산한다. 다만 페달을 밟듯 체감속도를 높여나가는 <데쓰 프루프>와 달리 <플래닛 테러>는 부지런히 스텝을 밟는 움직임으로 스태미나를 지속적으로 유지한다. 상황에 대한 논리적 유추를 조롱하듯 <플래닛 테러>는 그저 기저에 깔린 상황들을 두서없이 풀어놓고 마냥 떠들어댄다. 사건이 형성될 뿐, 그것이 어떤 원인에서 비롯됐으며 어떤 근거로 진행돼나가는가라는 상세한 논리 따위는 안중에 없다. 그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짐짓 모른 척 잡아다 놓고 시치미 딱 떼듯 진전시켜나갈 뿐이다. 왜 저것이 저 자리에 놓이게 된 건지, 대체 저 사람의 능력이 어디서 발생한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적 관점을 지속한다면 스스로 자폭할 가능성이 크다. <플래닛 테러>는 그저 영화가 깔아놓은 난장판을 의식 없이 즐겨야만 합당한 이벤트에 가깝기 때문이다.
스스로 수준 이하를 표방하지만 엄밀히 살피자면 <플래닛 테러>는 영리한 셈법으로 다양한 감정적 체험을 유도하는 수준 이상의 오락물이다. 불현듯 뭔가 튀어나올 듯한 상황을 통해 가열된 긴장감은 강도 높은 고어적 잔혹함을 통해 폭발되기 일쑤지만 긴박해 보이는 상황과 정면으로 대치된 도전적인 유머가 도처에서 발견된다. 잔혹성을 바탕으로 한 긴장감과 그런 상황을 배반하듯 촌티 날리는 유치함을 빙자한 유머감각은 <플래닛 테러>를 이끄는 평형감각에 가깝다. 물량 공세를 아끼지 않는 총격씬과 함께 액션의 화력도 단연 화끈하다. 또한 <데쓰 프루프>를 통해 이미 한차례 체험한 관객도 있겠지만 스크래치가 난무하고 화질의 상태를 극악하게 조작함으로써 ‘그라인드 하우스’의 체험을 이색적으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플래닛 테러>의 싸구려 유희에서 화룡정점을 이루는 코스는 포스터부터 눈길을 끄는 체리 달링(로즈 맥고완)의 아크로바틱 액션이다. 인간형 범용결전병기까진 아니지만 그 자체만으로 강렬한 포스를 뿜어내는 기관총 다리로 무장한 관능적인 그녀는 단연 <플래닛 테러>의 최종병기다. 단지 고고댄서였다는 이유만으로 저렇게 화려한 몸놀림을 보일 수 있는가, 다리에 장착된 기관총이 어떻게 자유자재로 발사될 수 있는가, 란 의문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 황당한 액션에 온몸으로 호응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능청스럽게 멀둔 중위 역으로 등장해 흉물(?)로 분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브루스 윌리스와 냉정한 의사지만 의처증이 심한 싸이코 근성을 지닌 윌리엄 박사 역의 조쉬 브롤린, 그리고 자신의 성기가 녹아 내리는 와중에도 혐오스럽게 섹스에 집착하는 광기어린 연기를 펼치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특별한 출연까지, 배우들의 헌신적 열연은 <플래닛 테러>의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특별한 카드로서 제각각 유효하다.
<플래닛 테러>는 지독하게 고의적이지만 명백히 순수한 의도를 담고 있다. 농염한 스트립 댄서의 전신을 적나라하게 비추며 떨어지는 앵글과 찢겨지고 터져나가는 인간의 육체를 정면에서 과감하게 비추는 샷이 말해주듯 <플래닛 테러>는 지극히 불결하고 혐오스러운 것들을 거리낌없이 비추고 이를 통해 직설적인 유희적 욕망을 숨김없이 들춘다. 명품을 표방한 싸구려가 널린 판국에서 <플래닛 테러>는 싸구려 유희의 정체성을 과감히 드러내고 스스로 즐긴다. 당신은 그저 이 순수한 싸구려 유희 앞에 앉아 염치 따윈 잊고 낄낄거리다가 영화가 끝난 뒤, 점잖게 극장을 빠져나가면 그만일 뿐이다.
TIP_<그라인드 하우스>에는 4편의 페이크 예고편이 함께 담겨있다. 하지만 이 중, 로드리게즈 감독이 연출한 <마쉐티>만이 <플래닛 테러>의 인터내셔널 버전에 포함됐을 뿐이다. 현재 <데쓰 프루프>와 <플래닛 테러> 인터내셔널 버전을 수입한 '스폰지'에서도 나머지 세 개의 예고편을 정식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전했다. 결국 국내 관객에게 공개되지 못한 나머지 세편의 예고편은 미싱 릴(Missing Reel)이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발빠른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나머지 예고편을 이미 봤거나 보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겠지만. (무비스트)
세상에 그를 제압할 상대는 없다. 총알조차도 그에겐 가벼운 쇳덩이에 불과하다. 그는 천하무적이다. 하지만 이 남자, 나태하다. 질서의식도 없다. 언제나 한 손에 술병을 들고 다니는 그는 도시의 필요악이다. 악당이 나타나도 그는 길가 벤치에서 고주망태가 되어 잠을 자고 있다. 악당을 물리쳐야 한다는 꼬마에게 등 떠밀려 현장으로 출동하지만 그는 시민들의 안전이나 도시의 미관 따위를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한다. 그의 영웅놀이가 LA를 위협하고 있다고, 그가 차라리 뉴욕으로 가버렸으면 좋겠다고 시민들은 푸념과 질시를 보낸다. 그 남자 핸콕(윌 스미스)은 그래도 술병을 따고 있다.
<핸콕>은 기존의 히어로 무비들과는 개념이 다르다. 핸콕은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히지도 않으며 신분을 가리기 위해 평범남과 히어로의 이중생활을 고민하지도 않는다. 언제나 술병을 들고 다니는 고주망태가 되어 음주비행을 일삼고 기분 내키는 대로 도시의 기물을 파손하는 꼴통(asshole)일 뿐이다. 물론 그가 도로에서 총기를 난사하며 질주하는 자들을 제압하거나 철도 건널목에 멈춰선 차에 탑승하고 있는 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철도를 막아서는 등, 나름대로의 능력을 발휘하긴 하지만 그에 대한 기회비용이 너무나 막대한 실정이다. 핸콕은 악당들로부터도, 시민으로부터도 천대받는 유례없는 초인이자 사회적 필요악이다.
기존의 히어로 무비의 관습을 뒤엎는 설정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다. 제각각 슈트를 갖춰 입은 초인들은 자신의 이중생활에 번뇌하거나 마이너리티로써의 정체성에 고민하곤 했지만-최근 <아이언맨>이 이례적인 사례를 남기긴 했지만- 술병을 들고 날아다니는 핸콕에게 그들은 쫄쫄이 타이즈를 입은 호모에 불과하다. <핸콕>은 히어로 무비의 관성에 짓눌린 무게감보단 가십거리를 양산하는 셀레브리티의 가벼움에 가깝다.핸콕이 우연히 목숨을 구한 홍보전문가 레이(제이슨 베이트먼)가 핸콕에게 ‘당신은 사랑받아야 한다’며 이미지 메이킹 제의를 주고 핸콕이 결국 이를 수용하는 순간 <핸콕>이 지닌 설정의 가벼운 묘미는 확실한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꼴통으로 불리던 핸콕이 제멋대로 웃자란 버릇을 억제하며 자숙을 하던 중, 결정적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레이가 준 슈트를 입고 매너있게(?) 악당으로부터 도시를 구하는 순간 그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탈바꿈되고 인생역전에 성공한다. 찬사 받는 영웅의 탄생 과정은 흡사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보는 듯한 묘한 뿌듯함을 남기는 동시에 아이러니한 위트를 형성시킨다. 동시에 이는 스타 기획 시스템 속에서 사고뭉치 셀레브리티가 국민스타로 거듭나는 이미지 메이킹 과정과도 흡사하다.
하지만 설정의 묘미가 정점에 달하는 순간, 약발도 떨어진다. 기막힌 설정을 통해 흥미를 유발하는 것에 성공했으나 그건 에너자이저처럼 오래 가는 것이 아니었다. 단발성 이벤트에 가까운 소재 덕분에 <핸콕>은 러닝타임을 유지시킬 땔감이 더 필요했다. 그 대안으로 자리잡은 것은 간단한 발상전환만으로 상승세를 유지했던 영화적 묘미를 순간 역으로 눕히는 셈이 됐다. 물론 의외의 캐릭터를 전복시키는 깜짝쇼를 펼치며 (스포일러 따위를 접하지 않은 관객에게)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의 효과를 일시적으로 작동시키긴 하지만 그 역시도 약발이 오래가는 것은 아니다. 재치 있는 입담과 설정의 파격을 통해 버라이어티의 묘미를 펼치던 <핸콕>은 드라마로 연결한다. 랩뮤직처럼 리드미컬하던 재미는 점차 오페라처럼 장중해진다.
전후로 양분할 수 있는 내러티브 전환의 무리수와 함께 영화는 전체적인 흐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창세기 아담과 이브처럼 연인의 운명을 타고난 불사의 남녀가 자석의 양극처럼 서로의 비범한 능력을 중화시키는 덕분에 함께 할 수 없다는 운명적 비극을 통해 간절한 로맨스의 기운마저 내포하는 후반부는 개별적인 설정으로써 흥미를 유발할만한 사안이지만 기존에 <핸콕>이 지니고 있던 주요한 매력을 철저히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핸콕이 선량해지는 순간, <핸콕>은 일정한 묘미를 잃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핸콕>은 삐딱하고 불량한 초인의 망나니 짓을 지켜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작품이었기에 그 설정에 발전적인 양상을 덧씌우지 못하는 이상, 영화적 효력도 거기서 끝날 공산이 컸던 까닭이다.
러닝 타임의 절반 가량을 꼴통 영웅 만들기 프로젝트에 할애한 <핸콕>은 나머지 러닝타임을 메우기 위한 대책마련에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100분이 채 되지 않는 러닝타임 안에서 그 설정을 효과적으로 지속시킬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에 실패한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에서-애초에 <핸콕>의 시나리오는 현재 완성본에 비해 조금 어두운 내용으로 전개됐다 한다.- 기존의 이미지를 포기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용두사미로 전락한 듯한 <핸콕>은 여러모로 아쉬운 기획물임에 틀림없다.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선전하는 윌 스미스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용두사미의 진수를 보여준 <나는 전설이다>의 뒤를 이어 <핸콕>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맞이한 셈이 됐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은 근원보다는 현상에 시선을 둔다. 사막을 헤매는 두 청년이 애초에 무엇을 향했는지(<게리>), 끔찍하게 총알을 난사한 소년들은 무엇을 겨눈 것인지(<엘리펀트>), 죽음에 대한 깊은 갈증을 느끼는 청년이 본래 지녔을 생의 의지는 어디로 증발한 것인지(<라스트 데이즈>), 그 모든 것은 중요치 않다. 그는 현실 뒤편의 어떤 근원 지점에 대해서 무신경하게 고개를 한번 돌렸다가 다시 제자리를 바라볼 뿐이다. 잠시 일그러지거나 부서지고, 사멸했던 존재의 형상들이 그 예감을 털어놓기가 무색하게 다시 형체를 안온하게 회복하는 순간의 형형한 찰나를 재생시킨다. 그 과정 속을 걸어가는 젊은 육체들은 그 심약한 영혼에 죽음을 새겨 넣는다.
구스 반 산트는 그렇게 사(死)의 영역을 향해 끊임없이 전진한다. 그것은 카메라의 동선을 따라 걷는 현실적인 족적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대기 속에서 어지럽게 흔들리는 구체음악(具體音樂)의 초현실적인 혼돈으로 울려퍼지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청춘은 죽음의 기억을 새겨 넣는 미완성 형태의 오브제(objet)로 영역화된다. <파라노이드 파크>는 구스 반 산트의 전진을 위한 탐미적 공간이자 재생의 연결고리다.
파라노이드 파크(paranois park)는 청년들의 육체적 기운이 넘실거림과 동시에 무질서한 폭력성이 잠재된 공간이다. 동시에 그곳은 젊은 시절의 규정될 수 없는 정체성의 혼란처럼 자리를 찾지 못하고 흔들리듯 활강과 하강을 거듭하는, 중력에 저항하지만 속박될 수 밖에 없는 대지다. 그곳은 저항할 수 없는 성장의 인과 관계를 거부하려는 역동적인 몸짓들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스케이드 보드에 실린 움직임은 지정된 시간의 흐름 안에서 가속화된 편입의 상일 뿐이다. 즉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짊어져야 할 성장의 고민은 <파라노이드 파크>의 벗어날 수 없는 이면의 진실이다. 마치 피할 수 없는 성장의 서사처럼 소년들의 움직임은 가속화될수록 시간의 중력 앞에 무력할 뿐이다.
파라노이드 파크에 가자는 자레드(제이크 밀러)의 말에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알렉스(게이브 네빈스)에게 파라노이드 파크는 감히 발을 들일 수 없는 이상 낙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에 누구도 그곳에 갈 준비가 된 사람은 없다는 자레드의 대답은 표면적으로 파라노이드 파크는 어떤 자격을 요구하지 않은 평등한 땅이란 의미를 뜻하는 것 같지만 이는 거부할 수 없는 통과의례적 관례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결국 파라노이드 파크는 알렉스의 삶을 장악하게 될 끔찍한 기억에 도달하기 위해 피할 수 없이 밟고 지나야 하는 운명의 문턱인 셈이다.
곡선 위를 미끄러지듯 구르는 스케이드 보드의 뒤를 쫓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슈퍼8mm카메라의 열악한 화면을 통해 이질적인 현실감을 부여 받는다. 현실에 불결한 잔상을 새기듯 얼룩진 화질을 선사하는 8mm카메라는 곡선의 역동적 동선을 쫓아갈 수 있는 유일한 카메라라는 점에서 되려 사실적이다. 이는 동시에 그 비현실적인 사실감이 그 영역의 허구적인 생동감을 표현하고자 하는 기교적 순수함으로서 활용된다. 공간적 정서를 끌어내기 위해 활용된 기술력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은 역시나 완전히 성숙되지 못한 자의식의 흐름이 역동적 기운으로 표출되는 공간적 활기를 담아내기에 적절한 그릇이 된다. 또한 소년기의 충동적 본능과 욕구가 육체적인 움직임으로 소비되는 공간적 기운을 거칠게 담아낸 비쥬얼은 몽환적인 일렉트로니카 음악에 덧씌워져 비현실적 자의식으로 확장된다. 또한 소년의 사소한 움직임과 시선을 구현하는 슬로 모션에 음향 효과처럼 덧입혀지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은 잊혀지지 않는 소년의 경험에서 비롯된 심리적 혼란을 외부적으로 투영한 내면적 현상으로 관객을 유인한다. 관객이 바라보는 그 영화적 현상들은 결국 소년의 심리적 공황이 만들어내는 무의식적인 기질이자 자의식을 속박하는 고민을 통해 형성된 외부적 무관심이기도 하다. 소년의 세계는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어떤 기억에 의해 외부적인 현상에 결계를 쳐놓듯 무신경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돌아가는 세상의 풍경은 소년의 자의식 속에서 몽환적으로 흘러가기도 하고 자질구레한 소음에 노출되기도 한다.
<파라노이드 파크>는 그렇게 현실과 비현실에서 방황하는 자아의 상을 오가며 비춘다. 알렉스는 그곳에서 소년기의 현실적 기운을 탐미하고 관찰하지만 그 현실에 동참하지 않는다. 그는 파라노이드 파크에 넘치는 젊음의 기운에 쉽게 동참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관망하고 현실의 상을 잠시 뒤로 밀어낼 뿐이다. 그 까닭은 소년의 작문, 즉 소년이 글로서 고백하는 어떤 사적인 기억을 거슬러 쫓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 기억은 영화적으로 관객에게 공개된다는 점에서 이미 열려있으나 영화 내부적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소년 스스로가 기억 속에 소진시켜버리는 닫힌 공간이기도 하다. <파라노이드 파크>는 결국 소년에게 밀폐된 기억을 보관하고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불침범의 공간이자 관객을 방관의 영역으로 밀어넣어 공범으로서 동참하게 만드는 비선택적 동참의 영역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 기억은 죽음과 관련되어버린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이자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일탈의 경계선을 딛고 나아가려는 상흔의 반환점이다. 그 위에서 자가 분열되는 자기 위안의 변명처럼 소년의 혼란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안정을 되찾기도 하지만 그와 함께 순수했던 기질로부터 비롯된 혼돈과 이별을 고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파라노이드 파크>는 그 순수했던 시절과 이별을 고하는 소년들의 끊임없는 저항적 몸부림이자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어제가 될 오늘의 운명 위로 기억을 채워 넣는 분주한 발자취다. 그래서 파라노이드 파크를 비롯한 소년의 동선은 두 번에 걸쳐 각각 재현되고 재생되며 현실적 행동과 기록적 묘사로서 행위에 깃든 동선의 기억을 되짚어간다.
붕괴되는 가정의 기반 안에서 잠재된 슬픔을 떠안고, 성적 충만감을 갈구하는 이성과의 교제 속에서 덧없는 관계 지속의 의미를 되새기는 알렉스의 삶은 소년의 여린 감수성에 도피의 출구를 꿈꾸게 한다. 평등한 삶 밖에는 뭔가 있지 않을까? 내 사소한 고민과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지 않을까? 파라노이드 파크에 다다른 소년은 비로소 자신의 현실로부터 도피한다. 동시에 그 출구로 발을 디딘 소년은 평상시 부딪히던 일상적 고민을 과거로 밀어넣고 차원이 다른 끔찍한 죽음이 도사린 현실에 직면한다. <파라노이드 파크>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자 동시에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특별한 계기의 굴곡이다. 일상의 사소한 고민에서 탈출하고자 했던 소년의 출구는 동시에 만만하지 않은 또 다른 차원의 삶의 무게를 떠안아야 한다. 그래서 기억을 떠안은 공간의 반복적 재생은 같은 상황에 다른 중압감을 껴안고 되풀이된다.
물론 소년은 그 후에도 스케이드 보드를 타고 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거듭되는 기억으로부터 달아나듯 현실을 전전해야 할 것이다. 고뇌의 무게감은 줄어들지라도 소년은 그렇게 기억의 공명 안에서 삶을 지속해야 한다. 그것은 후회라는 단어로는 충족될 수 없는 삶의 무게감. 결국 소년이 꿈꾸던 파라노이드 파크의 이상은 현실의 무게감을 덧씌운 채 소년의 세계를 상실시킨다. 기억을 태워버리고 현실의 무게감에서 달아났지만 그 순간, 더 이상 소년은 자신의 현실이 예전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파라노이드 파크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소년은 자라나고 삶의 기억은 오늘에서 어제로 서서히 흘러간다.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우리는 어떤 시절로부터 서서히 떠밀려 여기까지 왔다. 파라노이드 파크로부터 우리 삶은 그렇게 멀어져 간 것이다.
총구에서 불꽃을 튀며 튕겨져 나간 탄환이 반대편에 날아온 탄환과 맞부딪혀 일그러진다. 인간의 반사신경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에 틀림없다. 대상을 정조준 하지 않고 팔의 스윙과 팔목의 스냅을 통해 내던져지듯 총구를 벗어난 총알은 곡선의 궤적을 그리며 장애물 너머의 과녁에 명중된다 회전력에 의해 날아가는 탄도의 관성적 움직임은 아무렇지 않게 간과된다. <원티드>는 과학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혹은 그것을 철저히 무시하는 방식으로 독창적인 스타일을 완성한다. 말이 되지 않음은 <원티드>의 동선을 옭아매는 제한요소로 작동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것은 현실이라는 중력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하는 반작용의 질서로 적용되는 것이기도 하다.
심장박동처럼 두근거리듯 울렁이는 화면이 말해주듯 웨슬리(제임스 맥어보이)는 지나치게 예민하고 소심한 성격을 지녔다. 과도한 업무와 지독한 타박에 시달리는 그는 쳇바퀴 돌아가듯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에 짓눌려 자신의 삶을 명명될 의미조차 없는 가치라며 좌절한다. 하지만 어느 날, 그의 앞에 정체불명의 여인 폭스(안젤리나 졸리)가 나타나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총격전에 휘말린다. 그리고 그의 권태로운 일상에 거대한 금이 가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집을 나간 아버지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고, 자신이 분당 400회가 넘게 뛰는 심장을 지닌 덕분에 뛰어난 반사신경을 지녔음을 간파하게 된 그는 피가 튀고 살을 깎는 고도의 수련을 통해 ‘결사단(The Fraternity)’의 킬러로 육성된다.
<원티드>는 현실이란 중력에 저항하듯 무중력에 가까운 영화적 스타일을 구사하는 영화다. 손목의 스냅을 통해 곡선의 궤도를 그리고 날아가는 탄환, 동물적 본능에 가까운 주행실력으로 매섭게 달리는 스포츠카, 그 비상식적 행동반경을 과감히 돌파하는 캐릭터들의 반사신경은 가히 초인적이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거듭되는 살인적인 훈련을 통해 익혀지는 후천적 기능에 가깝다. 생의 의지를 질식시킬 정도로 무기력한 삶의 굴레를 되감아 돌리듯 살아가던 웨슬리가 자신의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깨닫고 뼈저린 고행 끝에 최고의 킬러로 성장한다는 설정은 성장스토리의 클리셰와 닮았지만 복제된 것이 아니다.
파격적인 액션의 미학적 양식은 <매트릭스>를 떠올리게 한다. 동시에 그 이미지로부터 구축되기 시작하는 세계관의 양태 역시 그것과 유사하다. 평범한 비즈니스맨의 일상을 두르던 일개 청년의 삶이 실은 위장된 것이며 그 잠재력을 은폐시키는 환경으로부터 깨어나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획득하게 된다는 일련의 과정이 그렇다. 다만 ‘매트릭스’라는 가상 시스템의 작동을 통해 초현실적 자아와 실존적 자아 사이의 간극적 물음을 방대하게 되새김질하던 <매트릭스>와 달리 <원티드>는 훈육을 통해 재발견되고 숙성되는 인물의 초자아성을 부각한다. 세련됨의 여부를 넘어 터무니없을 정도로 장황하게 느껴질 만한 액션에 설득력이 부여되는 건 그 덕분이기도 하다. 현실로부터 질식할 것만 같던 평범한 비즈니스맨이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자신을 붙잡고 있던 중력 같은 현실을 거부하며 운명에 눈뜬다는 스토리텔링이 식상함을 탈피할 수 있는 건 비상식에 가까운 스타일리쉬가 효과적인 기제로 작동하는 덕분이다. <원티드>에서 스타일리쉬한 이미지는 전시적 기능을 넘어 내러티브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도구적 기능으로써 작동된다.
소심하던 찌질이가 자신의 비범함을 깨닫고 용 된다, 가 <원티드>의 전부는 아니다. 그가 자신의 비범함을 깨닫게 되고 그를 통해 새로운 삶을 거머쥐게 되면서 이야기의 양상은 플러스 극에서 마이너스 극으로 부호를 바꾼다. 전반부가 웨슬리의 성취담이었다면 후반부는 웨슬리의 극복담이다. 그가 속한 결사단(The Fraternity Bible)은 방직공장을 아지트로 삼은 노동자 계급으로 이뤄져 있다. 그들의 암살 대상은 방직기계로부터 지정되며 이는 마치 신으로부터 내려오는 계시처럼 부여된다. 이를 해독하는 건 슬론(모건 프리먼)이다. 그 체계는 절대적인 것을 숭상하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그만큼 일방적이다. 사제와 신도의 관계처럼 묘사되는 그들의 하위 일방적 시스템은 그 첨탑에 선 자가 이를 남용하게 될 때의 폐해를 드러낸다. 권력에 대한 견제가 불가능한 체제가 지닌 모순은 <원티드>의 후반을 지탱하는 반전의 매개로 작동할 음모의 성립조건이기도 하다.
맹신과 복종으로 유지되는 체제의 음모에 맞서고 권력적 구조를 타파하는 건 체제에 대한 맹신을 통해 조직에 유입되지 않은, 오로지 자신에 대한 가능성과 목적의식을 통해 조직의 전체주의적 결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를 통해 이뤄진다. <매트릭스>의 네오와 <원티드>의 웨슬리가 각기 선택 받은 자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나 그들의 역할수행이 각각 내부를 위협하는 외부적 시스템에 대한 극복과 내부적 시스템의 오류를 파기로 엇갈리는 건 그 시스템이 갈망하는 발전양상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전자가 구원을 통해 시스템을 복원하고자 한다면 후자는 유지를 위해 시스템의 오류를 제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주문처럼 들리는 이름을 지닌 티무르 베크맘베토브(Timur Bekmambetov) 감독은 러시아 자국에서 큰 흥행을 거둔 <나이트 워치>와 <데이 워치> 시리즈로 독창적인 스타일을 인정받았다. 제작환경의 열악함을 감안한다면 두 작품에 담긴 묵시록적인 세계관과 스타일리쉬한 비쥬얼은 창조적 재능을 인정받을만한 매물이 되기 충분했나 보다. 할리우드로 건너간 그는 두둑한 명성을 자랑하는 배우를 캐스팅하고, 고가의 장비와 숙련된 기술을 활용하여 비현실의 오차범위를 확장시키는 영상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전작들에 비해 화려하고 깔끔해진 영상의 때깔이나 스타일의 세련미는 자본의 투자에 따른 결점의 보완 수준을 실감하게 한다. 또한 <원티드>는 안젤리나 졸리의 육중한 매력이 고스란히 발산되는 영화다. 그녀의 캐릭터는 그녀가 지닌 장점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그 매력을 완전히 담아낼 만한 그릇으로 완성됐다. 제임스 맥어보이보다도 그녀가 매력적으로 묘사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동시에 이는 그의 불찰이나 미숙에서 비롯된 바가 아니란 점에서 더욱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사안이다.
<원티드>의 궁극적인 목적은 마지막 물음에서 발생한다. 동명의 그래픽 노블에서 모티브를 얻은-그로부터 소스를 얻었을 뿐, 전체적인 컨셉은 확 바뀌었다 한다.- <원티드>는 만화적인 양식을 대거 차용하며 그것을 영화적 실사로써 능숙하게 다루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것이 과학적인 법칙과 현실적인 논리를 배반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이미지는 가히 공격적이며 매력적이다. 영화는 현실을 배제하지 않되 그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는 현실에 대한 스트레스와 자신에 대한 콤플렉스의 중력에 얽매여 살아가는 누군가를 위한 충고처럼 보인다. 영화는 자신만의 이미지를 완성하되, 관객에게 되묻는다. ‘너는 무엇을 했는가?’ 현실이라는 자신의 독자적 가능성을 간과하게 만드는 현실의 중력에 저항하듯 스타일리쉬한 액션은 무중력적 쾌감을 선사한다. 물론 그 현란한 이미지에 비해 단순해 보이는 내러티브가 그 물음을 간과하게 만들 수 있음을 배제할 수 없지만.
사실 순차적으로 따지자면 <공공의 적 3>에 해당한다. 하지만 <강철중: 공공의 적 1-1>(이하, <강철중>)이 본래 타이틀 대신, ‘강철중’이란 캐릭터의 네임밸류를 앞세우고 ‘1-1’이란 번거로운 순번을 꼬리에 붙인 건 다름아닌 캐릭터의 정체성을 복구시키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이틀로 전면에 내세운 ‘강철중’은 그 앞에 ‘원조’라는 단어를 연상시킨다. ‘1-1’이라는 순번이 붙은 부제는 전작인 <공공의 적 2>를 시리즈로부터 분가시키는 동시에 <공공의 적>으로 돌아가 가문을 재건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강철중>이 ‘공공의 적 1-1’이 된 사연은 이렇다. 결국 <강철중>은 <공공의 적>이란 브랜드를 재건하는 작업이다. 무리한 확장사업으로 인해 훼손된 캐릭터의 정체성을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다. 동시에 <강철중>은 동어반복의 함정에서 탈피해야 한다. 가문의 정통성을 계승하되, 개별적인 존재의미를 확보하는 것은 속편이 맞이해야 할 숙명과도 같기 때문이다.
<강철중>에 주목할만한 점은 설경구의 출연, 강우석 감독의 연출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장진 감독이 시나리오를 완성했다는 점이다. 덕분에 <강철중>에서는 장진 감독 특유의 촌철살인적인 대사들이 4열 종대 앉아 번호로 연병장 2바퀴만큼은 아니지만 드물지 않게 눈에 띤다. 또한 강철중과 상대하는 이원술(정재영) 역시 전작에서 등장한 악인 캐릭터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 조규환(이성재)과 한상우(정준호)가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절대 악인으로써 강철중과 대척점에 놓였다면 이원술은 전자들에 비해 인간적인 냄새를 풍긴다. 물론 그는 고등학생에게 태연하게 칼을 쥐어주는 악인이긴 하지만 조직적 의리를 중시하고, 자가수성적 대범함을 갖추고 있으며, 가족적 자상함마저 갖추고 있다. 강철중을 주목하게 만들던 전작의 단선적인 악인들에 비해 이원술은 좀 더 입체적인 선을 지닌 캐릭터로 완성됐다.
동시에 <강철중>의 강철중은 <공공의 적>의 강철중에 비해 성장했다. 물론 그는 여전히 양아치만큼 껄렁껄렁하고 애처럼 멋대로이며 손발이 자동 반사되는 폭력적 습관도 여전하다. 그러나 자신의 철없음을 타이를 수 있을 만큼 똑똑하게 성장한 딸이 있고, 15년 차 경찰 공무원 월급으로 좀처럼 해소되지 못하는 빈곤한 현실적 고민에 사로잡혀 있다. 게다가 세월에 장사 없듯, 나이를 먹어서인지도 모르지만 <강철중>에서 강철중은 철없이 막무가내이던 <공공의 적>시절에 비해 성숙한 인상을 준다. 문제는 그 지점에 있다. 위트가 감소한 강철중 앞에 인간적 매력을 갖춘 악인 이원술을 대립시키면서 캐릭터 구도가 종종 역전되는 뉘앙스를 준다는 것. 사실 <공공의 적>에서 강철중이 조규환을-<공공의 적 2>는 논외로 치고- 미치도록 잡고 싶어한 건 강철중이 정의에 목숨 거는 인간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조규환이 인간적으로 혐오스러운 인면수심의 탈을 쓴 악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원술은 여러모로 매력적인 악인이다. 특히 그가 사시미 하나를 쥐고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그 두목(문성근)과 담판을 짓고 나오는 장면은 인상적인 카리스마가 구사되고 인간적인 유머까지 겸비한다.
단선적이던 캐릭터 나열방식에 불분명한 혼선이 발생했다. 강철중은 강우석 감독의 것이지만 이원술은 분명 장진 감독의 것에 가깝다. 결국 두 감독의 조합은 시너지 효과를 발생시키기도 하지만 쉽게 융합하지 못하고 겉도는 위트에 도취되기도 한다. 수위가 넘칠 것 같은 웃음의 타이밍에 좀처럼 쉽게 반응할 수 없는 건 융합될 수 없는 스타일의 간극 때문이다. 선이 굵고 묵직한 강우석 감독의 판을 지탱하기엔 장진 감독의 스타일은 가볍게 들뜬다. 동시에 캐릭터의 대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공공의 적>의 단선적 관계는 공익적인 메시지를 얹으며 다소 번거로워졌다. 학교 폭력과 청소년 문제에 관여하는 조폭들의 실상을 그리는 <강철중>은 누가 봐도 공익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게다가 그 안에는 작게는 상도덕의 윤리부터, 크게는 기업의 경영 윤리가, 게다가 대한민국의 조직적 위계질서에 대한 풍자까지, 넓은 현실관념의 메시지가 펼쳐져 있다. 문제는 이런 측면들이 더더욱 <강철중>을 경직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장진 감독의 유머가 녹아 들지 못하는 것도 이 심각한 사안들이 주제의식과 무관하게 극적인 유연성을 방해하는데 있다.
결과적으로 <강철중>은 ‘<공공의 적> 혹은 강철중 리턴즈’라 명명돼도 상관없는 작품이다. 하는 꼴을 봐서는 깡패인지 형사인지 구분하기 힘들 것처럼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던 강력계 형사 강철중에게 호감을 보였던 이라면, 게다가 양복 차려 입은 검사 강철중이 정의를 주창하던 경직된 모습에 뻣뻣해진 뒷목을 주무르던 이에겐 더더욱 반가운 사실일 수도 있다 게다가 오리지널 <공공의 적>을 계승하는 만큼 본래 <공공의 적>을 채우던 캐릭터들도 고스란히 돌아왔다. 삼류양아치였던 산수(이문식)는 강철중 덕분에 학교(!)에 다녀온 뒤, 유흥업으로 성공해 외제차를 몰고 다니고 칼잡이 용만(유해진)도 정육점을 운영하며 건실하게 살고 있다. 또한 강철중과 애증을 나누는 엄 반장(강신일)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공공의 적>의 중요한 관점포인트가 다양한 조연 캐릭터들을 통해 얻어지는 굵직한 재미였음을 간과하지 않았다는 점은 <강철중>의 장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강철중은 서민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한국형 안티히어로에 가깝다. 그가 상대하는 악인은 언제나 부자이며 그들은 하나같이 비열하다. 게다가 강철중은 가난하고, 심하게 강직하지 않다. 계급적 정체성에 대한 풍자가 막연한 단상처럼 녹아있는 강철중은 분명 대한민국 서민들을 통감시킬 만한 자의식을 걸치고 있다. 게다가 그의 공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향하기 보단 아래에서 위를 향한다. ‘형이 돈이 없다 그래서 패고, 말 안 듣는다 그래서 패고, 어떤 새끼는 얼굴이 기분 나빠, 그래서 패고, 그렇게 형한테 맞은 애들이 4열 종대 앉아 번호로 연병장 2바퀴다.’ 다소 길지만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내뱉는 강철중의 대사는 결코 선한 이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사회를 부패시키고, 이를 좀먹고 자라는 무리들을 향해 그는 주먹을 날리고 맞짱을 뜬다. <공공의 적> 그리고 <강철중>에 어떤 쾌감을 느낀다면 분명 이 때문이다. 게다가 권력친화적이고 부에 관대한 대한민국의 알량한 공권력과 달리 강철중은 공권력의 허울을 벗어 던지고 허구적이지만 실존적인 심판을 몸소 실천한다. <강철중>에 호감을 부여할만한 요인은 영화 외적인 환경에서 기인하는 바도 (분명) 존재한다. 게다가 미국산쇠고기 수입으로 인한 ‘광우병’ 위협에 시달리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본의 아니게) 시의 적절한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
형제지간 이라 말하기보단 이란성 쌍둥이라고 말하는 게 적확하다. <인크레더블>은 이안 감독의 <헐크>로부터 잉태된 작품이 아니다. <헐크>는 이안 감독의 야심으로 인해 원작이 변주된 사례지만 <인크레더블>은 마블 코믹스가 본래 지향했던 코믹스의 원천적인 야심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두 작품은 모태가 같을 뿐, 지향하는 형태가 다르다. 이안 감독의 <헐크>가 변화구였다면 <인크레더블 헐크>(이하, <인크레더블>)는 직구다.
<인크레더블>의 도입부는 자만이라기보단 자신감에 가깝다. 미국 정부 산하의 실험을 돕던 브루스 배너(에드워드 노튼) 박사가 실험 중 사고로 감마선에 과잉 노출된 뒤 헐크로 변하게 됐다는 캐릭터의 탄생비화를 개괄적인 방식으로 간략하게 집약하는 <인크레더블>의 오프닝 시퀀스는 <헐크>와 또 다른 개별적 자아를 증명하려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전자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동시에 어필한다. 또한 이는 <인크레더블>(을 자체 제작한 ‘마블’)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헐크’라는 캐릭터의 유명세에 자신감을 표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으론 1977년 이래로 여러 번에 걸쳐 TV시리즈로 극화되고 2003년에 이미 한차례 스크린판이 제작된 마당에 이 캐릭터의 전사를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제작진의 자기진단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됐건 <인크레더블>의 오프닝 시퀀스는 도전적이지만 합리적인 방식으로 서사의 너비를 좁히고 묘사의 영역을 넓히는데 기여하며 <인크레더블>의 목표의식에 확고하게 접근한다. 원작의 제목을 고스란히 영화의 타이틀로 오려 붙인 <인크레더블>은 이미지에 충실한 작품이다. 원작에 비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고뇌를 짊어진 영화는 지극히 기본적인 서사의 골격에 근육질 이미지를 키우는데 주력한다. 대부분의 안티히어로 무비의 선례처럼 <인크레더블>에서도 주인공을 위기로 몰아넣을만큼 막강한 적, 어보미네이션이 등장하고 <인크레더블>의 헐크는 그와 격렬하게 싸우는 지점에서 클라이막스를 찍는다.-이 점은 이안 감독의 <헐크>와 가장 큰 차이이기도 하다.-
게다가 <인크레더블>은 근래 다양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을 통해 전시된 액션 시퀀스 이미지를 대거 포용한다. 극 초반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골목과 옥상에서 펼쳐지는 브루스 배너와 미정부군의 추격씬은 <본 얼티메이텀>의 도심 추격씬을 떠올리게 하고 후반부, 뉴욕 시가지에서 등장한 어보미네이션을 쫓는 카메라 앵글은 캠코더 버전의 <클로버필드>처럼 대상을 과감히 비추지 못하며 어지럽게 흔들린다. 게다가 헐크와 어보미네이션의 도심격투씬은 <아이언맨>처럼 날렵하고 <트랜스포머>만큼 육중하다. 물론 <인크레더블>은 <헐크>와 마찬가지로 CG로 완성한 거대한 녹색괴물의 이미지를 이용해 탱크를 때려부수고 헬기마저도 박살낸다.
감정적 내러티브도 중시된다. 통제불능의 괴물로 변모했지만 자신의 연인을 보호하고자 사력을 다하는 헐크의 헌신적인 순정. 이는 <킹콩>과 비슷한 감수성을 유발한다. 흉폭한 폭력성을 표출하던 헐크가 자신이 사모하는 여인 앞에서 온순한 강아지처럼 선량한 눈빛을 내보이는 장면은 묘한 감동을 준다. 제어가 불가능해 보이는 광폭한 초인적 자아를 막아서는 강건한 로맨스는 <인크레더블>에 낭만적 감수성을 부여한다. 다만 그 낭만이 영화를 지배하던 <킹콩>에 비해 <인크레더블>의 그것은 장치적 효과로 작동되는 것이다. 그 감수성은 본격적인 액션의 스케일을 광역화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이는 결국 <인크레더블>이 <킹콩>과 비슷한 방식으로 감정적 내러티브를 형성하지만 그에 비해 구도는 빈약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크레더블>은 철저하게 자신의 존재적 의미를 캐릭터가 지닌 파괴력 안에 귀속시킨다. 헐크라는 내면적 자아로 인해 고통 받던 브루스 배너에 방점을 찍었던 이안의 <헐크>와 달리 <인크레더블>은 그 자아로 인해 고통 받던 브루스 배너에게 그 흉폭한 내면을 제어할 수 있는 자각적 능력을 끝내 부여한다. 이는 결국 <인크레더블>은 ‘헐크’에 방점을 찍는 영화라는 것이다. 그만큼 극적 스케일과 시퀀스의 스타일이 중시되고 내면적 갈등보단 외면적 격돌이 중시된다. 그 지점에서 <인크레더블>의 호불호는 갈릴 공산이 크다. 어쩌면 <인크레더블>은 이안 감독의 실험소재로 활용됐던 ‘헐크’라는 기자재를 더욱 제 모습에 가깝게 활용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이언맨>에 이어 자가생산한 원작모델의 영화화 작업을 외주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스크린에 이미지를 재생시킨 마블 코믹스는 <아이언맨>에 이어 자신들의 본질에 가까운 영화적 작업을 또 한번 완성했다. 게다가 극의 말미에 이르면 알겠지만 (현재 수많은 관람자들이 유포하기도 한 것처럼) 최근 화제가 됐던 동류 블록버스터의 인물이 출연한다. 게다가 마블 코믹스에서 마블 엔터테인먼트로 발돋움한 <인크레더블> 제작진의 야심을 선전포고하듯 드러내는 지점이라 더욱 흥미롭다. 힌트를 하자 주자면 마블 엔터테인먼트에서 <인크레더블> 이전에 제작한 영화는 당신도 알겠지만 <아이언맨>이다. 아무래도 몇 년 후에 우리는 ‘쉴드’의 정체를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유명 안티히어로들의 연합과 격돌까지도.
부엌은 비좁아도 상관없지만 옷장만큼은 넓어야 한다는 캐리(사라 제시카 파거)의 마놀로 블라닉 구두는 <섹스 앤 더 시티>(이하, <섹스&시티>)에 대한 기호를 파악하는 기준과도 같다. 그 누군가에게 호가의 사치품으로 인식될만한 마놀로 블라닉 구두는 <섹스&시티>의 캐리에겐 필연적 기호다. 그 기호에 대한 수긍과 부정은 <섹스&시티>를 뉴요커에 대한 환상과 된장녀에 대한 질시로 구분하는 척도로 작동한다.
<섹스&시티>는 그녀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는 것이다. 섹스 칼럼니스트 캐리와 그녀의 친구들, 미란다(신시아 닉슨)와 샬롯(크리스틴 데이비스), 사만다(킴 캐트럴)의 노골적인 성담론과 진솔한 경험담으로 발췌되고 집약되는 뉴욕 커리어우먼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6시즌의 대장정으로 진열한 TV시리즈 <섹스&시티>는 그에 대한 열광과 혐오를 통해 대중들의 관심사를 얻었다. 하지만 속물적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사소한 일상을 여백 없이 배치하며 그에 담긴 의미를 자문하는 <섹스&시티>의 미덕은 분명 그로부터 축적된 삶으로부터 진솔한 답변을 얻고 삶의 경지를 터득한다는 점에 있다. <섹스&시티>를 둘러싼 취향의 잡음은 섹스와 시티의 표면과 내면, 그 어느 쪽을 인정하느냐에 달렸다.
극장판으로 버전업 된 <섹스&시티>는 말줄임표처럼 늘어뜨려진 채 여운을 남긴 TV시리즈의 에필로그와 같다. 혹은 시즌6을 잇는 시즌7의 2시간 분량 압축이라 해도 무방하다. 게다가 TV시리즈와 극장판 사이에 놓인 3년간의 공백을 콜라주 영상으로 간략히 정리해주는 영화의 도입부는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직장과 가정 생활로 바쁘게 지내는 미란다와 불임으로 고생하다 중국에서 입양한 딸과 함께 행복한 가정생활을 누리는 샬롯, 그리고 누구보다도 성적 유희에 충실했던 사만다가 배우로 일하는 연하애인과 할리우드에서 동거 중이란 사실을, 그리고 TV시리즈의 긴 에피소드 속에서 끈질기게 이별과 재회를 거듭하던 빅(크리스 노스)과 캐리가 다시 열애 중임을 캐리의 자전적 내레이션으로 총망라한다.
극장판의 형식은 TV시리즈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캐리의 내레이션을 통해 던져지는 인생과 사랑에 얽힌 물음은 시크한 도시적 취향으로 포장되고 은밀한 성적 담론을 여과 없이 나누는 네 여성의 솔직한 대화와 주변 경험을 거쳐 역시 캐리의 음성으로 답변된다. 다만 2시간 여의 러닝타임으로 이뤄진 영화적 규격에 맞춰 TV시리즈의 리모델링이 불가피했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극장판은 빅과 재회한 캐리의 에피소드를 축으로 그녀의 세 친구들의 사연을 주변부에 고르게 배치한다. 이는 매회마다 중심인물을 바꾸며 그로 인해 발견된 명확한 주제의식으로 끝을 맺던 TV시리즈와의 차이라 할만하다. 이런 면에서 극장판 <섹스&시티>는 TV시리즈의 오랜 목차에 연연하거나 그에 대해 민감하게 의문을 품지 않는 이에겐 무난한 로맨틱 코미디 정도로 관람해도 무방할 만큼 평이한 구성으로 완성됐다. 특히나 ‘색칠(coloring)’이란 단어로써 이뤄지는 그녀들의 섹스토크는 TV시리즈만큼 노골적이진 못하지만 시리즈의 위상을 각인시킬 만큼 발칙한 웃음을 제공한다.
하지만 극장판은 되려 기존의 TV시리즈에 팬덤을 지녔던 이에게 또 한번의 지루한 동어반복으로 여겨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캐리와 빅의 지긋지긋한 구간반복 로맨스는 또 한번 열애와 파탄을 오가고, 그 안에서 캐리의 좌절과 극복 역시 또 한번 반복된다. 게다가 자신들의 배우자 혹은 애인에게 종종 불안감을 조성하는 여성들의 히스테리나 스스로 자책할 만큼 후회할 짓을 반복하는-특히 빅!- 남성들의 답답한 소심증은 극장판의 도처에 깔려있다. 이는 한 인물을 축으로 단락적인 에피소드에 집중한 TV시리즈의 에피소드를 매회 보는 것과 달리 극장판이 네 인물의 전반적인 사연을 한 시즌을 전방위적으로 구성했다는 점에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차이이며 극장판이 감수해야 할 당위과제처럼 보인다. 게다가 간결한 에피소드 안에서 순발력 있게 구성된 사연들의 재미에 비해 긴 러닝타임만큼이나 극장판은 지나치게 호흡이 긴 인상을 주며 사연 속에 농축된 성찰의 깊이도 분산되는 에피소드 속에서 다소 밋밋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섹스&시티>극장판은 개별적 완성도 여부를 따지기 전에 시리즈의 서비스 정신을 높게 사는 편이 더 온당해 보인다. 화려한 패션에 열광하고, 개방적인 취향에 수긍하고, 뜨거운 사랑을 열망하면서, 서로의 우정을 중시하는 그녀들의 20여 년간의 뉴욕 연대기가 7년 동안 6시즌으로 지속될 수 있었던 건 이 시리즈의 매력이 그만큼 유지된 까닭이기도 하거니와 그녀들을 향한 팬덤이 그만큼 지속됐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만약 당신이 이 시리즈에 깊은 호감을 지닌 이라면 결말부에 이르러 그 지지부진한 연애에 확실한 종지부를 찍는 캐리의 모습에 감정이입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캐리가 자신이 처음 뉴욕에 입성했던 20년 전을 회상하는 것처럼 당신도 언젠가 과거 스스로를 회상할 때 즈음, 이 시리즈를 회상할 것이다. 단지 캐리의 마놀로 블라닉을 흠모했건, 캐리의 내레이션에 담긴 예리한 경험적 성찰에 공감했건 간에 <섹스&시티>극장판은 그녀들의 네버 엔딩 스토리를 꿈꾸는 이들에 대한 무한한 보답과도 같다. 마흔을 자축하는 그녀들의 사연이 거듭 재생되지 않아도 팬심은 계속된다. 그리고 <섹스&시티>극장판은 분명 그 추억을 한 뼘 자라게 해줄 만한 요량은 된다.
재테크를 위한 투자로 탕진을 거듭하다 남편과 이혼하고 딸의 양육권마저 빼앗긴 미경(김선아)은 봉순(이경실)과 이만(나문희), 은지(고준희)와 이웃이자 같은 곗돈을 넣는 사이다. 그런데 그들의 계주였던 미용실 원장 성혜란(임지은)이 곗돈을 들고 튀었다. 게다가 남편 없이 두 아이를 키우는 봉순은 아들의 수술비를 곗돈으로 충당하려던 차에 충격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결국 그들은 함께 곗돈을 찾아 떠난다. 단지 곗돈을 들고 달아난 성혜란이 잘 간다는 미사리의 카페를 향해서 무작정 간다.
곗돈 떼인 아줌마들의 억척스런 고군분투를 담고 있는 이 영화가 <걸스카우트>라는 제목을 달게 된 건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별반 까닭 없다. 게다가 그녀들은 ‘걸(girl)’이라 불릴만한 이들도 아니다. 물론 그것이 (역시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영화와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니다. 단지 그녀들의 연대가 어떤 조직적 슬로건을 머리말로 삼기엔 그리 조직적인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곗돈을 떼먹고 달아난 이들을 찾기 위해 막연한 단서 하나만 믿고 뭉친 것에 불과하다. 그 와중에 그녀들은 ‘걸스카우트’란 이름으로 자신들을 지칭하게 된 것뿐이다. 결국 <걸스카우트>에서 ‘걸스카우트’는 별반 의미 없음을 통해 그 연대의 가치를 재생산한다. 제 각각의 사연을 통해 여자란 이름을 잃어버리고 아줌마로써 억척같이 살아가야 하는 그녀들의 환경을 환기시키고 그 연대에 필연적 의미를 부여하게 한다.
20대인 은지를 제외한 30대 미경과 40대 봉순, 60대 이만은 각각 아줌마라고 불리는 여성이다. 억척스럽게 살아가던 그녀들에게 여자로써의 정체성은 아줌마의 삶에 매몰된다. 게다가 20대인 은지마저 죽은 아버지가 남긴 사채 빚을 떠안으며 빚 독촉에 시달린다. 그녀들을 괴롭히는 건 치열한 자본주의적 살풍경이다. 게다가 매번 재테크를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던 미경은 곗돈마저 떼이고, 망나니 같은 아들의 박대 속에서 숨죽이고 살아가는 이만도 삶이 순탄치 않다. <걸스카우트>는 이토록 삶이 만만치 않은 여성들을 한데 모으며 그들을 자연스럽게 연대시킨다. 고단한 삶에 억매인 그녀들은 세대차이를 뛰어넘어 여성이라는 굴레로 얽힌 사연 아래 정렬한다.
<걸스카우트>는 여성의 연대를 남성에 대한 적대감 혹은 열등감의 반대급부로써 배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연상시킬만한 것이기도 하다. 아줌마라는 이름 안에서 그녀들은 억척스럽지만 어머니란 이름 안에서 그녀들은 강인해진다. 삶의 피로를 남성에게 떠안길 수 없는 생계의 주체라는 점에서 그녀들은 고단하지만 굳세다. 나약한 여성상을 넘어 아줌마의 탈을 쓴 어머니의 강인한 모성을 두른 <걸스카우트>는 여성을 남성의 대리적 자아로 배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평가될만하다.
각각의 캐릭터에 집중하던 영화는 중반부로 넘어가는 동시에 긴박한 추격전으로 양상을 달리하며 호흡을 조절한다. 쫓고 쫓기는 활극 속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우여곡절은 매 순간 반전을 발생시키며 유연한 이야기적 묘미를 발생시킨다. 게다가 스타일리쉬한 화면전환과 재치 있는 상황 설정은 나름대로 특별한 감상을 남긴다. 물론 한바탕 시끄럽게 몰아치던 이야기가 다소 허탈하게 내려앉는 결말부는 진부한 감이 없진 않지만 그 말미에서 등장하는 풀스윙 이미지마저도 나름 구도가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도 억척스럽지만 살가운, 아줌마와 어머니라는 여성의 양면성을 통쾌하면서도 가볍지 않게 그려낸다는 점은 <걸스카우트>가 지닌 가장 큰 미덕이다. 이는 동시에 자신의 캐릭터를 진심으로 이해하려 노력했을 여배우들의 고군분투가 일군 성과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