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생각났다. 그 무덤덤한 이별 끝에서 쏟아져 내리던 눈물의 엔딩이 생각났다. 지금은 무덤덤하다. 건조해. 좀처럼 허전함이 가시지 않는데 그게 그리 서럽진 않다. 오히려 화가 날 때도 있다만 그게 그리 처절하지 않다. 공허하다.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이 공허하다. 모르겠다. 뒤늦게 슬퍼할지도 모른다. 어찌될지 몰라도 그때 징징짜면서라도 널 붙잡고 다시 시작을 설득해봤어야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항상 넌 끝을 말했지만 항상 난 시작을 원했다. 부팅, 재부팅, 다시 재부팅. 관계의 연장이 곧 서사의 흐름이라 믿었건만 넌 계속해서 분절된 형태의 반복을 돌고 돌다 끝을 선언하고 돌아섰다. 너와 나의 추억이 담긴 인터페이스는 매번 새로운 것이었다. 난 그게 예전의 그것들이라 믿었지만 사실상 매번 다른 것이었다. 다만 유효기간이 점점 짧아졌을 뿐. 감정의 인내심이 얕아져 갈 뿐.

 

마찬가지다. 이번에도 또 끝이다. 다만 새롭게 시작할 겨를이 없다. 난 그럴 자신이 없어졌다. 문득 예감한다. 끝이라고. 네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한, 내가 다시 잡을 기력이 없다고. 고로 진짜 끝이라고. 넌 좀처럼 돌아오지 않을 거다. 문득 생각한 적은 있다. 너와 내가 정말 어울리는 사람일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말했다. 정말 어울린다고, 심지어 너무 닮았다고. 때때로 천생연분, 혹은 소울메이트, 그딴 간지러운 용어들로 우리 관계를 정의하는 것마저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아. 너에게 있어서 끝은 적절한 타이밍이고 나에겐 예상치 못한 반전이었다. 늘 그랬다. 넌 끝냈고, 난 붙잡았다. 이젠 넌 끝냈고, 난 붙잡지 못하고 있다. 고로 우린 헤어질 것이다. 지금 당장 가슴 속에 들러붙은 공허도 언젠간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기억하겠지. 추억이 될까. 그건 모르겠다. 널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그런 치졸한 짓 따위는 안 할거다. 그건 나에게도 있어서 좋은 방법이 아니므로, 널 위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날 위해서 안 할거다. 그냥 흘려 보낸다. 저 편으로 둥둥 떠내려가는 기억을 애써 오늘로 끌어당기고자 애쓰지 않을 거다.

 

감정이란 게 이토록 얄팍한 것이라서 우리 사랑도 어느 새 닳고 닳아서 각하나 없이 둥그렇게 마모됐나. 서로에게 둥그런 존재가 됐다. 어떤 자극이 되지 못한다. 그냥 옆에 있는 사람 이상의 값어치를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감정으로 보호하던 의미의 속살이 드러났다. 생각보다 왜소했다. 적어도 네가 보는 의미가 내가 보는 의미에 비해 그랬다. 그러니 이별을 말하지. 너에게 난 이제 의미 없는 사람이다. 추억은 의미가 없다. 언젠가 죽기 직전까지 나에 관한 기억들이 널 미소 짓게 만든다 해도 그건 내게 의미 없는 일이다. 내 삶에 더 이상 관여하지 못하는 네 기억 따윈 내게 어떤 의미도 될 수 없다. 그것이 공허하고 쓸쓸하다. 너에게 있어서 죽은 기억이 된다는 것이 처참하다. 이대로 우리가 끝난다면 난 잊을 것이다.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묻을 것이다. 묻고 묻어서 도저히 내가 파내려 갈 수 없는 지점에 널 덮어버릴 거다. 그리고 무덤덤하게 밥을 먹어야지. 더 이상 눈물의 의미를 얻지 못하는 이상, 밥을 먹겠다. 살아야지. 뱉어내지 않고 채워 넣을 거야. 그렇게 널 지나쳐서 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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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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