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으로 덮인 언덕 위로 상의가 벗겨진 곳곳에서 상흔이 발견되는 남자가 두 팔이 묶인 채 달리고 있다. 본래 그 남자는 용맹한 로마군의 백인대장이었다. 그의 두 다리가 박차고 밀어내는 땅은 로마 본토로부터 멀리 떨어진 영국이다. 로마군은 영국 땅을 점령했지만 픽트족이라 불리는 현지 민족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히며 고전을 면치 못한다. 이에 로마 최강의 군단이라 불리던 제9군단은 그 저항을 누르려 하지만 픽트족은 결코 만만치 않다.
참혹한 고어 이미지와 스릴러적인 긴장감이 극대화된 <디센트>를 통해 전세계 장르팬들의 지지를 얻은 닐 마샬은 <매드맥스>시리즈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듯한 <둠스데이-인류 최후의 날>을 통해 다시 한번 비주류적인 감성으로 자신의 취향을 명백히 다졌다. 시대극의 서사와 배경을 두른 <센츄리온>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기존의 필모그래피와 거리를 둔 작품처럼 보이지만 그의 전작들에서 두드러지는 요소들이 고스란히 잔존한 ‘닐 마샬’표의 인장이 곳곳에 찍힌 작품이다. 향연처럼 펼쳐지는 살육의 도가니 속에서 강렬한 인상의 여전사의 활약이 돋보이는, 마이너한 B급 취향의 감수성은 고전적인 시대극 안에서도 유효하다.
극 초반부터 로마군과 픽트족의 전투신을 연출하며 과감한 육체적 파괴의 장관을 묘사하는 <센츄리온>은 사실 전투라는 이미지에 많은 러닝타임을 할애하는 작품은 아니다. 되레 100분이 되지 않는 러닝타임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건 추격과 도주로 이뤄진 소수정예 캐릭터의 분투에 가깝다. 적으로부터 자신의 부대를 궤멸 당한 로마의 백인대장이 포로로 잡힌 뒤, 도주하고 극적으로 제9군단을 만나 새로운 삶을 얻은 뒤 다시 전투에 임하게 된다, 라는 <센츄리온>의 서사는 거창한 시대극의 배경보다는 그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자리했던 한 점과 같은 인물의 고민과 의문을 비범하게 조명하려는 반시대적인 이야기에 가깝다.
로마군 최고의 위용을 자랑했다는 제9군단이 증발하듯 사라졌다는 역사적 미스터리에 대한 수많은 추측 가운데서 가장 정답에 가까운 형태로서 그 사건의 배경을 인용한 <센츄리온>은 사실 그 미스터리를 수단으로 삼는 추격영화나 다름없다. 이는 곧 <센츄리온>에서 연출되는 제9군단의 몰락이 시대에 대한 거대한 고찰로 연동될 의무감 안에서 재현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동시에 이는 <센츄리온>의 시대극 분위기에 기대감을 품고 있었을 어떤 관객들에 대한 극적인 배신감을 부여할 가능성의 원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센츄리온>은 역사적 서사에 대한 고찰이라는 의무감을 벗어버리고 그 거대한 역사 속에 자리했던 어느 개인의 선택을 열어둠으로써 나름의 목적을 관철시킬 수 있는 활로를 개척하고 있다.
<센츄리온>은 전쟁영화의 이미지를 포획한, 재현성에 기반을 둔 고전적 시대극의 형태를 두르고 있지만 실상 어느 개인의 동선에 앵글을 맞추고 그 성찰을 눈 여겨 보고 있는 작품이다. 시대를 장악한 로마의 몰락보다도 거대한 제국적 야심과 권력적 야욕 속에서 도구처럼 희생당한 병사들의 감정과 그 끝에서 새어 나오는 페이소스를 체감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용맹한 로마 제9군단의 병사들과 픽트족의 전사들이 죽어나가고 그 끝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는 자신을 추격해 죽이려던 픽트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사생아 같은 여인이다. 살육과 복수라는 양가의 폭력성으로 점철된 어떤 시대 속을 유령처럼 헤매거나 겉돌았던 이들의 새로운 삶을 조명한다. 전쟁이라는 갑주를 걸치고 벌어지는 과감한 피칠갑의 제의 대신 <센츄리온>은 역사적 미스터리라는 제단 위에 시대에 대한 회의 속에서 살아가던 어느 인물의 선택을 지지하고 새로운 생을 불어넣음으로써 어떤 영광의 시대를 낭만으로 대변하는 대신 야만으로 반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