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나

도화지 2012. 6. 7. 23:57

누나가 손가락 수술을 했다. 병문안을 갔다. 아버지가 온다고 했다. 병원과 가까운 곳에 산다 했다. 아직도 아버지와 연락을 하고 지내느냐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나는 겸연쩍게 답했다. 뭐하고 사는지 물었다. 누나도 잘 모른다 했다. 결국 예기치 않게, 하지만 피할 수 있었던, 허나 차마 그러할 수 없이, 아버지를 만났다. 2년여 만인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 옆으로 새어 나온 머리가 죄다 새하얗게 샜다. 노인이 서있었다. 나는 잠시 말을 잊었고, 내민 손을 잡아 천천히 흔들며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이 순간이 두려웠다. 두려운 건 증오가 아니라 연민이었다. 그의 정수리가 보일 것 같았다.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을 나이가 됐으니 그가 작아지고 있는 것이리라. 10년여 정도 됐을까. 아버지와 함께 세 가족이 모인 것이, 어렴풋이 그런 듯했다. 가까운 커피점을 찾았다. 카드를 꺼내 계산을 하니 그가 지폐를 내밀었다. 받지 않았다. 그는 머뭇거리다 누나가 앉은 자리에 앉았다. 아주 잠깐 입을 열어 안부를 물었지만, 대부분 그저 들었다. 아버지는 술, 담배를 끊었다고 했다. 몇 년 전처럼 그랬다. 당신이 술 마시고 했던 그 일을 생각하면 술을 끊어야 하지 않겠냐 허허 웃었다. 문득 덧없는 서러움이 차오르고 찰랑거리기에 종종 창 밖을 보고 심호흡을 했다. 헤어질 때 즈음 그는 손을 내밀었고, 난 손을 잡은 뒤, 잠시 흔들고 갈라서서 뒤 돌아섰다. 무심결에 한번 돌아보곤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누나가 20만원을 쥐어줬다. 아버지가 준 돈이라 했다. 그제서야 욕지기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증오는 연민에 짓눌려 이미 숨이 끊어졌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한번 갈아탄 뒤, 집으로 오는 길에 맥주 두 캔을 샀다. 한때 그의 멱살을 잡고 내 설움의 근본을 물어야 할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가 요즘 무엇을 하며 사는지 묻지 못했다. 그저 그가 남루하게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가 내 아버지였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그리고 그가 더 이상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님을 확인했을 뿐이다. 사생아 같은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맥주 캔을 땄다. 한 모금 들이키고, 난 잠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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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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