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시경, 마감을 핑계로 컴퓨터 앞에 붙어서 산만하게 노닥거리고 있을 즈음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영화를 봤다고 했다. <왓치맨>을 봤다는데 재미없다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질식할 것 같아 내게 구원을 요청했다. 난 물론 흥미롭게 봤다. 재미있었다. 녀석은 좋아했다. 원래 이 친구랑은 말이 잘 통했다. 항상 영화를 같이 보고 나면 긴 대화를 나누곤 했다. 어쩌면 지금 내 삶에 끼친 영향력의 7할 정도는 이 친구 몫일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음악을 들었고, 영화를 봤다. 이야기를 했고, 글쓰기에 대한 고무를 가능케 했다. 때때로 이 녀석이 날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었다며 비아냥거렸다. 반쯤은 농담이고 반쯤은 진담이다. 내가 지금 날 새는 것도 어쩌면 이 녀석 탓이라니까. 하지만 나쁜 의미는 없다.반쯤의 진담보단 농담 쪽으로 좀 더 저울추가 기운다. 여러모로 힘이 되는 녀석이었다. 내 지루한 이야기를 꽤나 재미있게 들어주는 상대라면 내게 있어선 정말 괜찮은 녀석인 거다.

 

간만에 수화기를 경계로 대화를 나눴다. 광주에 있는 녀석을 만나기란 어렵다. 하긴 내가 절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의 9할 정도는 광주에 있다. 이 녀석도 그 중 하나고. 어쨌든 영화를 보고 나서 대화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대화를 했고, 자연스레 시간이 흘렀다. 대화를 통해 시간을 이겨야 할 사람이 있는 반면, 대화와 함께 시간을 흘려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아무래도 후자가 편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점점 후자의 입장에 있는 상대들과 멀어지고 있다. 사람을 잃는 느낌이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 중 대부분과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많지 않다. 추억을 공유하지 못하는 인연은 쉽게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자주 만나지 못하는 옛 친구들과 여전히 연대할 수 있는 것도 그 추억덕분이다. 그 친구들이 보고 싶은 것도 그 때문일 테고. 그저 짧은 통화만으로도 멀어졌던 수많은 기억들이 다시 눈 앞으로 돌아온다는 거. 그거 대단히 즐거운 일이거든.

 

사람이 그립다. 옛 이야기가 하고 싶다. 나이 먹어간다는 건 이런 건가. 문득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오래된 친구의 전화만으로도 감상에 젖고 옛 기억들을 떠올리며 씁쓸해진다. 시간을 되돌릴 순 없다. 안다. 그저 한번쯤 다시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그 추억 위로 덮인 먼지들을 훅 불어내고 온전한 형체를 멀리서나마 한번쯤 되돌아보고 싶을 뿐이다. 다시 허물어질 언어라 할지라도 잔상은 거기서부터 다시 지속될 것이다. 그 당시보다 많은 시간을 지나왔음에도 그 시절보다 긴 추억을 만들어낸다는 게 어려운 나이이기도 하지 않나. 어른이 된다는 건 더 이상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추억을 쉽게 만들 수 없는 시절로 들어선다는 걸 의미할지도 모르겠다. 모르지. 어쩌면 내가 지금 마감을 앞두고 이 문장들 사이로 도피한 것일지도. 어쨌든 다시 마감이나. 일단 지금은 외로움 타령보다도 먹고 살 궁리를 할 시간. 아, 이렇게 적고 나니 진짜 없어 보이네. 나도 그럼 허세라도, 뉴욕 헤럴드 트리뷴!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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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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