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에 대한 단상

도화지 2016. 10. 21. 18:06

1.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열광하는 사회의 저변엔 가난한 다수의 불만이 도화선처럼 깔려 있다. 정직한 부에 대한 갈망이 깊다는 건 부정한 부에 대한 인식이 팽배하다는 역설에 가깝다. 결국 부자들을 손가락질하는 이들은 실상 가진 것 하나 없이 증오까지 끌어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결국 그 손가락들은 정작 자신들이 손가락질하는 대상보다 가깝게 닿는 주변의 손가락들과 부딪혀 싸우거나 기형적인 집단 논리로 번져나가기 십상이다. 사회적인 갈등을 야기시키는 건 결국 부의 대물림을 손쉽게 허하고, 빈부 격차의 확대를 방관하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에서 비롯된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으면 억울해지는 사회란 얼마나 불행한가. 그 불행을 개개인의 무능 탓이라고 몰아갈 때 부는 완벽한 권력이 돼서 도처에 깔린 무능을 깔고 앉아 영생을 누릴 것이다. 대를 이어 무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가난한 운명공동체, 완벽한 지옥의 완성.


2. 한때 정치적인 관심도 없고 투표도 하지 않는 ‘20대 개새끼론’이 고개를 들기도 했지만 어쨌든 기성세대가 ‘개판’으로 만들어놓은 사회적 인프라의 최대 피해자는 현재의 10대와 20대다. 고학력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대학 입학금과 등록금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그 외에도 다양한 스펙 요건을 채우기 위한 비용이 요구되는 가운데서 은행에선 학자금 대출로 금리 장사를 하고 있다. 단군 이래 가장 스펙이 좋은 애들이 단군 이래 가장 돈을 못 버는 세대가 되는 아이러니. 이게 말이 되는가.


3. 부유하게 태어난 건 행운이다. 행운을 누리는 건 자유다. 하지만 행운을 실력으로 착각하고, 타인의 가난을 무능으로 규정하는 건 자유가 아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를 자기 실력으로 행사하는 건 보기 드문 꼴불견이다. 그 이전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를 자기 실력처럼 행사하도록 방관하는 사회는, 정치는, 문화는 심각하게 꼴불견이다. 행운을 방치하는 사회는 노력을 간과하게 만들고, 실력을 어지럽힌다. 부모 잘 만난 것이 자랑거리가 되는 사회는 끝내 멸망해도 상관 없다. 아니, 멸망하는 게 낫다. 그러니 우리는 생존할 가치가 있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건강한 목소리를 모아야만 한다. 어차피 우리는 대부분 가난하다. 그런데 가난이 꼭 불행의 동의어가 될 이유는 없다. 부자가 아니라서 행복할 수 없다면 그건 분명 이상한 일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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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세상에 관심이 없었다. 세상 또한 소년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소년은 어려서부터 가난했고, 엄마가 없었다. 어느덧 열여덟 살의 고등학생으로 성장한 소년은 가난과 소외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하지만 어느 날, 그 가난하고 소외된 소년을 향한 세상의 관심이 시작됐다. 완득(유아인)의 담임선생인 동주(김윤석)의 짧은 언어로. “얌마, 도완득!” 하지만 갑작스러운 관심이 완득은 귀찮기만 하다. 하지만 같은 동네, 그것도 심지어 건너편 옥탑방에 사는 담탱이는 퇴교 후에도 완득의 주변에서 그를 귀찮게만 한다. 그래서 완득은 기도한다. “제발 똥주 좀 죽여주세요.” 하지만 그 교회에서도 완득은 듣는다. 자신의 호를 지어준 담임선생 동주의 부름을. “얌마, 도완득!”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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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는 평범하듯 비범한 뮤지컬이다. 심심찮게 터져 나오는 유머와 경쾌한 넘버가 인상적인 뮤지컬이지만 궁극적으론 가난한 사랑노래라 마음 한 부분이 애잔해진다. 사회의 밑바닥을 이루는 빈민층들은 저마다의 꿈을 접고 접어 달동네 한 켠 작은 방에서 또아리를 틀 듯 비좁게 살아간다. <빨래>는 그들의 삶을 단순하듯 진솔하게 묘사하며 유쾌하듯 구슬픈 멜로디로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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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되지 않은 육두문자와 거침없는 구타는 스크린 너머의 세상을 온전히 타자화시킬 것 같지만 실상 그곳은 그래서 현실적이다. 가난 앞에 무기력한 수컷들은 가족들에게 무차별적인 증오를 휘두르고 가족은 점차 부서져 나간다. 상훈(양익준)은 그 증오를 먹고 자란 짐승이다. 분노와 증오를 되새김질하며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욕을 던진다. 욕을 빌리지 않고서야 진심을 표현할 수도 없는 상훈은 폭력이 잉태한 사생아처럼 살아간다. 오로지 주먹질을 통해서 삶의 시효를 연장해나갈 뿐 스스로의 삶을 위한 배려 따윈 없다. 증오와 분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허우적거리기보단 더욱 깊숙이 내려앉아 독을 품는다. 배다른 혈육에게 마음을 쓰면서도 스스로를 저주하듯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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