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의 아이콘으로 선택된 건 호주 출신의 미아 바시코프스카였다. 사람들은 의아했다. 팀 버튼이 말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을 통해서 당신이 이 세계를 목격할 것이기 때문이지.” 발음만큼이나 생소한 그녀가 배우의 길을 선택한 건 15세 무렵이었다. 구글을 통해서 시드니의 에이전시를 검색했고, 오디션에 참여한 뒤, 연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2008, HBO의 미니시리즈 <인 트리트먼트>로 미국에 진출한다. 그녀는 올해 동명 고전을 영화화한 <제인 에어>와 구스 반 산트의 신작 <레스트리스>에서 예사롭지 않은 재능을 전시했다. 분위기가 다른 두 영화에서 상반된 캐릭터를 연기했음에도 그녀에게서는 유사한 재능이 읽힌다. 비밀스러움과 신비로움, 나약함과 강인함, 그녀에게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힘이 있다. 그야말로 타고난 재능이 아닐까. 바시코브스카는 최근 박찬욱의 할리우드 진출작 <스토커>(2012)의 촬영을 마쳤다.

 

(beyond 12월호 Vol.63 'TAKE ONE MOVIE')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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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1 9일부터 20일까지 제22회 스톡홀름 국제영화제가 열린다. 스톡홀름 국제영화제는 북유럽 최대 규모의 필름 축제다. 구스 반 산트의 신작 <레스트리스>(2011)를 비롯해서 50여 개 국가에서 모인 160편 이상의 작품들이 북방의 베네치아스톡홀름의 스크린을 수놓는다. 이번 영화제는 프랑스의 대배우 이자벨 위페르를 위한 평생공로상을 마련했다. 이를 기념하듯 스톡홀름으로 날아든 전세계의 유려한 필름들이 백야의 축제를 장식한다.

 

(beyond 11월호 Vol.62 'TAKE ON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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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 키드먼은 될성부른 나무였다. 키드먼을 떡잎부터 알아본제작자들은 그녀를 발 빠르게 할리우드로 인도했다. 일찍이 할리우드의 뮤즈 자리를 수성한 그녀는 여전히 가지를 뻗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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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빛이 있었다. 빛은 이미지를 낳았다. 영화는 이미지의 예술이다. 영화는 빛이 낳은 예술이다. 그 빛을 통해 보다 밝게 영화를 밝힌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영화를 통해 세상은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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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란 제목은 우리가 잘 아는 그 보통명사의 의미가 아니다. 이는 실존했던 어떤 사람의 이름, 즉 절대명사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밀크>는 전기영화란 말이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공직자로 활동한 게이이자 게이인권운동가로서 활발히 활동했던 하비 밀크의 삶을 조명하는 영화다. 영화는 그의 생의 일부, 즉 그가 죽은 1978년으로부터 8년 전인, 1970년에 시작된다. 이유는 명확하다. 하비 밀크란 인물에 대해서 말할 때, 8년 이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건 딱히 유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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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콕이란 이름은 한 감독을 지칭하는 절대명사의 영역을 넘어선 장르를 설명하는 절대명사다. 히치콕이 태어난 지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는 서스펜스를 지배하는 스타일이며, 규칙이고, 철학으로 군림한다. 히치콕의 추종자들은 여전히 그의 양식을 자신의 창작에 투영하며 오마주의 제의를 치른다. Hitchcockian의 순례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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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 반 산트 감독은 근원보다는 현상에 시선을 둔다. 사막을 헤매는 두 청년이 애초에 무엇을 향했는지(<게리>), 끔찍하게 총알을 난사한 소년들은 무엇을 겨눈 것인지(<엘리펀트>), 죽음에 대한 깊은 갈증을 느끼는 청년이 본래 지녔을 생의 의지는 어디로 증발한 것인지(<라스트 데이즈>), 그 모든 것은 중요치 않다. 그는 현실 뒤편의 어떤 근원 지점에 대해서 무신경하게 고개를 한번 돌렸다가 다시 제자리를 바라볼 뿐이다. 잠시 일그러지거나 부서지고, 사멸했던 존재의 형상들이 그 예감을 털어놓기가 무색하게 다시 형체를 안온하게 회복하는 순간의 형형한 찰나를 재생시킨다. 그 과정 속을 걸어가는 젊은 육체들은 그 심약한 영혼에 죽음을 새겨 넣는다.

구스 반 산트는 그렇게 사(死)의 영역을 향해 끊임없이 전진한다. 그것은 카메라의 동선을 따라 걷는 현실적인 족적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대기 속에서 어지럽게 흔들리는 구체음악(具體音樂)의 초현실적인 혼돈으로 울려퍼지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청춘은 죽음의 기억을 새겨 넣는 미완성 형태의 오브제(objet)로 영역화된다. <파라노이드 파크>는 구스 반 산트의 전진을 위한 탐미적 공간이자 재생의 연결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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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영화제 60주년 기념작. <그들 각자의 영화관>(이하, <영화관>)의 목표는 이처럼 자명하다. 거장이라 명명된 35명의 감독들이 모인 것도, 그들이 3분으로 국한된 러닝타임의 과제를 받아들인 것도, 모두 마찬가지다. <영화관>은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 준 영화 그 자체에게 바치는 오마주이자 자신의 일상을 무덤덤하게 발췌하는 수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들의 영화를 존재케 하는 관객을 위한 헌사에 가깝다.

제목에서 발견되는 ‘그들’이란 단어의 의미는 영화를 만든 거장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화를 보는 관객이다. 원제의 ‘그들’이 ‘their’가 아닌, 성별이 불분명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his’로 표기된 건 이 때문일 것이다. 왜냐면 ‘그들’이 감독 자신이라면 제인 캠피온과 같은 여류 감독이 포함된 자신들을 결코 ‘his’로 묶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와 같이, <영화관>은 말 그대로 영화를 보는 우리들, 즉 관객을 바라보는 감독들의 자발적인 주객전도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3분이라는 폐쇄적인 러닝타임을 통해 무려 32작품을 나열하는 <영화관>은 각각의 작품을 매만진 주인들의 이름만큼이나 매혹적인 것들로 채워졌다. 32구간의 여정은 프랑스 다큐멘터리의 거장 레이몽 드파르동의 <야외 상영관>에서 출발해 켄 로치의 <해피 엔딩>에서 멈춘다. 3분이란 짧은 시간 안에 보여지는 제 각각의 사연들은 무덤덤하게 현실을 응시하거나 희극과 비극을 넘나드는 상황으로 연출되며, 우연처럼 보이는 상황극을 그려내거나 감각적인 영상을 통해 상징적인 의미를 전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이 일맥상통한 건 하나같이 스크린이 걸린 영화관-실내가 됐든, 실외가 됐든, 절대명사적 공간 의미가 아닌 영화를 트는 장소로서 명명되는-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극장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를 보기 위한 이들이지만 그들의 태도는 각기 다르며 그들이 모두 다 하나같이 영화에 매혹되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 것도 아니다. 단적으로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가 상영되는 극장의 텅 비었다시피 한 상영관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며 영화에 몰입한 늙은 매표원과 그 뒤에서 격정적인 애무를 즐기는 연인이 등장하는 안드레이 콘잘로브스키의 <어둠 속의 그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영화는 애무를 즐기는 연인을 조롱하지도 혹은 늙은 매표원의 진지한 관람 행위를 미화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본다. 그들의 상영관은 각자에게 개별적인 의미가 있을 뿐, 그 자체로서 규정된 가치로 이해되지 않는 공간이다. 감상의 다양성과 영화에 접근하는 태도의 차이는 상영관에 다양한 풍경을 연출한다.

<상영관>은 3분이란 데드라인으로 나열되는 다양한 진풍경을 나열한다. 거장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감독들은 각자의 양식으로 자신만의 상상을 스크린에 담아낸다. 그 안에는 심오한 의미적 해석도, 혹은 가치 부여에 대한 동기 유발도 하나같이 무의미하게 만드는 순수한 영화가 있을 뿐이다. 영화를 기다리는 시골 아이들의 눈동자도,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흘리는 감동의 눈물은 영화를 위대하게 만드는 가치이자 영화를 존재케 하는 이유다. <상영관>은 우리가 영화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혹은 영화란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에 대해서 한번쯤 되묻고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란 지나친 예술적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되지만, 자본의 수단으로 몰락해서도 안 되는 것임을, 우리는 이를 통해 한번쯤 재고할 필요가 한다. 지나치게 경도된 취향을 계급주의적으로 강요하는 것도, 포식자의 식성처럼 유희적 탐욕을 남발하는 것에 대해서 경계할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는 모두 다 ‘그들 각자의 영화관’을 찾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같은 것을 보면서도 다른 꿈을 꾼다. 어떤 이는 팝콘을 씹어대며 낄낄거리고, 어떤 이는 눈가에 글썽거리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흘려 보낸다. 어떤 이는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어떤 이는 결벽하게 오로지 스크린만을 응시한다. 각자의 취향대로, 혹은 관람의 목적대로, 그들은 상영관을 찾음으로써 영화를 존재하게 만든다. 거장들이 그들에게 바치는 경배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화를 사랑하듯 자신들의 영화를 사랑해주는 관객들에게 진심 어린 헌사를 보내고 있다. <상영관>은 바로 관객이라는 지지자를 위한 영화의 애정 어린 편지와도 같으며 관객화된 영화의 객석관람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은 것도 제대로 못하는 우리들은 왜 굳이 큰 걸 하려는 걸까.’ 영화가 인용하는 짐 해리슨(Jim Harrison)의 말은 32편의 짧은 영화들의 태도를 함축한다.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때로 영화를 통해 꿈을 꾼다. 그건 우리가 어리석은 인간이라서 만은 아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현실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기에, 그 현실을 완전하게 이루고 싶다는 꿈을 꿀 수 있다. 영화가 존재하는 건 우리가 꿈을 꾸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꿈을 꾸는 한, 극장은 언제나 존재할 것이며 언제나처럼 우리는 영화를 통해 자신의 꿈을 확인하고 되새길 것이다. 그건 평범한 거장이나, 위대한 관객이나 마찬가지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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