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음절의 경쾌한 제목처럼 홍상수의 <하하하>는 경쾌한 영화다. 언제나 그렇듯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잰 체하는 예술인과 지식인들의 속물적 근성을 벗겨내는 ‘생활의 발견’을 그려내는 홍상수의 ‘극장전’은 <하하하>에서도 거듭된다. 홍상수 영화에 등장하는 영화평론가, 감독, 작가들은 평론이나 연출, 창작을 한다고 할뿐, 그에 어울리는 행위를 보여준 적이 없다. 언제나 술을 마시고, 여자를 탐하며, 제 삶을 변명하거나 위장하기에 바쁘다. 그럼에도 그들을 미워할 수 없는 건 그들이 보여주는 소소한 일탈적 행위가 하나 같이 인간적이란 변명으로 통용될 수 있는 까닭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함께 홍상수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대중적 호응도가 높을 것으로 기대되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하하하>는 그의 영화 가운데서 가장 유쾌한 맺음새를 지닌 영화라고 해도 될 것 같다. 홍상수의 영화는 일상성을 고스란히 노출하면서도 그 일상성을 완전히 탈색시켜버리는 듯한 체험적 기질을 품고 있다. 그건 홍상수 특유의 ‘대구의 힘’에서 비롯된다. 공간성이나 인물을 축으로 캐릭터를 대칭의 구도에 내려놓고 이를 통해 대비적인 내러티브를 구성해나가는 홍상수의 영화는 관대하듯 치밀하며, 유연하듯 첨예하다.
무엇보다도 매일 아침 당일의 시나리오를 탈고해 배우들에게 전달한다는 홍상수식 드라마투르기의 비결이야말로 그의 영화에서 발견되는 의외성의 뿌리일 것이다.-이를 드라마 현장의 쪽대본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무엇보다도 (그의 영화를 본 관객의 짐작 안에서는 의외처럼 들리겠지만) 치밀하게 테이크를 반복하는 홍상수의 현장에서 배우들의 비연기적인 ‘연기’가 가능한 것도 바로 그 즉흥적 자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무엇보다도 근작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함께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기획한 디지털 삼인삼색 옴니버스 <어떤 방문>에 포함된 <첩첩산중>은 홍상수라는 감독의 변화를 발견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하하하>는 그 변화를 가장 뚜렷하게 증명하는 또 하나의 진행형 작품처럼 보인다. 그 변화라는 건 세계관이 보다 유연해졌다는 것. 그리고 그 유연함이란 홍상수의 영화가 발생시키던 웃음의 너비가 실소에서 진짜 코미디로 변모하고 있다는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입봉작도 없는 감독 문경(김상경)은 영화평론가 선배 중식(유준상)을 만나 낮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중, 두 사람은 최근 동시간대에 통영에 머무르면서도 마주친 적조차 없음을 아게 된다. 그리고 사연 하나에 술 한잔을 청하며 각자 통영에서의 경험담을 주고 받는다.
이 소소한 이야기가 비범할 수 있는 건 같은 시간대에 한 공간 속을 활보했던 두 인물의 경험담이 이루는 일상성의 너비가 이루는 진귀함 덕분이다. 이야기를 안주 삼아 술잔을 부딪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입담을 겨루듯 경쟁적이지만 과장되기 보단 솔직하며 고백적이다. 이는 지금까지 타인의 삶을 염탐하듯 들이미는 홍상수의 줌인과 달리 직접적인 화자의 고백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이 독백이 아닌 대화의 형식으로서 사연을 재현한다는 점에서 보다 적극적이다. 최소한 홍상수의 영화의 내레이션이 지금까지 관객을 향한 방백의 형태로서 활용됐던 것과 달리 <하하하>는 대화의 형태로서 관객을 참여시킨다는 점에서 영화가 묘사하는 사연의 형태는 수치스러운 것이라기 보단 긍정적인 이야기거리로서의 감상을 부른다.
문경과 중식은 동시간대에 같은 공간을 경유하면서도 서로 다른 동선 속에서 같은 인물들을 만나고 헤어지며 두 가지 줄기의 플롯을 만들어나간다. 미묘하게 엇갈리는 두 사람의 동선 속에서 평행처럼 나열된 두 사람의 사연은 공간성과 시간성을 초월하는 일상성의 신비를 염탐하게 만든다. 궁극적으로 <하하하>를 단순명쾌하게 정리하자면 ‘재미있는 이야기’다. <하하하>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때때로 궤변을 늘어놓고 거짓말을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을 이기지 못하거나 눈치를 살핀다. 그 속물성은 밉기 보다 귀엽다. 평범한 욕망을 대단한 것인양 둔갑해 허세를 부리던 예술적 지식인들이 한순간 찌질한 속물적 근성을 드러내지만 <하하하>는 이를 고발이 아닌 발견의 태도로 다루며 이는 평범한 인간을 살피는 일상성의 풍경으로 승화된다. 그리고 그것이 홍상수를, <하하하>를 비범하게 수식한다. 잘 알지도 못하지만 <하하하>가 묘사하는 일상은 분명 귀엽다.
무엇보다도 <하하하>는 언제나 홍상수의 영화가 그러했듯이 배우들의 이색적인, 혹은 진짜 같은 연기를 지켜본다는 것만으로도 유쾌한 작품이다. 특히 문소리는 <하하하>에서 압권의 연기를 펼치며 유준상의 이색적인 면모는 단연 발견에 가깝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말한다. “이 길을 선택하는 순간, 너희는 많은 것을 잃게 돼.”각오와 경고가 한 몸에 담긴 언어가 필사적인 절박함을 드러낸다. 영광보단 고난을 명확히 관통하는 스승의 언질 앞에 제자들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피땀 흘린 노력의 과정이란 성공이란 방파제를 쌓지 않고서야 쉽게 허물어질 모래성 같은 영예나 다름없다. <킹콩을 들다>는 역도선수를 꿈꾸는 어린 학생들과 금메달에 도전했다 동메달에 머무르고 부상까지 얻은 비운의 역도선수의 삶을 사제라는 관계에 뒤엉켜 넣은 신파다.
금메달에 도전했다 실패한 동메달리스트 이지봉(이범수)은 심각한 부상과 잠재적 질병까지 진단받은 후, 역기를 놓고 은퇴한다. 그에게 동메달이란 애증의 영광이며 무관의 짐이나 다름없다. 1등을 놓친 3등은 예선탈락보다도 더욱 비참한 멸시의 대상이 된다. 그런 어느 날, 매일 노역을 통해 밥벌이를 하던 그에게 전직 국가대표 감독이자 옛 스승(기주봉)이 찾아와 제안을 던진다. 보성의 여자중학교에서 역도를 교육시킬 것을 권한다. 마지 못해 보성으로 내려간 이지봉은 한적하게 낚시나 하며 시간을 죽이려던 중 역도에 관심을 보이는 모종의 소녀들을 만나고 점차 그네들에게 마음을 연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제 때 밥을 챙겨먹지 못하는 영자(조안)가 눈에 밟힌다. 점차 새로운 결심이 생긴다.
<킹콩을 들다>는 스포츠 영화의 외양을 지니고 있지만 한없이 여리디 여린 신파의 마음을 품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킹콩을 들다>는 단지 스포츠 도전기라는 페어플레이 정신만으로 몸통을 이룰 수 없는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다시 한번 들추는 스포츠 신파다. 가난하거나 촌스러운 시골의 고학생들이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채 구타와 욕지거리를 견디며 세워 올린 스포츠 강국의 ‘7전8기’적인 전설적 외피의 속살에 담긴 피와 땀의 잔인한 내면이 공분을 부르고 그 안에서 학대 받는 학생들의 눈물과 신음을 페이소스로 건져 올리는 공식적인 신파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처우가 열악한 대한민국의 속성을 극복한 여성들의 연대기란 점에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연상시키는 바도 없지 않다. 최고가 되지 않고서야 견딜 수 없는 현실이 금메달에 대한 집착과 영광에 대한 속박으로 드라마를 이끈다.
열악한 환경을 무시하듯 엘리트 체육의 금메달 지상주의가 득세하는 국내 체육계의 현실은 스포츠 신파를 위한 좋은 먹잇감이나 다름없다. 연금을 보장하는 금메달에 목숨 걸지 않고선 버틸 재간이 없는 비인기종목 스포츠 선수들의 현실은 스포츠강국 대한민국의 얄팍한 신화를 지탱하는 열악한 기자재다. 아이러니하지만 21세기가 지나도 이런 기자재가 꽤나 쓸만한 소품이 된다. 먹히는 신파를 만드는 도구가 된다. 이건 시대착오적인 영화가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영화의 현실이다. <킹콩을 들다>는 이 열악한 시대에 담긴 근본적 자질이 노골적으로 활용된 현실적 신파다. 가녀린 소녀들의 몸에 구타의 이미지를 새겨넣고 가난한 루저의 슬픔을 묘사하면서도 중간중간 소박한 웃음을 매복하는 <킹콩을 들다>는 정직하다기 보단 적확한 기획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허구를 채워 넣은 드라마의 완성도가 빼어난 건 아니지만 분노가 자각되고 슬픔이 인정되는 수순을 거칠 때 <킹콩을 들다>는 효과적인 신파의 탈을 쓰고 객석을 공략한다. 배우들의 열연도 볼만하지만 가장 큰 볼거리는 여전히 촌스러운 대한민국이다. <킹콩을 들다>는 그 촌스러운 현실의 열악함을 영화적 감정으로 치환하는, 얄팍하지만 효과적인 신파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