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사극 <광해: 왕이 된 남자>는 광해군 집권 당대의 아슬아슬한 정치적 조형을 창작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안착시키는데 성공했다. 구중궁궐 내의 정치적 모략의 중심으로 떠밀리며 엄격한 궁의 생활에 적응해나가는 ‘왕의 남자’의 일상은 코믹한 광경을 이끌어낸다. 이 아이러니한 유머가 칼을 품은 <광해>에서 자연스러운 긴장과 이완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아슬아슬한 정치적 조형을 창작적으로 잘 안착시킨 시나리오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때때로 그 합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순간도 존재하나 전반적으로 거슬리지 않는 흐름을 지녔으며 그 틈새를 메우는 건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다. 1인 2역을 오가는 이병헌은 서까래처럼 영화의 지붕을 받치고, 류승룡은 주춧돌처럼 영화를 떠받든다. 김인권과 장광의 연기에는 마음이 간다. 교과서적인 웅변조차 절절하게 소화하는 <광해>는 ‘정치하는 사람’보다도 ‘사람이 하는 정치’가 18세기 조선이나 21세기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절실함임을 잘 알고 있다. 달다가 맵다가 끝내 콧날이 시큰해진다.
학문을 익혀도 과거에 응시할 수 없고, 무예를 익혀도 나라를 훔칠 수 없는 신분. 인조반정의 피바람에 휘말려 역적으로 몰락한 자손으로서는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지만 시대는 그를 무기력하게 억누른다. 학문도 무예도 남이(박해일)에게는 덧없는 미망과 같다. 그래도 하나뿐인 여동생 자인(문채원)을 아끼는 그에게 자신을 거두어준 은인의 아들인 서군(김무열)이 결혼을 허락해달라 간청한다. 그리고 여동생의 결혼과 함께 먼 길을 떠나려던 그에게 불길한 기운을 느낀다. 거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밀려든 청의 대군 앞에서 성문은 손쉽게 열리고, 평화롭던 마을이 삽시간에 비극의 불길로 타오른다.
시대적 배경은 병자호란, 공간적 배경은 만주, <최종병기 활>은 탈한반도 지형의 액션물이다. 나라로부터 버림 받은 역적의 아들이 청의 군사들에게 포로로 끌려갔으나 나라가 구해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여동생을 되찾기 위해서 압록강 국경을 건너 만주 벌판으로 나아가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활을 들고 청나라 병사들과 맞선다. 스토리의 구조가 시공간의 묘와 맞아떨어진다. 국가라는 대의의 명예보다도 중요한 건 사적인 생사에 있다. 조선이라는 보수적 세계관 안에서 도드라지는 진보적 가치관이 개개인의 현실 안에서 설득력 있게 맞붙는다. 이야기적인 설정의 묘가 시공간의 성격과 맞아떨어진다. 무엇보다도 역사적 비극에 함몰된 인물이 타국으로 끌려간 여동생을 찾고자 국경을 넘는 남이의 의지를 설득력 있는 서사로 자연스럽게 노출시켜 나가는 과정도 자연스럽다. 사실과 허구의 배합이 자연스럽다.
무엇보다도 <최종병기 활>은 어떠한 인물보다도 제목에서도 등장하는 활 자체가 주인공인 영화다. 검과 창이 아닌, 활과 활의 대결을 그린다는 건 결국 서로 거리를 둔 채 활시위를 당기는 인물과 인물 사이의 심리를 얼마나 긴박하게 묘사할 수 있느냐에 성패가 달렸다. <최종병기 활>은 그 거리감을 능수능란하게 조절하며 인물과 인물 사이의 심리적 긴장감을 끊임없이 당기고 놓는다. 검과 창을 맞부딪히는 묵직한 백병전 대신 잠복과 엄폐를 통해 위치를 점하고 상대를 겨냥하는 남이의 게릴라전과 이를 뒤쫓는 청군의 추격전을 통해서 영화의 심박수를 조절해나간다. 거리를 둔 채 활시위를 당기는 인물 간의 간격이 팽팽한 서스펜스로 당겨진 뒤, 속도감 있는 추격전이 재빠르게 튕겨져 나간다. 활의 기동성을 통해서 형성되는 긴장과 이완의 리듬감은 <최종병기 활>이 지닌 영화의 ‘최종병기’다.
무엇보다도 대립각을 펼치는 양쪽의 인물들이 선악의 이분법에 매몰되지 않고 저마다에게 적당한 명분을 쥐어주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특정 인물의 행위에 감정을 쏟아 넣기 보다는 중립적인 시각에서 캐릭터들의 행위를 관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추격전의 묘미가 보다 생생하게 살아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탁월한 호연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그 배우들의 호연에 멍석을 깔아준 캐릭터 설계 또한 준수하다. 단단한 드라마를 활처럼 세운 뒤, 탄력 있는 연출력을 활시위처럼 매달고, 화살처럼 잘 깎인 캐릭터들을 얹혀서 튕겨 날리니 쾌감과 감동이 적중한다. 단단한 드라마, 팽팽한 연출력, 날렵한 배우들, <최종병기 활>은 당기고 놓는 법을 잘 아는 영화다. 큰 무리수 없이 흐르는 스토리를 줄기 삼아서 주렁주렁 열린 액션들이 즐기기 좋은, 이 정도면 확실한 웰메이드 대작이다.
<최종병기 활>은 제목 그대로 활을 들고 싸우는 신궁의 게릴라전을 그린다. 시대적 배경은 병자호란, 공간적 배경은 만주, 탈한반도 지형의 액션물. 학문을 익혀도 과거에 응시할 수 없고, 무예를 익혀도 나라를 훔칠 수 없는 역적의 자손이 활을 움켜쥐고 청나라 병사들에게 끌려간 누이를 찾아간다는 설정의 묘가 시대와 공간에 잘 맞아떨어진다. 거리를 두고 활시위를 당기는 인물 간의 간격이 적절한 서스펜스를 잉태하다가 속도감 있는 추격전으로 리듬을 조율한다. 단단한 드라마를 활로 삼아 탄력 있는 연출력을 활시위처럼 매달고 화살처럼 잘 깎인 캐릭터들을 얹혀서 튕겨 보내니 쾌감과 감동을 관통한다. 큰 무리수 없이 흐르는 이야기를 줄기 삼아 주렁주렁 열린 액션들이 즐기기 좋은, 이 정도면 확실한 웰메이드다.
전쟁은 승패로 기록된다. 하지만 거기 사람이 있었다. 전쟁은 승패보다도 생사의 문제로 기억돼야 한다. 전쟁이라는 명분에 휘말리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건너야 하는 인간들의 존재는 승패로서 기록되는 역사적 명제 아래 손쉽게 지워진다. 전쟁은 영문도 모른 채 생사의 기로로 떠밀린 인간들의 지옥도다. <고지전>은 이를 대사로서 명확하게 전달한다. “빨갱이가 아니라 전쟁과 싸우는 거다. 그러니 살아남는 게 전쟁으로부터 진짜 이기는 길이다.” 전쟁이 승패가 아닌, 생존의 문제임을 강력하고 확실하게 피력하고 환기시킨다. 물론 이는 숱한 전쟁영화들이 다루고 언급해온 이야기다. 하지만 <고지전>은 사람 죽이는 전장의 비극을 전시하고 눈물을 요구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 지옥도 속에서 이유도 알 길 없이 서로를 죽이고 죽어나가는 이들의 참혹한 비극에 주목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1951년 7월 10일 휴전 협정의 시작과 함께 형성된 휴전선 부근에서 2년여 동안 교착상태의 국지전을 거듭한 후, 1953년 7월 27일에 이르러서야 휴전을 맞이했다. <고지전>은 남북의 대표가 만나 군사분계선과 포로교환 문제로 탁상공론을 거듭하던 2년 여간의 휴전 협정 기간 속에서 고지 점령을 위해 소모적인 전투를 벌이던 휴전선 부근의 숱한 전투를 펼치던 치열한 전선 가운데 하나로 시선을 돌린다. 후방에 근무하던 방첩대 중위 은표(신하균)는 애록고지에서 전선을 지키는 악어중대 중대장의 죽음을 비롯해서 일부 부대원이 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혹을 조사하라는 명을 받고 애록고지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참전했다가 북한군에게 끌려가 죽은 줄만 알았던 친구 수혁(고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은표는 애록고지를 둘러싼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는 동시에 참혹한 전장의 진실 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매일 같이 약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고지 전투 속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가운데서도 전장의 일상은 흐른다. 그렇게 흐른 일상이 어느새 2년여 시간에 다다라서 어제 봤던 그 놈이 살아있었는지, 죽었었는지 분간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 돼버린 고지의 병사들은 어제 올랐던 그 고지에 또 오르고 내리며 매일 같이 생사의 기로를 넘나든다. <고지전>은 치열한 고지 쟁탈전에 나서는 병사들의 일상을 그리며 숙연하게 내리쬐는 전쟁의 비장함 대신 그 아래 드리워진 부조리한 전쟁의 단면들을 채집해 나간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해야 하기에 전장에 끌려 나온 젊은이들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전선에서 한 뼘의 땅을 넓히기 위한 하루살이로 소모된다. 땅따먹기에 열중하는 윗대가리들이 탁상공론 속에서 시간을 허비할 때, 생존의 본능마저 찢겨 나뒹구는 고지를 기어올라가며 죽어나가거나 죽어나가는 전우의 시체를 밟고 넘는다.
<고지전>은 전쟁이 숙연하거나 엄숙하게 기념될만한 역사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비극임을 명백하게 전시한다. 그리고 이런 비극을 방관한 채 한 뼘의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당연하게 요구하는 권력, 더 나아가 국가라는 이름으로 비호되는 결정권자들의 부조리한 행실을 폭로한다. <고지전>은 아비규환 같은 전장의 풍경을 통해서 이 땅의 부조리한 역사를 환기시키는 진보적인 전쟁영화다. 생생하게 묘사되는 전투 시퀀스의 프레임이 인간적인 윤리에 대한 고찰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고지전>은 한국전쟁을 다룬 지난 영화들에서 한 발 나아간다. 이념의 대립이라는 빤한 수식어 대신 그저 생사의 기로 속에 내몰린 인간과 인간의 덧없는 사투가 낳은 명목 없는 비극의 온도를 서서히 가열시킨다.
<영화는 영화다>와 <의형제>를 통해서 갈등 노선에 놓인 사내들의 멜로를 그려낸 장훈의 장기는 <고지전>에서도 여전하다. 하지만 대립과 연대를 거듭하는 두 인물의 긴밀한 감정선을 그리던 전작들과 달리 전쟁영화라는 스케일 안에서 다양한 인물의 관계도를 그리는 <고지전>은 너르고 보편적인 공감의 영역으로서 인물들의 감정선을 펼쳐 보인다. 은표와 수혁의 대립적 구도와 함께 북과 남의 경계에서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적으로 대치한 이들이 똑 같은 바람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될 때, 이는 1대1의 관계로 그려지던 장훈의 전작들 속에서 발견되던 등을 맞댄 남자들의 미묘한 연대적 감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박상연은 <고지전>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이념이라는 거대한 명분에 짓눌린 개개인의 비극을 환기시켜낸다. 그리고 이제 연출전문 감독이라 불려도 좋을 장훈은 주목할만한 신예 연출가의 수준을 넘어서 진짜 물건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저마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들의 열연 속에서도 신예 이제훈은 비범하게 돋보인다.
치열한 전투와 전투 사이에서 소소한 일상을 영위하는 이들의 생이 일거에 타 들어가는 클라이맥스는 <고지전>의 본체나 다름없다. 살아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일시적인 희망으로 부풀어오르다 이내 꺼져버린 광경은 전쟁기념비 속에 기록된 이들에 대한 감사보다도 분노해야 할 대상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젊은이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는 기득권들의 행태는 그 시절의 전장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 사회에서도 만연한 부조리와 다를 바 없다. 시대는 변했고, 상황도 달라졌지만 몰염치와 몰상식으로 시대를 지배하는 이들의 세태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경계심을 부추기는 어떤 이들의 자극적인 멘트처럼 이 땅에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은 전쟁에 대해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그 주적에 대한 적개심이 아니라 그 전쟁의 명분을 부추기는 우리 안의 어떤 입이다.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며 몸과 마음을 다 바칠 것을 강요하는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 입으로 세상을 움직인다. 그러니 기억해야 한다. 전쟁이란 승패의 기록이 아닌 생사로 기억돼야 하는 것임을, 승자와 패자가 아닌, 산 자와 죽은 자의 비극임을,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고지전>의 주제는 명확하다. 빨갱이가 아니라 전쟁과 싸우는 거다. 그러니 살아남는 게 전쟁으로부터 이기는 거다. 전쟁이 승패가 아닌, 생존의 문제임을 거듭 환기시킨다. 물론 숱한 영화들이 해왔던 이야기다. 하지만 <고지전>은 사람 죽이는 전장의 비극을 넘어서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지 알 길이 없는 전장에서 죽음을 조장하고 방관하는 치들에 관한 분노와 서러움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한편으로 의미심장하다. 땅따먹기에 열중하는 윗대가리들이 탁상공론에 열중하는 가운데 살기 위해서 죽이고 죽는 청년들의 모습은 단순히 전장이 아닌 이 사회에도 만연한 부조리 가운데 하나다. <고지전>은 전장을 통해서 이 땅의 부조리한 역사적 환기까지 나아가는 진보적인 전쟁영화다. 장훈은 확실히 스스로 물건임을 증명하고, 선배 배우들의 열연 속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뚜렷이 각인시키는 신예 이제훈이 인상 깊게 남는다.
좋은 햇살을 받고 정제된 소금과 맑고 깨끗한 천연의 물, 기름진 토양 위에서 자란 콩. 깊은 맛이 우러나는 좋은 된장을 만들기 위한 기본적인 재료들. 하지만 이 모든 재료들이 마련된다 하여 꼭 좋은 된장이 빚어질 수는 없는 법. 이 모든 재료를 빚어낼 손의 정성도 중요하고, 오랜 시간 제 몸에 된장을 품을 장독대가 튼실해야 하며 풍부한 햇살과 적절한 바람을 맞을 시간이 필요하다. 그 모든 조건을 완벽히 갖춘다면 필히 깊고 풍부한 맛이 담긴 된장을 빚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모든 조건을 다 갖췄다 해도 다다를 수 없는 궁극의 맛을 선사하는 특별한 된장의 비결 그것은 무엇일까.
탈옥 후 5년 동안 잡히지 않았던 희대의 살인마 김종구는 결국 경찰에게 검거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를 검거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강력반 김형사도, 이형사도 아닌, 된장이다. 그러니까 사연인즉슨 된장찌개를 먹다가 자신을 검거하러 접근하는 형사들도, 자신을 겨눈 총부리도 인식하지 못한 채 마저 된장찌개를 밑바닥까지 긁어먹고서야 넋이 나간 표정으로 수갑을 찬 채 경찰차에 올랐다는 것이다. 이 기막힌 사연을 전해들은 특종PD 최유진(류승룡)은 이를 취재 조사하던 중, 그 신비한 된장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된장녀, 장혜진(이요원)의 존재를 알게 된다.
너무도 익숙하기에 낯선 제목인 <된장>에서 ‘된장’은 일종의 미끼이자 핵심이다. 희대의 살인마의 경계를 일순간 해체시켜버린 된장찌개의 비밀을 쥔 여인의 정체를 탐문해나가는 영화의 내러티브는 곧 그 된장에 얽힌 물음표의 실체에 접근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 의문 너머에 자리한 사연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는 수순으로 관객의 흥미를 이어나간다. 마치 후각을 통해 얻어진 식욕이 미각적인 만족으로 이어져 나가듯 <된장>은 소재 자체가 발생시킨 일종의 흥미를 이야기 본연의 감동으로 승화시켜나가는데 성공했다. 이는 단지 소재를 통해 완성해낸 이야기의 완성도가 탄탄한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된장이라는 소재의 특성을 이야기에 착안해낸 기획력과 그 기획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낼 것인가라는 구성력이 이를 든든하게 지원하고 있는 덕분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된장이라는 소재를 되레 심오하고 세심하게 다룸으로서 소재에 의외적인 특이성을 부여하고 흥미를 유발시킨 뒤, 이를 내러티브의 추진력으로 밀고 나간다. 기본적으로 완급조절이 탄탄한 스토리텔링을 능수능란한 연출로 구사하는 <된장>은 안정적인 배우들의 연기에 힘입어 이야기가 품고 있었던 가능성을 실현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좋은 된장을 만드는 비결이 단순히 이상적인 환경 조건을 공식처럼 더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정성과 기다림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된장>은 뛰어난 이야기란 것이 단지 좋은 소재와 완결성의 구조의 조합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맛있는 이야기는 많아도 숙성된 감동을 지닌 이야기를 찾기란 쉽지 않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질려도 감동은 질리지 않는다. 그리고 <된장>은 질리지 않는 감동을 맛있게 이야기하는 진국과 같은 작품이다.
아내가 살인했다. 아니, 살인한 것 같다. 형사인 남편이 살인현장에서 발견한 물증들은 정확하게 아내를 진범으로 겨냥하고 있다. 대학동기인 동료형사에 대한 불리한 증언마저 고지식하게 해낼 수 밖에 없었던 원칙주의자 형사는 남편으로서 기로에 선다. 남몰래 물증의 은폐와 훼손을 감행한다. 그러나 수사가 거듭될수록 은폐하거나 훼손할 수 없는 증거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다. 그리고 도무지 돌아설 수 없는 일이다. <세븐 데이즈>의 각본을 쓴 윤재구가 직접 메가폰을 잡은 <시크릿>은 전자와 마찬가지로 공공적인 윤리에 발붙여야 할 이를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얹어놓은 뒤 벌어지는 개인적 갈등을 다룬다. 윤리적 죄의식에 등돌린 채 개인적 불행에서 헤어나기 위해 내달릴 수록 상황은 진창으로 떨어진다. 가치관의 갈등을 느끼는 인물의 심리는 <시크릿>에서 전반적인 긴장감을 직조해내기 위한 궁극적 핵심과 같다. 동시에 빠르게 나열되는 컷과 숏을 통해 정보량을 증가하는 <시크릿>은 단서들의 교차와 충돌을 통해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가는 스릴러다. 일단은 그렇다.
<시크릿>은 인공적인 영화이자 그것을 애써 가리지 않는 작품이다. 말끔한 슈트를 차려 입은 형사의 옷 매무새부터 시작해서 끝없이 단서를 벌려나가는 내러티브의 형태까지, 영화는 좀처럼 현실을 끌어안을 생각이 없다는 듯 모든 것들을 연출적 시공간으로서 치장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스릴러로서 단서를 벌려나가는 이야기가 딱히 인상적이지 않을 때, 이 모든 건 허세가 된다. <시크릿>은 기본적인 비밀의 깊이를 유지하지 못하면서 그 수면 위에 단서를 마구 흩뿌린다. 사연의 단초는 쓸만했다. 도입부의 몽타주도 꽤나 인상적이다. 문제는 그 사연의 설계다. 비장한 표정으로 자꾸 패를 던지는데 그 결과가 초라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비밀은 여간 해서 모른 체하기 어렵고, 결말부에 다다라 영화가 제 입으로 설명하는 비밀의 정체란 구차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그 끝에 매달린 사족은 명백한 낭비다. 허물처럼 벗겨지는 단서들 사이에 감춰진 비밀의 정체란 정작 허망하다. 감춰야 할 것은 제대로 감추지 못하면서 지나치게 많은 것들만 드러낸다. 비범한 척 패를 돌리지만 결과적으로 뻥카 같은 반전 앞에 허세로 몰락하고 만다.
“대통령은 일개 개인이 아니라서 (개인적인 처신까지도) 국민적 동의와 수반적 회의를 거쳐야 하거든요.”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 등장하는 대사는 일면 의미심장하다. “국민의 손과 발이 되겠다”던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의 취임사처럼 대통령은 국민을 대신해 국가를 운영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직책이자 전국민적 동의를 등에 업고 대표성의 권위를 등에 업은 권력자다. 그만큼 대통령은 어느 개인으로서의 삶을 전면에 내걸 수 없는 대의적 존재로서 의무를 지닐 때 그만큼의 권력을 함께 보장받는다. 그리고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국민적 동의를 통해 절대적 권력을 얻었다는, 그 대통령에 관한 드라마다.
사실 대통령이 등장하는 한국영화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단순히 대통령이 등장하는 영화가 아닌, 대통령을 중심에 둔 영화라는 점에서 전례들과 차별화 될만한 작품이다. 또한 대통령이라는 직책으로부터 행사되는 업무적 고뇌를 벗어나 대통령이라는 직책의 아우라에 감춰진 개인적 인간미를 조명한다는 것이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궁극적 방점이다. 어쩌면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근래 두 전임대통령의 부고를 겪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특별한 감상을 부를 만한 시의성을 두른 작품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 대통령의 임기 교체 과정을 이어나가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세 대통령을 둘러싼 세 가지 사건을 형식적 단절을 생략한 상태로 접붙인 옴니버스적 장편이다. 대통령 퇴임을 앞두고 로또 1등에 당첨된 김정호(이순재), 젊고 잘 생긴 최연소 대통령 자리에 올라 국책을 수행하던 중, 한 청년의 개인적 바람 앞에서 갈등하게 되는 차지욱(장동건), 그리고 건국이래 최초로 여성대통령이 됐지만 남편 최창면(임하룡)의 돌발적 행동으로 곤혹을 치르게 되는 한경자(고두심)까지, 세 번의 정권교체 속에서 세 대통령이 겪게 되는 큰 사건들을 서사적으로 나열한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그 주요한 사건을 통해 대통령이라는 틀에 감춰진 인간을 발췌하려 한다.
사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대통령으로서의 공무적 현실성을 추적하는 작업이 아닌, 대외적 바람이 투영된 이상적 이미지즘에 가깝다. 공무적 역할을 수행하는 대통령의 사소한 에피소드는 직책에 가려진 개인을 환기시킨다. 대통령이라는 공적 범위와 충돌을 일으키는 개인적 범위의 사연은 대통령이라는 직책에 대한 뿌리깊은 관성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기 위한 도발과도 같다. 독재의 역사와 더불어 제왕적 이미지를 뿌리깊게 내린 기존의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현실적 권위를 한 꺼풀 벗겨내기 위한 허구적 작업과도 같다. 소박하고 진솔한 대통령들을 연이어 묘사하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인간적이란 언어와 괴리감을 이루는 대한민국 대통령들과 차별화된 대리적 만족을 그리기 위해 기획된 고의적 판타지다.
현실에서 사실상 좀처럼, 어쩌면 결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대통령들이 등장하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일종의 희망사항이거나 허구적 대리만족에 가까운 작품이다. 대통령의 비현실적인 미담을 연이어가는 건 현실적 가치관을 역설하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에 가깝다. 현실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이상을 영화적으로 대리 만족시킨다는 미덕이 발생한다. 하지만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지나치게 강박적인 영화다.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들뜬 기분을 죽이지 못한 채, 매 사연을 안이하고 평이한 해피엔딩으로 그려내기 위해 작위적인 미소를 짓는 느낌이다. “굴욕의 역사는 있어도 굴욕의 정치는 하지 않소. 한국을 우습게 보지 마쇼.”극중 2번째로 등장하는 최연소 대통령 차지욱의 혈기왕성한 발언처럼, 때때로 과도하게 격양된 국가적 자부심을 웅변하거나, 매 에피소드마다 내재된 개별적 클라이맥스에서 과장된 음악을 삽입하며 감정적 고양을 조장한다.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대통령들은 마치 ‘인간적’이란 용어를 대변하는 이상적 롤모델로서 묘사되기 위해 동원된 이미지로서 자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대통령들이란 친서민적이거나 자기헌신적인, 혹은 일탈적인 일상을 꿈꾸는 대통령을 나열하기 위한 수단적 이미지에 불과하다. 마치 소재에 대한 강박에 눌려 창작적 태도를 발전시켜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 것마냥 지나치게 이상적인 이미지를 전시하는 수순에서 한 발 나아가지 못한 인상이 느껴진다는 건 분명 아쉬운 지점이다. 동시에 <굿모닝 프레지던트>가 재기발랄함과 치기어림이라는 취향적 호불호로서 명확한 팬덤을 두르던 장진의 영화란 점을 염두에 두자면 그 특이성을 거세한듯한 코미디와 평이한 이야기 전개를 연출한다는 건 작가적으로 일면 아쉬운 지점이다.
물론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나름대로 대중적 호응을 얻을만한 코미디적 감각을 품고 있는 동시에 시대적 위무를 가능케 할만한 기능적 역할이 뚜렷한 작품이다. 예술이 현실 안에서 누릴 수 없는 꿈을 대변하는 기능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이상적 태도는 인정할만한 구석이 있다. 장진이라는 개인적 범위의 퇴보적 결과물이란 평을 떠나 <굿모닝 프레지던트>라는 영화가 지닌 대중적 고려는 시대적으로 인정받을만한 구석이 있다. 다만 그 판타지가 현실을 대변한다고 파악한다면 곤란하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우리가 바라는 대통령에 대한 환상일 뿐,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대통령에 대한 현실적 이면이 아니다. 말 그대로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공익적인 우화일 뿐이다. 타인을 짓밟고 권위를 누리는 현실의 뻔뻔한 누군가들과 결코 무관한 이상적 대통령들이 사는 그곳은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 아니므로.
사라진 동생 소진(심은경)을 찾아나서는 희진(남상미)이 맞닥뜨리는 상황을 대변하는 건 형사 태환(류승룡)의 잦은 대사다. “그게 말이 돼?’당연히 말이 될 리가, 좀처럼 믿을 수 없는 일 앞에서 당연한 질문. 하지만 그게 말이 되건 말건 간에 누군가는 믿을 수 없는 일을 겪는 세상. 말 그대로 불신지옥, 누군가가 믿어줄 수도 없는 일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사람의 삶이란 이토록 괴롭고 처연하다. 지독한 믿음을 지닌 자들이 만들어낸 지옥에 믿을 수 없는 자가 갇히게 되는 상황은 공포 그 자체다.
<불신지옥>은 자신의 광기를 전도하는 자들의 믿음이 만들어낸 지옥도다. 믿는 자들의 광기에 치여 사는 인간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때때로 공포가 된다. 건조한 톤으로 내려앉은 영화는 시종일관 서늘한 낯빛으로 긴장감을 조성하고 복도식 아파트와 지하실과 같은 한국적 풍경을 적극 활용한 호러적 연출은 꽤나 인상적인 이미지를 구축한다. 무엇보다도 <불신지옥>이 ‘(한국식)기독교’와 ‘무속신앙’을 묘사의 대상으로 삼은 건 형태적으로 전혀 무관해 보이는 두 종교가 사실상 한국 사회 내에서 뿌리깊은 병리적 맹신을 전도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형 체육관에 모여 통곡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나 종을 울리고 춤을 추며 굿판을 벌이는 행위는 실상 그 믿음의 외벽에 놓인 자들에게 기괴한 감상을 부르는 병리학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믿는 자들이 만들어낸 광기는 믿지 않는 자들의 눈에 공포를 비춘다.
믿을 수 있는가, 믿을 수 없는가의 물음은 종교와 신앙이라는 단어 안에서 반복돼왔다. <불신지옥>은 그 물음에 답변할 개인적 권리를 침해하는 자들의 광기를 공포로 치환한다. 믿음의 본질과 무관하게 그 형태 자체에 미쳐버린 자들은 자신의 주변에 놓인 자들을 파괴하는 형태로 그 믿음을 전도해나간다. <불신지옥>은 연출적 면모와 주제적 접근 모든 면에서 주목 받을만한 작품이다. 초자연적인 분장을 빌리지 않고 실생활의 표정만으로 섬뜩한 공기를 형성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다만 지나치게 모호한 해석을 부르는 결말이 조금 아쉽다. 마치 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입을 급하게 다무는 느낌이랄까. 강한 이미지적 자극을 원하는 관객이라면 정적인 영화의 분위기에 지루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그럼에도 <불신지옥>은 근래에 보기 드물었던 장르적 성취를 드러낸다. 뛰어난 연출력과 연기력을 기반으로 소재의 특성을 세계관에 반영하는데 성공했다. 근 몇 년간 국내 관객을 질식시키던 수준 이하의 호러를 잊어도 될만큼 인상적이다.
공무원 지상주의가 대한민국 20대를 고시라는 무덤에 매장해버린 세태 속에서 <7급 공무원>이란 제목은 의미심장한 예감을 부른다. 하지만 예감은 예감일 뿐, 오해하지 말자. 코미디, 그것이 진리다. 첨단 기기를 이용한 첩보행위 도중에도, 지상과 수상을 넘나드는 추격전 도중에도, 긴박한 육박전이 동원되는 액션 도중에도, 어김없이 다리에 힘 풀릴만한 엇박자가 연출된다. 진지한 상황 가운데서도 해프닝을 일삼는 캐릭터와 분위기 파악엔 안중 없는 대사의 합은 매번 웃음을 안겨주고야 만다.
안수아(김하늘)는 국가 비밀정보요원이다. 하지만 신분이 드러나선 안 되는 처지인 덕분에 스스로를 여행사 직원으로 위장한 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공무(?)를 수행한다. 이런 까닭으로 애인인 이재준(강지환)의 오해를 사고 결국 이별 통보까지 받는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고 여전히 공무를 수행 중이던 안수아는 이재준과 재회하고 구타로 회포를 푼다. <7급 공무원>은 액션물이나 형사물, 심지어 첩보물의 외피를 한쪽씩 걸치고 있지만 본질적으론 로맨틱코미디다. 그리고 그 로맨틱코미디 안에서도 로맨틱보단 코미디에 강세를 두고 있다. <7급 공무원>은 시작부터 끝까지 코미디를 위해 모든 요소를 복무시키는 영화다.
전체적인 맥락만 놓고 보자면 <7급 공무원>은 조악한 영화다. 사건의 인과관계를 충분히 설득할만한 내러티브는 종종 무시되거나 간과된다. 시퀀스 전체를 관통할만한 유기적인 맥락은 애초에 고려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그릇을 시야에서 가려버릴 정도로 뻔뻔하게 눈에 띄는 장기가 그 안에 담겨있다. 개성이 충만한 캐릭터들은 <7급 공무원>이란 작전을 수행하는 일급요원들이다. 새침하듯 억척스런 안수아와 소심하듯 열정적인 이재준을 연기하는 김하늘과 강지환은 나름대로 그 캐릭터에 충실한 연기를 펼친다. 또한 두 주연이 이루는 합의 빈틈을 메우거나 역할의 반사적 기능에 충실한 덕에 효과를 증폭시키는 조연들의 공헌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류승룡이 연기하는 재준의 상관 원석은 웃음의 자율신경이라 명명해도 좋을만큼 중요한 배후 인물이다.
국정원에 소속된 비밀요원들은 신분을 위장하고 국내에 잠입한 국제적 범죄조직을 일망타진한다. 그들은 고성능 장비를 소지하거나 첨단 추적 기기를 통한 지원을 얻는다. 사실 영화 속 ‘7급 공무원’의 세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과 거리가 있다. 과학수사대와 경찰특공대라는 절대명사까지 동원한다 해도 영화 속에서 ‘첩보’란 단어를 묘사하는 이미지 자체가 대한민국이라는 지정학적 조건의 범주를 통해 예상되는 스케일과 괴리감을 부른다. 드레스를 입은 채 수상제트스키를 타고 범인들을 쫓는 안수지의 추격전에서 시작되는 <7급 공무원>은 작게는 고화질 위장캠을 비롯한 첨단 첩보 장비로 무장한 국정원 비밀 요원들의 외형부터, 크게는 스파이물이라는 소재 자체의 성격까지, 모든 것들이 한국적이라고 부르기엔 괴리감을 형성할만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
그 괴리감은 <7급 공무원>의 선택적 오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의 지향점이 그 영화적 현실을 관객에게 온전히 설득시킬 요량과 무관함을 입증하고 있다고 보는 쪽이 옳다. 만약 일련의 이미지로부터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면 그것이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첩보물 형태의 오락영화들과 무관하지 않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7급 공무원>은 분명 할리우드 오락영화에 대한 동경심이 읽히는 영화다. 반대로 그 동경심 자체를 역공으로 착취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엄밀히 말하자면 할리우드 오락영화의 스케일을 흉내 내고 있다. 할리우드가 묘사한 사례들을 대한민국에 적용시킨 판타지에 가깝다.
그러나 <7급 공무원>의 핵심은 시트콤에 가까운 에피소드를 순발력 있게 이어가며 강세를 유지하는 코미디다. 공격할만한 허점이 많은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그만큼 파괴력 있는 공격력을 갖추고 있다. 철저하게 조직된 진영이라기 보단 마구잡이로 깔아놓은 지뢰밭처럼 예측할 수 없는 웃음들이 순간을 지배한다. 물론 객석에서 일어서게 될 즈음엔 영화의 첫 장면이 가물가물함을 느낄지 모른다. 어떤 관객은 뒤늦게 이를 지적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결론을 두더라도 2시간 정도는 분명 낄낄거리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7급 공무원>은 욕설과 구타라는 가학적 폭력을 코미디라고 착각하는 어떤 코미디영화들과 궤를 달리한다. 유연한 캐릭터와 합이 적절한 대사를 통해 웃음을 전달하는 건전한 오락영화란 점에서 장르적 성취를 인정할만하다. 어쩌면 코미디라는 기능성 그 자체를 염두에 두고 <7급 공무원>을 선택할 관객에게 이런 긴 설명은 무의미한 일이 될지 모른다. 대사로 치자면, ‘장난 한번 치니까 죽자고 덤벼드는’ 꼴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