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총구에서 불꽃을 튀며 튕겨져 나간 탄환이 반대편에 날아온 탄환과 맞부딪혀 일그러진다. 인간의 반사신경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에 틀림없다. 대상을 정조준 하지 않고 팔의 스윙과 팔목의 스냅을 통해 내던져지듯 총구를 벗어난 총알은 곡선의 궤적을 그리며 장애물 너머의 과녁에 명중된다 회전력에 의해 날아가는 탄도의 관성적 움직임은 아무렇지 않게 간과된다. <원티드>는 과학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혹은 그것을 철저히 무시하는 방식으로 독창적인 스타일을 완성한다. 말이 되지 않음은 <원티드>의 동선을 옭아매는 제한요소로 작동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것은 현실이라는 중력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하는 반작용의 질서로 적용되는 것이기도 하다.

 

Posted by 민용준
,
사용자 삽입 이미지

미국의 비밀첩보국 컨트롤은 그의 정보분석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다. 그는 비상함의 수준을 넘어 적의 심리까지 점검해주는 세심한 배려 덕분에 상관의 신임을 얻었지만 그로 인해 그는 자신이 간절히 고대하는 외근(?) 나설 없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외근직 첩보원이 되기 위해 78기를 다짐하는 남자, 맥스웰 스마트(스티브 카렐)에게 드디어 기회가 생겼다. 세계 각지에 투입된 첩보원들의 잇단 살해와 정체불명의 외부습격으로 위기를 맞이한 컨트롤이 그에게 현장근무를 명한 . 경력을 자랑하는 콧대 높은 에이전트 99( 헤서웨이) 그를 미더워하는 가운데 그들은 자신들의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동유럽 체첸으로 향한다.

1960
년대 동명 스파이물 TV시리즈를 리메이크한 < 스마트> 역설적인 웃음을 발생시키는 영화다. 유치한 상황을 진지한 태도로 모른 척하며 유머를 극대화시키고, 얼빠진 행위로 맞이한 위기 상황은 역시 상황에 걸맞지 않은 엉뚱한 대처로 극복된다. 첩보라는 특수한 상황을 웃음의 코드로 매개하는 < 스마트> 슬랩스틱의 동선과 스탠딩의 입담을 접목시키며 곳곳에 코믹한 설정을 너무나 뻔하게 설치하고 스스럼없이 작동시킨다. 진지한 마스크로 어리숙한 상황을 연출하는 스마트의 매력은 캐릭터 설정의 묘미에서 발생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스티브 카렐이란 배우의 장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인할 없다. 상황과 역설적인 진지함을 유지하는 그의 포커페이스는 < 스마트> 웃음을 매개하고 촉매한다. 또한 8등신 S라인을 자랑하는 미모의 첩보원 에이전트 99 연기하는 헤서웨이 역시 역설적인 개그에 추임새를 넣으며 한몫 거든다. 이미지를 배반하는 배우들의 캐릭터 접근은 < 스마트> 웃음을 유발시키는 훌륭한 성과다.

<
스마트> 원작 TV시리즈의 틀을 이어받았으되, 현대적으로 각색된 것이다. 이는 작품의 시대적 거리가 무려 반세기만큼이나 너비를 탓에 있다. 핸드폰이 일상화되고, 컴퓨터가 일반화된 21세기 첨단 시대에서 1960년대 TV시리즈가 펼쳐내던 첨단의 상상력은 지나치게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물론 오프닝의 자동문 시퀀스를 비롯해 방음장치(Corn of Silence) 에피소드와 오리지널 시리즈에서 등장했던 자동차와 구두폰까지, < 스마트>에는 원작의 특성을 대표할만한 설정들이 고스란히 장착됐다. 하지만 두드러지는 캐릭터의 특성변화는 원작과의 차이를 발생시킨다. 자신의 이름과 반대로 '스마트'하지 않았던 원작의 스마트와 달리 영화의 스마트는 엉뚱하긴 하지만 나름 민첩하고 영리하다. 결국 원작에서 스마트의 뒤처리를 담당하며 조화를 이루던 뛰어난 요원 에이전트 99와의 캐릭터 조합은 애매한 모양새를 취한다. 또한 단순히 코믹한 설정의 배경처럼 따라붙는 악당 조직 카오스의 존재감 역시도 안이하게 묘사됨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반감시키는 인상이다.

순간마다 웃음을 유발하는 순발력은 존재하지만 응집력 있는 폭발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 스마트> 단점이다. 웃음을 유발하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발견되지만 그것을 마음 편하게 받아들일 없다는 것도 아쉽다. 유치하지만 직설적인 슬랩스틱과 언어유희적 노력은 때때로 의도와 달리 지나치게 만연되어 되려 썰렁함을 낳는다. 이는 순간적인 설정을 중시했으나 전체적인 맥락이 지나치게 간과된 까닭이다. 물론 설정의 묘미가 < 스마트>에서는 중요했으며 이야기의 논리가 중시될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국내관객을 배려한 자막은 상황보다 박자 먼저 치고 들어오는 까닭에 웃음의 타이밍을 어색하게 빼앗아간다. 미사여구의 목록은 화려한데 좀처럼 정곡을 찌르지 못하는 < 스마트> 유머는 결국 끝맛이 떨떠름한 웃음으로 거듭될 따름이다.


(씨네서울)
Posted by 민용준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실 순차적으로 따지자면 <공공의 적 3>에 해당한다. 하지만 <강철중: 공공의 적 1-1>(이하, <강철중>)이 본래 타이틀 대신, ‘강철중’이란 캐릭터의 네임밸류를 앞세우고 ‘1-1’이란 번거로운 순번을 꼬리에 붙인 건 다름아닌 캐릭터의 정체성을 복구시키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이틀로 전면에 내세운 ‘강철중’은 그 앞에 ‘원조’라는 단어를 연상시킨다. ‘1-1’이라는 순번이 붙은 부제는 전작인 <공공의 적 2>를 시리즈로부터 분가시키는 동시에 <공공의 적>으로 돌아가 가문을 재건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강철중>이 ‘공공의 적 1-1’이 된 사연은 이렇다. 결국 <강철중>은 <공공의 적>이란 브랜드를 재건하는 작업이다. 무리한 확장사업으로 인해 훼손된 캐릭터의 정체성을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다. 동시에 <강철중>은 동어반복의 함정에서 탈피해야 한다. 가문의 정통성을 계승하되, 개별적인 존재의미를 확보하는 것은 속편이 맞이해야 할 숙명과도 같기 때문이다.

<강철중>에 주목할만한 점은 설경구의 출연, 강우석 감독의 연출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장진 감독이 시나리오를 완성했다는 점이다. 덕분에 <강철중>에서는 장진 감독 특유의 촌철살인적인 대사들이 4열 종대 앉아 번호로 연병장 2바퀴만큼은 아니지만 드물지 않게 눈에 띤다. 또한 강철중과 상대하는 이원술(정재영) 역시 전작에서 등장한 악인 캐릭터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 조규환(이성재)과 한상우(정준호)가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절대 악인으로써 강철중과 대척점에 놓였다면 이원술은 전자들에 비해 인간적인 냄새를 풍긴다. 물론 그는 고등학생에게 태연하게 칼을 쥐어주는 악인이긴 하지만 조직적 의리를 중시하고, 자가수성적 대범함을 갖추고 있으며, 가족적 자상함마저 갖추고 있다. 강철중을 주목하게 만들던 전작의 단선적인 악인들에 비해 이원술은 좀 더 입체적인 선을 지닌 캐릭터로 완성됐다.

동시에 <강철중>의 강철중은 <공공의 적>의 강철중에 비해 성장했다. 물론 그는 여전히 양아치만큼 껄렁껄렁하고 애처럼 멋대로이며 손발이 자동 반사되는 폭력적 습관도 여전하다. 그러나 자신의 철없음을 타이를 수 있을 만큼 똑똑하게 성장한 딸이 있고, 15년 차 경찰 공무원 월급으로 좀처럼 해소되지 못하는 빈곤한 현실적 고민에 사로잡혀 있다. 게다가 세월에 장사 없듯, 나이를 먹어서인지도 모르지만 <강철중>에서 강철중은 철없이 막무가내이던 <공공의 적>시절에 비해 성숙한 인상을 준다. 문제는 그 지점에 있다. 위트가 감소한 강철중 앞에 인간적 매력을 갖춘 악인 이원술을 대립시키면서 캐릭터 구도가 종종 역전되는 뉘앙스를 준다는 것. 사실 <공공의 적>에서 강철중이 조규환을-<공공의 적 2>는 논외로 치고- 미치도록 잡고 싶어한 건 강철중이 정의에 목숨 거는 인간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조규환이 인간적으로 혐오스러운 인면수심의 탈을 쓴 악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원술은 여러모로 매력적인 악인이다. 특히 그가 사시미 하나를 쥐고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그 두목(문성근)과 담판을 짓고 나오는 장면은 인상적인 카리스마가 구사되고 인간적인 유머까지 겸비한다.

단선적이던 캐릭터 나열방식에 불분명한 혼선이 발생했다. 강철중은 강우석 감독의 것이지만 이원술은 분명 장진 감독의 것에 가깝다. 결국 두 감독의 조합은 시너지 효과를 발생시키기도 하지만 쉽게 융합하지 못하고 겉도는 위트에 도취되기도 한다. 수위가 넘칠 것 같은 웃음의 타이밍에 좀처럼 쉽게 반응할 수 없는 건 융합될 수 없는 스타일의 간극 때문이다. 선이 굵고 묵직한 강우석 감독의 판을 지탱하기엔 장진 감독의 스타일은 가볍게 들뜬다. 동시에 캐릭터의 대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공공의 적>의 단선적 관계는 공익적인 메시지를 얹으며 다소 번거로워졌다. 학교 폭력과 청소년 문제에 관여하는 조폭들의 실상을 그리는 <강철중>은 누가 봐도 공익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게다가 그 안에는 작게는 상도덕의 윤리부터, 크게는 기업의 경영 윤리가, 게다가 대한민국의 조직적 위계질서에 대한 풍자까지, 넓은 현실관념의 메시지가 펼쳐져 있다. 문제는 이런 측면들이 더더욱 <강철중>을 경직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장진 감독의 유머가 녹아 들지 못하는 것도 이 심각한 사안들이 주제의식과 무관하게 극적인 유연성을 방해하는데 있다.

결과적으로 <강철중>은 ‘<공공의 적> 혹은 강철중 리턴즈’라 명명돼도 상관없는 작품이다. 하는 꼴을 봐서는 깡패인지 형사인지 구분하기 힘들 것처럼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던 강력계 형사 강철중에게 호감을 보였던 이라면, 게다가 양복 차려 입은 검사 강철중이 정의를 주창하던 경직된 모습에 뻣뻣해진 뒷목을 주무르던 이에겐 더더욱 반가운 사실일 수도 있다 게다가 오리지널 <공공의 적>을 계승하는 만큼 본래 <공공의 적>을 채우던 캐릭터들도 고스란히 돌아왔다. 삼류양아치였던 산수(이문식)는 강철중 덕분에 학교(!)에 다녀온 뒤, 유흥업으로 성공해 외제차를 몰고 다니고 칼잡이 용만(유해진)도 정육점을 운영하며 건실하게 살고 있다. 또한 강철중과 애증을 나누는 엄 반장(강신일)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공공의 적>의 중요한 관점포인트가 다양한 조연 캐릭터들을 통해 얻어지는 굵직한 재미였음을 간과하지 않았다는 점은 <강철중>의 장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강철중은 서민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한국형 안티히어로에 가깝다. 그가 상대하는 악인은 언제나 부자이며 그들은 하나같이 비열하다. 게다가 강철중은 가난하고, 심하게 강직하지 않다. 계급적 정체성에 대한 풍자가 막연한 단상처럼 녹아있는 강철중은 분명 대한민국 서민들을 통감시킬 만한 자의식을 걸치고 있다. 게다가 그의 공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향하기 보단 아래에서 위를 향한다. ‘형이 돈이 없다 그래서 패고, 말 안 듣는다 그래서 패고, 어떤 새끼는 얼굴이 기분 나빠, 그래서 패고, 그렇게 형한테 맞은 애들이 4열 종대 앉아 번호로 연병장 2바퀴다.’ 다소 길지만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내뱉는 강철중의 대사는 결코 선한 이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사회를 부패시키고, 이를 좀먹고 자라는 무리들을 향해 그는 주먹을 날리고 맞짱을 뜬다. <공공의 적> 그리고 <강철중>에 어떤 쾌감을 느낀다면 분명 이 때문이다. 게다가 권력친화적이고 부에 관대한 대한민국의 알량한 공권력과 달리 강철중은 공권력의 허울을 벗어 던지고 허구적이지만 실존적인 심판을 몸소 실천한다. <강철중>에 호감을 부여할만한 요인은 영화 외적인 환경에서 기인하는 바도 (분명) 존재한다. 게다가 미국산쇠고기 수입으로 인한 ‘광우병’ 위협에 시달리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본의 아니게) 시의 적절한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형제지간 이라 말하기보단 이란성 쌍둥이라고 말하는 게 적확하다. <인크레더블>은 이안 감독의 <헐크>로부터 잉태된 작품이 아니다. <헐크>는 이안 감독의 야심으로 인해 원작이 변주된 사례지만 <인크레더블>은 마블 코믹스가 본래 지향했던 코믹스의 원천적인 야심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두 작품은 모태가 같을 뿐, 지향하는 형태가 다르다. 이안 감독의 <헐크>가 변화구였다면 <인크레더블 헐크>(이하, <인크레더블>)는 직구다.

<인크레더블>의 도입부는 자만이라기보단 자신감에 가깝다. 미국 정부 산하의 실험을 돕던 브루스 배너(에드워드 노튼) 박사가 실험 중 사고로 감마선에 과잉 노출된 뒤 헐크로 변하게 됐다는 캐릭터의 탄생비화를 개괄적인 방식으로 간략하게 집약하는 <인크레더블>의 오프닝 시퀀스는 <헐크>와 또 다른 개별적 자아를 증명하려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전자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동시에 어필한다. 또한 이는 <인크레더블>(을 자체 제작한 ‘마블’)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헐크’라는 캐릭터의 유명세에 자신감을 표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으론 1977년 이래로 여러 번에 걸쳐 TV시리즈로 극화되고 2003년에 이미 한차례 스크린판이 제작된 마당에 이 캐릭터의 전사를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제작진의 자기진단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됐건 <인크레더블>의 오프닝 시퀀스는 도전적이지만 합리적인 방식으로 서사의 너비를 좁히고 묘사의 영역을 넓히는데 기여하며 <인크레더블>의 목표의식에 확고하게 접근한다. 원작의 제목을 고스란히 영화의 타이틀로 오려 붙인 <인크레더블>은 이미지에 충실한 작품이다. 원작에 비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고뇌를 짊어진 영화는 지극히 기본적인 서사의 골격에 근육질 이미지를 키우는데 주력한다. 대부분의 안티히어로 무비의 선례처럼 <인크레더블>에서도 주인공을 위기로 몰아넣을만큼 막강한 적, 어보미네이션이 등장하고 <인크레더블>의 헐크는 그와 격렬하게 싸우는 지점에서 클라이막스를 찍는다.-이 점은 이안 감독의 <헐크>와 가장 큰 차이이기도 하다.-

게다가 <인크레더블>은 근래 다양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을 통해 전시된 액션 시퀀스 이미지를 대거 포용한다. 극 초반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골목과 옥상에서 펼쳐지는 브루스 배너와 미정부군의 추격씬은 <본 얼티메이텀>의 도심 추격씬을 떠올리게 하고 후반부, 뉴욕 시가지에서 등장한 어보미네이션을 쫓는 카메라 앵글은 캠코더 버전의 <클로버필드>처럼 대상을 과감히 비추지 못하며 어지럽게 흔들린다. 게다가 헐크와 어보미네이션의 도심격투씬은 <아이언맨>처럼 날렵하고 <트랜스포머>만큼 육중하다. 물론 <인크레더블>은 <헐크>와 마찬가지로 CG로 완성한 거대한 녹색괴물의 이미지를 이용해 탱크를 때려부수고 헬기마저도 박살낸다.

감정적 내러티브도 중시된다. 통제불능의 괴물로 변모했지만 자신의 연인을 보호하고자 사력을 다하는 헐크의 헌신적인 순정. 이는 <킹콩>과 비슷한 감수성을 유발한다. 흉폭한 폭력성을 표출하던 헐크가 자신이 사모하는 여인 앞에서 온순한 강아지처럼 선량한 눈빛을 내보이는 장면은 묘한 감동을 준다. 제어가 불가능해 보이는 광폭한 초인적 자아를 막아서는 강건한 로맨스는 <인크레더블>에 낭만적 감수성을 부여한다. 다만 그 낭만이 영화를 지배하던 <킹콩>에 비해 <인크레더블>의 그것은 장치적 효과로 작동되는 것이다. 그 감수성은 본격적인 액션의 스케일을 광역화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이는 결국 <인크레더블>이 <킹콩>과 비슷한 방식으로 감정적 내러티브를 형성하지만 그에 비해 구도는 빈약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크레더블>은 철저하게 자신의 존재적 의미를 캐릭터가 지닌 파괴력 안에 귀속시킨다. 헐크라는 내면적 자아로 인해 고통 받던 브루스 배너에 방점을 찍었던 이안의 <헐크>와 달리 <인크레더블>은 그 자아로 인해 고통 받던 브루스 배너에게 그 흉폭한 내면을 제어할 수 있는 자각적 능력을 끝내 부여한다. 이는 결국 <인크레더블>은 ‘헐크’에 방점을 찍는 영화라는 것이다. 그만큼 극적 스케일과 시퀀스의 스타일이 중시되고 내면적 갈등보단 외면적 격돌이 중시된다. 그 지점에서 <인크레더블>의 호불호는 갈릴 공산이 크다. 어쩌면 <인크레더블>은 이안 감독의 실험소재로 활용됐던 ‘헐크’라는 기자재를 더욱 제 모습에 가깝게 활용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이언맨>에 이어 자가생산한 원작모델의 영화화 작업을 외주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스크린에 이미지를 재생시킨 마블 코믹스는 <아이언맨>에 이어 자신들의 본질에 가까운 영화적 작업을 또 한번 완성했다. 게다가 극의 말미에 이르면 알겠지만 (현재 수많은 관람자들이 유포하기도 한 것처럼) 최근 화제가 됐던 동류 블록버스터의 인물이 출연한다. 게다가 마블 코믹스에서 마블 엔터테인먼트로 발돋움한 <인크레더블> 제작진의 야심을 선전포고하듯 드러내는 지점이라 더욱 흥미롭다. 힌트를 하자 주자면 마블 엔터테인먼트에서 <인크레더블> 이전에 제작한 영화는 당신도 알겠지만 <아이언맨>이다. 아무래도 몇 년 후에 우리는 ‘쉴드’의 정체를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유명 안티히어로들의 연합과 격돌까지도.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부엌은 비좁아도 상관없지만 옷장만큼은 넓어야 한다는 캐리(사라 제시카 파거)의 마놀로 블라닉 구두는 <섹스 앤 더 시티>(이하, <섹스&시티>)에 대한 기호를 파악하는 기준과도 같다. 그 누군가에게 호가의 사치품으로 인식될만한 마놀로 블라닉 구두는 <섹스&시티>의 캐리에겐 필연적 기호다. 그 기호에 대한 수긍과 부정은 <섹스&시티>를 뉴요커에 대한 환상과 된장녀에 대한 질시로 구분하는 척도로 작동한다.

<섹스&시티>는 그녀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는 것이다. 섹스 칼럼니스트 캐리와 그녀의 친구들, 미란다(신시아 닉슨)와 샬롯(크리스틴 데이비스), 사만다(킴 캐트럴)의 노골적인 성담론과 진솔한 경험담으로 발췌되고 집약되는 뉴욕 커리어우먼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6시즌의 대장정으로 진열한 TV시리즈 <섹스&시티>는 그에 대한 열광과 혐오를 통해 대중들의 관심사를 얻었다. 하지만 속물적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사소한 일상을 여백 없이 배치하며 그에 담긴 의미를 자문하는 <섹스&시티>의 미덕은 분명 그로부터 축적된 삶으로부터 진솔한 답변을 얻고 삶의 경지를 터득한다는 점에 있다. <섹스&시티>를 둘러싼 취향의 잡음은 섹스와 시티의 표면과 내면, 그 어느 쪽을 인정하느냐에 달렸다.

극장판으로 버전업 된 <섹스&시티>는 말줄임표처럼 늘어뜨려진 채 여운을 남긴 TV시리즈의 에필로그와 같다. 혹은 시즌6을 잇는 시즌7의 2시간 분량 압축이라 해도 무방하다. 게다가 TV시리즈와 극장판 사이에 놓인 3년간의 공백을 콜라주 영상으로 간략히 정리해주는 영화의 도입부는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직장과 가정 생활로 바쁘게 지내는 미란다와 불임으로 고생하다 중국에서 입양한 딸과 함께 행복한 가정생활을 누리는 샬롯, 그리고 누구보다도 성적 유희에 충실했던 사만다가 배우로 일하는 연하애인과 할리우드에서 동거 중이란 사실을, 그리고 TV시리즈의 긴 에피소드 속에서 끈질기게 이별과 재회를 거듭하던 빅(크리스 노스)과 캐리가 다시 열애 중임을 캐리의 자전적 내레이션으로 총망라한다.

극장판의 형식은 TV시리즈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캐리의 내레이션을 통해 던져지는 인생과 사랑에 얽힌 물음은 시크한 도시적 취향으로 포장되고 은밀한 성적 담론을 여과 없이 나누는 네 여성의 솔직한 대화와 주변 경험을 거쳐 역시 캐리의 음성으로 답변된다. 다만 2시간 여의 러닝타임으로 이뤄진 영화적 규격에 맞춰 TV시리즈의 리모델링이 불가피했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극장판은 빅과 재회한 캐리의 에피소드를 축으로 그녀의 세 친구들의 사연을 주변부에 고르게 배치한다. 이는 매회마다 중심인물을 바꾸며 그로 인해 발견된 명확한 주제의식으로 끝을 맺던 TV시리즈와의 차이라 할만하다. 이런 면에서 극장판 <섹스&시티>는 TV시리즈의 오랜 목차에 연연하거나 그에 대해 민감하게 의문을 품지 않는 이에겐 무난한 로맨틱 코미디 정도로 관람해도 무방할 만큼 평이한 구성으로 완성됐다. 특히나 ‘색칠(coloring)’이란 단어로써 이뤄지는 그녀들의 섹스토크는 TV시리즈만큼 노골적이진 못하지만 시리즈의 위상을 각인시킬 만큼 발칙한 웃음을 제공한다.

하지만 극장판은 되려 기존의 TV시리즈에 팬덤을 지녔던 이에게 또 한번의 지루한 동어반복으로 여겨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캐리와 빅의 지긋지긋한 구간반복 로맨스는 또 한번 열애와 파탄을 오가고, 그 안에서 캐리의 좌절과 극복 역시 또 한번 반복된다. 게다가 자신들의 배우자 혹은 애인에게 종종 불안감을 조성하는 여성들의 히스테리나 스스로 자책할 만큼 후회할 짓을 반복하는-특히 빅!- 남성들의 답답한 소심증은 극장판의 도처에 깔려있다. 이는 한 인물을 축으로 단락적인 에피소드에 집중한 TV시리즈의 에피소드를 매회 보는 것과 달리 극장판이 네 인물의 전반적인 사연을 한 시즌을 전방위적으로 구성했다는 점에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차이이며 극장판이 감수해야 할 당위과제처럼 보인다. 게다가 간결한 에피소드 안에서 순발력 있게 구성된 사연들의 재미에 비해 긴 러닝타임만큼이나 극장판은 지나치게 호흡이 긴 인상을 주며 사연 속에 농축된 성찰의 깊이도 분산되는 에피소드 속에서 다소 밋밋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섹스&시티>극장판은 개별적 완성도 여부를 따지기 전에 시리즈의 서비스 정신을 높게 사는 편이 더 온당해 보인다. 화려한 패션에 열광하고, 개방적인 취향에 수긍하고, 뜨거운 사랑을 열망하면서, 서로의 우정을 중시하는 그녀들의 20여 년간의 뉴욕 연대기가 7년 동안 6시즌으로 지속될 수 있었던 건 이 시리즈의 매력이 그만큼 유지된 까닭이기도 하거니와 그녀들을 향한 팬덤이 그만큼 지속됐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만약 당신이 이 시리즈에 깊은 호감을 지닌 이라면 결말부에 이르러 그 지지부진한 연애에 확실한 종지부를 찍는 캐리의 모습에 감정이입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캐리가 자신이 처음 뉴욕에 입성했던 20년 전을 회상하는 것처럼 당신도 언젠가 과거 스스로를 회상할 때 즈음, 이 시리즈를 회상할 것이다. 단지 캐리의 마놀로 블라닉을 흠모했건, 캐리의 내레이션에 담긴 예리한 경험적 성찰에 공감했건 간에 <섹스&시티>극장판은 그녀들의 네버 엔딩 스토리를 꿈꾸는 이들에 대한 무한한 보답과도 같다. 마흔을 자축하는 그녀들의 사연이 거듭 재생되지 않아도 팬심은 계속된다. 그리고 <섹스&시티>극장판은 분명 그 추억을 한 뼘 자라게 해줄 만한 요량은 된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재테크를 위한 투자로 탕진을 거듭하다 남편과 이혼하고 딸의 양육권마저 빼앗긴 미경(김선아)은 봉순(이경실)과 이만(나문희), 은지(고준희)와 이웃이자 같은 곗돈을 넣는 사이다. 그런데 그들의 계주였던 미용실 원장 성혜란(임지은)이 곗돈을 들고 튀었다. 게다가 남편 없이 두 아이를 키우는 봉순은 아들의 수술비를 곗돈으로 충당하려던 차에 충격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결국 그들은 함께 곗돈을 찾아 떠난다. 단지 곗돈을 들고 달아난 성혜란이 잘 간다는 미사리의 카페를 향해서 무작정 간다.

 

곗돈 떼인 아줌마들의 억척스런 고군분투를 담고 있는 이 영화가 <걸스카우트>라는 제목을 달게 된 건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별반 까닭 없다. 게다가 그녀들은 (girl)’이라 불릴만한 이들도 아니다. 물론 그것이 (역시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영화와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니다. 단지 그녀들의 연대가 어떤 조직적 슬로건을 머리말로 삼기엔 그리 조직적인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곗돈을 떼먹고 달아난 이들을 찾기 위해 막연한 단서 하나만 믿고 뭉친 것에 불과하다. 그 와중에 그녀들은 걸스카우트란 이름으로 자신들을 지칭하게 된 것뿐이다. 결국 <걸스카우트>에서 걸스카우트는 별반 의미 없음을 통해 그 연대의 가치를 재생산한다. 제 각각의 사연을 통해 여자란 이름을 잃어버리고 아줌마로써 억척같이 살아가야 하는 그녀들의 환경을 환기시키고 그 연대에 필연적 의미를 부여하게 한다.

 

20대인 은지를 제외한 30대 미경과 40대 봉순, 60대 이만은 각각 아줌마라고 불리는 여성이다. 억척스럽게 살아가던 그녀들에게 여자로써의 정체성은 아줌마의 삶에 매몰된다. 게다가 20대인 은지마저 죽은 아버지가 남긴 사채 빚을 떠안으며 빚 독촉에 시달린다. 그녀들을 괴롭히는 건 치열한 자본주의적 살풍경이다. 게다가 매번 재테크를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던 미경은 곗돈마저 떼이고, 망나니 같은 아들의 박대 속에서 숨죽이고 살아가는 이만도 삶이 순탄치 않다. <걸스카우트>는 이토록 삶이 만만치 않은 여성들을 한데 모으며 그들을 자연스럽게 연대시킨다. 고단한 삶에 억매인 그녀들은 세대차이를 뛰어넘어 여성이라는 굴레로 얽힌 사연 아래 정렬한다.

 

<걸스카우트>는 여성의 연대를 남성에 대한 적대감 혹은 열등감의 반대급부로써 배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연상시킬만한 것이기도 하다. 아줌마라는 이름 안에서 그녀들은 억척스럽지만 어머니란 이름 안에서 그녀들은 강인해진다. 삶의 피로를 남성에게 떠안길 수 없는 생계의 주체라는 점에서 그녀들은 고단하지만 굳세다. 나약한 여성상을 넘어 아줌마의 탈을 쓴 어머니의 강인한 모성을 두른 <걸스카우트>는 여성을 남성의 대리적 자아로 배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평가될만하다. 

 

각각의 캐릭터에 집중하던 영화는 중반부로 넘어가는 동시에 긴박한 추격전으로 양상을 달리하며 호흡을 조절한다. 쫓고 쫓기는 활극 속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우여곡절은 매 순간 반전을 발생시키며 유연한 이야기적 묘미를 발생시킨다. 게다가 스타일리쉬한 화면전환과 재치 있는 상황 설정은 나름대로 특별한 감상을 남긴다. 물론 한바탕 시끄럽게 몰아치던 이야기가 다소 허탈하게 내려앉는 결말부는 진부한 감이 없진 않지만 그 말미에서 등장하는 풀스윙 이미지마저도 나름 구도가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도 억척스럽지만 살가운, 아줌마와 어머니라는 여성의 양면성을 통쾌하면서도 가볍지 않게 그려낸다는 점은 <걸스카우트>가 지닌 가장 큰 미덕이다. 이는 동시에 자신의 캐릭터를 진심으로 이해하려 노력했을 여배우들의 고군분투가 일군 성과이기도 할 것이다.

(씨네서울)
Posted by 민용준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삿갓을 쓴 팬더가 날렵하게 날아올라 적들을 제압한다. 다양한 초식에서 비롯되는 일격필살에 벌떼처럼 날아들던 적들이 죄다 꼬꾸라진다. 하늘을 날아오르는 묵직한 팬더의 현란한 몸놀림. 하지만 그것은 팬더의 백일몽에 불과하다. 눈을 비비고 잠에서 깬 팬더는 비좁은 방에서 몸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로 뒤뚱거릴 따름이다. 그리곤 언제나처럼 어울리지 않게 작은 앞치마를 몸에 두르고 대를 걸쳐 이어온 아버지의 국수가게에서 국수를 나르고 배달한다. 그렇게 몸은 국수를 말고 있지만 마음은 쿵푸에 꽂힌 팬더는 결국 아버지의 희망을 배반하고 쿵푸대회가 열리는 시합장으로 계단을 오른다.

<쿵푸팬더>의 스토리텔링은 명백하게 상투적이다. 권선징악과 성장스토리의 데코레이션을 얹은 비만팬더의 쿵푸 도전기는 분명 지극히 상투적이라 지적할만한 내러티브를 지녔음에도 그것을 간과하게 만든다. 복부비만(?)으로 계단조차 힘겹게 오르는 팬더 포(잭 블랙)가 전설적인 쿵푸 후계자로 선정되어 그토록 갈망하던 쿵푸를 익히게 된다는 설정이 작위적인 우연에 기대고 있음에도 이는 <쿵푸팬더>를 폄하하는 요인이 되지 않는다. 왜냐면 <쿵푸팬더>가 관객의 이목을 끌기 위해 동원한 전략적 방점은 캐릭터와 설정의 묘미에 찍혀있기 때문이다.

<쿵푸팬더>는 지극히 단순한 스토리를 훌륭한 창조력으로 돌파하며 유희적인 소임을 다한다. 살집만큼이나 넉살이 풍부한 포를 비롯해 동물을 응용한 쿵푸 초식-호권, 후(원숭이)권, 사권, 학권, 당랑권-을 상징적 캐릭터로 배양한 직설적인 캐릭터 등 외모부터 성격까지 다양하고 뚜렷한 캐릭터들은 단순한 이야기에 풍부한 감성을 주입한다. 무엇보다도 경쾌하고 귀여운 위트로 무장한 비만팬더의 포는 <쿵푸팬더>의 유희 그 자체를 온몸으로 작동시킨다. 그저 표정만 봐도 희극을 기대하게 만드는 팬더 포의 미워할 수 없는 능청스러움은 잭 블랙의 탁월한 목소리 연기와 맞붙어 완벽한 시너지 효과를 발생시킨다. 특히 식탐이 강한 포가 <스타워즈>시리즈의 요다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너구리 쿵푸스승 시푸(더스틴 호프만)의 만두 수련(?)을 거치는 장면은 캐릭터의 대비를 극대화시키고 그 성격까지 영리하게 반영시킨 시퀀스를 연출함으로써 명백한 웃음을 선사한다. 특히나 슬로 모션을 응용한 몇몇 장면은 특별한 웃음을 제공한다.

권선징악으로 치장한 무한도전 성공담은 닳고 닳은 초식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쿵푸팬더>는 잘 만든 캐릭터 하나 열 배우 안 부럽다는 애니메이션의 기본기가 단단하다. 쿵푸팬더 포를 비롯한 창조적 캐릭터들을 통해 다양성의 이미지를 확보하고, 이로부터 유희의 절대적 내공을 끌어내는 <쿵푸팬더>는 단연 신나고 군더더기 없이 즐거운 오락적 묘미를 제공한다. 게다가 제 각각의 캐릭터와 절묘하게 부합되는 이미지의 배우들이 목소리를 통해 생동감을 더하며 캐릭터적 이미지에 설득력까지 더한다. 이는 뛰어난 세공력을 바탕으로 실사와 다를 바 없는 이미지를 통해 현실을 만화적으로 재생산해내는 기술력도 중요하지만 단출하면서도 뛰어난 아이디어와 창조적 마인드가 얼마나 큰 부가가치를 발생시키는지를 증명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물론 다가올 베이징 올림픽에 발맞춰 쿵푸와 팬더를 결합한 드림웍스의 전략은 그 자체로 속물적인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쿵푸팬더>는 그런 의심 따위는 거둬도 될 만큼 시종일관 유쾌하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

류덕환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6:05
사용자 삽입 이미지

누가 여우니까 조심하라더라.
나를? 왜지? 그런데 사실 그런 말은 많이 듣긴 했다. 여우 같다고. (웃음)

어쨌든 <우리동네>를 보고 나서 그런지 지금 마치 가면을 쓴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 같다. 평범한 외모가 오히려 가면처럼 느껴진다고 할까.
솔직히 지금같이 인터뷰하는 것처럼 내가 비쥬얼적으로 보여질 때만큼은 개인적으로 꾸미려고 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영화상 캐릭터로 류덕환을 보자면 특정하게 뭔가 떠오르는 게 없다는 게 내겐 조금 더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림그릴 때 검은 종이에 그리는 것보다 하얀 종이에 그리는 게 더 그림이 잘 나오는 것처럼. 어떻게 보면 메리트가 없는 게 단점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캐릭터를 잡거나 이런 부분들에서는 가끔 도움이 될 때가 있고 남들보다 접근이 더 쉬울 때도 있다. 물론 항상 쉬운 건 아니겠지만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내가 다른 사람들보단 조금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천하장사 마돈나>(이하, <마돈나>)의 동구처럼 <우리동네>의 효이같은 경우도 연기 이전에 캐릭터를 위한 어떤 준비가 필요했을 것 같다.
일단 <마돈나>때는 촬영 들어가기 전부터 감독님들과 약속을 했던 것처럼 살을 찌우는 게 일단 목표였고, 그 다음에 씨름을 익히고 트랜스젠더 분들을 만나면서 그들만의 여성적인 감성을 찾아내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동네>같은 경우는 뭔가 자꾸 따라 하고 싶지가 않았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싸이코패스들을 따라 하기 보다는 내 것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보편적인 모양새까지 무시할 순 없었을 텐데.
물론 그걸 만든다는 게 쉽지 않을뿐더러 대중성도 무시하면 안 된다. 내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내 나름대로의 싸이코패스를 했는데 관객들은 ‘저건 싸이코패스가 아니잖아’ 라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대중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외부적으로 보여지는 면에서는 분명히 싸이코패스적인 어떤 성격이나 표정, 행동 같은 것들이 나와야 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그런 걸 준비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효이라는 인물을 내면적으로 들여다봤을 때, 그의 성장 배경이나 어떤 전사(前史)들을 내 나름대로 조금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기존의 싸이코패스와 다른 점이 있다면 효이에겐 분명히 나름대로의 어떤 아픔이나 슬픔, 기쁨 같은 감정이 있다는 거, 태어났을 때부터 싸이코가 아니란 거다. 분명히 성장환경에 대한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 자극을 받았던 이유가 컸지.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나쁜 놈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싸이코패스라기 보단 손가락질했다가도 그 아픔이 어느 정도 이해되고 공감 받을 수 있는 싸이코패스가 되길 원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예전에 초등학생이 할머니를 망치로 때려죽이고 나서 그게 잘못된 건지 모르더라는 사건 기사를 접했을 때의 묘한 감정이 생각나기도 한다.
효이가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그게 나쁘다고 생각을 안 하는 것에 대한 아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했을 때 그에게는 아픔인 셈이지. 그 아픔을 같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싸이코패스로 비춰졌으면 하는 바람이 컸던 거 같다.

항상 캐릭터를 준비하면서 자신만의 시나리오를 쓴다고 들었다. 효이의 시나리오도 썼나?
사실 효이란 인물에 대해선 쓸 수 없었다. 예전 같은 경우는 내 나름대로 그런 것들을 써나가고 그랬었는데 <우리동네>는 효이가 왜 이런 아픔을 가질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성장 배경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 인물이 어떠한 상황에서 자랐는가에 대한 것들을 내가 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단지 정할 수 있었던 건 효이에게 어떤 아픔이 있었을지, 그리고 왜 그래야만 했는지, 그리고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그게 전혀 악이라는 걸 모르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심정적 근거들, 그런 것들만 내가 정할 수 있었지, 얘가 어떻게 자랐고, 어릴 때는 어땠고, 누구와 만났고, 그런 것들을 내가 정할 수 없었다. 이미 시나리오상에 그런 다이어리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감히 그렇게 건드리는 걸 차마 할 수 없었던 거다.

이미 인과관계가 시나리오에 명백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사실 효이라는 인물의 정체를 감춰서 반전의 효과로 이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동네>는 이미 누가 범인인지를 알고 보게 된다. 이럴 경우에 영화의 스토리가 맡아도 될 몫을 배우가 떠맡아야 한다. 결국 <우리동네>는 배우에게 부담이 큰 작품이라고 생각되는데 본인은 어땠나?
난 항상 부담이 커야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조금씩 커지는 거 같다. 그 부담감 때문에 계속 파고들려는 집요함이 생겨서 더욱 노력을 하게 된다고 할까.

그렇다면 본인에게 <우리동네>는 좋은 자극이 됐을 것 같다. 그런데 범인이 누군지 알고 가는 상황에서 장르적 긴장감은 많이 떨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 역시 부담되지 않았나?
<우리동네>같은 경우는 방금 말한 것처럼 범인이 누군지 이미 밝히고 가는 상황이기 때문에 보기 전에 긴장감이 없지 않을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누가 살인을 저질렀고, 누가 범인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들이 왜 이래야 했고, 왜 이렇게 상황이 전개가 되느냐가 <우리동네>에선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다. 영화를 보면서도 누가 범인일까에 치중을 하는 기존의 스릴러 영화들과는 다르게 <우리동네>는 이 두 사람의 결말이 어떻게 끝날 것이며, 세 사람의 감정관계나 인과관계가 어떻게 엮이는지, 그 매듭이 도대체 어떻게 풀릴까에 더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긴장감이 중요했다. 솔직히 난 효이가 어디서 어떻게 살인을 저지를까, 여기서 누가 죽을 거 같다는 식의 긴장감에 그렇게 큰 비중을 두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오히려 비중을 두고 싶었던 건 인물간의 갈등과 관계가 어떻게 풀리고,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가는가라는 것들이었다.

효이는 사악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순수한 존재다. 너무나 순수해서 사악한 거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양면적 성향을 동시에 표현해야 한다는 것도 고민이었을 것 같다.
난 그게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누군가의 힘을 빌렸다.

누구 말인가?
그게 그 아역 친구다. 왜냐면 사실 내 능력이 좀 더 좋았다면 현재의 효이를 통해 내가 직접 그런 것들을 보여줬어야 되는데 난 거기까진 능력이 안되기 때문에 그 아역친구의 도움을 빌렸다. 영화상에서 아역 친구의 분량이 많진 않지만 꽤나 임팩트가 있다. 아역 비중에서 그 아이의 순수함과 살의를 갖게 된 동기 같은 것들이 모두 밝혀지기 때문에, 그 친구의 씬이 없었다면 내가 그렇게 효이라는 캐릭터의 양면성을 뚜렷하게 보여줄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류덕환의 새로운 발견이라는 말도 듣지 못했을 거다.(웃음) 그 친구(아역 시절의 효이)가 없었다면. 물론 떡볶이 집에서의 순수한 청년의 이미지 같은 것들도 있었지만 그건 어떻게 봤던지 간에 단면성이니까, 이 아이가 왜 아픔도 없고 살인을 저질러야 했는가의 동기는 내가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는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친구에게 더 의지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친구 덕분에 양면성이 또렷해졌다고 생각한다. 일전에 청룡영화제 때, 황정민 선배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밥상은 남들이 다 차려놨는데 스포트라이트는 내가 다 받는다고, 그거랑 비슷한 얘기다. 나도 다른 배우가 있었기에 그렇게 주목 받은 것뿐이지, 난 내가 혼자 다 했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럼 결국 <우리동네>에서 류덕환의 밥상은 어린 효이가 고양이 목을 비틀 때 다 차려진 건가? (웃음)
내가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도 나오지만 그렇게 살인을 저지르는 긴장감의 출발점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거지. 외로울 때 항상 자기 곁에 있었던 고양이가 자기 손에 쥐어져 있었고 그 고양이를 죽였는데 이상하게 불쌍하지도 않고, 밉지도 않고, 자기가 무섭지도 않고, 그냥 단순한 쾌감, 혹은 그에 대한 어떤 즐거움만 있으니까. 그런 씬을 보여줬기 때문에 그 이후에 효이의 어떤 행동들이나 그런 사건들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관객들이 공감하게 되는 거라고 난 생각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선균이나 오만석 같은 배우들의 안정적인 서포트가 효이란 캐릭터를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건 아닐까.
일단 만석이형과 저 같은 경우는 분명히 살인마라는 세 글자를 건 비슷한 캐릭터를 연기했지만 다른 연기가 나왔다. 연기 스타일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건 캐릭터상의 문제다. 서로 연기를 하면서 대치했던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경주라는 인물과 많이 부딪히지는 않지만 마지막 씬에서 본격적으로 부딪히면서 긴장감이 팽팽히 도는 가운데 과연 누가 이길지 지켜보게 되는 건데, 어떻게 보면 내가 계속 쏘아붙이고 혼자 얘기하니까 마치 경주가 진 것처럼 표현됐다. 물론 둘의 긴장감은 끝까지 있었고 누가 효이를 죽인 건지는 결국 모른다. 효이가 자살했는지, 경주가 죽였는지 나도 모르고, 감독님만 아는 거겠지. 감독님께서 아직도 말씀해주시진 않지만 난 처음엔 경주가 그 힘을 못 이겨서 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까 왠지 효이가 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도 개인적으로 그 쪽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쏘아붙이던 효이의 모습 때문에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해지는 건 아닐까 싶다. 그에 반해서 선균 형의 연기는 일단 너무 편안하다. 사실 난 영화 보는 내내 너무 힘들었다. 내 연기를, 우리 영화 자체를 보면 항상 긴장되고 움츠려들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어깨가 여기까지 올라가고(어깨를 펴면서)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선균 형의 힘이 컸단 생각이 들더라. 그나마 관객들을 편안하게 해주시니까. 목소리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일단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연기 스타일을 갖고 계시니까. 나라도 저렇게 했을 거야, 나라도 저 상태에서는 저렇게 감정이 나왔을 거야, 라고 생각될 만큼 중립적인 입장을 너무나 잘 표현하셨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이 너무나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나왔다는 생각이 들더라. 효이가 굉장히 극단적이고 재신이 굉장히 스무드(smooth)한 역할이라면 경주는 그 가운데서 치고 받고 하는 인물이다. 그런 조합이 어떻게 보면 연기적으로 잘 맞았기 때문에 관객들이 긴장감을 갖게 되는 반면,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구도로 완성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효이가 자신 스스로에게 방아쇠를 당긴 것 같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난 효이가 전신주에 붙은 자신의 몽타주가 자신과 닮지 않았냐고 묻는 장면과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했다. 자신을 과시하는 듯한 이런 행위는 결국 누군가의 관심을 얻고 싶어하는 것이고 자학을 통해서라도 인정받고 싶다는 심리로 느껴졌다. 이는 한편으로 그 거리의 무관심을 조롱하는 행위라고도 생각했다.
자꾸 아역 때만 말하니까 내가 한 게 없는 거 같아서 좀 그런데,(웃음) 사실 아역 분량에서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엄마의 무관심 속에서 자랐고, 그래서 살아있는 동물들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아이의 모습, 그리고 소연이라는 여학생을 좋아해서 나름대로 관심을 표했지만 돌아오는 무관심, 그로부터 느껴지는 아픔들, 그런 주변 인물들로부터 보여지는 무관심한 아픔들로부터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몽타주 씬에서도 그렇고 자기가 살인자라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는 건 좀 더 관심을 받고 싶어했던 부분들이 컸기 때문인 거 같다. 그 타깃은 일단 경주였지만 그 외에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의 무관심을 하나씩 접하게 되고 그런 게 쌓이다 보니까 광기가 더욱 커진 것일지도 모르고. 그리고 동물 병원에서의 충동적인 살인도 명보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거다. 명보에게 거짓말로 소연이랑 살고 있다고 얘기했지만 그는 그녀가 죽은 것조차도 모르고 있지 않나. 자신이 관심을 가졌던 소연이에 대해서 상처를 받았던 건 정작 명보 때문이었는데 그런 당사자의 무관심이 충동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결국 효이의 그런 모습들이 무관심에서 출발한 셈이라고 봐도 될 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솔직히 <전원일기>에 출연했었다는 사실은 몰랐다.(웃음) 연기 경력이 나이에 비해 상당하더라.
여섯 살 때부터 시작했다. 시작하게 된 동기는 내가 너무 숫기가 없어서 어머니께서 웅변을 시킬까 연기를 시킬까 고민을 하셨던 것에서 출발한다. 병적으로 숫기가 없었다고 하더라. 이 세상에 어머니와 할머니 말고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심했다. 그러다가 어떻게 아는 분을 통해서 소극장에서 연극을 배우다가 한번 대회를 나갔는데 심사위원으로 유인촌 선생님이 계셨다. 그런데 날 좋게 봐주셨는지 관심 있으면 오디션을 보라고 하시면서 어느 연락처를 알려주셨는데 그게 <전원일기>오디션이었다. 그래서 오디션 보고 어떻게 하다가 <전원일기>에 들어갔다. 그렇게 TV쪽을 들어가게 되니까 여기저기서 얘기가 나오고 그를 빌미로 다른 오디션 보고 하니까 <허준>이나 <왕초>같은 드라마도 나오게 됐다. 그러던 중, 영화 일을 몇 번했는데 그게 매번 잘 안됐다 개봉 못한 영화도 있었고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아지고, 그러다 보니까 난 정말 영화랑 안 맞나 보다라는 생각까지 했는데 <묻지마 패밀리>라는 옴니버스 영화를 하게 됐다.

‘내 나이키’ 편에 출연했던.
장진 감독님과 박광현 감독님과의 인연이 그때부터 시작이 됐다. 아마도 그때부터 시작된 거 같다. 어떻게 보면 조금은 무모하지만 배우라는 길을 택하고, 해야만 한다고, 해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던 게 <묻지마 패밀리>이후부터였다. 사실 그 전에는 내 주위의 아역배우들을 이겨야겠다는 열등감이 강했다면 그 때부터는 내 의지대로 해나가는 식이었던 거 같다. 그 이후부터 스스로 (필름있)수다 사무실 찾아가서 계속 인사 드리고, 돌아다니면서 나 장진 사단이라고 떠들고 다녔고 그러고 싶었다. 그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내 욕심이었고, 의지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부터 영화에 대한 애정이 조금씩 커졌던 거 같다.

하지만 결국 배우로서 확실히 각인시킨 건 필름있수다에서 제작하지 않은 <천하장사 마돈나>를 통해서였다.
<웰컴 투 동막골>하고 나서 <마돈나>라는 작품을 택했던 건 물론 내 욕심도 있었고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들도 있었는데 그 남들 중에 가장 첫 번째로 보여주고 싶었던 게 장진 감독님이었다. 장진 감독님한테 ‘저 이번에 형 도움 없이 영화 하나 찍었어요. 한번 봐주세요.’라고 한번 말하고 싶었었다. 그런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거 같다. 물론 지금은 이제 그런 특정한 누군가를 대상으로 하는 의지는 없지만 내 스스로가 해야만 한다는 의지가 마음속에 남아있다는 게 앞으로 중요한 거 같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 같은 건 크게 중요한 거 같진 않다. 어쩌면 지금까지는 그냥 어머니가 시키니까 했던 거 같고.(웃음) 이제부터 시작인 거 같다. 내가 이제 보여줘야 하는 것들, 조금 더 공부를 해야 하는 것들도 많고.

평소에 조승우 같은 연기자가 되고 싶다고 많이 피력한 것으로 안다. 여전히 조승우는 류덕환에게 이상형인가?
내가 조승우 형을 너무 좋아해서 <웰컴 투 동막골>(이하, <동막골>)당시에 (강)혜정 누나와 친분이 있으니까 몇 번 물어보기도 했었고, 매니저 형 아는 분들 통해서도 몇 번 인사도 드렸지만 친해지거나 그렇진 않았다. 너무나 친해지고 싶었었다. 대학교 시험 볼 때도 조승우 형의 '지킬 앤 하이드'를 가지고 종합 연기 준비도 할 정도로 애정이 너무 깊었었다. 언제는 한번 누가 (조승우와) 닮았다는 소리를 해서 난 정말 날아갈 정도로 기분이 좋았었다. 너무 행복했지, 그땐. 내가 좋아하고 우상으로 섬기는 배우를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 기분은 정말 어떻게 말을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한편으로 이젠 나도 나중에 내가 조승우 형을 닮고 싶어하는 것처럼 누군가 나를 닮고 싶게 만들고 싶다는 욕심 같은 게 오히려 지금은 더 큰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그분을 안 닮고 싶다는 건 아니다. 게다가 그걸 따라가긴 어렵겠지. 다만 그 분의 연기에는 그분의 스타일이 있고, 분명히 나만의 스타일도 있기 때문에 존경은 하지만 이젠 내 길을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조금 더 커진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좀 엉뚱하지만 효이가 ‘나, 괴물이지?’란 대사를 할 때 <마돈나>의 동구가 했던 ‘나 장만옥닮지 않았어?’라는 대사가 생각났다. (웃음) 왜냐면 괴물이나 장만옥은 효이와 동구에겐 누군가에게 이렇게 인정받고 싶다는 어떤 구체적인 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류덕환은 배우로서 인정받고 싶은 어떤 구체적인 상이 있나?
음…글쎄. (골똘히 생각하다가)그들은 어쨌든 간에 둘 다 한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던 거다. 둘다. 오동구 같은 경우는 자기가 짝사랑하는 일본어 선생님한테 인정을 받고 싶었던 거고, 효이도 다른 사람이 아닌 경주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던 거다. 그런 것처럼 나 같은 경우도 인정받고 싶은 특정 인물 같은 부분은 분명히 있다. 그 인물들에 대한 심리 상태를 나에게 비교하자면 어느 한 특정인물한테 주목이나 인정을 받고 싶다기보단 내 자신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거 같다. 난 항상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고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내 자신을 충족하기 위해서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니까.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물론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나 지적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사실 그런 것들을 다 새겨듣지도 않는다. <마돈나>때도 안 좋다고 하셨던 분들도 있었고, 좋다고 하셨던 분들도 있었다. 사실 <아들>같은 영화를 찍었을 때는 내 나름대로 굉장히 무난하고 조용히 연기했다면 <우리동네>에서는 감정이 극단적인 상태로 치닫는 그런 연기를 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연기를 했을 때 칭찬이 더 많이 나온다. 솔직히 <아들>때 편안하게 연기했는데 이건 그냥 그랬구나, 하고 지나갔는데 <우리동네>같은 영화는 잘한다고 하는 모습들이 난 일차적으로 보여지는 어떤 시각적인 부분에 의해 내가 보여진다고 생각했다. 일단 겉모습을 통해 보여지는 것들, 표정이 굉장히 많이 나타난다거나, 연극적인 요소로 억지스럽게 표현한다거나, 이런 것들을 통해 인정받는다는 게 과연 정말로 내가 인정을 받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더라.

스스로를 아직 인정할 수 없다는 이야긴가?
사실 칭찬해줬을 때, 그런 것들을 굉장히 기분 좋게 받아들이긴 하지만 결국 내 자신으로서는 인정할 수 없을 때도 있는 거니까. 왜냐면 <우리동네>나 <아들>이나 <마돈나>나 <동막골>이나, 내가 임했던 연기의 자세는 똑같았다. 내가 어떤 연기를 하든 내가 노력한 부분에 대한 퍼센트 지수는 항상 똑같았다. 물론 내가 받았던 스트레스 같은 것들은 분명히 다르겠지만 내가 했던 연기적 태도는 분명 똑같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굳이 캐릭터가 뚜렷해야만 인정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내가 풀어야 할 숙제일 거다. 한편으로 다음 영화에서는 진짜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하게 가도 아, 류덕환 정말 연기 잘한다, 이번 영화 참 좋았다, 라는 얘기가 과연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해서 내 자신 스스로 한번 실험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그래서 그 특정인물을 굳이 정하자면 그건 다른 사람들이기보단 나인 거 같다. 오히려 나한테 인정받고 싶고, 내가 내 자신에게 죽어도 만족을 못할지라도 한번쯤은 만족할 수 있는 그런 연기가 나올 때까지 해보는 게 내 모습인 거 같다. 반대로 생각하자면 죽을 때까지 연기를 하겠다는 거지.

동구나 준석이나 효이가 아니라 그냥 류덕환이라는 자체로 인정받고 싶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럴 수도 있다. 내 본래의 모습을 최대한 배제하지 않고서 연기에 임했던 게 <아들>이었다. <아들>같은 경우는 반전에 대해서 좋다고 생각하시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게 별로 안 좋다는 지적도 많았다. 그런데 어쨌건 반전에 대해서 뒤통수 맞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았다. 난 오히려 그런 반응들이 내 개인적으론 굉장히 좋았다. 왜냐면 그 전 상황까지는 그만큼 승원형이랑 내 모습이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으로 보여졌기 때문에 그만큼 뒤통수 맞은 게 큰 타격이 된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부분들이 내 의도처럼 최대한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으로 비춰지길 원했고, 그 둘의 모습이 너무나 예뻐 보이길 원했었다. 어떻게 보면 <마돈나>나 <우리동네>와는 다르게 <아들>때는 최대한 그런 모습에 류덕환의 모습으로 다가가길 원했고, 류덕환의 모습이 조금 더 많이 보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게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통해서 내 나름대로 치밀하게 반전을 준비했었다. 앞으로는 내가 그런 연기를 했을 때도 <우리동네>나 <마돈나>를 통해 받았거나 받고 있는 어떤 칭찬들이 똑같이 나올 수 있는 그런 방법이 뭐가 있을지, 그런 것들이 내가 풀어나가야 하는 과제인 거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살기 위해서 여자가 되야 했던 동구처럼 류덕환은 살기 위해서 연기를 하고 있는 건가?
배우가 되기 위해서 사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살기 위해서 배우가 된다는 것보다는 배우는 나에게 너무 하고 싶은 낙인 거다. 내가 아까도 말했다시피 연기를 하면서 분명히 어려움이 없을 수는 없다. 스트레스를 비롯한 여러 가지 난관들을 계속 헤쳐나가고, 그런 과정들이 쭉쭉 나아가다가 결국 결과물을 봤을 때 느끼는 것들. 이번에도 하나 해냈구나, 100% 마음에 들진 않지만 오늘도 하나 해냈구나, 이런 감정들을 느끼기 위해서 계속 이렇게 하는 거 같다. 이런 것들을 말로 풀어내자면 내가 살면서 느낄 수 있는 어떤 즐거움 때문에 배우를 한다기보단 배우를 하면서 즐거움을 얻기 때문에 계속 이렇게 이 일을 하는 거 같다. 어떻게 보면 그게 내가 연기를 하는 정답일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즐거움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 계기는 뭐였나?
그러니까 그 정체성이라는 게, 옛날에 이휘재 씨가 하셨던 인간극장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래, 결심했어’ 뭐 이런 거? (웃음) 정체성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작품에 내 이름이 올라가는 걸 보는데 이 느낌을 한번만 더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마냥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짜릿한 것도 아니었고, ‘우와’도 아니었고, 경악도 아니었고, 그냥 이게 무슨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한번만 더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바로 나에게 영화에 대한 어떤 집요함이 생기게 된 계기인 거 같다. 물론 난 이러니까 배우를 해야만 한다고 내가 지금도 느끼고 있는 건지 잘은 모르겠다. 배우라는 이 한 단어가 제 이름에 붙여질 때, 배우 류덕환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때, 사실 난 아직 창피하다. 그건 아직 내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많이 배우고 있는 입장이니까. 물론 내가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직업상으로는 배우 류덕환이 맞겠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어떤 전문용어로 배우 류덕환이라고 불렸을 때는 난 아직 창피하다. 그렇기 때문에 난 배우라는 정체성을 앞으로도 계속 살려나가야 될 것 같다. 내가 이렇기 때문에 배우 류덕환이라는 정체성은 아직도 찾지 못했고 앞으로도 계속 찾아나가면서 만들어나가야만 할 것 같다. 내가 그 만족감을 언제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그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서 찾아나가야만 할 것 같다.

그렇다면 단순히 지수로 표시한다는 게 힘들겠지만 효이는 본인에게 몇 %의 만족이었나?
(골똘히 생각하다가)난 모르겠다. 사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이번에 <우리동네>를 보고 나서 그 때 찍었던 씬이 몇 테이크였는지 알 것 같더라. 영화를 보면서도 감독님이 몇 번째 테이크를 썼겠구나라는 걸 느낄 정도로 내가 너무 생각을 많이 했던 작품이었던 거 같다. 그래서 사실 영화를 보면서도 몇 번 테이크를 썼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물론 그렇게 테이크를 많이 간 것도 아니고 연기도 즉흥적으로 나왔지만 모니터를 이렇게 많이 본적은 진짜 처음이었다. 모니터를 계속 돌려서 보고 또 보면서도 하나하나 꼼꼼히 봤던 작품이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도 몇 번째 테이크를 썼는지도 알 것 같더라. 그래서 이번에 이 씬에서는 그 테이크를 썼으면 좀 더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굉장히 많이 하게 된 작품이었던 거 같다.

결과적으로 영화에 완벽하게 만족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인가?
내 자신에 대한 아쉬움이 있는 거 같다. 가령, 내가 왜 이 감정을 생각 못했지? 그러니까 영화 전개상 보다 보면 저 감정은 안 맞는 거 같다는 그런 느낌들이 있었다. 내 연기부분에서는 그런 것들이 있었고, 오히려 연기적으로 걱정했던 부분에서 음악이 비중을 많이 살려준 부분도 있었다. 음악이 깔리고 나니까 오히려 그 씬의 시니컬한 느낌이 더 살고, 그래서 조금 더 좋아진 부분도 있었다. 사실 내 연기 부분에 대해선 항상 나는 만족할 수 없는 거 같다. (웃음) <천하장사 마돈나>때도 그랬고. 내가 (신)하균 형이랑 조금 비슷한 성격인데 내가 찍은 영화를 두 눈 똑바로 뜨고 못 본다. 영화를 보면서도 계속 이렇게(손으로 눈을 가린 채로) 가리거나 중요한 장면 나올 때는 유심히 봐야 되는데 오히려 옆에 있는 사람을 본다. 어떻게 볼까, 어떤 반응이 나올까, 그런 것들이 궁금해서,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만족을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끝없는 소심함 때문에.

스스로를 자학하는 경향이 약간 있는 거 같다.
그런 게 조금 있다. 어쩌면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완벽주의자?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내가 자꾸 자학을 하는 거 같다. 예를 들어서 커피를 마시는데 커피의 농도가 딱 80%라면 그 80%에 맞춰야 된다. 누가 봐도 80%에 맞는 거 같다고 하는데, 내가 맛을 봤을 때 79%밖에 안 되는 거 같다면 그 1%를 만족하기 위해서 나는 계속 농도를 맞추려고 할 거다. 내 입 맛에 맞는 그 1%를 만족하기 위해서. 어떻게 보면 너무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을 통해 내 자신을 자학하는 것 같기도 하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 중 자학했던 사람이 많다더라.
아, 그런가? 그럼 좋게 받아들여야지. (웃음)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런데 이야기해보니 여우보단 애늙은이 같다. (웃음)
애늙은이도 많이 들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전원일기>라는 드라마를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웃음) 너무 높으신 선배님들이다 보니까 난 정말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있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까 그런 것들이 계속 몸에 배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나에게 가르쳐주셨던 게 네가 인사를 했는데 저 선배님이 모르고 지나갔다면 네 인사를 모른 척하고 간 게 아니라 못 보고 갔을 수도 있기 때문에 너는 끝까지 인사를 해야 된다는 것. 그래서 무조건 나는 내 인사를 못 받았을 때는 내가 쫓아가서 인사를 해야 된다. 그런 것들이 지금까지 몸에 배어있다 보니까 촬영이 끝나고 나서도 스텝 한 분들한테까지 가서 인사하는 버릇이 생겼다. 어떻게 보면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여우라는 말이 나왔던 것도 상대방의 반응을 자꾸 생각하다 보니까 그런 것 같다. 말을 하나씩 커트한다거나 농담도 함부로 못하는 거 같고, 농담을 했을 때도 그 사람이 기분 나쁘지 않을까, 이런 것들을 자꾸 안으로 소심하게 생각하다 보니까.

너무 배려가 심하다 보니까?
좋게 말하면 배려고, 나쁘게 말하면 나 혼자 망상에 빠지는 거지.(웃음) 그러니까 얘기를 하다가도 가벼운 농담을 할 수도 있는데 제 딴에는 기분이 나쁠까 봐, 그게 어떻게 보면 칭찬의 의미일 수도 있는데 괜히 했다가 뭐야, 이사람, 이럴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혼자서 자꾸 상상을 하게 되는 거다. 그래서 말하면서도 자꾸 생각하게 되고, 이 정도 수위면 기분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따르기 때문에 여우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계속 조심스럽게 말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대선배님들을 통해 몸에 밴 습관이 눈에 띠어서 애늙은이처럼 보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아역 시절부터 쌓아왔던 연기적 학습능력, 즉 필모그래피가 지금의 연기적 자양분이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난 아역 때도 내가 아역 취급 받는 걸 싫어했다. 그래서 난 지금 아역 친구분들한테도 처음에 만났을 때는 무조건 존댓말을 쓴다. 어쩌면 내가 그걸 겪었기 때문에 그 친구들의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한다. 본의 아니게 기분 나쁠 때가 있다. 무조건 어리다고 해서 반말하고 그냥 너는 대기하다가 조금 이따 나오라고 할 때 나와,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말하고, 이런 부분들이 어떻게 보면 무시당한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최대한 배려해준다고 하는 게 일차적으로 나오는 말이다. 누구나 말을 통해 그 사람의 인격이 보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친해지기 전까진 존댓말을 한다. 무시당하는 것까진 아니라도 내가 이렇게 보이면 너무 약해 보일 수도 있겠다는 것들을 내 나름대로 소심하게 표현했겠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강하게 계속 쌓여왔던 거 같다. 그래서 주연, 조연 같은 걸 따진다기 보단 현장에서의 내 모습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고 난 언제나 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한 씬을 나오더라도 두 씬을 나오더라도 언제나 나는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주연급 배우로서 빠른 나이이기도 하다.
<우리동네>는 사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분량으로 따졌을 때 조연급이지만 난 내 마음속으로 항상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런 자신감을 잃지 않아야 내 연기에 대한 어떤 신조나 정확한 어떤 연기관 같은 게 흐트러지지 않고 갈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내 중심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아역 때부터 그런 생각이 쌓이다 보니까 주연, 조연, 단역 배우에 대한 개념이 다 사라진 거 같다. 누구는 주연, 누구는 조연, 또 혹은 누구는 단역, 난 이런 것들을 정해놓은 거 자체가 너무 싫었다. 물론 우리가 구분을 위해 배역을 나누겠지만 영화 일을 하면서 만큼은 주연이 조연이 될 수 있고, 조연이 주연이 될 수 있듯이 항상 누구든지 그 영화에 출연한 모든 배우들이 주연이라고 생각한다. 한 명이라도 빠졌을 때 영화가 완성될 수 없기 때문에 다 주인공이라고 생각을 한다. 물론 주연이 훨씬 더 많이 고생하고 그에 대한 대우도 물론 다르지만, 자신이 갖고 있는 신조만큼은 항상 주인공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을 어렸을 때부터 생각해왔기 때문에 지금도 주연이나 조연, 그런 거 생각 안 하게 되는 거 같다.

그런데 솔직히 난 스물 다섯은 넘었을 줄 알았다. 항상 연기를 보면서 스물 한 살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거지. 연기를 통해서 막연히 생각했던 나이와 실제 나이 사이의 괴리감을 알고서도 놀란 부분도 있다.
아~! 정말?

요즘 학교에서 연극 준비했다고 하는 거 같던데.
어제 끝났다. 어제 쫑파티도 했고. 그래서 지금 사실 상태가 별로 안 좋다. (웃음)

사실 그 연극도 졸업작품이라도 준비하는 건 줄 알았다. (웃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무비스트)

'inter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강우 인터뷰  (0) 2008.05.31
한예슬 인터뷰  (0) 2008.05.31
엄지원 인터뷰  (0) 2008.05.31
이안 감독 인터뷰  (0) 2008.05.31
이연희 인터뷰  (0) 2008.05.31
Posted by 민용준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입에서 한기가 새어 나오는 한겨울 동대문 새벽상가에서 지방으로 내려갈 물류정리 관리일로 하루 벌이를 하는 할아버지(신구)는 손녀 다성이(김향기)와 함께 집과 일터를 오가며 살아간다. 그러던 중, 교도소에서 복역했던 그의 아들(김영호)이 찾아와 자신의 딸 다성에게 작은 방울토마토 화분 하나를 선물하지만 다음날, 제 아버지가 푼돈을 아껴 모아둔 통장을 들고 황망하게 사라져버린다. 게다가 할아버지와 다성이가 살아가는 비좁은 집마저도 재개발 지역이란 명목으로 철거당할 상황이다.

<방울토마토>는 가난을 짊어진 하층민의 고단한 일상을 비참할 정도로 끔찍하게 묘사한다. 지저분한 얼굴과 옷차림의 아이, 심술로 발화된 삶의 체증을 한 가득 질어진 할아버지의 표정, 어떤 설명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그들은 사회적 최하층민의 삶을 이미지로 대변한다. 말 그대로 <방울토마토>에서 등장하는 할아버지와 손녀의 삶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삶이 거짓이라고 부연할 수는 없다. 분명 그런 참혹한 일상을 두르고 살아가는 이는 이 땅에 드물지 않게 존재하는 법이므로. 허나 <방울토마토>는 이를 통해 보편적인 슬픔을 끌어내고 관객에게 심적 통증을 권고한다. 진창 같은 비극적 삶을 전시함으로써 이를 통해 비통한 감정을 양산한다.

굽이굽이 돌아서라도 돌아오겠다는 할아버지의 아들이자 손녀의 아버지는 통장을 들고 도망간 후행적조차 알 수 없고, 그 와중에 입에 풀칠하게 해주던 일자리도 사라졌다. 게다가 비좁은 집구석마저 강제 철거당하며 길바닥에 내앉는 신세로 전락한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있을까, 라는 순간마다 더욱 잔혹한 현실로 그들은 내던져진다. 결말은 지독할 정도다. 한치에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 그 곳은 빈부의 격차가 영락없이 인간의 삶을 쥐고 흔드는 자본주의적 패악의 세계다. 이를 통해 <방울토마토>는 자본주의 제도하에서 양산된 양극단의 계급을 묘사한다. 호화로운 대저택에서 살아가는 어떤 이는 기르는 개조차 한우를 먹이고, 어떤 이는 밥 한끼 사먹을 돈 없어 남이 먹다 남긴 국그릇을 몰래 훔쳐 마시다가 그 안에 버린 쓰레기까지 입에 담는다. <방울토마토>엔 비판의 수위를 넘겨버린 자본주의적 적대감이 넘실거린다.

전체적으로 중심인물들의 사연은 일관적인 흐름과 인과관계를 지니고 있지만 관계가 불확실한 몇몇 캐릭터들이 시간을 소모시키듯 불편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이야기의 얼개는 듬성듬성 불안함을 드러낸다. 물론 할아버지와 다성이의 주거침입(?) 에피소드는 나름의 묘미를 지닌 창의적인 플롯이라 평가할만한 부분이다. 하지만 전반적인 이음새가 부실하고, 다소 극단적인 양상의 비극적 내러티브는 시종일관 어떤 혐의를 야기시키는 것이라 다소 불편하다. 극단적인 빈부격차를 대립적 관계로 배치시킴으로써 관객이 빈곤한 노인과 손녀를 그 비극적 알레고리의 피해자로 쉽게 인식하게끔 유도당할 여지가 충분하다.

이는 결국 가난을 비극적 볼모로 삼아 관객의 눈물을 소비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지독하게 비극적인 양상 속에서 허덕이는 할아버지와 손녀가 끝끝내 비극을 맞이하는 이 무지막지한 영화로부터 얻을 수 있는 건 과연 무엇인지 의문이 남는다. 현실이 녹록하지 않다는 것? 아니면, 빈자의 지독한 현실적 슬픔?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비극이 몰아친 뒤, 황폐한 땅 위에 홀로 남은 노인의 곁에 방울토마토가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다. 이 영화가 희망을 말하는 방식은 이리도 얄팍하다. 제작의도는 고결했을지 몰라도, 가난한 이들의 비극적 에피소드를 적극 활용해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시키기에 용이한 결과물은 지독하게 황폐하고, 간악하다. 이는 연륜만큼이나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는 신구의 열연과 어린 나이에도 또박또박 제 연기를 하는 김향기의 호연을 제물 삼아 이뤄진 것이라 더더욱 악취미처럼 느껴진다. 그나마 이 영화가 지닌 일말의 미덕은 희망을 결코 무책임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만든다는 점이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

사용자 삽입 이미지

90년대도 아닌 1989년이다. 전작이라고 명명되어야 할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의 개봉연도가 말이다.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이하, <해골의 왕국>)은 그로부터 20년에서 1년이 모자란, 무려 19년 만에 제작된 속편이다. 이는 분명 어떤 이들에겐 상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 그리고 해리슨 포드가 함께 한 새로운 <인디아나 존스>를 21세기에 스크린으로 볼 것이라는 기대 따위는 하지도 못했던 올드팬들에게 <해골의 왕국>은 크리스마스 아침에 일어나보니 산타 할아버지가 왔다 가셨더라, 는 말처럼 진위만 분명하면 이유 따위야 알 바 아니란 듯이 들뜨게 되는 일이다.

어떤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좀처럼 벗겨지지 않는 가죽 중절모와 무엇이든 낚아채고 때론 밧줄처럼 활용되는 채찍은 20여 년이 지나도 쓸모가 대단하다. 물론 흰머리가 무성한 인디아나 존스(해리슨 포드, 이하 ‘인디’)는 분명 세월 앞에 장사 없음을 실감하게 하지만 여전히 그는 지적이면서도 화끈하다.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조롱 섞인 위트를 날릴 줄 알며 코 앞까지 닥친 위기 앞에서 순발력 있게 기지를 발휘하며 긴장감을 조성한다. 예전 같지 않다고 한숨 쉬지만 여전히 그는 쉼 없이 달리고 주먹을 날리며 악에 대항한다.

물론 20세기 아날로그 방식으로 채워진 <인디아나 존스>는 흡사 어드벤처 영화의 유물이라 할만한 것이다. 특히나 디지털 방식이 대세인 21세기에서 그것은 실로 시대착오적이라 할 만큼 쉰내 난다고 소박맞을 물건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이하드 4.0>으로 돌아온 존 맥클레인이 ‘죽지 않아’를 증명했듯 인디아나 존스 역시 21세기에서 현저하게 불필요한 노동으로 분류된 아크로바틱 액션의 진가를 여지없이 발휘한다. <해골의 왕국>은 철저하게 <인디아나 존스>라 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고대 유물에 얽힌 전설, 그리고 보물을 찾아 떠나는 여정, 유치하고 조악해 보이지만 마음을 설레게 하는 모험심을 유발하게 만드는 낭만. <해골의 왕국>은 <인디아나 존스>가 관객에게 쥐어주던 의미를 간과하지 않았다.

세월의 변화를 증명하듯 전작에서 악의 축으로 등장하던 나치는 사라지고 빈자리를 메운 건 공산진영의 소련군이다. 1930년대 2차 세계대전 당시를 배경으로 두르던 전작들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건 비단 영화 밖만이 아니다. ‘Better dead than red(빨갱이가 되느니 죽음이 낫다)’라는 문구의 현수막이 적나라하게 증명하듯 <해골의 왕국>은 미소진영의 대립이 한창이던 1950년대 냉전시대의 미국에 서있다. 게다가 의미심장하게도 <해골의 왕국>은 <인디아나 존스>시리즈의 서막인 <레이더스> 말미에 등장했던 네바다 군사기지 51구역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덕분에 <레이더스>에서 인디가 찾아냈던 성궤도 잠시 형체를 드러낸다.- 그곳에서 그들은 포로로 잡은 인디에게 무언가를 찾아내라 종용한다.

<인디아나 존스>에 대해서 알만큼 아는 당신이라면 이 시리즈가 지닌 이야기 맥락이 예상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몰랐다면 이제라도 알아둬라.- 숨겨진 보물과 이를 악용하려는 무리들의 음모에 맞서 인디는 한두 명의 파트너와 함께 모험을 감행한다. 그리고 숱한 난관을 이겨내고 보물을 찾아내지만 이를 소유하려는 악은 소멸하고 인디는 살아서 제집으로 돌아온다. <레이더스>에 등장했던 메리언(카렌 알렌)이 재등장하고, 이전에 그녀의 아들이자 인디와도 깊은 관계임이 밝혀지는 머트(샤이아 라보프)가 동행하는 모험은 원전에 충실한 반가운 것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신선한 감각이 수혈된 것이다. 다만 인디의 아버지 헨리(숀 코네리)는 죽어서 사진으로만 등장한다.-숀 코네리가 나이 관계상 출연제의를 고사했다고 한다.-

동세대를 배경으로 하는 블록버스터와 달리 인디가 ‘공산당이 싫다’고 말할 수 있는 1950년대가 새로운 <인디아나 존스>의 배경이 된 건 인디의 나이를 고려한 것이자 모험의 실효성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역동적인 액션을 펼쳐야 할 인디의 나이를 고려할 때, 1930년대를 배경으로 했던 전작 시리즈로부터 지나치게 멀리 떨어질 수도 없었거니와, 성스런 유물을 악용하려는 무리들이 존재해야만 모험은 이뤄진다는 점에서 냉전시대 소련은 나치만큼이나 유효한 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냉전의 이념대립이 구시대의 산물이 된 요즈음에 소련이 전작의 나치들마냥 악의 무리처럼 활용된 것이 불편한 사실이 될 수 있겠지만 전작들이 그러했듯 <인디아나 존스>에서의 악은 그저 모험을 성립시키는 구실로서 활용되는 것에 불과했을 뿐, 불필요하게 감정을 유발할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단지 우크라이나 억양의 이리나 스팔코 역으로 케이트 블란쳇이란 매력적인 배우가 악역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빼면 전작들에서 등장했던 소모적인 악역들과 <해골의 왕국>에서의 그들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해골의 왕국>은 올디스(oldies)한 시리즈의 감성을 현대에서도 구디스(goodies)하게 살렸다는 점에서 평가할만하다. 단지 인디아나 존스의 채찍질이, 그리고 그의 치킨 레이스가, 그리고 세월에 대한 예사롭지 않은 푸념마저도, 돌아온 풍운아 존 맥클레인의 아날로그 액션에 비견할 만큼 환호와 열광을 점지해도 좋을 만한 것이다. 동시에 무모하면서도 땀내나는 인디의 액션은 인간적 유대감을 형성시킬 정도로 숭고한 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디지털 기술을 두른 동세대 영웅들의 초현실적 몸놀림으로 즐비한 블록버스터의 현세태에서 아크로바틱 액션과 아날로그의 감성이 주를 이루는 <해골의 왕국>은 구시대적 유물의 현대적 희소성을 환기시킨다.

물론 <해골의 왕국>은 모험 그 자체로 이뤄졌다. 오랜 팬에게는 실로 반가운 귀환이자 <인디아나 존스>가 낯선 세대에게는 생소하지만 만끽할만한 체험이 될만한 것이다. 물론 의외성은 존재한다. 마치 멀더와 스컬리가 제기했을 만한 <엑스파일>스러운 결말은 무시무시한 스케일이 가공할만하지만 세대를 막론하고 빵상 아줌마를 대면했을 때나 느낄만한 생소하고도 난감한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 특유의 어드벤처 감수성은 <해골의 왕국>의 말미에 이르러 SF적 경이로움으로 치환된다. 물론 그 와중에도 인디는 ‘그들도 고고학자였다’며 감탄사를 날리지만 그것이 스필버그와 루카스가 지지한 범우주적 프로젝트의 실상에 대한 충격을 상쇄시킬만한 위력으로 작용하지 못한다.–이건 호불호에 대한 말이 아니다.- 모험의 종착역은 지금까지 <인디아나 존스>에서 봐왔던 초자연주의적 신앙을 초월한 것이며 경이롭고도 경악적인 것이다.-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알고 봤다 해도 결국은 당했다고 말할만한 것이다.- 마치 도입부에서 등장하는 핵폭발 씬만큼이나.

중요한 건 <해골의 왕국>이 미래보단 현재에 충실하며 과거를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인디아나 존스>는 유년시절에나 꿈꿀만한 유치하고 조악한 상상을 영화적 모험으로 재현한 것에 불과하다. 중요한 건 그 당시 관객들이 그것에 열광했다는 것. 그건 그 단순하고 유치한 꿈이 매번 낭만과 위트를 지닌 정의로운 인간을 통해 이뤄졌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현대 관객의 취향이 과거 당시와 많이 달라졌다 할지라도 인간이 지닌 기본적인 감수성은 세대를 넘어 전승된다. 그리고 <해골의 왕국>은 취향을 뛰어넘을만한 보편적 기질이 가득하다. 다시 한번 고고학 노동자, 인디아나 존스가 주목 받을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게다가 핵 떨어져도 죽지 않는 진정한 ‘다이하드’ 노장 인디아나 존스는 죽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다만 사라질 뿐. 물론 이전과 다르게 인디아나 존스 가족의 재구성이란 점에서 이번 시리즈는 각별하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