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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우리가 지배한다(We own the night).’ 명암이 뚜렷한 도시의 뒷골목에서 발생하는 알력을 지배하는 자와 이를 제압하려는 자들이 지향할만한 중후한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를 제목으로 내건 <더 나잇>은 그 먹이사슬의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본의 아니게 그 사이에 끼어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 자의 운명을 따라가는 것이야말로 <더 나잇>의 관심사에 가깝다.

미국의 뒷골목을 지배하던 갱과 이들을 소탕하려는-혹은 그들을 장악하려는- 경찰들의 관계의 간극에서 비롯된 사연은 미국범죄영화들의 오랜 소재기반으로서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범인을 검거하는 경찰들, 하얀 마약가루와 바늘 달린 주사기들. 무덤덤한 회상처럼 사건기록사진처럼 보이는 흑백의 스틸컷이 차례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도입부는 <위 오운 더 나잇>(이하, <더 나잇>)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를 공표하는 것과 같다. <더 나잇>은 1980년대 뉴욕에서 상반되는 지점에 선 형제의 관계 변화를 통해 시대적 공간에 담긴 세태의 모습을 묵직하고도 담담한 시선으로 스크린에 담아낸다.

디스코 음악과 현란한 조명 아래 음주가무에 들뜬 인파들, 매일같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뉴욕의 유명클럽에서 매니저를 맡고 있는 바비 그린(호아킨 피닉스)은 도시의 밤이 잉태한 향락을 기반으로 엔조이한 삶을 계획한다. 하지만 그의 부푼 꿈은 뉴욕 경찰서장인 아버지(로버트 듀발)와, 역시 촉망 받는 경찰인 형 조셉(마크 윌버그)이 주도하는 마약수사로 인해 혼선을 빚고 그로 인해 형제는 갈등을 빚는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의 기로에 섰음을 뒤늦게 안 바비 그린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숙명을 깨닫고 그로 인해 그는 예측범위를 벗어난 삶의 진로에 놓이게 된다. 나이트 클럽의 매니저로서 자신의 사업만을 골똘히 구상하던 바비 그린이 경찰 배지를 달기까지의 과정을 진지하게 보여주는 <더 나잇>은 어떤 의문을 품게 한다. 소시민적 행복을 추구하던 거리의 탕아는 왜 제도적 질서에 편입돼야 했을까? ‘네가 조만간 우리 편에 서지 않는다면 마약꾼 편에 서게 된다’는 아버지의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비 그린이 경찰이 되기로 결심한 건 그가 질서유지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기 보단 가문을 수성해야 할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희생은 바비 그린을 각성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한번의 선택으로 인해 삶의 수평이 흔들린 바비가 자신의 삶을 완전히 한 방향으로 기울일만한 선택을 다짐하는 건 적을 완벽하게 제거함으로써 가문을 수성해야 할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애초에 자신의 계획과 가장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된 바비는 자신이 양부처럼 모셨던 클럽의 회장과 반대편에 서게 된다. 결국 그는 가족을 위해 꿈을 상납하고 기꺼이 국가 질서의 수하로서 국경 밖에서 유입된 악의 세력을 처단한다. 선택을 종용하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갈등하고 변화를 고민하는 바비 그린을 묵묵히 묘사하는 <더 나잇>은 국경의 외부에서 유입되는 위험에 노출된 미국인이 제도로서 자신을 재무장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다양한 인종의 유입으로 이뤄진 미합중국의 힘은 때로 무분별하게 유입된 외부의 불순분자들로 인해 거리의 질서를 훼손당하고, 결국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동원된 공권력은 종종 되려 그들의 역습으로 명예를 훼손당한다. 동시에 뉴욕의 밤거리에서 거래되는 마약은 미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순한 외부 유입물이다. <더 나잇>에서 바비 그린의 경찰되기는 결국 외부의 적에 맞서기 위한 미국인의 결속과도 같다. 그 과정에서 거리의 질서는 회복되고 가족의 평안은 유지되지만 결국 개인의 주체적 삶은 제도적 강건함을 위해 소모된다. 경찰제복을 입고 형과 나란히 단상 위에 앉아 형제애를 나누는 바비 그린의 모습은 거듭난 미국인의 초상과 같다.

<더 나잇>은 다양성을 통해 존립의 기반을 마련한 미국사회가 스스로 야기시킨 자기모순의 희생자는 누구인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미국은 끊임없이 외부의 적과 싸워왔다. 외부의 적은 내부의 적을 단결시킨다. 미국인들은 끊임없이 외부의 적과 맞서며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각성해왔다. 그것이 아메리카 드림의 양면성이자 그라운드 제로를 품은 미국적 현실이다. <더 나잇>은 중후한 80년대 범죄드라마의 형식을 통해 과거를 되짚고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세련된 자성에 가깝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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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으로 포화 속에 갇힌 동심을 위로하기 위해 C.S.루이스는 아이들에게 판타지의 대륙을 선사하고자 했다. 전쟁을 피해 도시에서 시골로 내려간 네 아이들이 옷장을 넘어 나니아 대륙이란 신세계로 들어서게 된 건 그런 연유에서다. 그리고 C.S 루이스의 ‘나니아연대기’가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시리즈를 상기시키지만 본심은 <판의 미로>에 보다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여지도 이 점에 있다.

‘나니아 연대기’가 성인들에게 유치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건, 그것이 애초에 아동들을 위해 집필된 동화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을 집필하는데 큰 영향을 얻었다는 J.R.R. 톨킨의 고백처럼 ‘나니아 연대기’는 ‘중간계’를 잉태한 판타지의 원전으로서 명백한 가치를 지닌다. 대자연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종적 구성원(<반지의 제왕>)들로 이뤄진 현실 이면의 판타지적 세계관(<해리포터>)은 <나니아 연대기>가 판타지라는 대륙을 안착시킨 원형임을 입증하는 것과 같다. <나니아 연대기: 사자, 옷장, 그리고 마녀>에 이어 제작된 <나니아 연대기: 캐스피언 왕자>(이하, <캐스피언 왕자>)는 4부작으로 기획된 시리즈의 두 번째 시리즈이자 7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된 원작의 절반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분기점이기도 하다.

전작에 이어 모험을 주도하는 아이들, 피터(윌리엄 모슬리), 수잔(안나 포플웰), 에드먼드(스캔더 킨즈), 루시(조지 헨리)가 전작과의 서사적 간격을 증명하듯 과거에 비해 훌쩍 자란 모습으로 등장하는 <캐스피언 왕자>는 확실히 유아적 취향에 머물렀던 전작에 비해 성인을 고려했다고 할만한 것으로 성숙했다. 이는 동물의 왕국을 방불케 하는 전작의 전투씬에 비해 <캐스피언 왕자>의 전투씬이 체계가 잡힌 인위적 전투의 양상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캐스피언 왕자>가 성장기에 접어든 캐릭터의 고뇌와 숙명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니아 왕국의 수장이 된 피터와 대대로 이어온 왕위를 복원해야 하는 캐스피언 왕자는 각각 강박에 시달리듯 자신의 숙명 앞에 고뇌한다.

피터가 성장통을 겪는 사이, 그들 중 가장 어린 루시는 아슬란을 봤다고 유일하게 말한다. 성인이라 부를만한 연령에서 가장 동떨어진 루시가 보는 것을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한다. 이는 아동의 순수한 믿음이야말로 성스러운 것에 가깝다고 믿는 C.S.루이스의 신념을 대변하는 것과 같다. 의무감에 빠진 피터가 무리수가 예상되는 작전을 강행하다 실패를 맛보고, 모사의 간계에 이끌린 캐스피언 왕자가 마녀의 부활에 이용당할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나는 것과 달리 구원의 가능성을 본다. 이는 C.S.루이스가 ‘나니아 연대기’를 집필하던 폭력의 시대에서 아동들에게 주고자 했던 구원의 메시지이자 성인들을 향한 일말의 훈계였을 것이다. 동화를 원형으로 했지만 ‘나니아 연대기’는 분명 성인의 발상으로 이뤄진 함축의 세계관을 담고 있다. <캐스피언 왕자>는 전작이 지니지 못했던-실상 원작으로 인해 지닐 수 없었던- 비범함을 가미하며 단순한 구조의 권선징악 스토리를 원전의 위엄에 한발자국 접근시켰다. 아이들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시리즈도 성숙했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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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를 위협하는 리얼리티와 풍만한 색채가 보편화된 동시대 애니메이션들을 떠올린다면 이는 다분히 시대착오적이다. 극의 대부분이 흑백 컬러로 채색되고 앙상한 선이 그대로 드러난 드로잉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띄운 셀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가 말이다. 하지만 2000년에 출간된 마르잔 사트라피의 자전적인 유명 그래픽 노블을 동명 그대로 영화화한 <페르세폴리스>는 상상력의 유희와 드라마틱한 구성, 그리고 의미심장한 시대적 단상을 통해 기술이 충만할 수 없는 감수성의 깊이를 보여준다.

독재정권인 팔레비 왕조의 오랜 탄압에 반발한 이란 국민들의 대대적인 항거는 무력진압을 맞이하고 이는 결국 혁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페르세폴리스>는 독재정권을 붕괴시킨 혁명이 발발한 1970년대 이란에서 시작된다. 마르잔은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자유로운 집안에서 자라 활발한 아이다. 이소룡을 좋아하는 소녀는 혁명의 기운이 증폭되는 테헤란에서 지인들과 자유를 논하는 부모님들의 성향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스스럼없이 혁명을 외친다. 결국 혁명은 이뤄지고 독재왕권은 몰락하며 사람들은 저마다 좋은 세상을 기대한다. 하지만 새로 들어선 마호메니 정권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토대로 한 새로운 정권의 기치를 강압적으로 밀어붙이고 이로 인해 국민들은 혁명 이전의 정권보다도 더욱 극심한 탄압에 시달린다.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던 여성들에게 챠도르를 씌우며 극심한 보수로 들어서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도 마르잔은 펑크락을 듣고, 강압에 저항한다.

혁명과 독재, 그리고 전쟁까지, 강압의 알레고리들이 넘실대는 굴곡이 심한 시대적 상황을 견디기에 마르잔은 너무나도 자유분방하다. 결국 마르잔의 부모는 딸의 왕성한 혈기가 지독하게 폐쇄적인 이란의 현실을 인내하기엔 역부족임을 깨닫고 마르잔을 프랑스로 유학 보내고 만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타국에서 삶을 꾸려야 하는 소녀는 끝없이 방황하다 결국 피폐해지고 나서야 다시 이란의 부모곁으로 돌아온다. 물론 여전히 이란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강압적 폐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란의 정치적 현실을 단순하지만 명쾌한 이미지로 그려낸 <페르세폴리스>는 간단히 말하자면 마르잔의 성장담이라 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녀가 격변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의 육체라는 점이 간과될 수 없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유쾌하고 활기차게 세상을 바라보던 소녀가 자조적이고 망연자실한 눈빛의 여인으로 자라나기까지, 그 순탄치 않은 삶이 이란의 격동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에 저항했던 민중의 외침이 또 다른 견고한 형태의 억압을 이루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역사적 아이러니는 소녀의 성장기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개인의 정체성에 의문을 부여한다. 국가적 억압으로부터 탈출하듯 파리로 출국한 마르잔이 그곳에서 느끼는 생경함은 결국 자기 정체성의 자각기회를 박탈당한 인간의 고독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게 만드는 체제적 오류는 끝내 수정되지 않으며 결국 그 안에서 개인은 고통을 인내해야 할 따름이다. 마르잔은 오류적 믿음을 강압하는 폭력적 체제 속에서 방황하고 인내하는 과정을 거치며 문득 깨닫는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세상과 맞서야 한다는 것을.

심플한 영상은 때론 재기발랄한 웃음을 유도하며 때때로 뭉크의 ‘절규’와 같은 표정으로 경악을 표출한다. 단순하지만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캐릭터들의 명확한 표정만큼이나 뚜렷한 가치관을 지닌 <페르세폴리스>는 설득력을 갖춘 이야기를 통해 올곧은 정치적 자의식을 강건하고도 유연하게 전달한다. 대부분 흑백컬러의 영상으로 이뤄진 <페르세폴리스>는 (8만장의 드로잉 작업 덕분인지 몰라도) 아날로그적인 호감을 부여하며 때론 기록처럼 읽히는 이미지에 설득력을 더한다. 긴 고난의 여정 속에서 어느 새 성숙해버린 마르잔은 다시 한번 파리에 홀로 서지만 그녀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두려움은 이성을 잃게 하고 사람을 비굴하게 만든다’는 할머니의 충고처럼 마르잔은 ‘항상 정직하게 살라’는 의미를 드디어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이란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소망한다. 그렇게 소녀는 거대한 비겁한 체제의 폭력에 대항하는 건강한 방식을 터득하며 한걸음 앞으로 내딛는다. 그리고 우리는 소망(해야) 한다. 그녀에게 금지된 것들을.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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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란 무엇인가. 홍상수 감독은, 혹은 그의 영화는 항상 그 고민을 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답다라는 말이 현실적이다라는 말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아니면 얼마나 결부되어 있는지, 그의 영화는 항상 그걸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사실 나는 생각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스크린은 가끔 (혹은 대부분) 현실을 향해 젖혀놓은 창처럼 보인다. 실제로 촬영 순간에 임박해서야 배우에게 대본이 주어진다는 그의 영화작업을 생각해보자면 영화라는 작업이 현실이라는 중력을 거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밀착해갈 수 있다는 믿음의 소산물 같다는 생각을 품게 만든다.-물론 이것이 숭고하다라는 식의 작위적 수식어로 의미 부여되지 않길 바란다.- 홍상수 감독의 8번째 작품 <밤과 낮>을 보고나니 마치 그의 영화가 너무나 현실 같아서 낯설다는 느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동시에 그것이 영화라는 기교적 장막을 모두 다 걷어내고 나서야 온전한 감상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비취색을 띠는 창호지 재질(같아 보이는) 종이 위에 붓 펜으로 쓰인 듯한 궁서체 프롤로그가 무언(無言)으로 말하듯 <밤과 낮>은 대마초를 피웠다가 들켜 파리로 도피한 국선화가 김영남(김영호)의 34일 간의 수기(手記)다. 3인칭 관찰자 시점 혹은 전지적 작가 시점의 프롤로그가 지나가고 나면 파리 공항에 도착한 김영남의 모습이 등장하고 그로부터 그의 34일간의 고백담이 펼쳐진다. 서사의 영역을 구분하는 날짜가 프롤로그와 마찬가지 형식으로 잠깐 동안 화면을 정적으로 메우고 나면 그의 일기체 내레이션 혹은 그의 일상적 행위들이 그 간격 사이를 채운다. 간격에는 일정한 룰이 없으며 그 간격의 단위도 일정치 않다. 그건 때로 하루가 되기도 하고 이틀이 되기도 한다. 김영남의 독백은 일기체 형식으로 이뤄지지만 그건 왠지 기록된 것이 아닌 것 같다. 마치 기억의 단편을 끄집어 내듯 자신의 기억 속에 담긴 선명한 것들을 차례대로 끄집어 나열한 것에 불과해 보인다. 그래서 그것은 자신이 추억하고 싶어하거나 잊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선명하고 구체적이지만 자신의 무의식 중에 기억났거나 기억나지 않은 것들은 어떤 내레이션을 동반하지도 않거나 그냥 가볍게 뛰어넘어버린다. 이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밤과 낮>이 엄연히 김영호의 기억에서 끌어들인 수기이며 그의 시점으로 이뤄진 단상들의 조합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은 대부분 그의 시점을 통해 그녀들을 대하거나 감상하고 세상을 관조하거나 살아갔다. 하지만 이를 남성중심적인 태도라고 말하기 석연찮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녀들 앞에서 속물이었을 뿐이니까. 남성을 위한 합리화는 없었다.-물론 그들을 향한 질시가 필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밤과 낮>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밤과 낮>의 시점은 전작들과 미묘하게 다르다. 그건 <밤과 낮>의 일기체 형식의 서사와 관련이 있다. 일기란 지나간 일을 기록하는 행위이며 그 형식을 따르는 <밤과 낮> 역시 지나가버린 과거와 대면하는 회상이란 의미다. 전작들이 현재형의 이야기를 했던 것과 달리 <밤과 낮>은 과거형의 이야기를 하며 이는 전작들과 <밤과 낮>의 형식이 달라진, 혹은 달라져야 했을 근간적 연유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일기체 형식의 서사는 상당히 어울리는 방식으로 느껴진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일상에 대한 퇴고처럼 삶을 대구로 반복하곤 한다. 그렇게 반복되는 삶은 일상의 흐름의 지속 그 자체를 드러낸다. 그 반복적인 일상이 대구로 느껴지는 건 그 일상을 부유하는 인간의 심리가 변모되기 때문이다. 변화는 삶을 채우는 인간의 내부에서 비롯된다. <밤과 낮>은 그 일정한 흐름 안에 담긴 인간의 미묘한 대구적 삶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밤과 낮>의 대구를 이루는 건 시간과 공간의 진리적 변화일 뿐, 행위가 아니다. 이야기 흐름의 양면성을 이루던 주체적 행위는 서사 위를 흐르는 시간의 범주 위에서 흘러가고 그 주변의 영역이 대구를 이룬다. 파리와 서울, 그리고 꿈과 현실. 파리로 도피한 영남의 좌절감이 유정(박은혜)을 만나 기묘한 설렘으로 변모하기까지, 그리고 유정과 사랑에 빠진 뒤 갑작스럽게 서울로 돌아와 성인(황수정)과 재회하기까지, 균등하지 않은 서사의 흐름을 따르는 <밤과 낮>은 일상을 더듬어가는 편린의 기억을 통해 영화의 재현성을 갖춤과 동시에 현실을 반추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현실소통의 언어로 재생된다.

파리라는 지정학은 이질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한국적 소통을 부각시키는 보색적 환경성을 띠고 있다. 이는 시시콜콜한 한국적 풍경을 가득 내포하고 있음에도 타향의 감수성-구체적으로 프랑스-을 연상하게 만들던 전작들을 떠올렸을 때 역설적이다. 이는 홍상수 감독이 에릭 로메르나 장 으스타슈와 같은 누벨바그 양식을 따르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현실을 낯설게 만드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들의 행위는 비현실적이라기 보다 비(현대상업)영화적이다.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 대사나 명확하지 않은 동선은 결벽한 연출력과 거리를 두며 영화적 현실에서 그들은 타자화되어 공간의 기운을 변질시킨다.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이질감의 기운은 공간을 생소하게 만든다. –이는 현실의 모순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브레히트적인 것과 맥락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밤과 낮>은 (본래 홍상수 감독이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단순히 국적의 관계에 상정되지 않고 지정학적 중력에서 이탈하던 홍상수식 영화들의 근본적 까닭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밤과 낮>은 홍상수 감독의 변처럼 밤과 낮의 서사가 다른 지구 반대편을 가로지르는 통화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이야기다. 대구적인 시간의 영역 속에서도 공유되는 동 시간대의 삶. 결국 보편적인 삶은 인간의 중력들이 끌어당긴 관계로 이뤄지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기억으로 채워진 서사가 된다. 그 보편적인 삶 속에는 기억나는 서사와 기억나지 않는 서사가 부유한다. 결국 인간의 삶은 특수한 기억으로 의미가 부여되는 보편적인 서사의 일부에 불과하다.

<밤과 낮>은 삶이라는 특이한 서사 위를 흐르는 고유의 시간이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한계영역이다. 그 삶 안에는 현실이 있고 동시에 꿈이 있다. 꿈과 현실은 각각 우리의 밤과 낮을 지배하는 또 다른 삶의 영역이며 그 영역 위에 존재하는 우리는 꿈을 꾸거나 현실을 살아가며 그렇게 밤과 낮을 지나 자신만의 기억으로 채워진 특별한 삶을 꾸려나간다. 마치 하늘을 채우는 구름이 매일같이 그 너비를 달리하듯 인간의 삶은 보편적인 시간의 영역 속에서 자신만의 삶을 채워나갈 따름이다. 미묘한 기법의 변화도 눈에 띠지만 <밤과 낮>은 통찰과 직관을 아우르는 화폭의 순수한 역량을 먼저 느끼게 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바로 영화라는 고민에 대한 홍상수 감독의 진심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성의 음부를 ‘세상의 기원’이라 했던 쿠르베처럼 홍상수 감독은 현실의 진솔한 풍경을 영화의 기원이라 말하고 있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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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happiness), 기쁨(pleasure), 슬픔(sorrow), 사랑(love). <내가 숨쉬는 공기>에서의 공기(air)란 기화된 원소의 질량을 가늠하기 위한 명명이라기 보단 부피로서 상정되는 공간성에 대한 공유를 의미하는 것에 가깝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가늠할 수 없는 동선의 접촉으로 이뤄지는 타인간의 관계 맺기. 일정한 시공간의 공유로 인해 교차되는 동선의 필연적인 접촉은 활성화된 원소들의 충돌이 이루는 개인의 삶이 지닌 질량을 재기 위한 것과도 같다.

네 가지 감정의 문구들로 경계를 정한 뒤, 제 각각의 동선을 배회하는 <내가 숨쉬는 공기>는 은밀한 접점을 이루는 옴니버스 형식의 에피소드를 통해 하나의 결과를 도출한다. 각각의 이야기는 시작에서 명명되는 테마에 맞는 이야기를 수행하는데 그에 따라 이야기의 중심 인물도 각각 달라진다. 미묘하게 맞닥뜨리거나 혹은 무의식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 인물들의 개연성은 적당한 이해심을 동반한다면 그만큼의 설득력을 지닐 만큼은 된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숨쉬는 공기>는 스토리텔링으로 보자면 옴니버스라는 분절된 형식에서 일관된 맥락을 놓치지 않는 어리석은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고 역량이 충분한 배우들이 포진한 만큼 그들을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감상을 부를 여지는 충분하다. 하지만 각각의 사연이 담고 있는 테마는 이야기의 내면에 비해 과잉의 인상을 부른다. 말 그대로 행복이라 부르기 애매한 것을 행복처럼 위장하는 전술처럼 <내가 숨쉬는 공기>는 자신이 내건 테마에 이야기의 구색을 맞추거나 혹은 그런 것처럼 보이게끔 유도한다. 구체적인 주제 의식에 비해서 모호한 의미로 여운을 남기는 각각의 이야기는 결론에 이르러 명확한 상을 남기지만 그만큼이나 전자의 주제들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인지 애매하게 만든다. 그건 아무래도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겉멋이라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내가 숨쉬는 공기>는 이야기의 개연성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는 점에서 스토리텔러로서의 이지호 감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게 만든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걸출한 배우들을 총동원하게 만들었다는 그의 시나리오가 궁금해지는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필연을 가장한 우연을 통해 개연성을 확보하는 이야기를 특정한 주제의식으로 엮어 넣으려는 의도는 다분히 무리수처럼 보인다. 배우들의 녹록하지 않은 연기를 지켜보는 것으로 상쇄되지 않는 싱거운 뒷맛은 아무래도 이 때문이다.

(씨네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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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이분법으로 나누던 냉전의 이데올로기가 시대적 유산으로 기억되고 있다 해도 대한민국은 여전히 냉전의 접경을 품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다. 물론 그 앙상한 경계 이남에서 살아가는 대부분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이를 체감하지 못하는 불감의 시대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20대 초중반을 지나는 남성에게 날아올 입대영장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이데올로기의 현재를 일시적으로 자각하게 만든다. 이념의 대립이 만든 불길은 잦아들었음에도 그 불씨는 여전히 이 땅에 주거한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이념적 강압의 폐쇄성을 한번씩 경험케 한다.

공수창 감독은 전작 <알포인트>를 통해 베트남 참전이란 한국 근대사의 유물론적 트라우마를 소환시켜 외부에서 발생한 폭력의 전장에 내몰린 이들의 내면적 공포를 장르에 빙의시키며 그 공포를 야기시킨 실세들의 죄의식을 물었다. 이와 반대로 <GP506>은 그 구시대적 산물이 현전하는 이 땅의 구태의연한 지표로 침투해 들어가 시대적 흐름 속에 함몰됐을 뿐, 여전히 뇌관이 살아있는 한반도 이데올로기의 잠재적 실체를 추적한다.

GP(Guard Post)는 휴전선 남방한계선보다도 북에 가깝게 위치한 최전방초소로서 북의 동태를 살피는 최전선이라 할 수 있다. 비무장지대라는 명칭이 무색하게도 무장태세를 갖춘 병력들이 상주하는 GP는 결말을 보지 못한 유효한 전쟁이라는 잠재적 불안 속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한반도의 아이러니를 극단적으로 대변하는 영토에 가깝다. 구시대적 망각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문서적으로 유효한 이념적 폭력은 그곳을 거니는 소수의 청년들에게 일시적으로 묵언적 힘을 행사한다.

<GP506>은 그 불분명한 형태를 지닌 이념의 실체로부터 발생하는 살상의 정체에 대한 이야기다. 아들과 함께 죽은 부인의 영전을 지키던 국방부 군수사대 소속 노성규 원사(천호진)는 최전방GP에서 벌어진 소대원 몰살 사건 수사에 즉각 투입된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사건의 실체를 추적하는 동시에 고위 장성인 육군총장의 아들, GP506의 GP장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 후, GP에 도달한 그는 끔찍하게 살해당한 GP소대원들의 시신을 마주보며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라는 의문을 얻게 되지만 영문을 알 수 없는 생존자들의 묵묵부답은 이를 윽박지르게 만든다.

유일한 생존자였던 강진원 상병(이영훈)은 의식불명의 중태에 빠져있고, 그 와중에 본래 GP소대원의 수에서 하나가 모자랐던 시신의 수는 생존자의 발견으로 채워진다. 그는 자신이 GP장 유정우 중위(조현재)라고 주장하면서도 사건의 실체에 대해 묵묵부답이며 오히려 남몰래 증거를 파기시키려 한다. 결국 원인은 쉽게 규명되지 않고 사건은 점점 미궁에 봉착하며 그 와중에 GP로 들어선 새로운 병사들은 이상한 기운에 휩싸인다. 접점이 보이지 않는 난자된 의문의 더미 속에서 수사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며 그 사이에서 은폐의 의혹은 짙어진다. <GP506>은 미스터리를 표방하며 장르적 특성을 부각시키고 있지만 사실 그 외피가 감싸고 있는 본심은 정치적인 것에 가깝다.

소대원이 몰살당한 내무반의 참상은 결코 보편적이라 말할 수 없는, 특수 사례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군대라는 폐쇄적 체제가 유발할 수 있는 극단적 폭력의 잠재적 재현이란 점은 심상치 않다. 그들에겐 때로 실체조차 가늠할 수 없는 이북이란 객관적 주적보다도 배타적인 계급적 폐쇄성으로 이뤄진 내부적 체제에 대한 주관적 증오가 가깝게 도사린다. 폭력을 억누르기 위한 폭력의 방식으로 순환되는 체제의 유지는 개인적 자의식을 억압으로 은폐할 뿐, 개개인의 내면에서 남모르게 응축된 체제적 반감은 때로 한계치를 넘어 극단적으로 폭발되곤 한다. 영화와 직결된 사항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GP506>이 2005년에 발생했던 김일병 총기난사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건 소재의 연관성을 떠나서 일방적 통로에 놓인 한국의 징병 체제의 모순에서 비롯된 극단적 사례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칠갑이 된 청년들의 시체는 폐쇄적 체제의 한계성이 빚어낸 극단적 실패의 사례다. 하지만 그 체제의 상석에 앉은 지도부는 그 실상을 묵인하는데 급급할 뿐이다. 수사를 진두지휘하는 노성규 원사는 이에 맞서 의지를 표하지만 드러나는 단서들은 하나같이 새로운 의혹의 미로를 형성할 뿐, 사건의 갈피를 향한 출구를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GP506>은 복잡한 미로와 같은 사건의 실체를 추적하는 동시에 그 미로를 헤매는 이들의 혼란에 주목한다. 음습하게 내려앉은 GP에서 발생한 살상사건의 배후를 쫓는 수사가 좀처럼 진전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현장에 투입된 병사들은 폐쇄적 공포의 미궁으로 한발자국씩 들어선다. 사건에 한걸음씩 다가갈수록 의혹은 짙어지며 규정할 수 없는 새로운 의혹은 남몰래 진전되기 시작한다.

(결정적인 스포일러라 직접 언급할 수 없는) 어떤 원인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GP506 병사들과 무관한 새로운 경계지원병들은 전자들이 맞이했던 파국을 고스란히 이어받는다. 전자와 무관했던 이들이 맞이하게 되는 상황의 반복은 GP라는 동일한 공간에 발을 들인 이들의 운명적 굴레를 상징하며 이는 체제의 유지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프로파간다의 진실과도 같다. 국가의 위기를 강조하여 애국심을 권유하며 이를 볼모로 국가의 권위를 세우는 체제의 비열함은 폭력에 노출된 최전선의 젊은이들의 희생을 애국적 희생으로 미화함으로써 다시 한번 안보의 권위를 굳건히 다진다. 참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중첩되며 진행되는 새로운 파국의 진전은 <GP506>을 어지럽게 분산시킨다. 이와 함께 <GP506>의 미스터리는 쉽사리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끊임없이 이목을 분산시키고 어지러운 동선을 그려나간다. 그 과정에서 인과관계의 접점이 명쾌하게 맞아떨어지지 못하는 장르적 혼선이 발생하기도 하며 동시에 파국적 결말은 모호한 여운을 남기며 다시 원점으로 상황을 되짚게 만드는 무리수도 발생한다.

사실 <GP506>은 <알포인트>와 유사한 이야기 흐름과 캐릭터 구조를 지니고 있다. 군인이라는 동일한 신분의 인물들이 밀폐된 공간에 들어서서 파국을 맞이한다는 과정은 두 작품을 비교선상에 올려놓게 만든다. 다만 전작이 초자연적 현상이라는 심리적 공포를 장르적 매개로 삼았던 것과 달리 후작은 질환적 현상이라는 물리적 공포를 장르적 매개로 삼는다. 하지만 후작은 전작과 달리 원인의 발생지점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어떤 차이를 분명히 드러낸다. <알포인트>가 과거와 타국을 배경으로 하는 것과 달리 <GP506>은 현재와 국내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다. <알포인트>와 <GP506>의 인과적 명확성이 차이를 보이는 건 전자와 후자가 서로 다른 배경을 두르고 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전자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개인들의 죄의식을 다룸으로서 역사적 과오라는 고지를 명확하게 참배한다면 후자는 징병과 휴전이라는 불명확한 현재진행형의 관념적 전선에 내몰려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오류가 발생하고 있음을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원인을 쉽게 규정할 수 없고, 해결책도-혹은 해결의지도- 불분명한 난제는 마치 이유를 알 수 없는 미궁의 사건처럼 불명확할 따름이다.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인과관계의 구조, 그리고 원인을 알게 된 순간 직감할 수 밖에 없는 파국의 결과. 마치 <GP506>의 미스터리는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의 난제를 보는 것처럼 어지럽다.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서 개인을 착복하는 권력의 수혜는 과연 어디로 방출되는가. 군대라는 체제에 편입되어 (상부에서 하부로 가는) 권력적 복무를 완수한 청년들이 만들어낸 사회적 체계는 어떠한가. 전쟁의 상흔으로부터 세월은 멀리 떠내려왔지만 이념의 선전을 통한 권력의 착취는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 <GP506>은 그 모순 같은 반복의 세월을 피칠갑된 청년들의 시체로서 반문한다. 그 죽음이 무엇을 위한 희생인가가 아니라 그 죽음을 착취하는 실체는 무엇인가. 젊은 병사들의 경계는 외면적으로 훈육된 주적을 향하고 있지만 실은 내부적인 강압이 만들어낸 폭력의 구조로 이미 뻗어나간 것임을, 그리고 결국 그 잠재적 가능성의 파국은 언제라도 발화점에 도달해있음을. 결국 권력의 도구로 변질된 이념의 그늘은 폭력적 세뇌를 통해 억압적 체제를 유지시키며 국가적 권력의 수하로서 국민을 몰락시킨다. 혼란을 가중시키는 흐름으로 인해 장르의 집중력이 미흡하다는 거슬림을 인지하면서도 <GP506>이 주목될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유는 이런 속성에서 기인한다. 거대한 국가적 사명감을 통해 개인을 억압하는 체제는 결국 괴질과도 같은 사회적 병폐를 야기시킨다. 결국 그에 종속된 개인들은 강압을 의무로서 수행하며 체제의 병세는 더욱 악화된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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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 조운이라고도 불리는 상산 조자룡은 창술의 달인이자 유비 현덕의 의형제 관우 운장, 연인 장비와 함께 유비 현덕을 가까이 보필하고 후에 유비가 건립한 촉나라의 오호장군에 오르기도 하는 용장으로 그려진다. 장판파에서 유비의 아들, 아두를 구했던 그는 후에 장강에서 오나라 군사로부터 한번 더 아두를 구해오기도 한다. <삼국지: 용의 부활>(이하, <용의 부활>)은 소설 ‘삼국지’가 충직한 용장으로 그리는 조운, 상산 조자룡(유덕화)을 중심으로 개작된 ‘삼국지’라고 할 수 있다.

<용의 부활>은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필자에 의해 번역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바탕으로 하되 영화적 허구를 노골적으로 숨기지 않는다. 유비가 제갈공명에게 삼고초려를 하며 천하삼분의 계를 얻기 이전에 이미 유비는 조운을 가까이 두었다. 또한 장판파에서 조자룡이 아두를 구하기 전, 조조의 군대를 이끌고 온 하후돈과 대적하게 된 박망파 전투에서 하후돈의 군사를 화공으로 괴멸시키기 위한 유인책에 제갈량은 조운을 이미 중용하기도 했다. 그런 조자룡을 제갈량의 얼굴도 잘 몰랐으며 장판파에서 아두를 구하기 직전에 유비와 처음 대면하는 평범한 병사로 그린 <용의 부활>은 ‘삼국지연의’의 서사를 일부 묵과하고 재편하는 것과 같다.

물론 <용의 부활>에서 상세하게 묘사되는 전후반의 전투는 엄연히 소설에 밑바탕을 두고 있다. 조자룡의 활약을 그리는 전후 두 번의 전투 중 전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삼국지연의’ 중, 조운이 혈혈단신으로 아두를 구출한 장판파 전투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다소 허구가 많이 포함된 후자는 유비와 조조의 사후, 뒤를 이은 촉의 황제 유선을 모시던 제갈공명이 출사표를 던지고 조조의 뒤를 이은 조예의 위나라로 북벌을 결행한 이후, 두 나라의 군대가 처음으로 맞붙은 봉명산에서 선봉에 선 조자룡이 그에 맞선 한덕과 그의 네 아들간의 전투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용의 부활>은 이에 조영(매기 큐)이라는 조조의 손녀를 가상인물로 내세우며 조자룡의 비범한 최후를 그린다.

장대한 서사와 함께 각양각색의 개성을 지닌 캐릭터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삼국지’는 현대에도 다양한 해석과 감상을 부른다는 점에서 효율적이다. 무엇보다도 <용의 부활>은 ‘삼국지’를 토대로 한 영화화 자체란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지금까지 그 장대한 스케일 덕분에 섣불리 시도되지 못했던 ‘삼국지’의 영화화 작업이 무르익은 기술력과 연출력을 기반으로 이뤄진다는 건 분명 매력적이다. 물론 ‘삼국지’의 전사를 영화화한다는 건 상당히 무리한 일이다. <용의 부활>이 조자룡이란 인물을 중점으로 ‘삼국지’를 재편했다는 건 결국 이 장편 서사를 스크린에 옮길 수 없다면 그 일부를 극대화시키는 방편으로 영화화시킬 수 있음을 입증하는 바와 같다. –이는 현재 오우삼의 <적벽>이 인상적인 일부의 서사를 영화화시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소설에서의 관계 구조를 염두에 두지 않고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을 삽입하기까지 하며 사건 자체를 자기 방식으로 재편하는 건 신화적인 영웅들의 이야기인 삼국지 안에서도 조자룡이라는 인물을 극대화시키려는 수단의 방편처럼 보인다. ‘운명은 사람 손에 달려 있다’는 그의 되뇜처럼 <용의 부활>에서 묘사되는 조자룡은 ‘삼국지’ 안의 영웅 조자룡에서 발췌한 인간적 면모의 부각이라고 해석된다. 결국 <용의 부활>은 조자룡의 백전백승 일대기보다도 백전노장의 가공된 실패담을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일깨우고 동시에 영웅이라 불리는 자가 짊어져야 하는 숙명 같은 고뇌를 관객에게 짊어주려는 듯 보인다.

결국 <용의 부활>에서 조자룡은 우리가 아는 삼국지에서의 이름으로 대변되는 고유명사라기보단 ‘영웅’이라는 고유명사에 가깝다. 나안평(홍금보)이라는 가상인물을 관찰자이자 화자로 삽입하며 영웅이 될 수 없는 자의 비애를 조명하는 건 이를 대비시킴으로서 영웅의 고뇌를 부각시키려는 수단으로 보인다. 하지만 <용의 부활>은 이런 의도를 이해시킬 뿐,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삼국지’라는 가상적 원형에 굳이 변주를 넣어가며, 그것도 다소 격에 맞지 않는 여성캐릭터를 배치하면서까지 어떤 구색을 맞추려는 설정은 너무나도 뻔해 보인다. 정사도 아니고 연의도 아닌 ‘삼국지’의 영화적 변주는 그것이 원작과 달라져야 할 합당한 근거를 명석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아 보인다. 결국 이는 원판을 잘 숙지한 이들에겐 오독(誤讀)이 될 가능성이 높고 그렇지 않은 이들에겐 오역(誤譯)이 될 우려의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무예의 현신들이 구체적인 상으로 등장하는 ‘삼국지’는 그 세계관을 스크린에 전시한다는 것 만으로도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 매력을 반감시키는 건 애매모호한 영화의 성취다. 커다란 스펙트럼을 지닌 영웅의 면모에서 인간을 발췌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용의 부활>은 커다란 가능성을 미약한 성과로 깎아 내렸다. 그저 ‘삼국지’라는 소설의 판본을 영화적으로 시도해봤다는 것 이상의 가치가 <용의 부활>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원본을 훼손하는 방식의 무리수를 두고도 탁월한 성과로 거듭나지 못했다는 건 여러 가지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유덕화의 관록이 조자룡의 위엄을 잘 살리고 있다는 점은 일말의 위안이다. 하지만 그를 보좌하는 가상의 캐릭터, 조영과 나안평은 자신을 잉태한 영화의 모성애를 전혀 얻지 못한 채 존재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고 앙상하게 목숨을 부지하다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어떤 인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TIP>소설과 달리 영화는 가상적인 설정을 통해 삼국지를 재편한다. 애초에 원명 교체기에 집필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진나라 진수의 ‘삼국지 정사’를 토대로 민간구전을 덧씌운 문학적 가공을 거쳐 완성됐다는 점에서 이를 원형으로 하는 현대의 ‘삼국지’ 역시 많은 부분을 과장된 허구에 기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유비의 도원결의로부터 시작되는 ‘삼국지연의’는 나관중이 후한 혈통을 계승한 유비가 건립한 촉한을 노골적으로 두둔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며 이런 지적도 적지 않다. <삼국지: 용의 부활>에서 묘사되는 조자룡의 전투의 원형인 '삼국지연의'의 기록을 소개한다.

영화가 조자룡을 처음에 유비군의 일개 병졸 취급하는 것과 달리 조자룡은 이미 공손찬의 휘하에 있을 당시부터 유비와 인연을 맺었고, 언젠가 뜻을 같이 하자는 약조도 나눈다. 결국 후에 공손찬이 원소에게 패망한 뒤, 조자룡은 유비의 휘하에 들어가고 이는 유비가 삼고초려 끝에 제갈공명을 얻는 것보다도 이른 지점이다. 또한 그 이전에 박망파 전투에서 제갈공명이 하후돈을 유인하는 계책에서 중책을 맡길 정도로 조자룡은 공명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조자룡이 공명의 얼굴도 알지 못한다거나 자신이 아두를 구하겠다며 유비 앞에 무명의 장졸로 등장하는 건 영화만의 설정이라 할 수 있다. 조조의 80만 대군에 쫓겨 신야성을 버리고 강릉으로 향하던 유비는 장판파에 이르러 조조의 군대에 가로막혀 고전하고 가까스로 경산으로 피한 유비와 달리 그의 두 아내 감부인과 미부인, 그리고 아들 아두는 고립된다. 유비 가족의 호위를 맡았으나 적들과의 교전 사이에서 결국 그들을 놓친 조운은 30여기의 부하를 이끌고 적진을 헤매다 감부인을 찾아 구출해온 뒤, 다시 장판파로 향한다. 결국 미부인과 아두를 찾았지만 미부인은 상처입은 자신을 이끌고 가면 조운이 힘들어질 것을 알고 우물로 뛰어든다. 결국 조운은 갑옷을 끌러 가슴에 아두를 안고 장판파에서 조조의 80만 대군-실제 정사에서는 5천 정도로 기록됨-을 단신으로 뚫고 간다. 한편, 이를 지켜보던 조조가 조홍에게 급히 물었다. ‘저기 무인지경(無人之境)을 가듯 칼을 휘두르고 달리는 장수가 누구인가?’ 조홍은 조조와 함께 전황을 내려다보던 경산 아래로 내려가 목소리를 높여서 ‘장군! 성함이 어찌되시오?’ 라고 묻자 검을 높게 빼든 그 장수가 외쳤다. ‘나는 상산 조자룡이다! 그대도 내 앞길을 막으려는가?’ 이윽고 조홍이 다시 경산에 올라 조조에게 보고하자 조조는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저 자가 조자룡이구나! 저런 용장이 우리 진에 있다면 천하를 얻지 못해도 한이 없겠다!’ 그리하여 조조는 장수가 상하지 않게 각 진에 활을 쏘지 못하게 명하고 사냥하듯 조운을 몰아 생포하려 했지만 유비의 아들인 아두를 품에 안은 조운은 결국 필사적인 결의로 포위망을 뚫고 장판교를 지키던 연인 장비에게 뒤를 맡기고 유비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그 뒤로 조운을 쫓던 조조의 군대는 장판파에서 버티는 장비의 위엄에 눌리고 결국 그의 뒤 수풀 속에서 움직이는 기병의 모습에 후퇴를 감행한다. 하지만 이는 불과 20여기에 불과한 기병이 수풀 뒤에 숨어서 오간 것에 불과했다. 이 싸움에서 조운은 조조가 총애하는 하후돈의 동생 하후은을 죽이고 그에게 조조가 하사한 보검인 청강검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후, 유비는 결국 오나라로 넘어가 손권에게 의탁하고 이는 그 유명한 적벽대전으로 이어진다.


조영이라는 조조의 손녀를 가상인물로 내세우며 조자룡의 비범한 최후를 그리는 <용의 부활>과 달리 ‘삼국지연의’에서 조자룡은 전사하지 않았다. 조자룡의 비범한 최후를 그린 <용의 부활>의 후반부는 유비의 사후, 유선-조자룡이 두 번에 걸쳐 구한 아두-이 촉의 황제에 오른 뒤, 그 유명한 출사표를 던지며 단행했던 제갈공명의 북벌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북벌군을 편성할 당시 제갈공명은 조자룡의 나이를 염두에 두어 그에게 임무를 맡기지 않았다. 하지만 촉의 오호장군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제갈공명과 함께 남만정벌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던 조자룡은 출전을 요청하고 공명도 그의 뜻을 받아들여 등지를 부장에 두고 5천 군사를 주어 그에게 선봉의 임무를 맡긴다. 이에 위의 대장을 맡은 하후무는 자신의 네 아들과 함께 한덕을 선봉으로 삼아 조자룡에 맞서게 했다. 하지만 결국 영화에서와 같이 한덕의 네 아들은 조자룡에 의해 제압당했는데 영화와 달리 둘째인 한요는 사로잡았고, 나머지 세 아들인 한영, 한경, 한기는 모두 조자룡에 의해 죽음을 면치 못했다. 또한 한덕 역시 하후무의 질책에 부끄럼을 참지 못하고 조자룡과 교합을 벌이지만 결국 그도 창에 찔려 죽었다. 한편, 그 뒤로 봉명산에 진을 친 하후무의 참군 정욱의 아들 정무가 세운 계책에 빠진 조자룡은 위군의 매복군에 둘러싸여 고립되는 위기에 처했지만 관우와 장비의 아들인 관흥과 장포로부터 구출되었고, 그 뒤로 전투에 앞장서며 혁혁한 공을 세우다 후에 공명의 명을 어긴 마속으로 인해 중요한 고지였던 가정(街亭)을 위의 사마의에게 뺏긴 후, 결국 공명은 한중으로 귀환했다. 이때 조자룡은 마지막까지 후방을 사수했으며 후에 제갈공명이 직접 이 공을 치하했다. 또한 그 후, 명을 어긴 마속을 문책한 공명이 결국 그를 처형하라 명한 뒤, 통곡했으며 이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유래가 되기도 했다. 그 후, 한중에서 북벌을 위해 공명이 군대를 조직하는 중에 조자룡은 천수를 다했고, 그가 죽던 날 공명의 집 앞뜰 소나무 가지가 부러졌다고 한다. 그 후로 북벌을 거듭하는 공명과 그에 맞서는 사마의의 전투가 거듭된다. 한편, 1차 북벌 당시 공명은 마속을 잃은 대신 강유를 얻었으며 강유는 훗날 공명의 뒤를 잇는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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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으로 한걸음 들어갔다. 그러나 돌아 나와야 할 때 그 길은 끝이 없는 길이 돼있었다.' 우민(송승헌)의 독백과 함께 미끄러져 나가는 <숙명>은 시작부터 파국을 예감하게 만든다. 돌아나올 수 없는 어둠으로 들어간 수컷들의 이야기, 이쯤 되면 우리가 종종 느와르라고 정의하는 장르적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숙명>은 의리와 우정이란 남자들의 비범한 가오를 알량한 허세로 전복시키는 느와르의 세계관을 선포하며 말문을 연다.

전사를 과감히 중략한 채 한 차례의 액션 시퀀스로부터 튕겨져 나가듯 시작되는 <숙명>은 전반부에 이미 관계의 엇갈림을 드러내며 갈 길을 명확히 둔다. 배신과 복수의 상관성은 <숙명>이 필연적으로 몸을 내던질 숙명적인 마찰이다. 조폭성이란 껍데기를 뒤집어 쓴 의리라는 집합의 원소로서 남성성의 교열을 맞춰나가는 수컷들은 피비린내를 동반한 배신의 필터를 거쳐 파국의 내리막길로 뒤엉켜 구른다. <파이란> 등과 같은 작품의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연출하기도 했던 김해곤 감독은 그의 지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숙명>에서도 촌철살인의 대사를 통해 진창 같은 영화적 현실을 환기시킨다.

빠르게 돌진하던 초반부와 달리 <숙명>은 시간의 공백을 두고 다시 시작되는 사연을 통해 이야기의 리듬을 한차례 느슨하게 조율한다. 배신으로 인해 파국을 맞이한 얄궂은 의리는 돌아온 탕아로 인해 피비린내 나는 복수로 이어질 법한데 <숙명>은 그로부터 잠시 숨을 돌린다. 단순한 복수 신화로 대책 없이 승천하기 보단 현실적인 국면으로 천착한 드라마적 선을 살리려는 것인지 영화는 혈기를 누르고 흩어진 관계의 복원에 힘쓰는 우민의 고군분투를 조명한다. 물론 그 중간에 우민과 대립선에 선 철중(권상우)과의 마찰이 삽입되고 약물 중독에 빠진 도완(김인권)은 인물들의 심리적 혼란을 야기시킨다. 그리고 우민과 과거 연인 관계였던 은영(박한별)의 사연이 주변을 맴돌며 속내를 알 수 없는 영환(지성)이 전반적인 관계를 유일하게 오간다.

중첩되고 혼밀한 캐릭터의 상관성을 이루는 <숙명>은 개별적인 캐릭터의 사연을 이야기에 엮어내려다 오히려 본래 이야기의 선을 지워버린다. <숙명>에는 분명 일관된 이야기의 선이 있으나 군웅할거하듯 제 각각의 개성을 드러내려는 캐릭터들은 중구난방하듯 난립하여 이야기를 부질없이 헤매게 만든다. 물론 애초에 <숙명>은 차라리 캐릭터 영화였다고 말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 사연의 밑바닥을 드러내지 못해도 적당한 유추가 가능할 정도로 가공된 캐릭터들은 이를 반증한다. 하지만 마치 제 목소리를 내는 캐릭터들의 사연은 비중에 따른 목소리 차이만이 있을 뿐, 저마다 딴소리를 내다가 일관된 이야기의 밀도를 훼손한다. 장르도 있고, 드라마도 있고, 캐릭터도 있지만 <숙명>은 이를 녹여낼 발화점을 찾지 못하고 불씨를 찾아 헤맨다. 그 과정에서 각자의 캐릭터가 지닌 사연은 좀처럼 간극을 좁히지 못하다 감춰둔 필살기로 승부를 끝내듯 캐릭터의 이면에 감춰둔 비수 같은 반전을 통해 비극적 결말을 내던지곤 황급히 상황을 종식시켜버린다.

<숙명>은 불균형한 영화다. 마치 발화점이 다른 연료들을 연소시키기 위해서 무리하듯 온도를 높인 것만 같다. 물론 캐릭터를 뒤집어 쓴 배우들은 모두 다 하나같이 안간힘을 다하곤 있다. 그러나 원래 타고난 이미지에 갇혀서 외모를 전시하는 수순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누구의 캐릭터와 전체적인 극의 무게감 안에서 홀로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듯한 기이한 캐릭터로 정리된 누구의 캐릭터를 보고 있자면 <숙명>의 가장 큰 적은 캐스팅이 만들어낸 배우와 캐릭터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회의감이 든다. 그렇다고 배우의 연기력을 탓하기엔 마녀사냥 같고, 감독의 연출력을 꼬집기엔 부적절해 보인다. 이는 전체적인 조율의 문제다. 송승헌과 권상우, 그리고 우정출연이라는 형식으로 끼워 맞춘 지성까지, 꽃미남들을 비열한 거리로 내몬 <숙명>은 적어도 그들에게 진정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거리에서 그들이 소모될 수 밖에 없는 설득력 있는 인상을 부여했어야 했다. 하지만 <숙명>은 스크린을 빛나는 외모의 한류스타를 전시한 쇼윈도처럼 행세하고 있다. 그 와중에도 캐릭터의 날을 세우는 김인권은 산만하게 매장된 캐릭터의 전시관에서 연기적 구색을 맞추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허망하게 소모된다.

<숙명>이 의리를 참을 수 없는 저열함으로 몰락시키는 건 수컷들의 본능적인 책임감에서 비롯된 성공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숙명>은 남성성의 신화처럼 호명되곤 하던 의리의 저열함을 한시적으로 드러낸다. 하나같이 가족이라는 자신들의 원천적 기반 앞에서 약해지거나 소신을 굽히는 남성들은 자신의 울타리를 지키고자 하는 본능 앞에서 강인해짐과 동시에 비굴해진다. 철중이 친구들을 배신했던 것도, 우민이 복수라는 날을 세우기보단 삶을 바라보는 것도, 하나같이 그 귀속적 본능을 모른 척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느와르라는 장르적 감수성에도 부합할 수 있는 내면적 가능성이 <숙명>에 분명히 잠재되어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마저도 <숙명>은 소품처럼 활용한다. 자신의 울타리를 지키고자 하는 남성의 막중한 본능적 책임감보다도 의리를 앞세운 지독한 오지랖을 확인시키는 <숙명>은 결국 자신의 본심이 무엇인지도 헤아리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를 폼생폼사의 소모품으로 전락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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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으로 만든 리얼 돌(real doll)을 애인이라고 소개하는 그를 미친놈 취급하기 전에 ‘라스는 착한 녀석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그 곳은 분명 선량한 사람들의 공동체다. 하지만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이하, <사랑스러운 그녀>)는 현실에서 반허공에 뜬 착하기만 한 이야기라고 지나칠 수 없는 영화다. 그건 착한 이야기가 절실한 감정을 진심 어린 표정으로 내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의 접촉을 극단적으로 기피하는 라스(라이언 고슬링)는 함께 식사를 하자는 형수(에밀리 모티어)의 권유에 머뭇거리다 달아나고, 여자 직장동료(켈리 가너)의 적극적인 관심도 피해 다니기만 한다. 하지만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항상 온화한 얼굴로 기억되는 착한 사람이며 독실한 기독교도로서 인망도 두텁다. 하지만 항상 자신의 집에 홀로 박힌 그의 일상에 대해 형수는 걱정이 깊고 이웃들의 친절한 관심은 끊이지 않는다. 그런 그가 어느 날, 형의 집을 찾아와 멀리서 자신을 찾아온 여자친구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한다. 의외의 소식에 화색이 된 그들은 그녀에게 내어 줄 방까지 준비하며 설렘을 감추지 못하지만 이내 그가 데려온 그녀의 정체 앞에서 멍해질 따름이다. 그가 데려온 모종의 여인, 비앙카는 실리콘으로 만든 섹스토이 리얼 돌이었기 때문이다. 더욱 큰 문제는 장난이나 농담이라 말하기엔 너무나 진지한 그의 태도다. 그는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리얼돌을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비앙카라고 소개하는 라스와 대면하는 이들의 당혹감은 설명할 필요 없이 표정만으로 드러난다. 게다가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돌아올 리 없는-인형과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행동하는) 라스의 모습을 (관객으로서가 아닌 극 중 주변인으로서) 지켜본다면 심히 걱정이 앞설 것이 자명하다. 물론 당연히 라스의 곁에서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형과 형수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그의 이해할 수 없는 애정표현에 대해서 걱정하거나 때론 뜨악한 심정을 토로한다. 하지만 인형을 향해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흉측하게 바라보는 대신 그 특별한 로맨스의 주인공을 위한 연극에 기꺼이 조연으로 참여하는 그들의 노력은 진심만이 전달할 수 있는 감동을 숙성시켜나간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은 점차 행위에 진심을 담기 시작하며 허구적인 이야기는 점차 실존의 설득력을 얻기 시작한다.

<사랑스러운 그녀>에서 라스의 리얼돌은 마을이라는 공동체, 즉 인간적 유대감을 흔드는 어떤 물음과도 같다. 라스의 기이한 애정행각은 망상(delusion)이라는 의학적 진단을 얻지만 그의 주변에 있는 이들은 라스를 환자 취급하려 들지도, 그를 섣불리 치료하려고 들지 않는다. 단지 그의 애인 비앙카를 자신들의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사랑을 인정할 뿐이다. 그 과정을 이뤄내는 건 선량한 이들의 무조건적인 감수가 아니라 선택이다. 비정상과 정상에 대한 구별이 아닌 소수의 특수성을 받아들이는 다수의 포용력. <사랑스러운 그녀>가 특별한 이야기 이상의 값어치를 매길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자신과 다른 타인, 혹은 대부분과 다른 소수의 행위를 비정상으로 판명 짓지 않는 선택은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에 대한 이성적 도발을 감성적인 유대감으로 극복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인간미로 거듭나며 이는 상처받은 인간을 치유하는 현명한 처방전이기도 하다.

영화가 드러내는 것처럼 태생적 트라우마에서부터 기인한 라스의 방어적 본능은 성장기에 견뎌내야 했던 외로움을 통해 더욱 견고해진다. 자신의 외로움을 털어내는 것에 익숙지 않은 라스는 몸만 성장한 채 소통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어른이’다. 타인과의 접촉만으로도 통증을 느끼는 그의 질환은 지독한 애정결핍에서 비롯된 방어적 본능에 가깝다. 그가 유일하게 소통을 거부하지 않는 상대가 인간이 아닌 리얼돌이 된 것도 그가 접근하기엔 타인의 체온은 너무 뜨겁기 때문이다. 관계에 있어서는 미숙아에 가까운 라스의 칩거에 가까운 일상은 비앙카를 통해 활동영역을 넓히고 점차 관계적 소통의 폭까지 넓혀나간다. 라스는 자신의 내면을 비앙카와 동일시하며 스스로가 쉽게 드러내 보일 수 없었던 내면적 고뇌를 비앙카라는 대리적 자아에게 투영해 타인과의 소통을 시도하거나 혹은 관심을 유도한다. 결국 비앙카는 라스의 태생적 모성 결핍을 치유하는 대리모이자 폐쇄된 내면에 갇힌 자아를 이끄는 구원의 손길과도 같다. 비앙카의 손을 잡고 소통의 걸음마를 한걸음씩 내딛는 라스는 결국 홀로서기가 가능한 지점에서 비앙카와 이별을 고하게 된다.

현상보다도 그 안에 놓인 인간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 <사랑스러운 그녀>는 인간이 지닐 수 있는 투명한 믿음에 대한 이야기다. 순백으로 채색된 선량한 감정적 동의를 요구하지 않으며 순수란 이름으로 가공되는 기성복 같은 감동을 값싸게 내놓지도 않는 <사랑스러운 그녀>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유유히 흐르는 플롯 위를 부유하듯 떠내려오는 일목요연한 감정의 유유자적함이 돋보인다.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며 감정의 격양을 부르기보단 한산하게 흘러내리는 시냇가처럼 한껏 여유로운 <사랑스러운 그녀>는 흐르는 물길 주변의 여백에 채워진 이웃의 군상을 확인하게 만든다. 홀로 선 이의 어깨에 손을 올려줄 수 있는 인간들과의 소통이 가능한 그곳은 우리가 결코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믿음과 신뢰가 존재하며 이는 인간이 지닐 수 있는 투명의 소박한 극치에 가깝다. 너와 나의 차이를 넘어 우리를 이루는 믿음의 소통, 그 인간적 신뢰로부터 한발씩 디뎌나가는 <사랑스러운 그녀>는 선량한 눈빛을 넘어 끝내 투명한 감동으로 성장한다. 이는 종종 우리가 기적이라 부르는 것과 매우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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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치는 쇠는 불꽃을 튀며 돌을 부순다. 단단한 두 형질의 충돌은 약한 쪽의 육체를 박살내고야 만다. 귀를 후벼 파는 듯한 파열음의 공명에서 비롯되는 <데어 윌 비 블러드>(이하, <블러드>)는 파국적 결말을 암시하듯 경보를 울리며 시작되고 그와 함께 시선에 잡힌 산은 마치 무언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절대적 존재의 형상처럼 보인다.-하근찬의 ‘수난이대’에서 마지막에 언급되는 산의 형세와 같이- 마치 그곳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라는 것을 예감하고 암시하듯.

20세기 초, 캘리포니아 석유개발사업의 이면을 파헤친 업톤 싱클레어의 소설 ‘오일!(Oil!)’을 바탕으로 제작된 <블러드>는 한남자의 야망을 읽어내려가는 일대기다. 깊은 갱도 속에서 홀로 곡괭이질을 하는 남자 곁을 지키는 카메라 앵글의 건조한 시선은 의문스러운 갈증을 느끼게 할 정도로 묵묵하다. 그 뒤, 갱으로 추락해 다리가 부러져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하던 남자가 무언가-은으로 추정되는-를 찾아낸 뒤 힘겹게 땅 위로 올라 산을 기어내려가는 집념을 묵묵히 주시하는 앵글 너머로 갈증은 다시 한번 도모된다.-그 직후, 남자로부터 찬찬히 들어올려지는 앵글의 시선은 시작에서 보여졌던 산을 같은 구도로 다시 올려다보고 사이렌 같은 BGM이 다시 경보처럼 울린다.- 정확히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는 얼마 후, 무리를 이끌고 조직적인 작업을 펼치던 그 남자가 홍조를 띠는 순간, 의문은 해갈된다. 그의 미소를 부르는 건 땅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새까만 석유. 하지만 새어 들어온 희열 너머로 예기치 못한 비극이 밀려온다. 석유가 가져다 준 포만감이 찾아온 지 얼마지나지 않아 그들은 죽음을 맞이하고 목격한다. 그러나 피를 머금은 인간의 욕망은 더욱 어두운 탐욕으로 짙게 드리운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 남자, 다니엘 플레인뷰(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음성이 비로소 들리기 시작한다.

검은 석유의 빛깔은 인간의 어두운 탐욕과 지독하게 어울린다. 땅으로부터 솟구친 원유비를 뒤집어쓴 인간의 미소가 짙을수록 역설적인 사악함도 짙게 드리운다. 그리고 욕망의 중심지대에 바로 다니엘 플레인뷰가 서있다. 그는 <블러드>의 욕망이 시작되는 근원지점이다. 하지만 그는 욕망을 갈취하기 보단 성취하는 타입이다. ‘정당한 우리 몫을 벌거야!’라는 그의 의지는 현실적인 고난을 헤쳐나가는 원동력이자 추진력이 된다. 그는 자신만을 신뢰하고 타인을 경멸하는 염세적 자아를 지닌 자기중심적 인간이기에 때로 오만해 보이지만 결코 어리석지 않으며 자신의 신념을 통해 인생의 좌표를 개척하는, 철저하게 강인한 인간이다. 관계가 분명치 않은 아들 H.W.(딜런 프리지어)를 끔찍이 아끼던 그가 다친 아들을 뒤로 하고 불타는 유정탑으로 달려갔던 것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끔찍하게 아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석유업자이며 가족사업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는 입에 발린 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가 타인을 혐오하는 건 그의 신념이 결코 타인을 배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그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인간관계는 자신이 배려하지 않는 타인 이상의 관계, 즉 혈육(이라는 믿음)이다. 자신의 신념을 십자가처럼 짊어진 남자는 골고타의 언덕과도 같은 고독의 여정을 함께 넘어갈 자신의 분신을 갈망한다.

엘라이 선데이(폴 다노)는 플레인뷰의 대척점이자 그와 가장 밀접하게 닮은 상대다. 그는 외부의 힘을 빌어 자기 신념을 표방하는 인간이며 플레인뷰와 같은 탐욕을 갈망하지만 대비적인 신념으로 스스로를 위장한 자다. 플레인뷰가 엘라이를 혐오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그의 맹신적 태도가 불경스러워서, 혹은 플레인뷰 자신이 반신앙적이라서가 아니라 엘라이가 경도된 신앙을 이용해 은밀하게 플레인뷰의 성취를 탐하고 있는 까닭이다. 엘라이는 플레인뷰의 사업의욕을 통해 활성화된 지역경제를 기반으로 수혜를 누린다. 이는 가족사업을 표방하는 플레인뷰가 지역민의 신뢰를 점해야 할 위치에 위협을 가하는 행위에 가깝다. 유정탑의 부근에서 ‘제3계시교’의 전도를 행하기도 하는 엘라이는 플레인뷰가 유정탑의 개수를 늘려가고 인부를 끌어들일 때 교회를 확장하고 신도를 모은다. 석유사업의 활성화와 함께 변모하는 마을의 풍경 속에서 엘라이의 교회는 플레인뷰에게 쇼에 불과해보이는 성령의 퍼포먼스를 펼친다. 플레인뷰는 자신이 일군 토양 위를 가식적인 숭고함으로 점하려는 엘라이의 행위가 둘도 없는 눈엣가시일 수 밖에 없다.

다니엘 플레인뷰는 <블러드>가 향하는 세계로 통하기 위한 스펙트럼과도 같다. 그의 사적인 탐욕은 그 세계의 탐욕으로 번져나가고 그는 구체적인 탐욕의 상을 지목하는 영화의 내재된 눈과 같다. 하지만 <블러드>는 시대에 대한 적극적인 사유를 펼쳐내거나 정치적 태도를 견지하기 보단 그냥 묵묵히 그 현실을 바라보고 인물의 행위를 지켜본다. 다니엘 플레인뷰는 영화의 전체를 관장하는 주동인물임에 분명하지만 영화는 그에게 악의와 선의 중 어떤 감정이입도 도모하지 않는다. 그의 일대기는 영화의 전부이면서도 전체는 아니다. 영화는 국지적인 인물의 상을 충실히 묘사한다기 보단 인물이 드러내는 일화를 통해 영화의 윤곽을 확장하거나 형성시킨다. 캐릭터를 통해 영화의 일가를 이루지만 영화에는 족보가 없다. 영화로부터 발견되는 시대성은 인물로부터 대변되는 것이 아니라 인물로부터 새어 나오는 기운으로부터 막연히 감지되는 부가적인 영역일 뿐이다. 캐릭터의 일대기로 이뤄진 영화의 골조가 완성하는 건 그들의 일대기를 유도하는 시대의 기운이다. 인간은 시대의 징후를 따라 광기로 들어선다.

<블러드>가 재현하는 현실은 분명 20세기 초, 미국의 자화상이다. 그 시대가 발견한 석유라는 자원을 통해 자본의 가치가 활성화되고 신앙의 소비가 급증한다. 하지만 자본과 결탁하는 신앙은 실상 자본의 수하로 전락한다. 의미심장한 제목처럼 영화가 예감하는 피의 전조는 그 불균형적인 공생 구조 자체만으로 예언된다. 플레인뷰와 엘라이는 시대가 잉태한 두 개의 다른 신념을 지닌 맹주다. 자본과 신앙에 결탁한 신념은 각자 자신의 내부와 외부에 근본을 둔 믿음의 힘을 빌리고 있으며 이 대립적 형태의 신념을 통해 그들은 시대에 배팅을 건다. 모든 것을 독식해야 성이 차는 플레인뷰에게 엘라이는 공생할 수 없는 착취자에 불과하다. 결국 다른 형질을 지닌 욕망의 맹주는 서로 으르렁거리다가 결국 맞붙어 뒹굴고 다른 한쪽의 피를 부른다. 이는 자본을 숭상하는 다른 형태의 믿음, 즉 자아를 믿는 자와 신의 뜻을 비는 자의 충돌과도 같다. 형질이 다른 두 신념은 하나의 가치를 향해 결국 충돌하고 이는 결국 더욱 극악한 신념을 지닌 자를 살아남게 한다. 하지만 그 승리는 살아남은 자를 위한 것도 죽은 자를 위한 것도 아니다.

플레인뷰와 엘라이는 각각 서로를 상대로 한번씩의 공수교대를 한다. 송유관으로 가는 땅을 얻기 위해 자신의 폐부를 찔려가면서도 거짓간증을 완수하는 플레인뷰와 달리 자신의 가식적인 신념을 무너뜨리고 비굴하게 진실을 토로하는 엘라이는 패배자로 몰락하며 자본의 노예로 전수된다. 이는 결국 위선의 탈을 쓴 나약한 신념이 단단한 본성으로 채워진 강건한 신념에 부딪혀 부서지는 형태로 드러난다. 십자가를 거쳐 자본과 간접적인 유통구조를 형성하려 했던 엘라이에 비해 송유관을 통해 자본과 직접적으로 결탁한 플레인뷰-I have a pipeline-의 간결한 유통구조는 자본을 향해 배팅한 두 신념의 승패를 단명하게 갈랐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파멸시키는 시대의 기운은 쇠와 같은 플레인뷰가 엘라이를 돌처럼 부수는 파국을 맞이한다. 결국 플레인뷰는 파멸을 내림으로써 스스로 파국의 무대로 올라선다. 결국 그 처절한 승부는 파멸을 맞이한 자와 파멸을 부른 자 모두 파국의 결말로 뛰어내리게 만든다.

그 파멸의 종국에서 살아남은 건 무엇일까. 믿음의 본체는 사라졌지만 소산은 전도된다. 자본에서 비롯된 집념은 신념의 형체를 막론하고 하나의 광기를 잉태했다. 그 안에서 인간의 존엄성도 성령의 이름도 모두다 몰락하는 형상에 불과하다. 결국 자본이라는 물질주의적 신앙의 태동은 인간의 피를 제물로 한 파멸의 의식을 거쳐 굳건한 제단으로 자리를 잡는다. 마치 원유로부터 솟구치는 불기둥처럼 그렇게 욕망은 한껏 더 활활 타오른다. 그리고 그렇게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시대는 도래했다. 자본을 먹고 자란 미국의 거친 서사는 피로 물든 역사를 봉인한 채 현재를 맞이했다. <블러드>는 그 시대의 광기를 먹고 성장한 미국의 유년기에 대한 쓸쓸한 자화상이다. 하지만 <블러드>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플레인뷰의 마지막 구절-I’m finished-이 아니다. 플레인뷰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란 H.W.는 청력을 손실한 덕분에 그의 변해가는 표정을 남보다 유심히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바라보는 건 인간의 변화, 즉 자본의 광기로 지탱하는 인간의 피폐해져 가는 초상이다. <블러드>는 자신의 아버지가 잉태한 세계를 되돌아보는 동시에 자신이 그려 넣을 새로운 자화상의 청사진을 살며시 드러낸다. 플레인뷰와 엘라이의 시대를 지나 성장한 H.W.(러셀 하버드)는 시대의 광기를 물려받길 거부한다. 그는 스스로 지금이 변화해야 할 때임을 선포하고 –It’s time to make change-플레인뷰의 곁에서 떠난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뒤로 아버지 세대의 광기는 파국을 드리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마찬가지로 <블러드>는 광기를 선포하는 시대의 자화상을 그린다. 이는 현재 미국이란 나라가 짊어진 미래에 대한 불안한 징후이자 과거로부터 이어진 업보의 초상이다. 자본과 결탁한 삭막한 팍스 아메리카나의 출발지를 들여다보는 두 영화는 다른 풍경을 지니고 있지만 같은 것을 보고 있다. 탐욕은 인간을 전진하게 만들지만 결국 이에 이끌려가는 인간은 파멸을 면치 못하거나 파국의 예감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포스트 9.11시대에서 분노를 기회로 국책사업을 펼치던 부시의 악랄함과 달리 혜안을 지닌 어떤 미국인은 자신들을 광기로 몰아넣었던 흐름의 실체를 추적할 수 있음을 정중하게 증명한다. 특히 <블러드>는 과잉 같은 기교를 사족처럼 끼워 넣던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이례적으로 클래식한 고전적 분위기를 관성적으로 우직하게 밀고 나간다. 이는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동시대에 이 작품이 탄생했다는 우연적 사실과도 연관된다. 인간의 존재의 가치가 날로 나약해지는 시대의 불길한 징후, 두 영화는 같은 것을 주목하고 있다. 가치가 전복되는 시대에서 중후한 두 작품은 시대의 질서를 다시 한번 새롭게 정립해야 함을 중후한 고전적 화법으로 드러낸다. 또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배경음을 거세함으로써 시대의 앙상한 기운을 건조하게 묘사했던 것과 반대로 <블러드>는 마음을 밑바닥부터 요동치게 만들거나 신경의 깊숙한 곳까지 찌르고 들어와 곤두서게 만드는 배경음으로 감상을 자극한다. 이는 심리적 평형을 유지하던 전자와 반대로 심리적인 격양을 유도하며 이는 각자의 배경에 걸맞은 적절한 테크닉으로 구사된다. 동시에 마치 하나의 옥타브를 차례로 연주하듯 높낮이를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의 깊이를 품은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광폭한 연기는 소름 끼칠 정도로 대단하다. 또한 1인2역을 맡은 폴 다노는 마치 식물적인 표정을 통해 가늠할 수 없는 인간의 양면성의 너비를 드러내는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태평양 건너 먼 이국에서 날아온 이 작품은 우리가 사는 이 땅의 현실과도 멀지 않다. 기업화되고 권력화되는 종교 집단의 온상과 자본의 논리로 재편되는 사회적 질서의 맥락 속에서 <블러드>의 파국은 우리가 불러들일 파멸의 묵시록을 예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그분의 사업이 이 땅을 배불리 먹일 것인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모든 것을 돈의 가치로 환원시키겠다는 정책적 포부가 구체화될 이 땅의 미래 속에서 쓸모를 인정받지 못한 인간의 가치는 무엇으로 판명될 것인가. 엘라이는 자기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표독스럽게 말한다. ‘게으르고 멍청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우리는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일까.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 돌이 아니라 쇠가 되는 길을 택해야 할지 모른다. 부서지는 쪽이 아니라 부수는 쪽이 되어야 하는 운명. 그곳에 흐르는 피가 자신의 것이 아니기 위해서는 더욱 단단해져야 할 것이다. 모두에게 행운을 빈다. 물론 그 끝에서 어떤 파국을 만나게 될지 누구도 모르지만.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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