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는 의식으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행위의 근본적인 태반이다. 순수한 악의가 있듯 순수하다고 해서 선한 것은 아니란 말이다. 모든 이의 믿음은 순수하다. 어린 아이가 순수한 얼굴로 당신의 머리에 망치를 내리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기 어렵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그 순수한 본성에 어떤 믿음을 심어주느냐에 달린 것이다. 구도를 잡고 밑그림을 그린 뒤 채색을 한 뒤에서야 그림을 되돌리기 어렵듯이 겹겹이 쌓이는 경험과 미장된 훈육으로 단단하게 건축된 인간의 믿음을 바꿔보려는 시도는 뒤늦게 파괴적인 시도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1913년, 독일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하얀 리본>은 어느 누군가가 믿었던, 혹은 여전히 믿고 있는 어떤 순수한 신념으로부터 야기된 거대한 사건의 징후와 전조를 살피는 영화다. ‘우리 마을에서 일어났던 이상한 사건’을 소개하는 내레이션은 곧 그 사건이 ‘이 나라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한 부연이 될 것임을 첨언한다. 그 이상한 사건의 시작은 마을 의사의 낙마다. 어느 날과 같이 자신의 말을 타고 집으로 들어서던 의사는 무언가에 걸려 넘어진 말에서 떨어져 쇄골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우연이 아닌 필연적인 의도에서 기인된 결과임이 밝혀진다. 그리고 그 이후로 계속되는 방화와 실종, 그리고 처참한 테러까지 마을 사람들을 동요시킬 만한 사건이 이어져 나간다.
평화롭게만 보이던 마을에는 의심과 경계가 개개인의 심리 밑바닥에서 들불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는 사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 사건을 통해 발견된 것에 가깝다.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우발적이라기 보단 점층적이다. 이는 사건의 연속적인 형태가 아닌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팽배한 심리적 긴장을 통해 감지되는 것이다. 사건의 흐름은 인물들의 심리적 기저를 살피기 위한 일종의 지표와 같다. 계층적인 갈등과 세대 간의 소통 부재가 팽배한 마을은 마을 사람들에게 밀폐된 섬에 가둬버린 듯한 극악한 고립감을 제공한다. 좀처럼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날 길을 찾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포기해버린 하층민의 분노나 기성세대의 강압적인 훈육 앞에서 논리적 항변을 허락받지 못한 어린 세대들의 불만은 직접적인 언어를 통해 고백되기 전에 간접적인 관찰을 통해 목격된다.
1인칭 시점으로 진전되는 후일담 형식의 내레이션은 화자의 구도를 통해 이 모든 사건들을 관객에게 객관적으로 중계한다. 마을을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마을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목격하거나 전해듣는 교사(크리스티안 프리에델)는 그 사연들로부터 적당히 분리된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끝내 그 사건에 직접적으로 개입함으로서 끝내 그 모든 사건의 근본적인 발원지로 관객을 끌어당긴다. <하얀 리본>은 ‘누가’라는 의문을 증폭시키는 후더닛 구조의 영화처럼 보이지만 그 의문은 끝내 그 모든 현상의 근본에 자리한 사회병리학적 증상들을 포괄함으로서 거대한 질문 앞으로 감상을 집결시킨다. 강압과 폭력을 통해 순수를 훈육당하는 어린 아이들의 팔에 채워진 하얀 리본은 순결주의의 훈장이자 차별주의의 완장이 되어 배타와 응징으로 집단적인 심리를 작동시킨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의 한 마을을 비추는 <하얀 리본>은 거대한 광풍이 어디에서 불어왔는가를 살핀다. 모든 것은 지독한 믿음에서 비롯됐다. 개인에 대한 믿음은 그 믿음의 차이를 증상으로 간주하며 차별을 양성하고 끝내 폭력적인 강요와 관철로서 상대를 유린한다. 그 모든 증후의 소산은 결국 믿음에서 비롯된다. 개인의 평화를 가져다 주는 독실한 신앙이 곧잘 거대한 전쟁의 원흉이 되는 것처럼 믿음이란 때로 폐쇄적이기에 그만큼 아득하고 위험한 광기를 잉태한다. 그리고 순수한 믿음은 때로 그 모든 광풍의 핵이다. 순수한 믿음에는 방향이 없다. 단지 강력하고 막강한 것이다. 선에 대한 믿음도, 악에 대한 믿음도, 순수에서 비롯될 수 있다. 그 믿음은 오래전부터 지금까지도 우리 주변 곳곳에서 누군가와 이 세계의 삶을 유린해 왔던 것이다. <하얀 리본>은 바로 그 순수한 믿음으로 강요한 훈육의 결과가 세계를 어떤 지경으로 몰아넣었는가에 대한 후일담이다.
끔찍하고 참혹한 기억을 새겨넣는 영화의 영상은 되레 정갈하고 결벽하다. 이 엄격한 흑백영상은 추악한 내면을 가린 그 세계의 위장된 평화처럼 안온하고 담담하기에 더욱 위태롭고 잔인하다. 스크린과 객석의 경계를 실험하듯 관객에게 특수한 체험적인 가학을 주저하지 않던 미하엘 하네케는 <하얀 리본>을 통해 체험보다는 목격과 증언으로서 지난 과오의 역사를 잉태한 근본적 뿌리를 인지시킨다. <하얀 리본>은 깨어 있는 눈과 차가운 머리로 우리에게 매여진 <하얀 리본>을 직시하고 가리키며 경고한다. 악마적인 순수의 전조는 여전히 이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우린 그 시대로부터 멀어져왔지만 여전히 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위대한가. 악마는 우리 주변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바로 그 믿음을 먹고 자란다.
사라진 동생 소진(심은경)을 찾아나서는 희진(남상미)이 맞닥뜨리는 상황을 대변하는 건 형사 태환(류승룡)의 잦은 대사다. “그게 말이 돼?’당연히 말이 될 리가, 좀처럼 믿을 수 없는 일 앞에서 당연한 질문. 하지만 그게 말이 되건 말건 간에 누군가는 믿을 수 없는 일을 겪는 세상. 말 그대로 불신지옥, 누군가가 믿어줄 수도 없는 일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사람의 삶이란 이토록 괴롭고 처연하다. 지독한 믿음을 지닌 자들이 만들어낸 지옥에 믿을 수 없는 자가 갇히게 되는 상황은 공포 그 자체다.
<불신지옥>은 자신의 광기를 전도하는 자들의 믿음이 만들어낸 지옥도다. 믿는 자들의 광기에 치여 사는 인간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때때로 공포가 된다. 건조한 톤으로 내려앉은 영화는 시종일관 서늘한 낯빛으로 긴장감을 조성하고 복도식 아파트와 지하실과 같은 한국적 풍경을 적극 활용한 호러적 연출은 꽤나 인상적인 이미지를 구축한다. 무엇보다도 <불신지옥>이 ‘(한국식)기독교’와 ‘무속신앙’을 묘사의 대상으로 삼은 건 형태적으로 전혀 무관해 보이는 두 종교가 사실상 한국 사회 내에서 뿌리깊은 병리적 맹신을 전도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형 체육관에 모여 통곡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나 종을 울리고 춤을 추며 굿판을 벌이는 행위는 실상 그 믿음의 외벽에 놓인 자들에게 기괴한 감상을 부르는 병리학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믿는 자들이 만들어낸 광기는 믿지 않는 자들의 눈에 공포를 비춘다.
믿을 수 있는가, 믿을 수 없는가의 물음은 종교와 신앙이라는 단어 안에서 반복돼왔다. <불신지옥>은 그 물음에 답변할 개인적 권리를 침해하는 자들의 광기를 공포로 치환한다. 믿음의 본질과 무관하게 그 형태 자체에 미쳐버린 자들은 자신의 주변에 놓인 자들을 파괴하는 형태로 그 믿음을 전도해나간다. <불신지옥>은 연출적 면모와 주제적 접근 모든 면에서 주목 받을만한 작품이다. 초자연적인 분장을 빌리지 않고 실생활의 표정만으로 섬뜩한 공기를 형성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다만 지나치게 모호한 해석을 부르는 결말이 조금 아쉽다. 마치 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입을 급하게 다무는 느낌이랄까. 강한 이미지적 자극을 원하는 관객이라면 정적인 영화의 분위기에 지루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그럼에도 <불신지옥>은 근래에 보기 드물었던 장르적 성취를 드러낸다. 뛰어난 연출력과 연기력을 기반으로 소재의 특성을 세계관에 반영하는데 성공했다. 근 몇 년간 국내 관객을 질식시키던 수준 이하의 호러를 잊어도 될만큼 인상적이다.
경건한 미사 중 신부의 설교가 시작된다. “확신이 없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의미심장한 물음, 약간의 침묵. 항로를 잃어버린 어느 선장의 사연이 이어진다. 항로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선장이 별자리의 방향까지 의심하게 된다는 이야기. 이에 덧붙여지는 말. “의심은 확신만큼이나 강력하게 지속됩니다.”확신과 의심은 모두 다 마음에서 비롯된다. 의심과 확신은 배반적인 언어지만 그 태생의 기반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의심과 확신은 방향이 다를 뿐, 한 지점에서 출발한 믿음이다.
국내에서도 공연된 바 있는 유명한 동명희극원작을 영화화한 <다우트>는 그 불분명한 믿음의 갈래길에 선 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1964년, 뉴욕 브롱크스의 성 니콜라스 가톨릭 학교에 새로 부임한 플린 신부(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는 강권적인 교회 분위기에 온화한 변화를 주도한다. 그러나 학교장 알리시아스 수녀(메릴 스트립)는 권위적이고 원칙적인 방식을 고수하려 하고 두 사람은 은밀한 대립관계로 거듭한다. <다우트>는 성향이 다른 두 인물의 심리적 대결 구도를 치밀하게 묘사하는 작품이다. 그 대립은 점차 갈등으로 발전하고 서로를 향한 험담과 비난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 계기로 작동하는 방아쇠가 바로 의심(doubt)이다.
알리시아스 수녀는 학교의 권위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인물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온화하고 자유주의적인 플린 신부는 요주의 인물이다. 같은 바람을 두고도 ‘바람이 변하고 있다’는 알리시아스 수녀와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는 플린 신부의 견해차는 은밀하되 강경한 대립구도를 암시한다. 제임스 수녀(에이미 아담스)의 증언은 두 사람의 관계에 갈등을 발화시키고 긴장을 가열시킨다. 제임스 수녀는 플린 신부와 학교의 유일한 흑인 입학생인 로널드 밀러 사이에 모종의 의혹이 있음을 의심하고 이에 대해 알리시아스 수녀에게 증언한다. 결국 알리시아스 수녀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모되고 이는 플린 신부와의 갈등을 가열시키는 강한 발화점이 된다.
영화는 두 사람의 심리적 대립 구도를 직설적인 방식보단 행위 등을 통한 간접적인 제스처로 묘사한다. 알리시아스 수녀의 방에 들어선 플린 신부가 알리시아스 수녀의 자리에 앉는 순간 경직되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이윽고 차양을 올리는 알리시아스 수녀가 햇살에 눈을 찌푸리는 플린 신부를 모른 체 할 때, 그리고 차양을 내리기 위해 일어선 플린 신부의 자리를 다시 알리시아스 수녀가 탈환(?)하는 과정까지. 두 인물의 심리적 대립이 묵언적인 행위를 통해 일차적으로 묘사된다. 한편 심리적인 대립이 본격적인 격양으로 치닫는 순간, 그 주변부의 도구들이 감정의 온도를 높이는 촉매로 활용된다. 알리시아스 수녀가 플린 신부에게 자신의 의심을 처음으로 드러내고 이를 통해 두 사람의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 울려 퍼지는 전화벨은 팽팽한 감정의 대립을 더더욱 신경질적으로 보완한다. 인물을 하부에서 올려 비추거나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기울이는 카메라의 시선 역시 인물의 잠재된 불안을 적절하게 드러낸다. 저온에서 고온으로 끓어오르는 물처럼 감정적 충돌이 갈등의 파고로 출렁이기까지의 과정들이 세심하고도 견고하게 직조된다.
희곡을 기반으로 한 <다우트>는 다분히 연극적이다. 인물들을 둘러싼 환경을 무대적인 장치로 활용하는데 능숙하기도 하지만 그 중심에 선 배우들의 연기가 연극적인 연기를 가능케 하는 까닭이다. 직설적인 대사보다도 행간의 의미 사이를 읽게 만드는 제스처나 표정, 행위가 영화적 의미를 완성시킨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립은 현악기의 떨림처럼 섬세하지만 날카롭게 감정의 고저를 다스리고, 그 사이에 놓인 에이미 아담스는 짓눌리지 않고 제 수준을 유지한다. 특히 짧은 분량임에도 바이올라 데이비스의 연기는 실로 인상적이다. 뛰어난 배우들은 <다우트>에 있어서 최고의 자산이자 일등 공신에 가깝다.
알리시아스 수녀는 플린 신부에 대한 의심 너머의 진실을 놓고 공방하지만 실상 그 대립각의 시작점은 서로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다. 긴 손톱과 설탕의 섭취를 혐오하는 알리시아스 수녀가 손톱을 기르고 설탕을 선호하는 플린 신부의 성향을 알게 됐을 때 이미 구도는 이뤄진다. 정치적 축출을 위해 작동한 의심이 진실에 대한 공방으로 번져나가고 그 지난한 갈등 속에서 승패가 정해졌을 때, 영화는 그 승패 너머의 진실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그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된다.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과연 진실은 드러났는가. 실상 그것은 중요한 물음이 아니다. 영화는 그래서 그 진실을 애써 조명하려 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 긴 의심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건 진실을 위한 의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스로 자신의 신앙적 원칙을 깨버리면서까지 의심을 확신으로 밀고 나가는데 성공한 알리시아스 수녀는 끝내 눈물로서 자신의 통증을 내보인다. 교구를 떠난 플린 신부보다도 깊은 상처가 드러난다. 사실이 드러내는 순간, 진심이 부서진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진실을 드러낼 때 오히려 승자의 강박은 허위가 된다. 강박에서 튕겨나간 의심이 진실에 적중한다 해도 그로부터 비롯된 수많은 말은 허물을 만든다. 바람에 날린 깃털처럼 퍼져나가 주워담을 수 없게 된 말들이 양심을 자극한다. "이 모든 것이 다 내 의심에서 비롯됐어." 알리시아스의 눈물엔 자신의 의심을 통해 뿌리내린 고통에 대한 뒤늦은 자각이 담겼다. <다우트>는 그 속된 믿음이 낳는 책임과 의무를 지적하고 되짚는 현명한 물음이자 사려 깊은 대답이다. 진실을 위한 믿음은 숭고하지만 의도를 위한 믿음은 현명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고 만다. 그것이 비록 사실을 관통한다 해도 그 안에 담긴 진심은 배려하지 못한다. 승패를 위한 의심은 모든 것을 부순다. 그 끝에 남는 건 부끄럽게 선 황폐한 욕망뿐, 어떤 명예도 실리도 남아있지 않다. 믿음이란 이토록 강하고 지속적이라 위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