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는 의식으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행위의 근본적인 태반이다. 순수한 악의가 있듯 순수하다고 해서 선한 것은 아니란 말이다. 모든 이의 믿음은 순수하다. 어린 아이가 순수한 얼굴로 당신의 머리에 망치를 내리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기 어렵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그 순수한 본성에 어떤 믿음을 심어주느냐에 달린 것이다. 구도를 잡고 밑그림을 그린 뒤 채색을 한 뒤에서야 그림을 되돌리기 어렵듯이 겹겹이 쌓이는 경험과 미장된 훈육으로 단단하게 건축된 인간의 믿음을 바꿔보려는 시도는 뒤늦게 파괴적인 시도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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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지옥> 단평

cinemania 2009. 8. 6. 16:00

사라진 동생 소진(심은경)을 찾아나서는 희진(남상미)이 맞닥뜨리는 상황을 대변하는 건 형사 태환(류승룡)의 잦은 대사다. 그게 말이 돼? 당연히 말이 될 리가, 좀처럼 믿을 수 없는 일 앞에서 당연한 질문. 하지만 그게 말이 되건 말건 간에 누군가는 믿을 수 없는 일을 겪는 세상. 말 그대로 불신지옥, 누군가가 믿어줄 수도 없는 일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사람의 삶이란 이토록 괴롭고 처연하다. 지독한 믿음을 지닌 자들이 만들어낸 지옥에 믿을 수 없는 자가 갇히게 되는 상황은 공포 그 자체다.

 

<불신지옥>은 자신의 광기를 전도하는 자들의 믿음이 만들어낸 지옥도다. 믿는 자들의 광기에 치여 사는 인간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때때로 공포가 된다. 건조한 톤으로 내려앉은 영화는 시종일관 서늘한 낯빛으로 긴장감을 조성하고 복도식 아파트와 지하실과 같은 한국적 풍경을 적극 활용한 호러적 연출은 꽤나 인상적인 이미지를 구축한다. 무엇보다도 <불신지옥>(한국식)기독교무속신앙을 묘사의 대상으로 삼은 건 형태적으로 전혀 무관해 보이는 두 종교가 사실상 한국 사회 내에서 뿌리깊은 병리적 맹신을 전도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형 체육관에 모여 통곡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나 종을 울리고 춤을 추며 굿판을 벌이는 행위는 실상 그 믿음의 외벽에 놓인 자들에게 기괴한 감상을 부르는 병리학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믿는 자들이 만들어낸 광기는 믿지 않는 자들의 눈에 공포를 비춘다.

 

믿을 수 있는가, 믿을 수 없는가의 물음은 종교와 신앙이라는 단어 안에서 반복돼왔다. <불신지옥>은 그 물음에 답변할 개인적 권리를 침해하는 자들의 광기를 공포로 치환한다. 믿음의 본질과 무관하게 그 형태 자체에 미쳐버린 자들은 자신의 주변에 놓인 자들을 파괴하는 형태로 그 믿음을 전도해나간다. <불신지옥>은 연출적 면모와 주제적 접근 모든 면에서 주목 받을만한 작품이다. 초자연적인 분장을 빌리지 않고 실생활의 표정만으로 섬뜩한 공기를 형성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다만 지나치게 모호한 해석을 부르는 결말이 조금 아쉽다. 마치 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입을 급하게 다무는 느낌이랄까. 강한 이미지적 자극을 원하는 관객이라면 정적인 영화의 분위기에 지루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그럼에도 <불신지옥>은 근래에 보기 드물었던 장르적 성취를 드러낸다. 뛰어난 연출력과 연기력을 기반으로 소재의 특성을 세계관에 반영하는데 성공했다. 근 몇 년간 국내 관객을 질식시키던 수준 이하의 호러를 잊어도 될만큼 인상적이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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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미사 중 신부의 설교가 시작된다. 확신이 없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의미심장한 물음, 약간의 침묵. 항로를 잃어버린 어느 선장의 사연이 이어진다. 항로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선장이 별자리의 방향까지 의심하게 된다는 이야기. 이에 덧붙여지는 말. 의심은 확신만큼이나 강력하게 지속됩니다. 확신과 의심은 모두 다 마음에서 비롯된다. 의심과 확신은 배반적인 언어지만 그 태생의 기반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의심과 확신은 방향이 다를 뿐, 한 지점에서 출발한 믿음이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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