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는 알다시피 <어벤져스>의 속편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이자 마블 히어로 무비의 절정이다.
최근의 슈퍼히어로 무비들은 액션 롤러코스터의 수준을 넘어서 동시대의 고민이 담긴 철학을 껴안은 현대적 신화로 진화하고 있다.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이하, <윈터 솔져>)는 그 최전선에 놓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윈터 솔져>의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는 <어벤져스>(2012) 이후로 각개 전투를 펼치기 시작한 세 번째 마블 히어로다. 지난해에 성공적인 결과를 보여준 <아이언맨 3>와 <토르: 다크 월드>만큼 혹은 그 이상의 만족감을 부여할만한 작품이다.
단순히 히어로 액션물이라는 오락적인 기대감 안에서 보자면 전반적인 액션 연출은 탁월하다. 빠른 속도감과 생생한 타격감을 전달하는 극 초반부의 해상 작전신을 비롯해서 중반부의 리드미컬한 카체이싱 신, 극 후반부의 거대한 공중 액션신 등 전반적인 액션의 스케일을 조절하는 방식과 그 안에서 보여지는 역동적인 액션 연출이 잘 조율된 인상이다. 물론 극초반부터 핸드 헬드 기법을 활용하며 지나치게 화면을 흔들어 대는 탓에 시각적으로 피로해지는 경향도 없진 않지만 현장감을 살린다는 측면에선 필요악처럼 여겨지는 선택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윈터 솔져>에선 저마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신구 캐릭터들이 눈에 띄는데 특히 새로운 캐릭터들의 활약상이 극의 전반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개별적인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더한다. 특히 로버트 레드포드의 등장은 이번 작품을 위한 화룡점정에 가깝다. <윈터 솔져>에서 캡틴 아메리카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내부의 적을 찾아내고 맞서 싸우는 과정을 그린다. 완벽한 우리 편이 완전한 적이 되는 상황 속에서 갖은 위기를 건너는 가운데서도 위선의 가면을 쓴 거대악의 진면목을 추적하고 폭로해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과정이 주된 맥락을 차지하고 있다. 덕분에 슈퍼 히어로 블록버스터의 외피만큼이나 정치 스릴러의 내면이 크게 와 닿는 작품인데 로버트 레드포드라는 존재감 자체가 장르적인 중량감을 설득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를 통해서 <윈터 솔져>는 단순한 흥미를 쥐어주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영화의 이례적인 방향성을 탁월하게 제시하고 완결짓는다.
한편 주변부의 캐릭터인 닉 퓨리(사무엘 L. 잭슨)와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 또한 이번 작품을 통해서 보다 뚜렷한 자기 내면을 드러내는데 이를 통해서 극의 심리가 보다 입체적으로 확장되면서도 세계관의 정체성을 강력하게 확립해내고 있다는 인상이 느껴진다. 이는 앞으로 이어질 <어벤져스>까지의 여정을 고려한다면 대단히 흥미로운 예감을 부추긴다. 또한 그 밖에도 캡틴 아메리카의 사이드킥이라 할 수 있는 팔콘(안소니 마킨)과 관계적인 변화가 예상되는 ‘윈터 솔져’ 버키 반즈(세바스찬 스텐)의 등장 역시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를 보다 입체적으로 수식한다. 전반적으로 크고 작은 역할을 하는 캐릭터들이 단지 제 역할을 하는 수준 이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극 안에서 명확하게 세워 넣는다는 점에서 캐릭터의 존재감을 통해서 자기 생명력을 얻는 이 작품으로선 대단히 성공적인 결과물을 낳았다고 평할만하다.
사실 캡틴 아메리카는 <퍼스트 어벤져>(2011)를 통해서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었지만 인지도가 낮은 캐릭터였고, 그만큼 캐릭터에 대한 흥미도 떨어지는 인상이 강했다. 심지어 ‘캡틴 아메리카(Captain America)’라는 캐릭터명이 포함된 원제 <Captain America: First Avenger>가 <퍼스트 어벤져>라는 정식 국내 개봉명으로 확정된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아메리카’라는, 국적성이 뚜렷한 이름을 지닌 탓에 국가적 이데올로기에 대변하는 미국적 영웅의 선전도구라는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경향도 없지 않다. 하지만 캡틴 아메리카는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힘을 대변하는 ‘영웅질’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라기 보단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지닌 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영웅성’의 기준을 제시하는 캐릭터다. 게다가 캡틴 아메리카는 <어벤져스>의 세계관의 근본이 되는, ‘쉴드’의 뿌리가 된 캐릭터나 다름이 없다.
캡틴 아메리카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에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의 선친인 과학자 하워드 스타크가 참여했던 프로젝트를 통해서 개발된 ‘슈퍼 솔저’였고, 하루 아침에 빈약한 청년에서 벗어나 건장하고 강력한 육체를 지닌 최종병기가 된 남자였다. (슈퍼 솔져 프로젝트는 훗날 헐크로 변신하는 과학자 브루스 배너가 연구하는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수트를 입고 미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선전 도구처럼 전선을 배회하던 그는 본래 국가에 공헌하고자 했던 자신의 의지에 대한 회의감을 느낀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힘을 발휘할 기회를 얻고 위기로부터 자국의 군인들을 지켜낸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그 이름처럼 정말 ‘캡틴’이 된다. 미국적인 영웅상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영웅상을 제시한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의 순수하고 강직한 신념은 영웅으로서의 가치 그 자체를 대변한다. 게다가 그 본질적인 신념을 바탕으로 둔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력을 통해서 본질적인 가치관을 훼손하지 않는, <어벤져스>라는 히어로 세계관이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할 본질적인 답변을 지닌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세우는 작업이란 이 세계관의 전반적인 균형을 맞추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윈터 솔져>는 캡틴 아메리카라는 개별적인 캐릭터 스핀오프로서의 완결성은 물론 <어벤저스>를 향한 다리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한 작품이라 할만하다. <어벤져스> 이후로 <아이언맨 3>와 <토르: 다크 월드> 그리고 <윈터 솔져>로 이어진 마블 유니버스의 각개 전투가 성공적인 행보를 잇고 있는 만큼 이 시너지가 내년에 개봉될 <어벤져스>의 속편에서 어떻게 폭발할 것인지 사뭇 궁금하다.
한편 장기적으론 <윈터 솔져>는 <어벤져스>의 영웅들이 맞이할 파국이라 할 수 있는 <시빌 워>의 복선이라 해도 좋은 작품이다. 마블 엔터테인먼트에서 그리는 큰 그림을 명확히 알 순 없지만 ‘어벤져스’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구한 영웅들이 활약할수록 그 세계와의 갈등은 보다 거세질 것이다. 그만큼 고뇌도 심각해질 것이며 갈등의 불도 커질 것이다. 하지만 캡틴 아메리카의 신념이 향할 길은 명확하다. 세계를 구원하는 영웅들이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고 서로를 파괴하는 파국의 종주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금속슈트를 입은 히어로.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는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과 같은 대부호지만 고뇌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이 쓴 가면 아래에서 철저하게 신분을 감추는 브루스 웨인과 달리 토니 스타크는 과감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혀낸다.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나 <엑스맨>의 뮤턴트들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할 이유도 없다. 그는 부유하며, 똑똑하고, 외향적이다. 타인의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는 것을 즐길 줄 아는, 무대 매너가 대단한 셀레브리티의 전형에 가깝다.
토니 스타크에게는 히어로로서의 대단한 사명감이 없다. 물론 <아이언맨>에게도 ‘능력’과 ‘책임’의 알고리즘은 작동된다. 그러나 그것이 올가미 같은 숙명이 아닌 삶의 유희를 이루는 기반처럼 활용된다는 점에서 특이점이 발견된다. 토니 스타크는 ‘평화란 적보다 더 큰 힘을 가졌을 때 가능하다’는 선친의 말을 신봉하는 사내다. 그에게 힘이란 평화유지라는 혜택을 통해 얻어내는 유명세의 권위, 혹은 그 자체만으로도 자신의 이상을 구축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의 체제나 다름없다. 히어로로서의 의무와 개인의 정체성 안에서 고민을 거듭하는 기존의 히어로물과 <아이언맨>시리즈를 구분하게 만드는 이유도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아이언맨2>는 이런 인물의 성격을더욱 적극적으로펼쳐 보인다. 자신이 아이언맨임을 밝히는 토니 스타크의 모습에서 끝났던 전편의 서사를 이어받은 후속편은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만한 아이언맨 슈트를 국가에 귀속시키라는 의회의 요구를 맞받아친다. 심지어 대중의 앞에 서서 자신의 존재를 과감하게 어필한다. ‘세계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 나 때문이라고 말하진 않겠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도 모자라, 이를 통해 인기와 영합하는 셀레브리티 히어로는 분명 이례적인 것이었고, 여전히 이례적이다. 이를 통해 <아이언맨>은 금속슈트를 입은 히어로의 액션 이상으로 특별한 묘미를 장착시킨다.
성공한 히어로물, 더 넓게 말하자면 액션 블록버스터가 시리즈로 거듭나는 건 당연한 관례가 됐다. 애초에 기획 단계부터 흥행을 목표로 두고 그 이후의 계획을 설정해내는 근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제작 행태를 보자면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새로운 시리즈들은 어김없이 스케일의 확장이라는 엔터테인먼트의 양적 팽창울 통해 새로운 시리즈로서의 의미를 획득한다. <아이언맨2> 역시 새로운 시리즈가 확장을 통해 새로운 흥미를 유발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예기치 않게 변경된 캐릭터를 논외로 둔다 해도) 새로운 등장인물들은 서사의 너비를 넓히고 개연성을 확대시킨다.
중요한 건 시리즈를 거듭하는 어느 히어로 무비가 그러하듯이새로운 적의 등장과 함께 주연 캐릭터가 맞서야 할 필연적인 위기를 그린다. <아이언맨2>에서 아이언맨은 내외적인 위협에 당면한다. 러시아의 물리학자 아이반 반코(미키 루크)는 (아이언맨의 슈트에 활용되기도 하는) 원자로 기술의 도면을 스타크 기업에 강탈당했다는 한을 안고 쓸쓸히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하고, ‘위플래시’를 개발해 그를 위기에 빠뜨린다. 동시에 스타크 기업의 경쟁사 CEO인 저스틴 해머(샘 록웰)는 토니 스타크를 넘어서기 위해 그를 몰락시킬 궁리를 한다. 가장 큰 적은 토니 스타크의 몸에 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 중금속 팔라듐을 사용한다. 이는 몸에 치명적인 중독 현상을 일으키고 이로 인해 토니 스타크는 슈트를 입을 때마다 죽음과 근접해간다.
새롭게 등장한 적과 사투를 벌이고, 이전에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핵장치로 인해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토니 스타크는 그럼에도안티히어로의 길을 걷지 않는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생존에 대한 고민으로 대체되지만 이는 히어로를 비범하게 수식하는 가치관이나 의식을 형성하는 계기로 작동되기 보단 말 그대로 고비로서 장착될 뿐이다. 무엇보다도 <아이언맨2>는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장기적 계획을 위한 밑그림으로서 도구화되고 있다. <아이언맨>의 쿠키에서 닉 퓨리(사무엘 L. 잭슨)를 등장시키며 마블 코믹스의 슈퍼 히어로 열전이나 다름없는 <어벤져스>에 대한 팁을 남겼던 사례는 <아이언맨2>에서 보다 노골적으로 확장되고 적극적으로 그 계획을 홍보한다. 특히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의 등장은 그 캐릭터의 비중과 무관하게 시리즈의 밑바탕을 다지기 위한 포석으로서 보다 유용하다. 물론 <어벤져스>에 대한 특별한 기대감이 없는 관객에게 이는 불필요한 사족이자 시리즈로서의 일관성을 해치는 요인처럼 읽힐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근본적으로 <아이언맨2>는 단지 시리즈의 속편으로서뿐만 아니라 제작사의 미래를 위한 또 다른 시작점에 가깝다. 그만큼 시리즈 자체로서의 야심을 벗어난 사족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를 테면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와 같은- 그만큼 시리즈 자체로서의 서사적 내밀함이 전작에 비해 조금 부실해졌음을 지적할만하다. 하지만 캐릭터의 종이 늘었음에도 저마다 적당한 쓸모를 자랑하며 액션은 보다 강화됐고, 볼거리는 충만하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개성은 여전히 영화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가 걸친 금속슈트의 약발은 유효하다. 게다가 (불가피하게 배우가 교체된) 토니 스타크의 친구 제임스 로드 중령(돈 치들)은 아이언맨의 동료 워 머신으로 거듭나며 액션의 묘미를 두 배로 키운다. 다만 화려한 등장이 주는 기대감에 비해 졸속적으로 퇴장하는 듯한 미키 루크만큼은 다소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