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연음으로 이어진 제목은 그 형태만으로도 의미심장하다. 초점이 나가버린 듯한 세상 속에서 제대로 된 이상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은 고통이고 꿈은 절망이다. 하지만 어떤 이는 꿈을 칼처럼 갈아 세상을 베어내려 한다. 하지만 그 꿈은 자신에게 닿아있는 것부터 베어나간다. 자신을 지키던, 혹은 자신이 지키려던 신념부터 파괴한다. 마치 서로 다른 땅을 딛고서도 같은 달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은 때로 다른 길을 걷는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이상주의자들의 파국적 사연을 줄기로 드라마를 그려낸다.
박흥용 화백의 동명원작만화를 스크린에 옮겼지만 사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원작의 인물 관계를 활용하고 개연성의 모티브만 얻어냈을 뿐, 전체적으로 원작의 재현성과 거리가 먼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원작과 달리 이몽학(차승원)의 비중을 키우고 역할의 변화를 꾀했다는 점이다. 이몽학은 자신이 모시던 스승 정여립의 죽음 이후, 그가 이끌던 대동계의 수장으로 나선다. 본래 왜적의 침입을 막고자 세워졌던 대동계는 정여립의 복수와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꿈꾸는 반란군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이몽학과 함께 정여립의 또 다른 한 팔이었던 맹인 황정학(황정민)은 이몽학의 뒤를 쫓고, 이몽학에게 아버지를 잃은 견자(백성현)는 복수를 위해 이몽학을 쫓고, 이몽학과 연모를 나눈 기생 백지(한지혜)도 그 뒤를 따른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연상시키는 건 이준익의 <왕의 남자>와 <황산벌>이다. 등장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멜로적 정서와 그 너머로 그려지는 파국적인 운명의 서사는 <왕의 남자>의 그것과 유사하며 무능력한 실권자들에 대한 풍자가 담긴 코미디의 요소는 <황산벌>의 그것과 유사하다. 사실 그 결합적 형태로부터 발생하는 리듬감이 좋은 건 아니다. 캐릭터들의 배합은 자처하고라도 두 정서 사이의 간극이 지나치게 멀다. 코미디가 발생하더라도 그 형질이 달라서 서로를 밀어내는 것만 같다. 마치 하나로 위장된 두 개의 극을 보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궁궐에 들어서면 <황산벌>과 같은 풍자적인 코미디가 백치스럽게 펼쳐지다가도 그 밖에서는 비장하게 미간을 찌푸리거나 장난스럽게 의표를 찌르는 선문답의 대사들이 비장하게 구사된다. 그리고 마치 이건 어떤 면에서는 의도된 연출의 일환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품게 된다.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그 시대의 발음이나 화법을 고수하지 않는다. 사실상 영화 속 캐릭터들의 대사는 현대의 표준어나 다름없다. 이건 마치 이준익이 이 영화가 뒤집어쓴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의 이미지를 우롱하듯 현대적인 이야기를 하겠다는 의미처럼 읽힌다. 그런 지점에서 영화에서 묘사되는 우스꽝스러운 궁궐의 관리들이나 한심한 왕의 이미지는 오늘날의 정치적 분위기를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의미라기 보단 구도에 있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채우는 건 결국 이몽학이다. 그리고 영화 속 인물들은 이몽학과 연관된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이는 곧 이준익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중심에 이몽학이 놓여있다는 말이다.
자신의 올바른 이상을 이루기 위해 배반적이고 자기파괴적인 길을 택하는 인물의 삶이란 숭고하고 처연하다. 그건 선악의 논리 안에서 해석이 불가능한 가치관의 문제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이상이 신념의 차이로 무너져 내려가는 광경으로 허망하게 다다른다. 구도는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묘사의 방식에서 중량감이 떨어진다. 서로 다른 신념을 품은 이들의 대립을 통해 비장감을 덧씌우고, 꿈의 유무를 대비시키며 성장을 그리지만 그 모든 것의 총합이 드러내는 궁극적인 목표가 불분명하다. 이건 마치 고의적인 자기 파괴적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허망한 일이다. 단지 그 결말부의 텅빈 궁궐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마치 제로섬 게임과 같은 결말부의 파국을 목격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영화가 추켜세우던 모든 요소들이 어떤 성과로 다다르거나 의미를 새기지 못하고 일거에 무너져 내리는 꼴을 인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영화를 허망하게 만드는 동시에 모종의 고민을 품게 만든다.
맹인 검객을 연기하는 황정민은 인상적인 리듬을 유지한다. 황정민의 연기는 영화에서 가장 좋은 볼거리이자 가장 좋은 안배감을 자랑하는 요소다. 이는 황정민의 퇴장 이후로 급격하게 페이스가 떨어지는 듯한 영화의 분위기만으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검객들이 등장하는 만큼 칼을 부딪히는 장면이 여럿 되고 종종 볼만하지만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의 완성도에 다다르는 성과에 닿진 못했다. 사극으로서의 풍경을 재현하는 방식이나 사물과 환경을 포착하는 이미지는 유려하다. 그만큼 많은 것들이 보이지만 명확하지가 않다. 마치 뭉개지듯 받침이 누워버린 영화의 제목처럼, 모든 요소들이 뭉개지듯 초점이 흐려진다. 그건 마치 고의적으로 ‘초저믈 흐리는 영화처럼’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