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이란 안정적이면서도 불안정한 숫자다. ‘둘’은 무난하다. ‘하나’와 ‘하나’가 만나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결국 언젠가 권태는 밀려온다. ‘셋’은 그래서 보다 지속적인 흥미를 자극하고 보다 공고한 관계로 거듭날 수 있다는 점에서 안정적이다. 하지만 그만큼 ‘하나’와 ‘하나’ 사이의 관계를 흔드는 또 다른 ‘하나’와의 유지가 요구된다. 그래서 ‘셋’은 그만큼 ‘둘’보다 심오한 숫자다. 사회의 최소단위는 ‘둘’에서 시작되지만 ‘셋’으로 넘어갈 때 본격적인 사회적 현상이 발생한다. ‘둘’이 사회를 이루는 필요조건이라면 ‘셋’은 결국 사회를 이루는 최소한의 충분조건인 셈이다.
<쓰리>는 바로 그 문제의 ‘셋’에 관한, 어느 특별한 ‘3각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베를린에 한 부부가 있다. 유명 TV앵커 한나(소피 로이스)와 아트 엔지니어로 일하는 시몬(세바스티안 쉬퍼)은 겉으로 보기에 평온해 보이지만 그들은 은연 중에 자신들의 권태기를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삶은 딱히 문제 없이 흘러간다.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곧 부부는 각자 모종의 관계를 통한 비밀을 얻게 된다. 시작은 여자였다. 그녀는 망설였지만 결국 선택했고, 이를 즐겼다. 그리고 곧 남자도 자신의 정체성을 뒤흔들만한 사건을 얻고 관계를 지속한다. 누가 시작했는가라는 문제와 상관 없이 두 사람은 급격하게 그 관계로 빠져들었다.
톰 티크베어의 <쓰리>는 문제적인 소재를 실생활적인 합리로 풀어내고 전위적으로 전시해낸 작품이다. 그리고 이는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서 생을 유지하고 버텨내려 하지만 때때로 그 관계에 속박되어 자신이 더 나아갈 수 있는 삶을 포기하거나 인내하기도 한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삶을 단단하게 세우는 지지대 노릇을 하기도 하지만 다른 무언가를 포기하게 만드는 수갑과도 같다. 감정은 자유지만 제도는 곧 속박이다. 제도란 바로 그 자유로운 감정을 속박하고 구속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용이하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인간의 동물적인 본능을 제어하는 도구인 것이다.
<쓰리>는 바로 그 제도적 속박에 대한 합의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제시하는 작품이다. 불행을 억누른 거짓 행복과 동거하는 삶보다는 각자의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고 그 욕망의 절충과 합의를 통해서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고 공유하는 편이 백배는 나음을 보여주는 전위적인 전시인 것이다. <쓰리>는 이 문제적인 주제 의식을 거칠게 주장하거나 장황하게 설명해내는 노력 대신 그러한 삶의 단편을 연출하고 응시하게 만든다. 문제적인 주제를 담고 있지만 영화는 단순히 그 도발적인 스토리텔링을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결과물이기도 하다. 건조한 인상이 느껴지기는 하나, 이야기의 흐름에는 무리가 없고, 깊이가 있으며, 예상 경로에서 벗어나는 놀라움과 성찰을 안겨주는 순간도 존재한다.
삶이란 전기줄 두세 갈래의 흐름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것이기도 하지만 직접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없기에 어떤 행위를 통한 비유로 형상화시켜야 할 정도로 고차원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 복잡한 삶을 단순화시키는 방식은 결국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 안에서 얻어지는 에너지를 공유하고 한 덩어리로 승화시키는 길 밖에 없다. <쓰리>는 윤리적인 문제제기 안에서 자유롭진 않지만 분명 진보적인 의식을 지닌 작품이다. 서로에 대한 인정과 각자에 대한 이해가 가능할 때, 보다 너른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비키(레베카 홀)와 크리스티나(스칼렛 요한슨)는 지금 막 미국에서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서로를 잘 이해하는 친구 사이지만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두 사람은 특히 남자에 대한 견해가 판이하다. 조건을 꼼꼼히 따지며 신중하게 접근하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는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다. 안정적인 직장을 지닌 약혼자가 있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는 최근 새 남자친구와 이별을 겪었다.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바르셀로나에 왔지만 두 사람의 기대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Vicky Christina Barcelona>(이하, <내 남자>)는 심플한 원제처럼 ‘비키’와 ‘크리스티나’가 ‘바르셀로나’에서 겪은 이야기다. 건축학 석사논문에 도움이 될만한 가우디 건축물을 기대하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새로운 경험과 상대를 원한다. 비키와 크리스티나의 전혀 다른 꿍꿍이는 두 사람의 휴가를 사소함으로부터 밀어낸다. 물론 그 계기는 엉뚱하게 찾아온다. 우연히 미술관에서 마주친 화가 안토니오(하비에르 바르뎀)에게 반한 크리스티나는 비키와의 식사 테이블로 찾아와 여행에 초청하겠다는 안토니오의 뻔뻔한 청을 받아들인다. 비키는 이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결국 그 여행에 합류하게 되고 그 여행은 두 사람의 휴가를 사소함으로부터 이탈시킬 만한 비밀을 선물한다.
크리스티나의 위궤양으로 인해 예기치 않은 비밀을 얻게 된 비키는 이로 인해 자신의 일생을 뒤흔들릴만한 충동을 겪게 된다. 한편 여행을 병석에서 보낸 크리스티나는 다시 바르셀로나에 돌아와 안토니오와 연인이 된다. 하지만 안토니오의 유명한(!) 전처 마리아(페넬로페 크루즈)가 나타나고 기묘한 삼각관계가 이뤄진다. <내 남자>는 두 개의 삼각관계를 중첩하는 세 여자와 한 남자 사이에 놓인 기묘한 사연을 펼쳐놓은 영화다. 한 쪽은 비밀에 휩싸여 있으며 한 쪽은 기묘하게 얽혀있다. 누군가에게 익히 비정상이라 불릴 만한 관계 속에서도 로맨스는 이뤄지고 일상은 반복된다.
특별한, 혹은 기이한 사연을 담담하게, 혹은 유쾌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건 그 사연을 대하는 영화의 관점이 한없이 사소한 까닭이다. 동시에 리드미컬한 내레이션과 경쾌한 배경음이 불미스러움으로부터 그 인물들의 행위를 구출하는 덕분이기도 하다. 두드러지지 않지만 소소하게 묻어나는 유머 감각이 산재한 이 막장 스토리를 조율하는 우디 알렌의 감각적 리듬이 영화의 중심에 있다. 저마다의 감정을 이루고 동선을 펼치는 캐릭터들의 조합은 어떤 약속도 없는 이야기를 펼쳐내듯 흥미롭게 사연을 구성한다. 우연적인 감정과 필연적인 본능에 휩싸일 때 사연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튄다. 그러나 그 예기치 못한 사연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주체들을 결심하거나 체념하게 만든다.
비키와 크리스티나는 바르셀로나에서 각각 예상 밖의 경험을 얻는다. 안토니오와 그의 전처 마리아는 그 경험의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그 경험을 통해 비키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가치관의 진동을 느끼고, 크리스티나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가능성을 발굴한다. 자신과 전혀 무관할 것 같은 일상을 체험하거나 예측하지 못했던 방향성을 발견한다. 타인과의 관계는 비키와 크리스티나에게 불가능한 영역을 선사하거나 선물한다. 물론 대단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하나의 경험담을 관통할 뿐이다. 그렇다고 <내 남자>가 그저 그래서 허무할 것 같은 이야기 따위는 아니다. 형태적으로 비키와 크리스티나는 바르셀로나에서 휴가를 보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비키는 자신의 약혼자와 결혼한 채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크리스티나는 여전히 또 다른 충동을 꿈꾼다. 하지만 그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두 사람의 인생에 미묘한 변화를 부르는 첫 번째 도미노가 된다. 약혼자와의 잠자리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거나, 아무런 재능도 없다고 믿어지는 삶에서 뷰파인더의 가능성을 찾는다. 또한 서로 사랑하지만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믿는 안토니오와 마리아 역시 크리스티나를 통해 완전한 삼각관계(!)를 이루고 만족스런 일상을 보낸다.
우디 알렌은 항상 인물들의 작은 사연들을 관망하듯 수집한 뒤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그 세계엔 윤리적 태도보다도 결과적인 이야기의 형태만이 끝내 자리잡는다. <내 남자>도 그 과정 끝에 남는 어떤 결과만이 존재할 뿐이다. 스토리텔링은 어떤 훈계를 위해 복무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저 스토리텔링으로서 순기능에 충실하며 인물들은 저마다의 삶을 산다. <내 남자>는 그 사연이 부르는 후일담이 대단하다기 보단 순간을 채우는 관계와 사건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한 이야기다. 누군가의 흥미로운 경험담을 듣는 즐거움에 가깝다. 결국 그 이야기 속에서 한 차례 경험담을 거친 인물들은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간다. 뭔가 대단한 형태의 결과를 기대한다면 한편으로 허무에 시달릴지 모를 일이나 그저 그 과정 자체를 즐긴다면 충분한 만족감을 얻을 만하다. 훌륭한 재담꾼의 이야기는 그저 듣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만족감을 부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야기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도 간과할 수 없는 감상포인트가 된다. 특히 페넬로페 크루즈는 남미의 태양처럼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뿜어낸다. 물론 한 가지 애석한 점은 심플하고 도도한 원제를 천박한 막장 드라마 반열에 올린 한국개봉명이랄까. 좀처럼 적응하기 힘든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라는 제목은 영화에 대한 기대감도, 만족감도, 하나 같이 깎아 내릴만한 작명 센스다.
집안 가득 햇살이 가득 찼다. 보기만 해도 따스한 광경이다. 집안 구석구석까지 빛이 들어서있다. 그 광경만으로 반 허공에 뜨는 기분이다. 예쁘게 내려앉은 빛이 곱고 화사하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은 이질감이 느껴진다. 그 채광 좋은 집엔 젊은 부부가 산다. 자상한 상인(김태우)과 천진난만한 모래(신민아)가 아기자기하게 살아가는 둘만의 공간이다. <키친>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이들이 어느 정도의 진심을 공유할 수 있는가에 관한 사연이다. 한 공간을 공유하고 있지만 때로 다른 것을 보고 생각하게 된 어떤 이들의 마음을 비추려 한다.
제목처럼 <키친>은 공간의 역할이 중요하다. 과장된 명도로 내리쬐는 그 구석구석엔 인물간의 감정이 먼지처럼 켜켜이 내려앉아있다. 상인과 모래는 서로를 신뢰하며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감정을 도발할만한 사건이 생긴다. 약 기운에 취하듯 어느 좁은 공간에서 마주한 외딴 남자의 스킨십에 몸을 맡겨버린 모래는 난생 처음 이상한 맛(?)을 느낀다. 따스한 햇볕에 기분이 나른해지듯 그 남자와의 망중한 같은 시간이 나쁘지 않다. 그렇다고 남편에 대한 마음이 변한 것도 아닌데 자꾸만 그 남자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남자를 만난다. 우연히도 한집에서 살게 된다. 특별한 비밀을 공유하게 된 그 남자 두레(주지훈)는 한식당을 차리려는 남편이 믿는 사부라 한다. 기이한 삼각관계에 놓인 세 사람은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한 집을 공유하는 관계로 거듭난다.
우연과 필연의 접합으로 이뤄진 삼각관계는 그 투명한 명도만큼이나 인공적이나 설득력을 지닌다. 보다 중요한 건 우연에서 비롯된 필연적 사연의 본심이다. 순수한 캐릭터로 위장에 성공하고 있으나 관계를 흔들기 위한 불순한 의도가 내재돼 있다. 마음이 변한 건 아니라지만 또 다른 누군가가 좋아진 모래의 마음을 마냥 두근거리듯 바라볼 순 없다. 궁극적으로 마냥 순수한 경험담으로 보존될 수 없는 것이다. 갈등을 느끼는 주체는 모래가 아니라 두 남자다. 비밀의 유효기간이 파기되는 순간 화기애애하던 두 남자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고 웃음을 공유하던 공간은 침묵과 호통으로 채워진다. 애초에 소유하던 쪽과 새롭게 공유한 쪽의 감정이 점차 치열하게 맞부딪힌다. 결국 상황을 무마시키는 건 여자다. 엄밀히 말하자면 거듭나는 쪽은 여자다. 두 남자는 그저 무기력할 뿐이다. 소유하고 있다고, 소유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상대로부터 공유 당하고 있었음을 깨닫는 남자들은 허탈하게 주저앉는다.
<키친>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도발적 물음을 품고 있는 듯 하지만 맺음과 끊음에 대한 사유에 가깝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뒤늦게 이해해버린 여자는 결국 어느 쪽도 택하지 않음으로써 새롭게 거듭난다. 그렇다고 그 모든 관계가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그것은 선택의 역량에 달렸다. 결혼과 이혼을 시작과 끝의 대립적 성향으로 인식하는 풍토 안에서 <키친>은 나름 진보적인 영화다. 그 변화를 결정짓는 주체도 여자다. 소유하기 원했던 남자들은 그저 선택을 기다릴 따름이다. 장사가 되지도 않는 양산가게를 경영하며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듯 살아가던 모래는 그 특별한 경험을 거쳐 홀로서기를 꿈꾸고 시도한다. 남녀의 관계보다도 그 여자의 변화가 눈에 띈다. 항상 남자의 요리를 먹던 여자가 스스로 요리를 시도하고 남자들에게 요리를 떠먹여준다.
이야기 흐름은 명료하고 딱히 막히는 구석이 없다. 하지만 때때로 그 상황에 내재된 감정보다도 그 감정을 품은 그릇에 눈이 간다. 깔끔하고 정갈한 미장센은 안으로 삭힌 감정을 숨기기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지나치게 값비싼 그릇처럼 보인다. 보일 듯 말 듯 얕고 천천히 흐르는 감정선 사이로 시각적 묘미가 더욱 흥미롭게 파고 든다. 세심한 조리사의 손놀림 끝에 차려지는 빛깔 좋은 음식들의 향연은 트렌디한 재미를 더하고, 밝고 화사하면서도 뚜렷한 색감의 영상은 눈길을 끈다. 그 사이로 인물들의 감정변화가 확인되고 갈등의 양상이 감지되나 정작 그 감정에 몰입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개성이 뚜렷한 만화주인공처럼 비현실적이다. 그 비현실적인 상을 통해 풍겨져 나오는 감정의 내음 역시 어딘가 비현실적이다. 그래서 머리로 이해가 가나 마음으로 체감되지 않는다. 다만 그 주변부의 다양한 정보를 즐기느라 여념이 없다. 깊은 맛보단 인공적인 자극을 제공하는데 익숙하다. 고운 빛깔로 치장해 눈요기에 좋지만 정작 손이 가지 않는 음식과 같다. 착향료나 감미료처럼 인공적인 색과 맛이 인지된다. 너무 예뻐서 되려 맛보기 불편하다.
<키친>은 예쁘고 아기자기한 영화다. 투명하고 또렷한 색감처럼 인물들도 또렷하고 투명하다. 도발적인 사연을 품고 있지만 착하기만 한 인물들은 그 사연마저 순수하게 표백시킨다. 그 덕분에 <키친>은 극히 특별한 사연으로 속박된다. 보편적인 질문을 던지려 하지만 그 특수한 실례가 답변의 영향력도 제한한다. 너무도 투명하여 이 세상 것으로 보이지 않는 햇살만큼이나 세 사람이 이루는 사연도 반 허공에 떠있는 느낌이다. <키친>은 편향적인 답변으로 이뤄진 앙케이트다. 보편적인 수치를 얻고자 했던 물음의 가능성이 국한된다. 물론 그게 잘못은 아니다. 사랑에 정의가 없듯 어떤 로맨스도 가능성을 의심받을 수 없다. 단지 그것을 사랑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의 차이다. 도발적인 질문이 품은 답안지의 가능성에 비해 편향적인 답변을 수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