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매틱은 확실히 편하다. 하지만 스틱 한번 제대로 잡아보면 그 ‘손맛’을 잊기 힘들다. 물론 기어보다도 중요한 건 타고 싶은 차 그 자체다.
친구에게 물었다. “수동적인 여자와 능동적인 여자 중 누가 좋아?” 류현진의 직구처럼 답이 날아왔다. “낮에는 수동적이고 밤에는 능동적인 여자!” 그야말로 능동적이다. ‘낮에는 따사로운 인간적인 여자’든, ‘커피 한잔의 여유를 아는 품격 있는 여자’든, 수컷들은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운 여자’를 원한다. 이왕이면 침대에서. 대부분의 남자들이 능동적인 여자를 원한다고 말하는 건 한번 어떻게든 ‘해볼라꼬’ 노력했던 기억의 산실일 것이다. 그러니 능동적인 여자가 좋다. 혹시 능동적인 여자 이상의 자동적인 여자라면, 주님께 영광.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시라. ‘너무 수동적인 여자친구 때문에 고민입니다.’ ‘관계시 수동적인 여자는 어떻게 적극적이게 만들까요?’ ‘연애를 할 때 수동적인 여자 아닌 능동적인 여자 되라?’ ‘능동적인 여자의 섹스.’ ‘남자는 능동적인 여자를 좋아한다.’ 등등. 세상 수컷들의 관심은 로마가 아니라 섹스로 통한다.
‘수동적’이란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란 이렇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의 작용을 받아 움직이는. 또는 그런 것.’ 반대로 ‘자동적’은 이렇게 정의된다. ‘다른 힘을 빌리지 아니하고 저절로 움직이거나 작용하는. 또는 그런 것.’ 그러니까 수동적인 여자란 달과 같은 존재다. 자신을 비춰줄 남자가 필요하다. 상대의 액션에 따라서 리액션도 제각각이다. 흥미롭지만 속을 알 수 없어서 답답하다. 자동적인 여자란 자연히 태양과 같다. 주변에 빛과 온기를 전한다. 누리고 싶은 존재다. 에너지가 넘친다. 하지만 때론 견딜 수 없게 뜨겁다. 지나치게 주장이 강해서 지칠 때도 많다. 고로 섹스를 기준으로 여성의 수동성과 자동성을 판단한다는 건 다분히 수컷의 본능일 뿐이다. 게다가 남녀가 만나서 발정기의 개처럼 섹스만 하는 건 아니다.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워지는 여자’도 ‘밤이 오면 심장이 터져버리는 사나이’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이순재 선생님의 특별한 제안에 귀가 솔깃해질 나이가 온다. 인생은 길고, 섹스는 짧다. 수동적인가, 자동적인가라는 이분법적인 구별보다 중요한 건 어쩌면 얼마나 매력적인가라는 기준이다.
페로몬 향수보다도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일지 몰라도 ‘사랑 받을 수 있는 사람’일지는 정말 아무도 모른다. 물론 니체는 ‘두 사람이 있는 그대로 기뻐하는 것이 사랑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니체는 평생 혼자 살았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내 모든 것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이상형이라는 말은 자웅동체가 되고 싶다는 말처럼 들린다. 전략이 필요하다. 수동적인 여자와 자동적인 여자를 구별하는 건 남자일지 몰라도 기준은 분명 대상이 되는 여성 자신에게 있다. 자신의 성격을 자신의 매력으로 승화시키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필요하다.
“아니, 1년을 사귀었는데 한번을 안 해주는 거야. 내가 무슨 스님이냐? 그래서 1년 되는 기념일에 해외로 여행을 가기로 했어. 같이 해외까지 나가서도 설마! 그리고 역시 드디어! 했지. 했어. 그리고는 한국으로 돌아왔어. 아, 이젠 좀 쉽겠지. 아놔, 그런데 이게 뭐야. 또 안 해주는 거야. 내가 걔랑 한 3년 사귀었는데 1년에 한 두 번했나? 그런데 진짜 웃기는 게 뭔 줄 알아? 지금도 종종 걔가 생각난다니까? 헤어진 지가 언젠데.” 정말 아이러니한 사연이다. 쉬운 여자가 아니었기에 미련이 남는다. 자동적인 여자가 보다 좋다고 느낀다는 건 감정적 판단이 아니라 경험적 믿음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자를 리드해야 한다고 믿는다. 침대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그녀가 원하는 걸 해주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녀는 좀처럼 말이 없다. “그냥 너 편한 대로 해”라는 말을 믿었다가 맘 상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속내를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차라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거나 아예 상황을 리드해주는 자동적인 여자가 수동적인 여자보다 상대적으로 편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연상녀를 좋아하는 남자들의 심리도 어쩌면 이런 것이다. 그녀들은 남자를 자신을 위한 지갑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댈 수 있는 편안한 파트너십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남녀란 섹슈얼한 긴장감이 필요한 관계다. 연인이 아니라 모자지간이 돼선 곤란하다. 당신이 원하는 건 연애이지 육아가 아니니까. ‘나는 솔직하고 털털한 여성이야. 그게 매력이지’라고 믿는다면 당신이 구애하는 그 남자에게도 그런 동성 친구 몇 명쯤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을 사랑해주길 바라는 남자의 ‘베프’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정신 차려야 한다.
“클럽에서 만난 두 명의 여자가 앞에 있다고 생각해봐. 한 명은 정말 화끈하게 잘 놀아. 그런데 그 옆에 좀처럼 말도 없고 새침한 여자가 앉아있어. 둘 다 예뻐. 섹시해. 일단 그날은 화끈한 여자랑 자겠지. 그런데 아마 그 다음 날엔 그 옆에 있는 여자에게 연락할걸.” 좀 놀아본 지인의 말이다. 모든 남자의 심리가 꼭 이렇진 않다. 하지만 참고할 필요는 있다. 물론 내숭 떠는 여자는 매력이 없다. 정확하게는 내숭만 떠는 여자는 별로다. 물론 적당한 애교에 녹지 않는 남자는 드물다. 하지만 꼭 콧소리를 낼 필요는 없다. 그저 상냥하게 한번 거절해보시라. “미안하지만 안돼.” 당신의 자동적인 여자의 유전자를 억누르고 수동적인 여자의 탈을 써보라는 말이다.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다. 먹기 쉬운 떡은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먹기 힘들어지면 애써 손을 뻗는다. 남자의 마음도 간사하다. 쉬운 여자가 되느니 나쁜 여자가 되는 것이 훨씬 매력적이다. 물론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 마음을 얻는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체질을 바꾸라는 말이 아니다. 적당히 조절하라는 말이지. 지나치게 수동적인, 의존성이 심한 여자는 피곤하다. 누구라도 쉽게 나가떨어진다. 하지만 적절한 수동적 태도는 이성의 흥미를 자극할만한 매력이 될 수 있다. 채찍질을 한번 했으면 당근을 하나 물려줘야 하는 법이다. 긴장과 이완의 균형처럼 수동과 자동의 균형을 맞추는 노하우가 필요하다.
남자를 리드하는 건 좋다. 처음부터 모든 패를 보여줘선 곤란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을 아낄 필요가 있다. 좋아한다면 모든 것을 줄 필요가 있다. 다만 일방적이거나 쉽게 줘선 곤란하다는 말이다. <섹스 앤 더 시티>의 한 에피소드에서 캐리는 상담사에게 하소연한다. 연애도 잘 안 풀리고, 인생도 꼬여간다며, 자신이 만난 남자들이 왜 다 그 모양인지 모르겠다고. 그때 상담사가 말했다. “당신이 만난 이상한 남자들의 공통점은 바로 당신이죠.” 모든 이유는 당신의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자동적인 여자이건, 수동적인 여자이건, 남자의 선택을 기다리지 마라. 스스로를 뽑기 인형이라 여기지 않는다면. 선택을 이끄는 여자가 돼야 한다. 매력 있는 여자가 돼야 한다. 남자가 원하는 것도 그런 여자이니까.
변태가 나타났다. 여고 앞이 아니라 TV에서. 응큼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의외로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반응이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알고 보면 어차피 당신도 변태니까.
JTBC의 <마녀사냥>에 특별 게스트로 배우 정경호가 출연했다. 좋아하는 할리우드 배우를 이야기하던 중 정경호가 “줄리아 로버츠”라고 답하자 신동엽이 다시 물었다. “입 큰 여자 좋아하나 봐요?” 정경호가 답했다. “예.” 그러자 음흉한 표정으로 신동엽이 말했다. “은근히 크다고 자랑하네.” 어디서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정경호를 제외하고 스튜디오의 모든 이들은 파안대소했다. <마녀사냥>에서 신동엽은 정관장 혹은 산수유 같은 존재다. 그의 존재감만으로도 프로그램의 정체성이 선다. 이미 <SNL 코리아>에서 절정의 ‘섹드립’을 선보이며 변태적인 유머 코드를 대중적으로 삽입하는데 성공한 신동엽이였다. 이영돈 PD의 유명한 멘트 “제가 한번 먹어보겠습니다”를 음담패설처럼 비틀어버리는 건 분명 대단한 재능이다. <SNL 코리아>가 신동엽의 출연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것도 그런 덕분이다. 신동엽의 존재감이 <SNL 코리아>의 ‘섹드립’ 본능을 일깨우고 프로그램의 ‘성’ 정체성마저 각성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사실 <마녀사냥>은 <SNL 코리아>와 같이 섹스를 마음껏 희화화하는 성격의 콩트 프로그램이 아니다. <마녀사냥>은 섹스에 대한 솔직하고 자유로운 담론을 펼치는, 음담패설을 겸비한 토크쇼에 가깝다. 같은 소재를 다른 방식으로 다루는 두 프로그램에 신동엽이 발을 걸치고 있는 이유는 어쩌면 이렇다. 섹스라는 주제에 대해서 거리낌 없이 눙칠 수 있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빛을 보는 캐릭터들도 생겨나고 있다. 일찍이 ‘감성변태’라는 별명을 얻었던 유희열은 <SNL 코리아>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자리매김하는 중이고, <마녀사냥>에서 신동엽의 섹드립을 발군의 만담으로 이끌어내는 성시경의 솔직한 입담은 그야말로 재발견이다.
‘변태’라는 캐릭터가 인기를 끌고, 섹스 어필한 소재가 예능의 저변으로 확대된다는 건 섹스를 저속하다고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로부터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누구나 섹스를 하면서도 누구도 섹스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마치 섹스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수술과 암술로 꽃가루라도 교환해서 번식하는 종족처럼 행세한다. 공공장소에서 ‘섹스’라는 단어를 또박또박 발음했다가는 고해성사라도 받아야 할 것 같다. 섹스라는 단어를 단순히 야한 것이고 저속한 행위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솔직하지 못하다. 올해 처음으로 집행된 콘돔 광고에 대한 갑론을박은 밑바닥에 놓여있던 이런 의식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아이들도 보는 TV에서 콘돔 광고를 하면서 섹스를 조장하는 것이냐’라는 반대 여론과 ‘오히려 감출수록 부작용이 더 크다’는 찬성 여론이 팽팽히 맞섰다. 그런데 콘돔만 있으면 섹스가 가능하나? 콘돔이랑 섹스한다는 말인가? 콘돔 광고가 섹스를 조장하는 것이라면 냄비 광고도 비만 환자가 급증에 일조하고 있다는, 맥주잔이 음주를 조장하고 있다는 비판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이런 논쟁 자체는 긍정적이다. 누구나 섹스한다. 콘돔도 쓰고, 피임도 한다. 콘돔도 피임약도 소비재다. 소비를 촉진하고자 광고를 집행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21세기가 돼서야 광고가 집행된 건 콘돔의 소비가 민망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섹스는 건강한 행위다. 건강하지 않으면 하고 싶어도 못한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섹스를 건강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제대로 된 성교육이 부재한 것도 어쩌면 그래서다.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라는 순진한 질문에 당장 상세한 브리핑을 하라는 말은 아니지만 평생 속이며 산다는 건 문제다. 만약 청소년들의 성교육을 담당하는 것이 인터넷이라면? 농담이 아니다. 지난 해 성폭력상담소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성문화를 접하는 경로의 1순위가 인터넷이란 조사결과가 나왔다. 역시 인터넷 강국이다. 훗날 섹스를 인터넷으로 다운 받은 포르노로 배웠다는 자식의 고백을 듣기라도 한다면 기분 좋을 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섹스에 대한 의식이 건강하지 않다면 결국 우리 사회의 미래도 건강할 수 없다. 콘돔 광고가 성관계를 조장하고 부추긴다는 어떤 기성세대들의 주장은 인터넷으로 성문화를 경험하는 청소년들이 대다수라는 설문조사 결과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한가. 그런 의미에서 차라리 변태적인 유희의 소비는 차라리 좋은 변화다. 우리가 금기시했던 편견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기회라는 말이다. 남들이 들을까 무서워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이를 테면 동성애도 마찬가지다. 남자가 남자와, 여자가 여자와, 손을 잡고 다니든, 부비부비를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광장에서 섹스를 하면 범죄다. 하지만 섹스는 침실에서 일어나는 사생활이다.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입히지 않는 당사자만의 문제다.
동성애도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섹스를 말해도 되듯이 동성애도 말할 수 있다. 남녀가 손잡고 걷듯이 ‘남남’이 손잡고 걸을 수 있다. 당사자들에게 일말의 지분도 없는 이들이 참견을 시작한다면 오히려 기회다. 갈등이나 충돌은 불편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긍정적인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지날 수 없다면 어떠한 변화 자체도 존재할 리 없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불경한 짓이냐고 기도하고 불공을 드리거나 말거나 이건 대단히 건강한 변화다. 누구나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고 결국 섹스한다. 하지만 섹스를 ‘말하면’ 변태가 된다. 그렇다면 어차피 이 사회에선 모두가 변태다. 그러니 솔직해져야 한다. 우린 변태가 아니라 그 섹스로 잉태된 존재니까. 자기 존재의 근원을 부끄러워할 수 있겠나.
파격적인 동성애 영화로 알려진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그 어떤 멜로보다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러브스토리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지독한 멜로물입니다. ‘이별을 통한 소녀의 성장통’이란 식으로 정리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건 영화가 끝날 무렵까지 그 이별이 성장으로 해소되기 보단 통증으로 내려앉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델(아델 엑사르코풀로스)은 길에서 마주쳤던 엠마(레아 세이두)와의 우연한 재회를 통해서 예상하지 못했던 체험들을 거듭해나갑니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것은 물론 아티스트로서의 미래로 나아가는 엠마와 그 주변부의 삶에 종속되기 시작하면서 삶이 예상 밖의 궤도를 돌게 되는 셈이죠.
단순히 성정체성을 깨닫는다는 것 이상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삶의 저편으로 나아가버리는 셈이에요. 결과적으로 아델에게 있어서 엠마와의 이별이란 감정적인 단절뿐만 아니라 경험적인 기회와의 단절로도 이해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죠. 그만큼 이별이라는 진통은 아델의 삶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절망이자 비통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자신이 보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삶의 저편까지 나아가 그 일상에 익숙해질 무렵 다시 원점으로 튕겨져 추방돼버린 셈이니까요.
배우들의 연기가 대단히 좋습니다. 특히 아델 역을 맡은 아델 엑사르코풀로스는 전반적으로 영화의 서사와 함께 인상이 변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줄 정도인데 이별 이후의 감정적 진폭을 드러내는 후반부의 연기는 정말 연기가 아니라 실제라고 믿어질 만큼의 감정적 몰입도를 보여줍니다. 충동적인 계기로 맞닥뜨린 이별에 의한 심적인 고통이 스크린 밖으로도 절절하게 전이되는 기분이죠. 게다가 그 반대편에 선 엠마 역을 맡은 레아 세이두는 거대한 감정적 파고를 형성하는 매개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이별 이후에 남게 되는 애틋함 같은 감정의 끈을 놓지 않음으로써 극적인 페이소스를 극한으로 끌어올립니다. 두 배우의 화학작용 자체가 이 영화의 감정을 입체적인 구조로 이끌어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 영화가 화제가 된 건 대단히 수위가 높은 여성간의 섹스신이 긴 분량으로 등장한다는 점이었죠. 그런데 대단히 적나라해서 한편으론 담담한 기분이 느껴집니다. 은밀하고 농염한 연출을 위한 카메라 앵글이 동원되기 보단 사물을 관찰하듯 평범한 프레임 안에서 행위가 목격되는 인상입니다. 오히려 저는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무언가를 먹을 때 보는 이의 욕구를 건드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토마토 파스타를 너무나 맛있게 먹는 장면에선 입 안에 침이 고이는 느낌이기도 했죠. 색욕보다도 식욕이 강렬하게 느껴진다니 좀 묘하지 않습니까? 그건 아마 이 영화가 섹스신을 특별한 영화적 체험처럼 위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동성애라는 소재는 이 영화의 주요한 키워드가 될 뿐, 서사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사안처럼 보이지도 않습니다.
결말부에서 묘사되는 찰나의 엇갈림을 보면서 ‘운명’이란 단어에 설득 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뒤바꿀 수 없는 결과를 등 뒤에 두고 터벅터벅 걸어가야 하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끄덕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델의 뒷모습을 비추는 엔딩시퀀스의 롱테이크에서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건 그래서입니다. 그 너머의 삶에 대해서 염려하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걸어가길 바라는 마음이 드는 것이죠. 그렇게 그 너머를 살아가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요. 사실 저는 원작의 비극적인 결말보다도 영화의 결말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죽음에 대한 연민보다도 이면의 생에 대한 호기심이 지워지지 않는 여운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한편 영화에선 프랑스의 전인적인 교육 환경을 목격할 수 있는데 학생들이 등록금 인상을 반대하는 가두 시위를 하는 신에서 '민영화를 반대한다!'는 대사가 나올 땐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물론 불법시위라는 목적을 앞세운 과격한 진압 장면 같은 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건 비단 저뿐만이 아닐 것이라고, 문득 생각하게 되네요.
조셉 고든 레빗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메가폰을 잡고, 주연까지 맡은 <돈 존>은 보통 물건이 아니다.
매일 밤 친구들과 함께 클럽을 찾으며 여자를 찾는 남자가 있다. 최상등품의 고기를 고르듯이 점수를 매기고, 최고등급이라고 생각되는 여자에게 작업을 걸고, 춤을 추다가 집으로 가서 섹스를 즐긴다. 그에게 이는 일종의 게임이나 다름없다. 1회용품을 소비하듯이 자연스럽고 거리낌 없이 원 나잇 스탠드를 즐기고, 다음날이 되면 새로운 상대를 찾는다. 도돌이표 같은 밤이 반복된다. 하지만 그 어떤 여자와의 잠자리도 그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다. 그를 위한 환상 속의 그녀는 따로 있다. 클릭 몇 번이면 만날 수 있는 포르노 배우들을 보며 자위를 하는 것이 그 어떤 여자와의 잠자리보다도 그를 만족시킨다. 그런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새로운 여자가 나타났다.
<돈 존>은 할리우드의 미래로 꼽히는 영민한 배우 조셉 고든 레빗의 각본, 연출, 주연작이다. ‘돈 존(Don Jon)’이란 제목의 모티프가 된 건 스페인 귀족 가문의 전설적인 바람둥이 돈 주앙(Don Juan)이라고 한다. 돈 주앙은 카사노바와 달리 자신이 만나는 여자들로부터 혐오를 샀는데 여자를 노골적인 정복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돈 존>의 존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만족할 수도 없는 잠자리를 전전하는 건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자존감의 정복을 위해서다. 그를 충족시켜주는 상대는 인터넷의 포르노 사이트에 널려있다.
‘포르노 중독자’라는 캐릭터의 특성은 인터넷 시대의 폐해를 연상시키지만 <돈 존>은 궁극적으로 관계의 일방성을 지적하고 수긍하게 만드는 영화다. 존에게 있어서 진짜 섹스를 위해 거쳐야 하는 스킨십과 전희의 과정이란 그저 결과를 위한 노동에 가까운 반면, 포르노를 보며 자위하는 것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만족스럽다. 쾌감이란 결과에 닿기까지의 과정이 간편하고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가 바바라(스칼렛 요한슨)에게 끌리는 것 또한 쉽게 섹스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점차 존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그 변화는 존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일방적인 관계에 탐닉하던 남자는 자신을 매료시킨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투신함으로써 일방적인 관계의 허무를 깨닫는다. 간편하고 합리적인 방식의 쾌감이 ‘가짜’임을 깨닫는다.
<돈 존>은 계산된 연출 방식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반복적인 패턴을 지닌 존의 일상을 도돌이표 같은 동선과 공간 묘사, 행위를 통해서 묘사하는데 이 패턴에 미세한 변화를 삽입함으로써 인물의 심리적 변화를 별다른 설명 없이도 효과적으로 이해시킨다. 과감한 인서트컷을 삽입하거나 빠른 컷의 전환으로 두 개의 신을 연결하는 교차 편집 등 편집 방식이 현란하게 느껴지는 신도 더러 있는데 때때로 과장되거나 넘치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재기발랄하고 영리하게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킨다. 무엇보다도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에서 소모될만한 소재를 군살 없는 성찰로 승화시킨 성장드라마로 완성해낸 재능이 놀랍다. 과감하면서도 감복할만한 결말로 다다르는 이야기 방식도 탁월하다. 실로 주목할만한 연출 데뷔작이다. 조셉 고든 레빗, 역시 보통 물건이 아니다. 참고로 중반부에 놀라운 카메오가 등장하니 기대할 것.
안티크라이스트 일명 적그리스도, 이 불경한 언어를 제목으로 내건 <안티크라이스트>에는 불순한 기운이 그득하다. <파리넬리>를 통해서 유명해진, 바로크 작곡가 프레데릭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 2막에서 등장하는 아리아 <울게 하소서>가 경건하게 울려 퍼지는 도입부는 강렬한 성애에 빠진 두 남녀의 섹스를 유려한 고속촬영의 방식으로 포착한 뒤, 투명한 흑백의 색감으로 포장해낸다. 그 욕망이 절정의 쾌락으로 분열되는 오르가슴의 찰나를 공유한 부부는 동시간에 벌어지는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삶의 균열로 빠져든다. 극렬한 성욕 속에서 어린 아들의 죽음을 방치하게 된 부부의 일상은 점차 우울과 무기력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광기로 침전돼 간다.
입구와 출구 역할을 하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한 4장의 단락으로 구성된 영화의 서사는 음울한 분위기를 밑천으로 삼아 점차 흉악한 분위기로 발전돼 나간다. 우울과 무기력 속에서 점차 비이성적인 광기로 뻗어나가는 아내(샬롯 갱스부르)의 행위와 이를 관찰하고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남편(윌렘 대포)의 관계는 행위자와 관찰자의 단계를 넘어 가학과 피학의 상대자로 진화한다. 이는 성적인 욕망을 넘어서서 상대에 대한, 혹은 스스로에 대한 파괴적 희열을 느끼는 새디즘과 매조히즘의 대비적인 양상까지 맞닿는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가학과 피학의 대비적 상징에 가깝다. 그리고 이는 이성적인 (척 하지만 실상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는) 남성과 비이성적인 광기로 물들어가는 여성의 대비를 통해 때때로 우스꽝스러운 은유로 가 닿는다.
‘자연은 악마의 교회’라 일컫는 <안티크라이스트>는 종교모독이라는 주제를 건드릴만한 요소로 치장돼 있으나 이를 단순히 종교에 대한 직접적인 겨냥이라 국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는 신앙에 가까운 인간의 이성적 신념이 무지한 광기로 변질되는 과정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이자 상징과 은유를 동원한 독설에 가깝다. 11세기 중세 유럽에서 십자군 전쟁 시절의 광기 어린 역사를 배경으로 둔 <리날도>의 <울게 하소서>가 오프닝과 엔딩 시퀀스에 사용되는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이성을 무기로 둔 한 남성이 피라미드를 그려나가며 여성의 비이성적인 행위를 악마적인 본성과 연결해나가는 과정은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을 둘러싼 광기의 매커니즘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남성성의 기득권으로 무장한 사회 전반에 대한 공격적인 은유처럼 보인다. 특히 에필로그로 명명된 엔딩 시퀀스는 이런 영화적 메타포를 블랙코미디의 정점으로 끌어올린다.
(포르노 배우를 대역으로 삼아 촬영했다는) 성기 노출과 삽입 신을 비롯해서 (언론시사회에서는 공개됐지만 정식 상영본에서는 삭제된다는) 여성의 성기 절단을 비롯한 극악한 신체 훼손 신 등, 당신의 자극적 역치를 시험에 들게 할만한 몇몇 장면이 존재하지만 <안티크라이스트>는 단순히 극악무도한 이미지로 점철된 영화라 폄하할만한 작품이 아니다. 이성의 껍데기가 벗겨진 채 쾌락과 생존이라는 동물적인 본능만이 남겨진 남녀의 끔찍한 양상을 묘사하는 과정은 자연 상태의 인간이 지닌 원초적인 힘의 본질과 이성적 무기력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과 같다. 성적 행위를 비롯한 폭력의 상응까지, 극단적인 광기와 함께 가학과 피학의 매커니즘에 갇힌 남녀의 양태를 묘사하는 영화는 문명과 이성이라는 제어로부터 발가벗겨진 인간의 본질이 이토록 손쉽게 파괴될 수 있는 나약한 것임을 강렬하게 조명한다. 광기란 결국 순수한 극단의 소산이다. 정이든, 반이든, 가학과 피학은 어떤 식으로든 합의 광기로 통하게 돼있다. 그것이, 아니, 그것도 결국 인간이다.
(어쩌면 마케팅 때문에) 단순히 웃겨주는 섹스코미디 정도로 생각했다가는 다소 뜨악할 수도 있겠다. 이해영 감독의 <페스티발>은 자신의 전작이었던 <천하장사 마돈나>와 커다란 접점을 지닌, 성소수자들에 대한 사연이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는 작품이다. <페스티발>에 등장하는 세 커플과 7인의 캐릭터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취향이 다른 성적 결핍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통해 관계적 소통의 불편을 느낀다. 옴니버스 구조의 캐릭터들이 이루는 야릇한 사연들은 영화를 버라이어티하게 확장하며 내러티브의 진전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는 동시에 대사와 행위를 통한 웃음을 드물지 않게 포진시켜나간다. 하지만 진보적인 가치관으로 표방될 만한 <페스티발>의 메시지가 전체적인 이야기의 얼개 안에서 포용되지 못하는 느낌인 동시에 다양한 캐릭터들이 펼치는 네 갈래의 사연을 갈무리하는 방식에서도 탁월한 합의점을 발견할 수 없다. 웃겨주는 캐릭터가 존재하는 건 맞지만, 웃겨주는 이야기라고 말하기란 어렵다. 축제 분위기는 요란한데, 들뜨는 기분이 멈칫거린다고 할까.
세상 어딘가엔 진실한 사랑을 추구하는 남자가 있을 거라 믿는 여자. 남자란 모름지기 여자와 침대에 올라갈 생각만 하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남자. 진실한 사랑을 추구하는 여자와 그 믿음을 허구라며 깨부수는 남자의 만남. 남녀라는 함수관계 속에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공식을 내세우며 반대의 이미지로 뻗어나가는 그래프로 대칭된다. <어글리 트루스>는 남녀라는 함수관계 속에서 정반대의 공식을 통해 대칭적 그래프처럼 거리감을 두던 남녀가 다시 한 점에서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는 로맨틱코미디다.
아침 뉴스쇼 PD 에비(캐서린 헤이글)는 품격 있는 방송을 추구하지만 나날이 바닥을 긁는 시청률에 임원진의 압박을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야간 케이블 방송에서 ‘어글리 트루스(The ugly truth)’라는 성 카운셀러 방송을 우연히 보게 되고 직설적인 발언으로 순수한 사랑을 짓밟는 마이크(제라드 버틀러)를 보고 격분해서 전화연결까지 시도하지만 결국 모욕만 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오전, 마이크를 아침 뉴스 쇼에 영입한다는 국장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지령을 받게 된 에비는 이에 질색하지만 결국 임원진의 압박에 그를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뉴스 쇼에 출연한 마이크는 직설적인 발언으로 방송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지만 시청률은 상승하고 에비는 더욱 발만 동동 굴린다.
갈등선이 뚜렷한 남녀가 반목을 거듭하다 우연히 서로의 진심을 들추는 기회를 얻게 되고 이를 통해 호감을 이루다 종국에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로맨틱코미디라 불리는 대부분 영화들이란 남녀의 관계변화를 줄기로 로맨스의 진전을 그려나가는 작품이다. 어쩌면 그만큼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는 신선도를 유지하기 어려운 관습적 영화란 말이기도 하다. 그건 사랑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특별하게 묘사한다는 것 자체가 식상한 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로맨틱코미디가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하는 건 그 전형성이 갖춘 쏠쏠한 재미에 있다. 그리고 그 재미의 원천은 로맨틱의 배후에 놓인 코미디 덕분이다.
무엇보다도 <어글리 트루스>는 스크루볼 코미디로서 탁월한 묘미를 자랑한다. 저마다의 생각과 속내를 거침없고 장난끼 가득한 수사에 담아 속도감 있게 주고 받는 캐릭터들의 입담은 <어글리 트루스>에서 오락적 재미를 자아내는 첫번째 묘미다. 또한 입담이 뛰어난 캐릭터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자랑하는 동시에 상황에 적절한 슬랩스틱을 구사하며 유머를 강화한다. 특히 캐서린 헤이글의 진동(?) 연기는 인상적인 웃음을 발생시킨다. 동시에 남녀 관계에 대한 적나라한 믿음을 표현하지만 연애 카운셀러로서 인상적인 조언을 던지는 마이크와 이를 통해 감정적 변화를 감지하는 에비의 관계 변화를 바라보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너무도 다른 두 사람이 긴밀한 연인 관계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간다는 점에서 <어글리 트루스>는 성공한 로맨틱코미디라고 할만한 여지가 있다.
결말은 뻔하다. 누구나 예상하듯, 원수는 연인이 된다. –이건 스포일러도 아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결말을 확인하는 일이란 그만큼 식상하다. <어글리 트루스> 역시 그 식상함의 혐의에서 온전히 자유롭기 어려운 영화다. 하지만 그 뻔한 결말을 연출하기 위한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분명하다. 마초남과 순진녀가 만나 애정관의 차이를 확인하지만 이성으로서 거부할 수 없는 본능적 감정에 이끌리게 되는 과정은 흥미진진하다. 섹스어필한 입담을 통해 사랑에 대한 순진한 감상을 날려버리고 실제적인 감정에 치중한다는 점도 현실적이다. 무엇보다도 근육만큼이나 입담도 탄탄한 제라드 버틀러와 우아하면서도 깜찍한 캐서린 헤이글의 앙상블이 <어글리 트루스>의 매력을 온전히 보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