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페르노>는
기호학자 로버트 랭던(톰 행크스)을 앞세운, 댄 브라운의 소설을 영화화한 세 번째 탐정물이다. 그런데 <다빈치 코드>와
<천사와 악마>의 로버트 랭던이 기호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중세부터 이어져 오던
종교집단들의 은밀한 광기를 추적해 나간 것과 달리 <인페르노>의
로버트 랭던은 현대문명을 관통하는 인구과잉문제와 연관된 테러리즘에 맞선다. 어떤 의미에서 <인페르노>의 로버트 랭던은 그가 아니어도 될만한 일까지
떠맡은 셈인데 그의 역할을 만들어주기 위해 동원된 건 단테라는 모티브를 통해 구상한 기호학적인 퍼즐이다. 그러니까 <다빈치 코드>와
<천사와 악마>가 로버트 랭던의 개입을 자연스럽게 유도할 수 있는 이야기였던
것과 달리 <인페르노>에선 인위적인 구조적 설계가
필요하다.
<인페르노>의
로버트 랭던은 의문의 사나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기억상실증 상태로 피렌체의 한 병원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가 품은 의문과 관객의 의문은 똑같이 제시된다. 결국 그가 기억을 회복하며 단테의 지옥도에 담긴
의미를 쫓아 피렌체와 베니스, 이스탄불을 누비는 과정에 동참하는 관객의 흥미는 그가 왜 이 사건에 휘말렸는가라는
물음표에 놓여있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인페르노>는 <다빈치 코드>나 <천사와 악마>처럼 로버트 랭던을 탐정처럼 앞세운 지적인
추리극으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미스터리에 더 큰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초반에 제시하는
물음표의 흥미는 중후반부에 다다라 싱거워지는데 아무래도 각본의 내러티브가 완급조절에 실패한 인상이다.
전반부가 정체불명의 물음표로 가득한 호기심을 잉태하는 장이었다면 후반부는 그 물음표의 장막을 벗긴 실체의 위압감을
증명해야 하는 장이다. 문제는 로버트 랭던이 고도의 지적 추리를 통해 추적한 적의 실체가 그리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영화를 지탱하던 의문들이 손쉽게 자기 손을 들어서 정체를 드러내듯 미스터리의
동력이 손쉽게 소진된다. 게다가 극의 향방을 전환시키는 결정적 존재가 자기 정체를 드러낸 직후 그 인물과
관련된 과거사를 제시하는데 그 순간 이 영화가 멜로를 지향했던 것인가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감상적이라 영화의 지향점에 의문이 생길 정도다. 덕분에 영화의 서스펜스를 지탱하던 물음표의 패가 모두 다 열린 극 후반부에선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완전히 증발돼버린
듯해서 클라이맥스의 존재감 자체가 부재한 인상마저 준다.
한편 <인페르노>에서
탁월한 병풍 역할을 하는 피렌체와 베니스, 이스탄불의 풍경들은 아이맥스 카메라의 광대한 시선을 등에
업고 관광영화의 묘미를 극대화시킨다.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두오모돔과 조토의 종루 그리고 베키오
궁전과 우피치 미술관을 아우르는 피렌체부터 베니스의 산 마르코 광장 그리고 이스탄불의 하기스 소피아 성당과 예레바탄 지하궁전까지, 세계적인 유산이라 할만한 풍경이 아이맥스 카메라의 광대한 시선을 통해 중계되는 건 영화적 완성도와 무관하게
그럴 듯한 볼거리를 이룬다. 물론 충분한 기회비용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대세는 VR이다. 모두가 VR을 언급한다. 바람이 분다. 물론 이것이 판을 뒤엎을 바람인지는 알 길이 없다.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선 지난해 선댄스영화제에서 화제가 된 VR영화
<카타토닉>을 상영했다. <카타토닉>은 특별한 스토리가 있다기 보단 휠체어를 타고
괴기스러운 공간을 돌아다니며 소름 끼치는 광경을 목격하게 만드는 과정을 체험하게 만드는데 목적을 둔 호러 단편물이다. 이를 테면 테마파크의 귀신의 집 같은 거랄까. 특별히 마련된 휠체어에
앉아 안내에 따라 VR헤드셋을 쓰니 플레이 과정에 대한 선택을 묻는 문구가 떴다. 헤드셋의 전면부를 터치하니 영화가 시작됐다. 다른 세상이 시야에
꽉 찼다. 아니, 다른 세상이었다. 뭔가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기이한 풍경 속으로 내가 떠밀려가고 있었다.
긴장감이 엄습하면서도 호기심이 발동해서 주변을 자꾸 두리번거렸다. 앞서 영화를 본 여자가
상모 돌리듯 머리를 돌려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VR영화는 고개를 돌리면 그 시점에 해당되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관객이 시점을 결정할 수 있다. 신기해서 상모 돌리듯 상하좌우로
고개를 돌려 보게 됐다. 그런데 무언가 굉장히 끔찍한 것이 오른쪽에 있었는데 내가 왼쪽을 보고 있어서
지나쳐 버린 것 같다. 본의 아니게 긴장감 대신 내가 외면한 귀신의 쓸쓸함을 느껴버렸다. 게다가 영화를 보는 내내 시력이 0.5 정도 떨어진 것만 같았다. 화질이 선명하지 않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날 영화를 보는데 활용된 건 삼성기어VR인데 해상도가 좋지 않다는
지적이 담긴 기사가 적지 않게 검색된다. 콘텐츠의 가능성을 막는 기술적 한계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어쨌든 흥미로운 변화다. 아이맥스,
3D, 4D 등 새로운 관람 방식이 더러 등장했지만 VR영화는 완전히 새로운 체험이다. 그만큼 전세계 영화계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루카스필름 산하의 한 스튜디오에선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VR영화를 제작할 것이라 발표했다. 관객이
다스베이더가 등장하는 영화가 아니라 관객이 다스베이더의 시점으로 영화에 참여하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아이맥스(IMAX)사에서도 VR영화를 제작할 것이라 발표했다. 아이맥스사에서 만드는 VR영화이니만큼 기존의 VR기기에 비해 화각이 넓은 VR기기를 제공할 것이라 밝혔다.
VR영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기존의 영화산업에 몸담고 있던 이들만이
아니다. 지난해 구글에선 <헬프>라는 단편 VR영화를 발표했다.
간단한 테스트 영상 정도를 만든 게 아니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와 <스타트렉 비욘드>를 연출한 저스틴 린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으로 우주에서 날아든 괴물이 활보하는 도시를 1인칭 시점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작품이다. “시청자가 영화 속 공간에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어려웠다.” 구글과 함께 <헬프>를 제작한 콘텐츠 기업 불릿의 대표 토드 마커리스의 변이다. 그렇다. 영화란 감독의 예술이다. 감독이 결정한 시점에 영화의 의도가 담겨있다. 문제는 VR영화는 관객이 시점을 결정함으로써 영화의 의도를 완벽하게
외면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관객의 체험이 의도치 않게 영화적 실패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관객에게 360의 시야각을 열어줌으로써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건 VR영화가 지닌 현재 시점의 한계인 셈이다. 그리고 이는 과연 VR영화가 영화산업의 미래를 견인할 화두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모종의 답변일 수도 있다.
VR영화가 영화를 대체하는 미래일 것 같진 않다. 다만 VR영화는 하나의 장르를 자처할 수 있다. 1인칭 시점의 영상을 통해 관객에게 영화적 체험을 주입하려는 시도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극명한 오락적
장점을 품고 있다. 다만 VR영화라는 것이 보편화되려면 극장의
풍경이 달라져야 한다. 관객의 자리마다 VR헤드셋이 비치돼
있거나 3D입체안경처럼 상영관 출입구에서 관객에게 VR헤드셋을
하나씩 나눠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거대한 스크린이 아니라 각자의 머리에 쓴 고글을 통해 각자의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상영관에서 본 영화에 대한 기억은 제각각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극장에서 VR영화를 본다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홈비디오 시장 혹은 기존의 극장과 다른 형태의 VR영화관이라는
신종 사업을 통해 활로를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엔 VR영화를 볼 수 있는 VR시네마라는 영화관이 문을 열었는데 그곳엔
거대한 스크린 대신 저마다 자리를 잡고 영화를 볼 수 있는 VR헤드셋이 다량으로 배치돼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VR영화에 대해 이와 같이 말했다. “VR영화는 위험하다. 왜냐면 관객은 감독의 의도와 다른 곳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VR기술을 개발하는 한 회사의
고문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까 영화의 대가에게도 VR영화는
흥미롭게 다가오는 쟁점인 셈이다. 결국 VR영화는 그에 어울리는
기획과 결합됐을 때 완벽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런 의미에서 VR은 영화의 미래라기 보단 새로운 영토, 즉 신대륙의 발견인 것이다.
극장은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다. 그래서 누구나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간다. 하지만 요즘 극장은 영화만
상영하는 곳이 아니다. 사람들은 영화 이상의 체험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아내와 영화를 한편 보기로 했다. 극장부터 골랐다. 코엑스 메가박스에 새로 단장한 프리미엄 상영관 ‘부티크 M’을 찾기로 했다. 스마트폰으로 예매사이트에 접속해서 영화를 고르고, 두 좌석을 선택한 후 결제를 했다. 5만원이 결제됐다. 그러니까 영화 티켓 두 장의 가격이 무려 5만원이다. 티켓을 금으로 만들었나? 종이였다.
상영관 이름이 스위트룸이라고 했다. 흔한 극장 상영관처럼
1관이라고 부르는 대신 101호라고 했다. 상영관이
아니라 호텔룸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호텔식 서비스를 지향했다.
넓고 편안한 리클라이너 체어에서 다리를 쭉 뻗고 거의 눕다시피 앉아서 영화를 볼 수 있다. 게다가
에비앙 생수를 웰컴 드링크로 제공한다. 입구에서 무릎담요를 나눠주고 자리엔 슬리퍼도 놓여있다. 룸서비스도 가능하다. 영화 시작 전에 좌석 측면에 있는 벨을 누르면
직원이 와서 주문을 받는다. 팝콘이나 나초 대신 피자를 주문했다. 화덕에서
구운 조각피자로 유명한 ‘피자리움’이 입점해있었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와인도 판다. 그뿐만이 아니다. 홍대 부근의 유명한 커피 전문점인 앤트러사이트를 비롯해 타발론 티, 오설록
아이스크림도 상시 판매한다. 어쨌든 2시간 30분에 달하는 영화를 보면서 리클라이너 체어의 안락함을 실감했지만 동시에 영화가 재미없다면 숙면을 취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행히도 나는 흥미로운 영화를 보고 있었고,
잠들 일은 없었다.
부티크 M과 같은 상영관이 낯설게 느껴진 것은 아니다. 이미 유사한 형태의 프리미엄 상영관은 존재해 있었으니까. CGV 골드클래스가
대표적인 모델이다. CGV에선 일찍이 식사와 영화관람을 연동해서 즐길 수 있는 ‘시네 드 셰프’와 같은 시스템을 운영하기도 했다. 롯데시네마 역시 샤롯데라는 프리미엄 상영관을 운영하고 있다. 메가박스
부티크 M은 후발주자다. 이미 존재하는 프리미엄 상영관 시장에
뛰어든 건 지금의 시장에서 유효한 기획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메가박스에선 지난해부터
다양한 형태의 상영관을 기획해왔다. 과거의 자동차 극장을 연상시키는 드라이브 M과 건물의 옥상에 설치된 텐트와 캠핑 의자에 앉아 야외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글램핑 상영관인 오픈 M이 눈에 띈다. 둘 다 영화 관람 외적인 경험을 서비스한다는 공통점이
눈에 띈다. 특히 가족 단위 관객들을 위한 배려가 눈에 띄는데 어린 유아가 있는 부부가 쉽게 극장을
찾지 못하는 환경을 생각하면 상당히 유용한 서비스처럼 보인다. 바비큐나 와인, 맥주와 함께 영화를 즐길 수도 있다. 전통적인 영화관의 관습에서
벗어나 영화 관람과 동반할 수 있는 체험적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는
21세기에서 영화를 본다는 행위의 의미가 조금 달라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입맛을 돋우는
음악처럼, 영화 또한 감각적 소품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의미다.
CGV에선 멀티플렉스 대신 컬처플렉스란 언어를 동원하며 새로운 방향성을
정립했다. 컬쳐플렉스는 영화뿐만 아니라 외식이나 쇼핑, 문화체험
등 영화 외적인 다양한 경험과 연계된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는 공간성의 연계나 확장을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CGV청담시네시티엔 다양한 식당과 커피 전문점,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이
층층마다 자리해있다. 기존의 골드클래스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더
프라이빗 시네마’와 오페라 극장의 박스석 형태로 제작된 커플석만으로 상영관 좌석을 채운 ‘스윗박스 프리미엄’과 같은 상영관은 영화 관람에서 서비스의 형태가
중요한 기준이 되는 관객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대변한다. 롯데시네마 역시 새롭게 문을 연 롯데월드몰의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에 ‘시네
파크’라는 광장 형태의 공간을 마련했는데 이는 영화 이외의 문화적 체험을 전달하려는 다른 극장들의 정책과
유사하다. 그러니까 결국 이런 체험적 다양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흐름은 극장산업의 화두인 셈이다.
물론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영화를 볼 것인가라는 선택권이 넓어졌고, 관객들은 기꺼이 고민하고 선택하며 기다린다. 이를 테면 최근에 화제가 된 <인터스텔라>의 아이맥스 열풍이 그렇다. <인터스텔라>나 <그래비티>를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보길 고집하는 배경엔 ‘좀 더 큰 화면에서 보고 싶어서’라는 단순한 욕망을 넘어서 ‘두 영화를 관람하는 최적의 관람 방식이
아이맥스 상영관이기 때문’이라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에 따른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는 영화가 주는 감각적 체험을 최대한 극대화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영화관람이란 행위를 엔터테인먼트적인 체험으로서
보다 확실하게 소비하길 원하는 이들이 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D 상영 방식의 일반화 또한 궤를 같이
하는 사례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의 전세계적인 흥행 이후로 디지털 상영관이 확대되고 3D 상영이
영화 상영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정착해 버린 건 어떤 체험을 계기로 관객들의 감각적 경험이 확장되고 정착된 덕분이다. 그리고 이런 체험 감각에 대한 수요는 새로운 체험적 방향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체험의 확장을 통해 훈련된 감각을 고스란히 체감하길 바라는 관객의 정착이 극장 상영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입체적인 사운드로 청각적 체험을 극대화시킨 돌비 애트모스 음향 시스템도 장착된 상영관을 선호하는 관객이 늘어나고, 개인 좌석마다 설치된 헤드셋을 통해서 영화 사운드를 홀로 독점하는 상영관이 출현한 것도 새로운 감각적 체험을
통한 학습효과라 할 수 있다. 영화의 음향에 따라서 좌석의 진동을 체감하도록 하는 비트박스관과 오감을
자극하는 4D 상영관의 공감각적 체험 또한 다르지 않다. 특히
4D는 기존의 영화관람 형태를 롤러코스터적인 감각적 엔터테인먼트로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가장 극단적인
방식의 영화적 체험이라 할 수 있다. 관객들은 시각적 체험을 넘어서 다양한 감각적 체험이 가능하다는
학습효과를 얻었고, 그런 시장의 수요를 파악한 극장은 진화하고 있다.
21세기의 극장들은 영화의 관람방식을 다양하게 세분화하고, 영화 관람 외적인 서비스의 확장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통적으로
극장은 쉽게 찾을 수 있는 문화적 공간으로서 역할을 견인해왔다. 동일한 티켓 가격으로 각기 제작비가
다른 영화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문화적 경험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콘텐츠이기도 했다. 그만큼
극장 산업이란 대중의 기호에 민감한 공간이기도 하다. 지금 극장문화의 변화란 결국 대중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의미다. 과거와 달리 이제 영화는 손쉽게 볼 수 있는 것이 됐다. 또한 IPTV를 통해서 한동안 부재했던 영화의 2차 판권 그러니까 홈 씨어터 시장이 순식간에 정착됐다. 영화란 언제든
쉽게 볼 수 있는 무언가가 됐다. 그만큼 극장이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해야 하는 건 필연적이다. 커다란 스크린만으로 극장의 경쟁력을 논한다는 건 시대착오적이다. 관객들은
이제 보다 다양한 경험을 원한다. 영화 그 이상의 영화관을.
<그래비티>를 보고 난 사람들은 마치 우주에 다녀온 것 같았다. 우주를 그린 영화는 많았지만 <그래비티> 같은 우주 영화는 없었다. 하지만 당신이 다녀온 그 우주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지난 10월 17일 <그래비티>가 개봉된 이후로 지금까지 세상은 <그래비티>를 본 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는 것 같다. 혹은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그래비티>를 본 사람과 그럴 수 없었던 사람으로. <그래비티>의 감독 알폰소 쿠아론이 입체적인 사운드 시스템을 갖춘 돌비 아트모스(Dolby Atmos) 상영관에서 <그래비티>를 관람하길 적극 추천한 덕분에 서울에 단 두 개밖에 없다는, 돌비 아트모스 시스템이 완비된 상영관의 예매율이 천정부지로 치솟기도 했다. 영화를 즐기는데 있어서 보다 나은 영사 방식이나 사운드 시스템을 찾아나서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래비티>의 경우엔 그와 유사하나 다른 욕망이 읽힌다. <그래비티>를 정의할 때 한결 같이 동원하는 단어는 ‘체험’이다. 그러니까 아이맥스 상영관이나 돌비 아트모스 상영관이 <그래비티>를 좀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선택적 방법이 아니라 <그래비티>를 ‘제대로 볼 수 있는’ 필수적인 방법, 즉 최적화된 시스템이라고 인정한다는 것. 사실 모든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체험의 산물이다. 여기서 체험은 두 종류로 나뉜다. 현실에서 결코 할 수 없는 비현실에 대한 체험과 현실에서 경험할 기회를 얻지 못한 현실적인 행위나 감정에 관한 체험. 그렇다면 우리는 <그래비티>를 통해서 무엇을 체험했을까?
일단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비티>를 대단히 사실적인 영화로 인식하는 것 같다. 실제로 알폰소 쿠아론은 <그래비티>를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게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러니까 하이퍼 리얼리즘의 영화를 추구했다는 것. <그래비티>는 프리프로덕션(Pre-production) 단계에서 100% 프리비즈(Pre-visualization)’을 거쳤다. 프리비즈란 전반적인 영화의 비주얼을 계획하고 그 실현 방법을 디테일하게 구성하는 방식인데 비주얼 전반의 연출 계획을 세세하게 설계하는 사전 작업에 가깝다. 일종의 도면 작업인 셈. 하지만 ‘당장 애니메이션으로 발표해도 상관없을’ 결과물을 원했던 알폰소 쿠아론의 요구에 의해서 <그래비티>의 프리비즈는 집을 짓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프리비즈 단계에서 100%에 가까운 CG 작업으로 완벽한 비주얼을 구축한 것. 그리고 배우들은 집에 들어가듯, 완벽하게 구축된 이미지 안에서 철저하게 동선이 통제된 채 연기했다. 그렇게 연기한 배우들의 이미지를 화룡점정처럼 찍어 넣는 방식으로서 <그래비티>는 완성됐다. <그래비티>의 주인공이 우주라고 일컫는 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
알폰소 쿠아론의 구상에서 <그래비티>의 우주는 관객들에게 그저 밤하늘을 바라보듯 멀게 느껴져선 안 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자신이 놓여 있다고 느껴지는 공간이어야 했다. 실제로 산드라 블록은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매일 같이 10시간 정도의 시간을 수많은 LED 패널로 둘러싸인 ‘라이트 박스(Light Box)’라는 특수한 세트에서 갇히듯 연기해야 했는데 이를 두고 제작진은 라이트 박스가 마치 산드라 블록의 새장 같다며 ‘샌디의 새장(Sandi’s cage)’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주에서 고립된, 그리고 끝내 홀로 남겨진 스톤 박사의 외로움은 실제 배우의 감정이 이입된 결과인 셈이다. 그리고 라이트 박스 안에서 세트의 벽에 지구나 국제우주정거장(ISS) 등 배우가 바라보는 시야에 해당되는 우주의 이미지를 투사함으로서 배우에게 우주라는 공간성을 인식시키고자 했다. 배우의 시점을 관객과 동일하게 만들었다. 이는 곧 배우들의 시점을 관객의 시야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이나 다름없다. <그래비티>는 이런 인물이 바라보는 시점을 대변하는 시점숏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객석의 중력을 무력화시킨다. 스크린 밖이 아니라 안에서, 영화에 동참하고 있다는 착시와 착각을 부추긴다. 게다가 진동과 저주파음 그리고 기습적인 묵음 효과를 교차시킨 사운드 전략을 통해서 공기가 없어서 음파의 전달이 불가능한 우주에서의 청각적 체험을 극대화시킨다. 시각과 청각이라는 공감각적인 체험은 <그래비티>를 지극히 현실적인 영화로 둔갑시켰다.
하지만 <그래비티>는 몇 가지 사실을 왜곡시킨 영화다. 일단 영화 속에서 조지 클루니가 연기한 코왈스키는 우주에서 우주배낭 추진체(MMU)를 타고 자유 자재로 유영한다. 그는 그 추진체를 타고 우주미아가 될뻔한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를 구출하며 국제우주정거장까지 그녀를 끌고 간다. 이는 모두 허구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KARI)의 김해동 박사에 따르면, 나사(NASA)의 우주인들이 착용하는 우주복엔 모두 추진장치가 달려있다. 다만 잠깐 동안의 이동이 가능한 소량의 연료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만한 장거리 유영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견해다. 물론 코왈스키가 타고 다니는 배낭식 추진장치가 영화를 위한 설정이었다면 이야긴 달라진다. 하지만 허블망원경 주변부에서 국제우주정거장(ISS)으로 그리고 중국 우주정거장 텐궁까지 다다르는 여정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추진장치나 소유즈만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엔 세 지점의 자전 궤도가 지나치게 멀고 궤도의 접점에서 마주칠 확률도 희박하다. 이 영화의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중요한 설정들이 모두 허구인 것이다.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영화적 오류들에 대한 예시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래비티>는 나사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영화다. 실제로 촬영 현장엔 나사와 연결되는 직통전화가 있었고, 산드라 블록은 촬영 중 의문이 생기면 시간을 가리지 않고 수화기를 들었다. 결국 세계 최고의 우주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은 우주 영화가 사실(fact)대로 완성되지 않았다는 건 그 비사실적인 결과물이 고의라는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그래비티>의 거짓말을 통해서 놀라운 사실(reality)적인 체험을 할 수 있게 됐다. 결국 영화의 사실성에 대한 전제 조건은 현실의 복제가 아니란 말이다. <그래비티>라는 영화적 체험이 위대한 건 이 영화가 주는 체험적인 쾌감이 숭고한 감동으로의 착지를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테크놀로지의 생존 방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 우선시돼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이 영화가 하고 있다고 본다.” 김지운 감독의 말처럼 진화한 테크놀로지의 과시도 중요하지만 테크놀로지의 진화가 어떤 영화적인 감동을 더해줄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 더욱 중요하다. <그래비티>는 ‘놀라운 거짓말’로 ‘믿을 수 없는 감동’을 전한다. 무중력의 우주를 체험하게 만들지만 결국 두 발 딛고 살아야 하는 현실의 의지를 고취시킨다. 용기를 준다. 결국 <그래비티>가 증명하는 건 기술의 진보가 영화의 발전을 촉매할 순 있지만 영화의 발전의 절대적 조건일 수 없다는 교훈이다. 한편 미국의 라이브쇼 <SNL>에서 <그래비티>의 오류 하나를 지적했는데 내용인즉슨, 조지 클루니가 저렇게 오랜 시간 동안 동년배의 여성과 대화를 나눌 리 없다는 것. 이야말로 정말 날카로운 지적 아닌가?
지구의 구체 일부의 이미지로 가득 채워진 아이맥스 스크린의 압도적인 시각적 자극과 반비례하듯 청각적 자극을 완벽하게 말소시키는 적막함으로부터 <그래비티>는 시작된다. 우주로부터 날아온 시점숏을 통한 시각적 체험과 함께 음파를 전달할 공기가 없다는 청각적 체험이 동시에 진행된다. ‘우주를 보고 있다’가 아니라 스크린 속의 ‘우주에 포함돼있다’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 경이로운 우주의 풍광 속에 잠재된 공포가 그 신비를 목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직구처럼 달려드는 순간부터 <그래비티>가 그리는 진짜 우주를 목격할 수 있다. 무중력, 무산소, 무기압이라는 ‘무’의 바다에 빠진 한 점 같은 인간의 처절한 사투를 보고 있노라면 무기력이라는 단어의 공포가 생생하게 환기된다. 우주 그 자체가 괴물처럼 느껴진다.
<그래비티>는 몇 가지 전복적인 흥미를 던진다. 일단 탈출이라는 단어의 방향성을 뒤튼다. <그래비티>는 지구로부터 우주를 향해서가 아니라 우주로부터 지구를 향한 탈출극처럼 보인다. 그 결말부에서 <쇼생크 탈출>의 엔딩컷이 떠오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편으론 우주의 경이적인 이미지보다도 사운드 전략이 <그래비티>에서 우주를 체험시키는 방점 노릇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산소와 무기압은 직접 체험할 수 없지만 완벽한 묵음 상태를 통해서 무음 상태의 우주를 재현하는 적막함이 아이맥스 스크린을 채우는 우주의 풍경과 맞물려 진짜 우주에 떠있다는 공감각적인 체험을 극대화시킨다. 중력 안에서 완성된 영화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무중력의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배우의 움직임과 생물처럼 부유하는 카메라의 시점숏 또한 <그래비티>의 우주를 생생하게 체험하도록 유도한다. 우주라는 공간성의 신비를 벗기고 공포라는 감각을 주입하는 것 역시 뼈가 시리도록 신선하다.
열연을 펼치는 산드라 블록도 대단하지만 이 숨막히는 우주적 재난에서 산소 같은 위트를 공급하고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을 선사해내는 조지 클루니의 존재감도 형형하다. 무엇보다도 <그래비티>는 이토록 거대하고 적막한 재난이 생명과 인생이라는 두 개의 ‘생’을 구원하는 우주적인 감동으로 나아간다는 데에서 보다 훌륭한 가치를 품고 있다. 다시 그 생을 목격하고 싶다.
1. 왕십리 아이맥스 3D로 <그래비티>를 봤다. 우주에 다녀온 기분. 우주 혹은 무중력 그 자체가 이길 수 없는 괴물 같다.
2.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광활한 시점숏과 적막함이 아이맥스 스크린을 가득 메우며 시작되는 오프닝 시퀀스는 경이로운 무중력 세계의 신비를 순식간에 공포로 둔갑시켜버리는데 정말 숨이 막히고 어지러운 기분을 체험했다. 그 이후로 그 우주에 함께 떠 있는 듯한 기분.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대단한 서스펜스와 스릴을 부여하는데 이리와, 이런 건 처음이지, 라고 손짓하는 느낌이랄까.
3. <더 문>이 잠깐씩 생각나긴 했다. 모노드라마에 가까운, 광활한 우주에서의 고립감. 하지만 <그래비티>는 우주라는 공간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생생하게 이입시킨다. 덕분에 우주에 가보고 싶다는 기분이 짜게 식는 기분도. 결국 집 나가면 고생이다. 블록버스터급 '홈 스위트 홈' 교훈극이랄까.
4. <피라냐>가 생각나기도 했다. 이게 무슨 쌩뚱맞은 소리냐 싶겠지만 보면 안다.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미친듯이 달려들어서 온갖 것들을 해체하는데 딱 그런 공포심이 느껴진다.
5. 이만큼이나 광활한 시점숏은 본적이 없다. 이 영화는 직접적인 배우들의 시점숏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하지만 그 배우들을 향한 카메라의 시선마저도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지극히 '생물 같은' 시점숏이 활용된다. 실제로 가끔씩 배우들이 카메라를 고의적으로 의식하는 인상을 주는 컷도 등장한다. 어쨌든 덕분에 우주라는 광활한 공간에 '갇혀 있다'는 긴장감이 배가되는 느낌. 실제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거대한 우주를 표류한다는 건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공간에 갇히는 것이라고 느낄 수 밖에 없는데 것인데 지금까지 경험하고 보고 들었던 그 어떤 공포스러움보다도 공포스러운 기분을 체험한 기분.
6.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통해서만 가능한 영화들은 때가 되면 더러 등장하는데 그 발전을 영화적 표현력의 진화로 승화시키는 영화들은 아주 가끔 등장한다. <그래비티>가 그런 영화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그래비티>의 전후로 나뉠 것이다. 기술적으로도 표현적으로도 훗날 <그래비티>를 연상시킨다라고 할만한 영화들이 나올 것이다. 물론 아이맥스 상영 방식이 아닌 일반 상영관에서도 이런 관점이 유효할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오히려 일반 상영관에서 <그래비티>를 한번 체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7. <그래비티>를 통해서 경이로운 기술적 체험을 우선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정말 지극히 영화적이라 더욱 놀라운 작품. 우주라는 거대한 괴물로부터의 탈출극이 장르적인 카타르시스를 책임지는 가운데서도 전형적인 휴머니즘과 멜로적인 감수성의 결정을 선사하며 영화적인 중력을 선사한다. 기술적 체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 진보를 영화적 표현력의 진화로 끌어올린다.
8. 사운드 전략이 대단하다. 도입부에서 설명하듯 음파를 전달할 공기가 없는 우주의 특수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적막함과 웅장함의 극단적인 음의 이동과 전개가 서스펜스를 촉진시키고 극대화시킨다.
9. <프로포즈>(2009)로 재기에 성공하며 그 해에 <블라인드 사이드>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했을 때, 정말 산드라 블록이 좋아졌는데 <그래비티>를 보면서 아, 정말 좋은 배우로 자리잡았구나 생각했다. <그래비티>의 조지 클루니를 보면서 <밀양>의 송강호가 생각났다. 산드라 블록을 지지하는 조연이자 영화적 장치로서의 임무에 완벽하게 복무한다. 실제 등장 배우가 온전히 둘에 불과한 이 영화에서 조지 클루니는 생각보다 일찍 퇴장함에도 불구하고 천연덕스럽게 복선을 세우고, 광활한 우주를 메울만한 감정선의 스케일을 넓히고, 방점까지 찍어낸다. 정말 훌륭한 배우다. 멋있다.
10.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3번 정도는 더 보고 싶다. 아니, 목격하고 싶은 것일지도. 지금이어야만 가능한 일은 해도 해도 아깝지 않다.는 기분이 짜게 식는 기분도. 결국 집 나가면 고생이다. 블록버스터급 '홈 스위트 홈' 교훈극이랄까.
이건 단순한 영웅전이 아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트릴로지는 오늘날의 슈퍼히어로 무비들과 또 다른 전형이다. 혼돈과 절망을 건너 끝내 세상을 구원하는 배트맨의 여정은 여전히 당신의 믿음을 시험하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장편 연출 데뷔작 <미행>(1998)은 단돈 6천불의 예산과 게릴라 슈팅으로 촬영된 작품이다. 이는 미국 내 단 두 개의 상영관에서 개봉된 뒤 4만 8천여 불의 수익을 거뒀다. 최근 놀란이 지휘한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지극히 초라한 규모를 지닌 이 작품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중요한 단서다. <미행>의 파편적인 서사의 운용은 놀란을 세계적인 입지의 감독으로 승격시킨 <메멘토>(2000)를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영화의 주제 의식은 <인셉션>(2010)과도 흡사하다. 실제로 <미행>에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하는 <인셉션>의 코브와 동명인 또 다른 코브가 등장하는데 그는 도둑질이라는 행위가 타인의 삶에 관여하고, 어떤 의미로는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이는 타인의 꿈에 침투해서 기억을 조작하고 개인의 삶을 조종한다는 점에서 흡사하다. <미행>의 도둑질이 곧 ‘인셉션’인 셈이다.
놀란이 죽어가던 <배트맨> 시리즈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을 적임자로 임명됐을 당시, 화두에 오른 건 문에 붙은 배트맨 로고가 등장하는 <미행>의 한 장면이었다. 그가 일찌감치 배트맨의 팬보이였다는 소문이 전파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가 배트맨에게 시행한 심폐소생술은 탁월했다. 팀 버튼이 연출한 <배트맨>(1989)이 할로윈의 코스튬 카니발이라면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2005)는 하이퍼리얼리즘의 테러를 주목하는 영화였다. 그러니까 팀 버튼의 그것이 철저하게 악몽 같은 코믹스의 세계관 안에서 복무하며 현실과 괴리된 존재들을 비추는 대신 놀란은 최대한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이 세계의 폭력 위를 누비는 영웅의 고단함을 추적한다.
<배트맨 비긴즈>는 배트맨 수트의 부품 하나하나의 근원과 기능까지 짚어나간다. 결과적으로 <배트맨 비긴즈>는 <다크 나이트>(2008)와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위한 충실한 매뉴얼이다. 반도체의 단자들을 연결하듯 배트맨을 이루는 물리적, 정서적 인과관계에 크고 작은 디테일을 새겨 넣는 과정을 통해서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이라는 이중적 자아가 공존할 수 있는 현실적인 장을 마련한다. 이는 단순히 놀란의 고집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명확한 인식이자 철저한 기준, 즉 그가 생각하는 영화적 가치를 대변한다. 스크린과 객석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고 일치시킴으로써 상영관을 벗어난 관객이 자신의 영화적 체험을 곱씹을 때, 영화 속 고담과 객석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일치시킴으로써 그 세계는 무한한 가능성을 확장되고 이로서 완성된다.
<배트맨 비긴즈>가 놀란의 배트맨을 스크린에 세우는 작업 자체로서의 의미를 지닌 작품이라면 <다크 나이트>는 그 완성된 배트맨을 도구 삼아서 고담, 즉 이 세계의 곳곳을 비추고, 살피는 ‘놀란의 본격적인 시선’에 가깝다. 아이맥스 카메라까지 동원된, 전작에 비해서 광대해진 스케일은 <배트맨 비긴즈>에서 어루만진 디테일의 연결을 통해서 보다 손쉽게 확장된다. 물론 히스 레저의 목숨을 건 열연이 <다크 나이트>가 지닌 자질 이상의 성취를 더했다는 걸 간과할 순 없지만 기본적으로 이 작품이 사회를 관통하는 시선과 영웅에 접근하는 방식은 주목할만하다. <다크 나이트>는 ‘이 사회의 대중이 진정한 영웅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인가?’라는 물음을 품었다. 고담을 유린하던 조커가 배트맨이 가면을 벗으면 자신도 자수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을 때, 시민들은 배트맨을 비난하고 자수를 촉구한다. 조커는 대중의 나약하고 이기적인 심리를 파고 들어 헤집는다. 이를 통해서 영웅을 끝내 궁지로 몰아넣는다.
놀란의 ‘배트맨’ 트릴로지 대단원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그럼에도 이 사회에 영웅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에 관한 이야기다. <다크 나이트>에서 스스로 권위의 추락을 선택한 배트맨은 다시 한번 일어서서 고담을 구원할 흑기사가 된다. 배트맨에게 기생하듯 등을 맞댄 숙적 조커와 달리 베인은 철저하게 반체제의 선동가로서 배트맨을 마주보고 선다. 놀란은 말한다. “조커는 확실히 혼돈에 가까운 무정부주의자이자 사악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로서 특별한 악당의 전형을 보여줬다. 내게 베인은 이 영화를 위한 밑천이었다. 이번 영화에선 새로운 무언가를 원했다.”조커가 고담을 흔드는 바람, 즉 혼돈 그 자체를 유희하는 악마였다면 베인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절망의 화신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관객 대부분은 베인에게 뭇매를 맞고 나뒹굴던 배트맨이 끝내 허리가 꺾여 몸을 가누지 못하는 광경에서 묘한 통증을 공유했을 것이다. 기댈 곳이 없다는 건 세상의 끝으로 몰린 절망이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그런 세상의 끝으로부터 되돌아오는 이야기다. 물론 이성적인 질서와 규범이 무법적인 폭력에 의해 와해되는 풍경을 초월적인 존재의 등장만으로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은 역설적인 절망이다. 하지만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비관적인 영화가 아니다. 배트맨이 구원한 고담에서 자라난 누군가는 정의로운 신념으로 영웅적인 채비를 차리고, 세계로 나아간다. 배트맨은 말한다. “모두가 영웅이야. 어린 아이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며 세상이 끝나지 않았다고 희망을 주는 남자도.” 배트맨의 탈을 쓴 브루스 웨인이 지키고자 했던 고담의 가치란, 이 세계의 정의란 그런 것이다. 결국 놀란은 이 세계를 좌우하는 건 배트맨도, 베인도 아닌, 객석의 개개인이라 말하고 있는 셈이다.
놀란의 영화는 항상 진실에 대한 물음을 품고 있다. 그 물음은 일종의 게임의 형식을 취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 진실을 마주하기까지의 고난과 목도했을 때의 충격을 중요하게 다룬다. <프레스티지>(2006)는 어쩌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한 가장 좋은 도면일지도 모른다. 마술은 트릭이다. 눈속임이다. 진실을 알게 되면 시시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훈련된 눈속임이 아니라 위장된 진실이라면? 최고의 마술을 꿈꾸던 두 마술사가 경쟁 끝에 도달하는 진실은 생각 이상으로 놀랍고 끔찍하다. <프레스티지>는 바로 놀란이 품은 진실게임이다. 놀란은 말한다. “자신만의 세계와 논리를 가진 영화들이 관객이 보는 이미지 이상의 의미로 확장될 수 있다.”당신이 바라보는 영화적 세계가 스크린 너머의 허구일 때 우린 안전하지만 그것이 때때로 현실로 튕겨져 나올 때, 영화란 더없이 위험한 도구처럼 보인다. 최근 콜로라도 주의 소도시 오로라에서 벌어진 참혹한 총기 사건도 영화의 잠재적 불안을 조커처럼 속삭이고 부추긴다. 하지만 영화는 결코 이 세계를 망치지도, 구원하지도 않는다. 그 주체는 바로 당신이다. 놀란이 전하는 진실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결국 우린 믿어야 한다. 당신이 지켜야 할 모든 가치들을, 그리고 우리 자신 스스로를.
(BOX)왜 아이맥스인가?
“아이맥스가 영화를 위한 최고의 포맷으로 발명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다크 나이트>를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한 이유다. 상업영화 최초의 사례였다. 심지어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전작의 두 배에 달하는 55분 분량을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했다. 70mm 아이맥스 필름에 담긴 광대한 비주얼은 그 자체로 대단한 볼거리다. 하지만 놀란은 단순한 볼거리를 의식한 것이 아니다. “<인셉션>은 그 특이한 풍경을 포착하기보다 꿈의 리얼리티를 묘사하는 게 중요했기에 아이맥스 대신 핸드헬드 카메라의 현장감을 활용했다. 반면 <다크 나이트>와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아이맥스의 거대한 캔버스에 매우 잘 맞아떨어진다. 그 차이는 영화가 요구하는 방식에 의존한 결과였다.”놀란이 재발견한 아이맥스에 할리우드가 주목하고 있다.내년에 개봉될 <스타트렉: 더 비기닝 2>와 <헝거 게임: 캐칭 파이어>는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됐으며 스티븐 스필버그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중이라니, 3D를 잇는 차세대 영화 플랫폼은 아이맥스가 될지도 모르겠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아이맥스 관람 열풍이 뜨겁다.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본 배트맨과 일반 상영관에서 본 배트맨이 다르다는 소문도 자자하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지난 8월 13일 기준으로 개봉 4주차에 접어든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전국적으로 6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모았다. 그 중에서 30여만 명 관객이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배트맨을 목격했다고 한다. ‘아이맥스(IMAX)’와 국내 독점 사용권을 계약한 CJ CGV 극장 체인은 개봉을 2주 앞두고 오픈한 자체 예매 사이트에서 아이맥스 상영관 개관 이래 최대 사전 예매량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현재 국내에 아이맥스 상영관이 위치한 곳은 서울 3개 극장을 포함한 10개 극장이다. 지난 해 말까지 전세계 아이맥스 상영관 수는 48개국 583개로 집계됐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 이전에도 아이맥스 상영관은 존재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개봉과 맞물린 아이맥스 관람 열풍과 마찬가지로 2008년 <다크 나이트> 개봉 당시에도 아이맥스 관람 열기가 뜨거웠다.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한 <다크 나이트>를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보기 위한 예매 경쟁이 치열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상영시간은 164분, 그 중 아이맥스 카메라 촬영 분량은 55분에 달한다. 아마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영화를 봤다면 아이맥스 촬영 분량이 등장할 때마다 화면 비율이 변하는 것을 관찰한 관객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만약 당신이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일반 상영관에서 봤다면 55분 정도는 본래의 이미지보다 상하로 절반 가까이 잘려나간 형태로 볼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그게 대수냐고 묻는다면, 맞다. 대수다. 도입부부터 펼쳐지는 비행기 납치신을 비롯해서 중반부 즈음 등장하는 ‘더 배트’의 이륙 광경 그리고 미식축구장의 함몰로 시작되는 광활한 도시 폭발신, 결말부의 시가전 등 당신이 잃어버린 한 뼘은 보다 몰입도 있는 감상의 너비였다.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한 영화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직사각형 꼴의 와이드스크린 즉 시네마스코프 스크린과 달리 정사각형 꼴에 가깝다. 상하의 여백을 채우며 스크린을 가득 채운 광활한 이미지가 구현된다는 것이다.
‘아이맥스(IMAX)’는 1970년대 캐나다에서 개발된 촬영 및 영사 기술이다. ‘이미지 맥시마이제이션(Image Maximization)’ 또한 ‘맥시멈 이미지(Maximum Image)’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이 용어는 심심찮게 ‘아이 맥스(Eye Max)’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시각적으로 가장 극대화된 이미지를 제공한다는 이 단어의 의미는 예나 지금이나 허풍이 아니다. 아이맥스 카메라가 단지 큰 화면에서 보기 위한 수단이라 생각한다면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이 있다. 큰 화면으로 볼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월등한 해상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디지털 카메라의 해상도는 필름 카메라를 넘어서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그럼에도 유일하게 디지털 촬영 방식으로 따라잡지 못한 필름 촬영 방식이 바로 아이맥스 카메라다. 현재 최고의 해상도를 자랑하는 디지털 카메라 레드원의 해상도는 아이맥스 카메라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1970년대에 개발된 아날로그 기술을 21세기의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카메라의 조도가 높아서 어두운 나이트 촬영에서도 선명하게 상을 포착할 수 있다. 밤거리를 누비는 배트맨의 활약상을 그린 <다크 나이트>나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아이맥스 카메라는 보다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현재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된 영화는 모두 네 편이다. 상업영화 최초로 아이맥스 카메라로 부분 촬영된 <다크 나이트>(27분 16초)와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8분 54초),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23분) 그리고 <다크 나이트 라이즈>. 그렇다면 <다크 나이트> 이전까지 어째서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한 영화는 없었던 것일까? 간단하다. 무겁고 비싸기 때문. 전세계에 아이맥스 카메라는 단 4대뿐이다. 카메라 제작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대체로는 그만큼 시장의 요구가 적기 때문이다. 110kg이 넘는 아이맥스 카메라를 역동적인 극영화 촬영에 활용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일반적인 35mm 필름보다 두 배 너비에 달하는 70mm 필름은 그만큼 더욱 무거울 수 밖에 없다. 또한 아이맥스 카메라의 렌탈 비용도 만만치 않다. 최근 미국의 영화 통계 사이트 박스오피스 모조의 분석에 따르면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원래 예정된 제작 예산 1850만 불을 훌쩍 넘긴 2500만 불의 제작비를 사용했는데 이는 아이맥스 렌탈 비용 때문이라 분석했다. 덕분에 <다크 나이트> 촬영 당시 아이맥스 카메라가 추락하며 박살 나는 장면은 단연 화제였다. <다크 나이트>가 전세계 아이맥스 카메라를 세 대로 줄였다는 우스갯소리마저 돌았지만 최근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뷰에 따르면 카메라는 잘 고쳤다는 후문이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 촬영 중 앤 해서웨이가 탑승한 배트 포트가 카메라와 충돌하는 영상이 인터넷에 돌면서 또 한 대가 부서졌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그만큼 아이맥스 카메라에 대한 관심이 이 작품들에 대한 관심과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메가폰을 잡은 크리스토퍼 놀란은 심심찮게 3D영화에 대한 거부감을 표현해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롤러코스터와 같은 3D 비주얼이 이야기에 대한 몰입도를 방해하는 탓에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감상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는 아이맥스 카메라로 상업영화를 촬영해야 한다고 누누이 밝혀왔다. 그리고 증명했다. 압도적인 스케일의 광활한 이미지를 통해서 영화의 스토리와 철학에 보다 깊게 빠져들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의 시도는 영화 산업 전반을 자극한다. <다크 나이트>에 흥미를 느낀 감독 마이클 베이가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에서 아이맥스 카메라를 사용했듯이 현재 아이맥스 카메라 촬영을 계획한 작품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다. 내년에 개봉되는 <스타트렉: 더 비기닝 2>와 <헝거 게임: 캐칭 파이어>가 그것. <아바타> 이후로 3D 촬영이 <아바타>로부터 시작된 것처럼 <다크 나이트 라이즈>로부터 아이맥스 카메라 촬영이라는 새로운 영화적 시도가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 자주 방문하는 편이다. 이번이 8번째 방문이다. 한국에 오는 건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 CJ엔터테인먼트가 드림웍스(Dream works)의 초창기 투자 멤버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래서 마치 가족을 방문하는 느낌이다.
한국영화산업에 대한 흥미와 이해가 어느 정도 인가?
한국시장에 대한 특이점이 몇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한국이 국제적으로 탑 텐 시장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한국시장의 특성 중 하나는 영화 제작과 영화 상영 모두가 매우 중요한 시장이란 점이다. 한국영화 산업기반이 탄탄할 뿐만 아니라 한국영화 자체가 성공적으로 제작되고 외국영화들도 한국시장에서 매우 좋은 성과를 올린다는 점에서 양면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 매우 건실한 영화 산업과 시장을 함께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예슬 씨가 한국에서 더빙을 맡았는데 목소리 연기자 섭외에 직접 관여했다고 들었다. 캐스팅 기준이 궁금하다. 그리고 한예슬 씨를 실제로 만났는데 인상이 어땠나?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은 47개 언어로 더빙된다. 우리가 목소리 캐스팅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목소리의 멜로디다. 한예슬 씨는 훌륭한 배우이기 때문에 그 배역을 충분히 연기로서 소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목소리의 멜로디가 아름답기 때문에 이 역할에 가장 접합했다. 물론 목소리만큼이나 인물도 출중하더라. (웃음) 유머 감각도 빼어난 편이다. 게다가 지금 캘리포니아에 가족도 있고, 본인도 거주한 경험이 있어서 이에 관해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다.
<몬스터 vs 에이리언>(이하, <몬스터>)에 사용된 ‘인트루 3D(Intru 3D)’란 어떤 기술인가.
우리가 3년 전 즈음에 발견한 첨단기술로서 우린 이것이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앞으로 모든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을 이 기술로 제작하자고 결정했다. 과거엔 3D를 놀이공원에서 체험하는 매체로 생각했다면 이젠 이 새로운 기술이 3D를 영화상영체험과 영화제작방식에 혁신을 부를 것이라 예상한다. 우리가 보다 더 적극적으로 스토리텔링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영화체험 자체를 바꿀 것이라 생각한다. <몬스터>가 이런 기술력을 활용한 첫 작품이 됐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하고 있다. 한번 보는 것이 천마디 보다 낫다는 말처럼 아마 내가 하는 삼천 마디보다 한번 직접 체험해보는 게 나을 거다.
드림웍스와 마찬가지로 경쟁 스튜디오라 할 수 있는 픽사(PIXAR)에서도 3D 애니메이션 제작에 착수할 것이라 밝혔다. 3차세대 매체로서 주목받고 있는 3D영상의 산업적 가능성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3년 반 전에 우리는 <폴라 익스프레스>를 아이맥스 3D로 제작했다. 그때 이 기술이 앞으로 우리의 미래적인 방향성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우리뿐만 아니라 많은 제작사들이 3D로 영화를 촬영하거나 제작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조지 루카스’, ‘스티븐 스필버그’, ‘피터 잭슨’, ‘폭스(FOX)’, ‘디즈니’, ‘픽사’ 등 수많은 제작자나 제작사에서 3D를 활용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3D 기술의 미래가 상당히 밝지 않은가 생각한다.
당신이 말한 <폴라 익스프레스> 아이맥스 3D를 3년 전에 봤을 땐 눈이 많이 피로했다. 이번에 본 <몬스터>은 확실히 그런 불편함이 경감된 느낌은 있었다. 말한 것처럼 이번에 본 3D는 몇 년 전에 봤던 3D보다 훨씬 혁신적으로 개선된 상태다. <몬스터>는 고품질 디지털 영상으로 상영된다. 좌우 대칭이 이루어지고, 흐릿한 화면을 찾아보기 힘들다. 과거의 안 좋았던 부분이 최대한 개선했다. 이 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의 이미지와 함께 스크립터나 스토리텔러들의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아마 1년 후에도 오늘을 되돌아보면 지난 1년 간 3D 기술이 많이 발전됐다고 생각하게 될 거다. 이렇게 앞으로도 몇 년간 3D 기술이 계속 혁신적으로 발전할 것이라 기대한다.
한국인을 비롯해서 전세계의 재능 있는 인력들이 드림웍스에서 일을 하고 있다. 드림웍스가 인재를 선발하는데 있어서 국적이나 문화적 제약이 없다는 건 얼마나 큰 장점이 되는가?
지금 1700명의 아티스트들이 캘리포니아에서 작업하고 있는데 이중 매우 재능 있는 한국 아티스트들도 많다. 그 뿐만 아니라 기술자와 애니메이터도 많으며 그 중 드림웍스에서 배운 기술을 한국에 와서 나누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이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드림웍스를 애니메이션의 UN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35개 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지금 드림웍스에서 근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방방곳곳에 있는 인재들이 지금 드림웍스에서 근무를 해주는 덕분에 우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3D기술이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을 차별화시키는 전략이 될까?
3D이전에 우리는 이미 차별화된 회사라고 생각한다. 영화 한편에 1억 5천만 불 정도 규모의 자본을 투자할 수 있는 회사는 실질적으로 세계에서 한두 곳 정도밖에 없지 않나.
작년에 개봉된 <쿵푸팬더>는 2D애니메이션이지만 큰 인기를 모았다. 2D애니메이션의 시장성이 여전한데 3D애니메이션과 병행할 생각은 없나?
병행하진 않을 거다. 모든 영화는 처음부터 3D로 제작될 거다. 다만 현재 대부분의 극장이나 가정 DVD로는 3D영화를 볼 수 없다. 그런 상영관과 가정을 위해서 원래 3D로 제작한 영화를 2D로 출시할 예정이다.
2D애니메이션을 3D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는데 부가되는 비용은 얼마나 되나?
3D로 제작하는데 추가적으로 드는 비용은 1500만 달러 정도, 전체비용의 약 10%정도가 더 들어간다.
3D애니메이션에 주목하는 건 그만큼 시장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3D영상을 보기 위해선 물리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이 많다. 특히 홈 비디오 시장에서 3D애니메이션은 현재 무용지물 아닌가. 이에 대한 대안도 마련하고 있나?
홈씨어터를 통해서 3D영상을 상영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TV모니터에서도 3D영상이 구현되고 편광안경으로 이를 관람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 중이다. 실제로 안경제작사에서도 3D전용안경을 제작한다고 들었다. 미래에는 아마 관객들이 자체적으로 자신만의 영화안경을 갖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실제로 선글라스를 제작하는 회사 ‘오클리(OAKLEY)’에서 개발하는 안경이 있다. 일반적으로 사용할 땐 그냥 편광선글라스지만 영화관 실내로 들어와서 영화를 볼 땐 3D전용안경으로 자동 전환되는 안경을 제작중인 걸로 알고 있다. 지금 밖에 나가서 선글라스를 쓰듯이 극장용 안경을 쓰는 시대가 올 거라 기대하고 있다.
3D는 현재 시청각적 자극에 있어서 최종적인 단계에 가깝다. 혹시 그 다음단계라 할 수 있는 공감각적 자극을 활용한 단계로서의 개발을 생각하진 않나? 예를 들면 의자가 움직인다던가.
그런 단계까진 생각하지 않고 있다. 공감각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관객들이 이를 지나치게 의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3D를 사용하는 건 관객이 스토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우리가 나가서 실제로 뭘 만지거나 이동시키면 관객 자체가 거기에 너무 의식해서 스토리텔링에 집중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길 거라 생각한다. <몬스터>이 시작될 때 라켓에 달린 페더볼(featherball)이 화면에서 튀어나오는 것처럼 장난을 쳤다. 그리고 그 다음부턴 그런 장난을 하지 않았다. 거기서 보여주고 싶었던 건 이런 것도 가능하지만 <몬스터>에서 보여주고 싶은 건 이런 특수효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효과에 집중하다 보면 결국 관객을 스토리로부터 탈피시키기 때문에 효과마저도 하나의 장난에 지나지 않게 된다. 놀이공원에서는 그런 것이 적용돼도 상관없겠지만 영화에서는 그런 것들이 적용돼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