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희가 진행하는 <뉴스9>엔 유난히 독점 보도가 많았다. 이상하다. 타방송사 기자들은 노는 것도 아닐 텐데 왜 <뉴스9>에서만 유독 독점 보도가 많단 말인가. 손석희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매일같이 출입처에서 나오는
자료 보고 그 바탕 위에서 보강 취재하는데 익숙해지면 자기가 주도적으로 하는 게 아니다. 그런 데 익숙해진
기자의 경우 자율적 취재기능이 상당 부분 떨어져 있다.” <뉴스9>의
공신력은 바로 그러한 기본적인 저널리즘의 원칙을 지키는 데서 나온다. 그리고 손석희의 <뉴스9>은 언론의 직업 윤리란 정의로운 신념을 걸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전달할 수 있는 실력을 증명함으로써 가능한 것임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뉴스룸>이추구하는것은지금까지진행해왔던 <뉴스9>과본질적으로다르지않습니다. 한걸음더들어가진실에접근하는것입니다." 손석희의말처럼<뉴스룸>은
기존의 <뉴스9>의 확장판이다. 100분짜리 뉴스라니, 전례가 없는 일이지만 보도국 입장에선 기존의
탐사 보도를 보다 정밀하게 분석하고 전달할 수 있는 호흡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기존의 <뉴스9>에서 힘을 발휘했던 손석희의 생방송 인터뷰 능력과
현장성 있는 보도 방식은 100분이라는 시간을 생동감 있게 채운다. 실제로
지난 10월 17일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 당시 <뉴스룸>은 해당 보도를 무려 70분 동안 진행했는데 대부분 현장에 출동한 기자들의 현장 스케치와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들과의 통화로 채워졌다. 지금 가장 중요한 사건을 사건 현장에서 급박하게 전한다는 것. 이건 <뉴스룸>이 타방송사들과 차별화된 취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해외의 ‘뉴스쇼’들처럼 박진감을 연출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갖은 사회적 이슈들이 난무하는 작금의 현실에서 100분짜리 뉴스가 존재한다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손석희의 <뉴스룸>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지, 무모한 도전으로 회자될진 모르겠다. 공중파 뉴스의 시청률에 비해서
낮은 시청률을 보이는 종편 뉴스로선 모험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뉴스룸>의 영향력은 이미 타방송사의 뉴스를 압도한지 오래다. 브랜드로서의 인지도가 중요하다. 게다가 당장 TV 앞에 앉아서 뉴스를 보지 않아도 <뉴스룸>엔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많다. 시작한지 한 달이 지나지 않은 <뉴스룸>에 대한 평가가 심심찮게 들린다는 건 이미 <뉴스룸>이 어떤 식으로든 기류를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적지 않은 영향력이 감지된다. 지금 한국의 방송 뉴스는 손석희가
있는 뉴스와 손석희가 없는 뉴스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각해 보면 처음 손석희가 JTBC의 보도국 사장직을 맡는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손석희를 의심했다. 하지만
지금 그 누가 손석희를 의심하는가. 지금 손석희를 의심할 수 있는 건 어쩌면 손석희뿐이다. <뉴스룸>에 대한 믿음도 거기에 있다. 손석희는 손석희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 낯 붉힐 일 없게 멀리 떨어져서 데이트에 방해되지 않도록 예의 바르게 찍었다고 했다. 그리고 행복하라고 축하한다고 전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자라고 했다. 하지만 대중은 그들을 파파라치라고 불렀다.
파파라치라는 단어가 국내에서 심심치 않게 들려온 건 대략 2008년
즈음이었다. 할리우드에서나 유용해 보이던 이 단어가 국내에 도입된 건 이 땅에서도 파파라치식 보도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최초의 보도는 <디스패치>와 <더 팩트>의
자궁 역할을 했던 <스포츠서울닷컴>이었다. 처음엔 우여곡절이 있었다. 어느 연예인 커플이 함께 있는 현장에
카메라를 들이밀고 덮쳐서 셔터를 눌러댔고 필연적으로 충돌도 있었다. 당하는 쪽도, 강행하는 쪽도, 첫 경험이라 서툴렀고 서로 당황했다. 그래도 한 번 해보니 요령이 생겼다.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자세를 바꿨다. 그렇게 안전한 자세로 낚싯대를 드리웠다. 연예인을
찾아서 ‘연애’인을 찍고 연예 기사를 배포했다. 막 건져온 활어 같은 사진은 인터넷이란 도마 위에 오르자 회를 뜨듯이 클릭됐다. 사랑을 싣고 사방팔방으로 전파됐다. 사진 주변엔 ‘두 사람의 사랑을 축하해요, 뿌잉뿌잉’이란 식의 문장이 나열됐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인터넷에서 돌고 도는 건 두 남녀의 밀회를 담은 사진이었다. 위풍당당하게 ’특종’이란
명패를 내걸고 나온 기사 주변으로 숱한 온라인 매체의 기자들이 새우깡에 달려드는 갈매기처럼 날아들어 하나씩 주워먹고 트림을 했다. 소위 ‘우라까이’라는, 타 매체의 기사를 적당히 베낀 후속 보도가 쏟아졌다. 검색어에 걸려서
클릭만 되면 트래픽이 나오고 광고 수익이 올라가니까. 포털 사이트라는,
패가 잘 붙는 담요처럼 잘 깔린 판 덕분이었다. 배우의 연애 덕분에 모든 이들이 풍년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파파라치’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엄밀히 말해 그 사진들은 파파라치가 찍은 게 아니다. 간단히 말하면 <스포츠서울닷컴>이라는,
<디스패치>라는, <더 팩트>라는, 온라인 매체에서 직접 찍고, 써서 보도라는 명목으로 게재한 기사다. 간단히 정리하면 기자가 파파라치
행세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외국에선 셀러브리티의 사생활을 촬영하는 파파라치는 프리랜스다. 매체에서 직접 파파라치식 취재를 하지 않는다. 파파라치들은 자신이
목표로 한 셀러브리티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배제한 채 마구잡이로 사진을 찍어댄다. 완벽한
영리적 행위다. 그들의 사진을 구매할 것인가는 매체의 윤리적 기준에 달려 있다. 가십을 다루는 타블로이드는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국내에서 ‘파파라치’라고 통용되는 건 버젓이 언론사를 표방하는 매체이며 본질적으로
그 매체의 기자다. 탐사 보도 전문을 표방해도 그들을 파파라치라고 부르는 건 다들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들은 무례하게 면전에서 겁박하듯 셔터를 눌러대지 않고, 망원렌즈로
상대방을 배려하기 때문에 파파라치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곤 그들의 러브 스토리를 만천하에 공유한다. 참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사랑을 만천하에 홍보해 주고 축하까지 해주는 이들의 업적이 당사자들에겐 고마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취재차 만난 숱한 소속사 관계자들은 <디스패치>든 <더 팩트>든
그들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하진 않지만 결국엔 귀찮고 짜증나는 존재라고 말했다. 한 소속사 관계자는 <더 팩트>의 사무실에선 기가 막힌 광경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자신들이 몰래 촬영한 연예인들의 파파라치 컷이 사무실 복도에 자랑스럽게 일자로 죽 걸려있다고
한다. 지금은 과거형이 된 연인도, 심지어 다른 상대와 결혼까지
했던 이의 과거도 결박당한 것처럼 벽에 걸려 있단다. 사실 그들의 파파라치식 보도 이후에 결별한 커플들의
사례가 적지 않았다. 최대한 아름답게 보도해 준다는 원칙 따위가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심지어 연예인 커플이 아니라 한쪽이 일반인인 경우엔 ‘신상’이 털리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아름답게 미화하든 말든
깨질 커플은 깨졌고, 털릴 신상은 털렸다.
소속사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이들 매체는 배우들의 연애 사실을 보도하기 전날이나 당일 몇 시간 전에 해당
소속사에 전화를 건다. 남자 쪽보단 여자 쪽에 먼저 알려준다. 일종의
통보다. 그런데 어차피 기사를 내지 않을 것도 아닌데 전화를 거는 이유는 뭘까. 소속사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인정하냐고 묻는다 했다. 인정하라고
설득한다고 했다. 그리고 가끔씩 ‘인정하지 않으면’이란 식으로 협박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전화로 말할 때도 있고, 소속사 관계자를 자사 사무실로 소환해서 면전에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불려가든, 전화를 받든, 때론
고민스럽다. ‘저 사진 정도면 그냥 부정해도 될 텐데, 뭔가
또 다른 게 있다면 어쩌나?’ 고민스럽다고 했다. 해당 인물들의
인정을 강요하는 건 자신들의 취재에 대한 논거를 강화하는 취지라고 했다. 연애가 죄도 아닌데 사진을
보고 인정해야 하는 상황도 불편하지만 죄인처럼 추궁 당하는 기분이라 더욱 별로라고 했다. 그리고 인정한다면
그들의 기사를 위해 디테일한 소스도 제공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협박으로 팩트를 얻어낸다는 말이다. 사실 연예인들의 데이트 사진을 배포하는 것만으로 화제가 될 텐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디스패치>나 <더 팩트>는 스스로가 언론사라는 것을 의식한다. 그래서 자신들이 단순히 가십이나 캐서 팔아먹는 타블로이드가 아니라 배우들의 상호 동의 하에서 정보를 세간에
공유하는, 공정한 뉴스를 보도하는 매체로서 보여지길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나름대로 러닝 파트너라고 생각하는 매니지먼트 사에 나름의 방식으로 협조를 요청한다. 어딘가 억울해 보이는 공생관계다.
생각해 보자. 어느 날 애인과 길을 가는데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난데없이 ‘몇 달 전부터 여자친구를 만나는 걸 봐왔다’고, ‘축하해 줄 테니 둘이 사귀는 거 인정하라’고, 묻는다면, 행복할까. 한편으론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니 겁이 날 것 같다. 물론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존박이 말했던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연예인 걱정’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연예인을 위한 기도를 올리자고 독자를 끌어들이는 부흥회가 아니다. 다만 궁금하다. 사실 이건 일종의 범죄 행위 아닐까? 스토킹에 준하는 사생활 침해에 해당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린 지금
범죄적 행위를 손쉽게 소비하고 있는 것 아닐까? 법무법인 청파의 이재만 변호사에 따르면 이렇다. “일단 과거 법원의 판례에 따르면 연예인은 ‘공적 인물(Public Figure)’로 구별되는 공인으로 구별된다. 그래서
연예인의 경우엔 초상권 침해를 판단할 수 있는 범위가 일반인에 비해 제한적이다.” 그러니까 연예인의
얼굴은 일반인의 얼굴과 달리 공적으로 전시되고 보도되는 것에 대해서 법적으론 보다 관대하다는 말이다. “다만
사생활에서 초상권 침해의 판단 여부까지 제한되는 건 아니다. 또 상대방의 명시적 의사에 반하여 지속적으로
특정인을 괴롭히는 행위를 반복하면 1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결국 파파라치식 보도에 찍힌 연예인이 해당 매체에 법적인 소송을 가해서 처벌이 가능하다고 한들 미약하다는
말이다. 사실상 되로 주고 말로 받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러니
매니지먼트 입장에선 그저 웃으며 만나서 웃으며 헤어진다.
사진에 안 찍히면 된다. 그러면 연애를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나? 그러니 누군가는 찍히기 마련이다. 8개월 동안 잠복해서 관찰하고 소설을 쓰든, 3일 정도 쫓아다닌
뒤 빵하고 터트리든, 정말 오래된 연인이든, 썸 타는 사이든
상관없다. 그래서 얻는 트래픽이 실질적으로 얼마나 막대한 광고 수익으로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들의 사진이 묘한 영향력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디스패치>에서
보도했던 김연아의 파파라치 컷에서 그녀가 들고 있었던 모 브랜드의 도시락 통은 완판됐다. 최근 <더 팩트>에서 찍은 손흥민 사진을 본 네티즌들은 ‘손흥민’보다 ‘손흥민
차’를 보다 많이 검색했다. 파파라치 컷에서 그들과 함께
보이는 상품은 협찬이 아니라 리얼이니까, 구매욕구는 배가된다. 이는 <디스패치>가 나름의 방식으로 ‘사실’적인 매체라는 인지도를 쌓는 데 성공했다는 말이다. 사실 <디스패치>는
연예 전문 매체를 지향한다. <더 팩트>는 종합지를
표방한다. 실제로 두 매체의 전체 기사를 고려한다면 파파라치식 보도의 비중은 적다. 하지만 두 매체의 인지도를 만든 건 파파라치 컷이다. 자신들이 파파라치가
아니라고 부인해도 대중은 그들을 파파라치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크다. 연예인의 사생활을 폭로해 주길 기대하는
독자들이 적지 않다.
두 매체는 소위 말하는 특종 매체다. 누군가의 연애 정황을 사진으로
제시하면 수많은 온라인 매체들이 하나같이 재빠르게 기사를 낚아채서 재생산한다. 포털 사이트라는 플랫폼이
미디어의 허브 노릇을 하는 기형적인 플랫폼에서 자극적인 헤드라인과 검색어 경쟁을 통한 클릭 낚시에 치중하는 낚시 전문 매체들이 기승을 부리는 건
궁극적으로 포털사이트 탓이 크다. 대중이 원하니까 이런 콘텐츠를 만들고 유통한다는 말은 대중에게 팔리는
콘텐츠는 제작과 유통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는 논리와 손쉽게 결탁한다. ‘연애’나 ‘결혼’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기사는 누구를 막론하고 조회 수가 남다르니 경쟁적으로 써 내려간다. 트래픽 장사가 쏠쏠하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파파라치식 보도는 자극적인 단어로
말초신경을 자극해 클릭을 유도하는 트래픽 장사의 신무기에 가깝다. 기형적인 온라인 미디어의 환경이 만들어낸
진짜 기형아다.
사실 할리우드에도 파파라치가 존재한다. 유럽에서도 존재한다. 연예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대중의 관심을 독버섯처럼 먹고 자라는 신이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듯 화려한 무대 뒤엔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기 마련이다. <디스패치>나 <더 팩트> 같은
매체가 존재한다는 것이 그 대상이 되는 연예인들의 입장에선 대단히 불편한 일이겠지만 산업적으로 봤을 땐 기이한 일만은 아니다. 불법성의 여부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혹은 법적 처벌의 수위를 압도할 만한 수익이 보장된다면 시도할 수 있는
영리적 행위다. 다만 기자들이 파파라치 코스프레를 하면서 스스로의 행위를 전문 탐사 보도라고 변호하는
건 조금 이상하다. 이건 언론이라는 생태계가 바닥을 치는 수준까지 내려왔음을 대변하는 바로미터다. 한국에서 대부분의 언론 매체는 이제 기자의 직업적 사명감이나 품위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니 파파라치가 되고, 스스로 탐사 보도를 했다고 자위한다.
1957년 모나코 왕실에선 캐롤라인 공주가 탄생하자 공주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경매로 구입할 것임을 밝혔다. 이에 수많은 사진기자들이 캐롤라인 공주를 찍기 위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 후 유명인의 사진을 찍는 프리랜스 사진가들이 생겨났다.
파파라치의 기원으로 꼽히는 일화다. ‘파파라치’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쓰인 건 1960년에 공개된 이탈리아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 때문이었다. 영화에선 상류층 여성과 열애 중인 기자를 쫓아다니는 사진기자가 등장하는데 그의 이름이 파파라초(Paparazzo)다. 모기를 의미하는 ‘파파타치(Papatacci)’와 번개를 의미하는 ‘라초(Razzo)’의 합성어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파파라치는 파파라초의 복수형 단어다. 파파라초 대신 파파라치라는
복수형 표현이 실용화된 건 유명인의 주변에 모기처럼 들끓는 ‘파파라초들’의 모습이 그만큼 일반적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펠리니는 파파라초에
유명인의 가십이나 팔아먹는 데 혈안이 된 기생적인 미디어의 단면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았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파파라초는 상징적 언어였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 파파라치는 현실의 언어다. 기형적으로 몰락한 미디어 산업의 사생아다. 언론사임을 주장하고 파파라치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지만 그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 어디에나 있다.
정체를 모르겠다. 그들 스스로도 모르는 것 같다.
<제보자>는 상당히 괜찮은 영화였다. 힘 있는 이야기의 흐름도 좋고, 연출의 완급 조절도 탁월했으며 새삼스레 재확인하는 박해일의 연기력과 주변 캐릭터들의 호응도 상당히 좋은 영화였다. 국내에서도 두고두고 회자될만한 언론 영화 한 편을 갖게 됐다는 점에서도 성과라면 성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두고두고 아쉬울 만한 기분이 남는 건 결말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결국 방송 보도를 통해 줄기세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정황들을 전달하고 신기루 같은 업적에 갇혀서 의심하지 못했던 사회를 각성시키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데 그 이후로 영화는 어딘가 안이해 보일 정도로 재빠르게 낙관적인 표정으로 도취된 방송국의 분위기 안에 매몰돼버리듯 영화를 끝내버린다. 사실상 황우석 사태의 핵심은 황우석이 스스로 자신의 사기 전과를 고백한 이후에도 그를 추앙하는 이들로 인해 끊임없이 불거지던 줄기세포 신앙에 있었다. 그리고 이런 무조건적인 믿음의 방식은 그 이후로도 한국 사회 곳곳을 잠식하던 크고 작은 사건의 중심부에서 발견되는 기이한 현상이기도 했다. 심지어 최근의 세월호 사태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제보자>는 부정한 사실을 폭로한다는 쾌감에 도취되어 진실을 웅변하지 않고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겹고 괴로운 싸움이 될 수 있는가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작품이다. 게다가 그 맞은 편에서 선의 탈을 쓰고 사회를 유린하는 악인의 내면이 꼭 악해서 그런 것만은 아닐 수 있음을 시사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악인이라고 해서 악한 것만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라도 조건만 맞아 떨어지면 선인을 자처하며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구태의연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새삼 환기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딘가 안이한 결말이 되새김질 할수록 아쉽다.
<제보자>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방송사 밖에서 촛불시위를 하는 시민들을 보며 줄기세포의 존재를 추적하던 PD는 말한다. “처음으로 저 사람들이 무서워지려고 하네요. 진실을 말하면 모두 다 내 편이 될 줄 알았는데.” 황우석 사태 이후로 PD수첩은 3년 뒤 다시 벼랑 위로 내몰렸었다. 광우병 사태 당시였다. 진실이 드러난다 해서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진실을 말하는 자의 입은 아직도 외롭고 고단하다.
지난 16일, 언론에선 하루 종일 진도의 여객선 침몰 상황에 대한 소식을 알려왔다. 참담했다. 그리고 그 소식만큼이나 참담했던 건 한국 언론의 현주소였다.
미국의 케이블 채널 HBO의 미니시리즈 <뉴스룸>은 뉴스를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유명 앵커인 윌 맥어보이(제프 다니엘스)를 주축으로 구성된 방송 보도국의 분위기를 현장감 있게 전달하는 이 미드는 동시대의 뉴스를 소재로 삼아 에피소드를 전개함으로써 동시대와 호흡하는 진짜 뉴스가 만들어지는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는 인상을 전달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공정성에 중점을 둔 뉴스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묻고 답해나간다.
개인적으로 대단히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시즌 1 에피소드 4회의 말미인데 주말에 갑작스럽게 발생한 애리조나의 총기 난사 사건에 관한 속보를 내보내기 위해 긴급히 정보를 수집하고 보도 준비를 해나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이 속보의 핵심은 하원의원인 가브리엘 기포즈가 행사 참석 도중에 총에 맞았다는 사실인데 라디오에서 그녀의 죽음을 보도하면서 일체의 케이블 채널 뉴스들도 역시 그녀의 죽음을 속보로 전하기 시작하고 윌의 뉴스룸도 술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뉴스룸 안의 스태프들은 공식적인 확인을 얻게 될 상황에 대비할 뿐 부정확한 타매체의 속보전에 동참하지 않고 상황을 주시한다. 그러나 방송국 대표의 젊은 아들은 죽음에 대한 공식 발표를 하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 추궁하기 시작하고 뉴스 진행이 한창인 뉴스룸으로 박차고 들어오기까지 한다. 그때 한 스태프가 말한다. “사람 목숨이잖아요. 뉴스가 아니라 의사가 결정하는 거죠.” 그리고 결국 타방송사들의 속보가 오보였음이 밝혀진다. 기포즈가 살아있으며 수술을 준비하고 있다는 병원의 정보를 전한 것. 공식적인 정보를 확인하는 인내심을 통해서 유일하게 진실을 전하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힘든 하루였고, 다시 한번 힘든 하루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16일 아침부터 진도 해상에서 여객선이 침몰했다는 속보가 보도됐다. 오전 10시경에 이뤄진 정부의 브리핑에선 제주도로 향하는 이 여객선엔 총 477명의 승객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그중 수학여행을 떠난 325명의 단원고 학생들이 탑승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 여객선이 침몰했다는, 언어만으로도 마음이 쪼그라드는 속보였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학생들이 전원 구조될 것이란 보도가 이어졌고, 오전 11시경엔 학생들이 모두 구출됐다는 문자가 학생들의 부모에게 전달되기도 했다. 하지만 곧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소식이 줄줄이 이어졌다. 실종자의 숫자는 매번 달라졌고, 전체 승객의 숫자마저도 불명확해졌다. 실종자의 수에 관한 정부의 발표는 고무줄처럼 늘었다가 줄었다. 그에 따라 언론의 정정보도가 이어졌다. 가장 심각한 상황은 4시 30분경에 벌어졌다. 구조자수가 368명이라고 했던 언론들은 곧 집계상의 오류로 잘못된 정보를 전달했음을 전했고, 실제 구조자수가 절반으로 떨어진 164명이란 보도가 이어졌다. 집계상의 오류라는 이유였다. 학생들 대부분이 구조될 수 있으리란 희망을 쓰나미 같은 절망으로 덮어버린 이 소식 이후로 구조자수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어두운 예감을 부추기듯 해가 저물고 하늘보다도 마음이 먼저 암담해졌다.
일선의 한 기자는 이처럼 무분별한 정부의 통계는 처음이라며 볼멘소리를 토로했다. 하지만 과연 정부의 통계만이 문제였을까. 오전 10시경을 전후로 시작된 갖은 언론 매체들의 속보 경쟁 또한 무분별한 레이싱 같았다. 온라인과 방송, 공영방송과 케이블 채널을 가리지 않고 진도에서 벌어진 참극에서 얻어낸 모든 정보들을 누구보다 먼저 ‘속보’란 이름으로 내걸었다. 정부가 발표하면 받아 적고 게재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알고자 하는 의지보다 알리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정확한 정보보단 신속한 소식이 중요했다. 기자가 아니라 속기사들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언론의 현주소가 명백하게 드러났다. 진도는 포털사이트를 바탕으로 가속화된 갖은 언론 매체들이 벌이는 속보의 전장이 됐다. 그 와중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촌극이 언론 기사라는 미명하에서 게재되기 시작했다. ‘타이타닉, 포세이돈 등 선박사고 다룬 영화는?’이라는 믿을 수 없는 헤드라인을 내건 <이투데이>의 기사는 오후 2시 40분경에 게재됐다. 질타를 받았다. 상관없었다. 논란의 도마 위에 오를수록 트래픽을 챙기고자 하는 속셈이 다분한, ‘어뷰징’ 기사였다. 그리고 15분 뒤 이 매체는 ‘SKT, 긴급 구호품 제공, 임시 기지국 증설 “잘 생겼다~ 잘 생겼다”’라는 추악한 헤드라인까지 선보이며 매체의 정체성을 적나라하게 과시했다. 현재 기사는 삭제된 상태다.
한편 몇몇 인터넷 언론 매체는 여객선의 보험 가입 현황에 주목하는 기사를 송고하기 시작했다. 조선닷컴에선 ‘세월호 보험, 학생들은 동부화재 보험, 여객선은 메리츠 선박보험 가입’이란 헤드라인을 내건 기사를 송고했고, 이런 온라인 기사에 자극을 받았는지 공영방송 MBC는 보험 조건에 따라서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상세한 분석 보도를 전했다. 보험사 PPL 음모론을 제기해도 될만한 촌극이었다. 한편 같은 날 JTBC의 <뉴스 9>은 손석희 앵커의 긴 사과로서 뉴스진행을 시작했다. “오늘(16일) 낮에 여객선 침몰 사고 속보를 전해드리는 과정에서 저희 앵커가 구조된 여학생에게 건넨 질문 때문에 많은 분들이 노여워하셨습니다. 어떤 변명이나 해명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나마 배운 것을 선임자이자 책임자로서 후배 앵커에게 충분히 알려주지 못한 저의 탓이 가장 큽니다. 깊이 사과드립니다.” 손석희의 사과는 16일을 암담하게 뒤덮었던 언론들의 막장 배틀에 내린 한 줄기의 빛처럼 느껴졌다. 공정한 보도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는 것도 언론의 몫이다. <뉴스 9>은, 손석희는 최소한 그 자리를 지켰다. 다행이다.
“언론의 자리를 되찾는 거지. 언론을 다시금 명예로운 직업으로 만드는 거야. 위대한 나라에 걸맞은 토론의 장을 탄생시킬 정보를 제공하는 저녁 뉴스를 만들고, 예의를 알고, 존중할 줄 아는, 진정으로 중요한 본질로 돌아가는 거. 천박함은 벗어 던지고, 가십과 관음증도 끝내고, 어리석은 대중일지언정 진실을 전달하는 거.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얘기 말고, 그래서 언론이, 우리 모두가 뭉칠 수 있는 구심점이 되는 거야.” <뉴스룸>에서 등장하는 대사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오늘 대한민국 언론들은 이를 다른 방식으로 실천했다. 끔찍한 사고가 벌어졌다. 그리고 언론은 이를 보도한다. 그런데 진실을 전하려는 의지보다도 추악한 의도가 먼저 눈에 띈다. 무분별한 언어를 통해서 상처 입은 이들을 되레 유린한다. 듣고 싶고, 알고 싶은 소식은 기약이 없는데 알 필요가 없는, 어쩌면 알아선 안될 소식들이 귓전으로 내던져진다. 누군가의 비극이 하나의 쇼가 돼서 초단위로 판매되고 폐기된다. 마치 모든 언론이 합심이라도 한 것처럼 그랬다.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16일 하루 동안 대부분의 언론이 보여준 작태는 온라인 쇼핑몰과 홈쇼핑에 매대를 세우고 정보를 팔아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취재원에 대한, 독자에 대한 예의도 없었다. 그저 무엇이든 팔아 치우겠다는 장사치의 욕망만이 파도처럼 진도를 덮쳤다. SNS상에선 기자라는 이름 대신 ‘기레기’라는 조롱이 난무했다. 기자와 쓰레기를 더한 말이다. 대한민국 언론의 현주소를 압축하는 조롱이다. 마치 온라인 쇼핑, 홈쇼핑이 돼버린 듯한 글과 말의 추락에 대한 씁쓸한 비유다.
조지 클루니가 메가폰을 잡았던 영화 <굿나잇 앤 굿럭>은 미국의 CBS방송에서 시사프로그램 <See It Now>를 진행했던 에드워드 머로우에 대한 영화다. 그는 1940년대 미국에 불어 닥친 매카시즘의 광풍 앞에서 끝까지 진실의 목소리를 포기하지 않고, 되레 끈기 있게 조셉 매카시의 실정을 주도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머로우는 말했다. "TV는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 계몽하고 영감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그런 목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 한, TV는 바보상자에 불과할 뿐이다." 언론이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은 언제나 자명하다. 하지만 진실을 추구한다는 건 그만한 각오와 실력이 필요한 일이다. 치밀한 기획을 통해서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은 단순한 정의심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사회의 사람들은 수많은 언어에 둘러싸여 있다. 스마트폰으로 숱한 정보를 공유하고 세상의 곳곳을 본다. 하지만 그 수많은 정보에 대한 변별력은 본인의 몫이다. 하지만 독자는 안다. 알 수 있다. 혹은 알아야 한다. 가십을 생산하는 건 언론이 아니다. 흔히 우리가 ‘알 권리’라고 말하는, 개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공적인 정보들을 전달하는 것이 저널리즘이고 언론이다. 가장 중요한 건 그런 언론이 제대로 된 기능을 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건 과연 우리에게 그런 정보들을 구별할 수 있는 변별력이 있는가라는 문제다. 신념 있는 언론의 등장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 신념을 지켜줄 수 있는 대중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에드워드 머로우는 말했다. “남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하고,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신뢰감을 줘야 한다. 또한 남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서는 정직해야 한다.” 언론과 대중이 서로를 신뢰할 수 있다는 건 이상적이다. 믿을 수 있는 언론과 이를 지지하는 대중이 함께 하는 사회는 보다 나은 가치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린 보다 나은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찾아야 한다. 지금도 진도에선 뉴스가 전해지고 있다. 방금 막 두 번째 수색 작업이 시작됐다는 소식을 봤다. 우린 희망의 끈을 놓아선 안 된다. 언론은 그 희망을 팔아먹는 매대로 전락해선 안 된다. 그러니 부디 오늘도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해’ 주길 바란다. 팔기 쉬운 가십이 아니라 모두에게 필요한 진실을 위해서. 부디 껍데기는 가라.
인간의 오랜 역사는 폭력과 맞물려 왔다. 야만의 시대에서 문명의 시대로 진입한 현대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폭력의 상흔이 발견된다. <바더 마인호프>는 폭력적 역사에 대한 기록적 재현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연출된 스크린 너머의 풍경엔 인간이, 인간의 신념이, 인간의 신념이 잉태되는 시대가 있다. 신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리는 인간은 추구하는 신념에 따른 역사를 완성하기 위해 때때로 폭력을 발화시키며 시대를 덥힌다. 폭력을 등에 업은 신념이 시대를 가열시킨다. 기록된 폭력은 역사가 되고 인간과 함께 끊임없이 사유된다. 폭력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 가치인가. 그리고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은 어떻게 기억될 수 있을까. <바더 마인호프>의 화두는 분명 그렇다.
1967년, 이란의 전제군주인 ‘팔레비 샤’왕가가 서독을 방문한다. 베를린에서 그들의 방문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집회가 발생하고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적 진압이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한 대학생이 총에 맞아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폭동에 가까운 시위를 일으키고 극단적인 테러를 자행하는 반정부적 조직 ‘독일적군파(RAF: Red Army Faction)’가 창설된다. 안드레아스 바더(모리츠 블리입트로이)와 그의 연인 구드룬 엔슬렉(요한나 보칼렉)을 주축으로 한 이 청년단체는 프랑크푸르트의 백화점 폭탄테러를 통해 이름을 알리고 본격적인 조직의 방향성을 알린 뒤 시민들의 지지마저 얻는다. 이 사건으로 투옥됐지만 이듬해에 가석방된 이들은 본격적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이들을 지지하는 진보적 언론인 울리히 마인호프(마르티나 게덱)는 독일적군파를 행위적으로 지원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연방경찰국장 호르스트 헤롤드(브루노 간츠)는 이들의 뒤를 쫓는 동시에 그들의 심리를 추적한다.
2시간 30여분의 시간이 증명하는 건 폭력의 전진이다. 이란의 전제군주를 맞이하는 서독 정부가 시민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폭력을 선택한 것처럼 정부에 반발한 시민의 일부는 폭력에 대항한다는 명분아래 폭력을 자행한다. 대립의 형태로 맞선 신념의 구도는 점차 극단적 행위의 대결로 번져나간다. 폭탄 테러를 자행하고 정부요인을 암살하며 시민들의 암묵적 동의를 거치는 독일적군파는 점차 그 행위적 명분을 둘러싼 내부적인 갈등에 시달린다. 극단적 행위를 통해 신념을 관철하려는 바더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조직을 장악하며 테러리즘에 가까운 행위적 목표를 추구하지만 이성적인 방식의 설득을 중시하는 마인호프는 이를 경계하고 우려하며 바더와 대립적인 갈등을 겪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정부의 올가미에 걸려 검거되거나 이에 맞선 총격전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는 단원이 늘어가고 조직은 점차 존폐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바더 마인호프>는 혁명과 테러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위치를 점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역사의 몸통 위로 카메라를 들이민다. 혁명가와 테러리스트 사이에서 자리한 독일적군파에 대한 가치평가를 걷어내고 건조하고 묵묵한 다큐적 질감의 영상을 가미하며 의문의 범위를 좀 더 확대한다. 물론 <바더 마인호프>를 온전한 리얼리즘 필름의 시선으로 주장될 수 있는 작품인가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인 ‘슈테판 아우스트’의 저서 ‘신화의 시간(국내 출판명, 원제 ‘The Baader Meinhof Complex’)’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온전한 역사의 현장을 관통하기 보단 그 주변부에서 제기된 하나의 가설적 형태로서의 역사를 재현하는 것으로서 인정받을 때 보다 정당해진다. 동시에 <바더 마인호프>가 역사적 증언을 목표로 둔 영화라기 보단 그 역사적 논란의 중심에서 논의의 진전을 꾀함으로써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점철된 작품이라 정의할 때 이런 배후에 대한 설득력이 보다 힘을 얻을 가능성도 크다. 자국에서도 여전히 논란이 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지표를 외부자가 온전히 파악하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시대와 역사에 대한 윤리적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기록에 근거를 둔 형태의 역사를 스크린에 재현함으로써 얻어낼 수 있는 건 그 역사에 대한 새로운 증인들을 양산해낸다는 점이다. 그 시대를 바라보고, 현장을 지켜보는 행위를 통해 역사적 의문을 제기하고 그 가치에 대한 논의를 진전한다는 것이 <바더 마인호프>의 궁극적인 가치다. 혁명과 테러를 오가는 역사적 정의 가운데서 사실에 대한 평가를 배제하고 현상의 근본을 탐구하게 만든다. 특히 <바더 마인호프>가 그리는 1970년대 독일의 살풍경이 단지 그들에게 국한된 역사적 장면이라고 대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더더욱 중요하다. 혁명이냐, 테러냐, 역사에 대한 가치판단을 쉽게 논하기 어려운 건 그 시대가 머금은 광기가 선의를 악의로 잠식하고 주체성에 대한 고민을 깊게 진전시키는 까닭이다.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던 청년들이 폭력의 또 다른 주체가 되길 결심하고 죽음과 파괴를 전시하는 광경을 지켜볼 때 커다란 대의의 전진이 아닌 세계의 또 다른 몰락이 목격된다. 양극단으로 몰린 세계의 두 축이 강하게 맞부딪히는 순간 또 한번 세상은 어지럽게 들뜬다.
시민들의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는 정부의 강압적 정책과 이에 반발한 청년들이 자행하는 반국가적 테러를 묘사하는 영화적 시선엔 당위를 따져 묻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 관객들은 혁명의 기운에 도취되다가도 테러의 현장 가운데서 깨어나야 한다. 그 가운데 발생하는 물음표에 매달릴 수 밖에 없지만 영화는 그저 혼란의 도가니로 관객을 끌어들이고 방치한 채 무심하게 서사를 전진시킬 뿐이다. <바더 마인호프>는 그 역사의 가치를 설득하거나 부정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 시대의 광기를 먹고 자란 괴물의 형태를 증명하는 작업이다. 자신들의 가치관을 관철하려는 인간들의 대립은 가치판단의 영역을 넘어 대상의 파괴로 변질되어 나간다. 본질은 훼손된 채 극악하게 가중되는 상황이 거듭 이어질 뿐이다.
만약 <바더 마인호프>의 곳곳에서 기시감을 느낀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이러니하지만 1970년대 독일의 살풍경 속에서 발견되는 건 분명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가치관의 명분과 동떨어지게 발생하곤 하는 극단적 성질의 폭력은 좌우의 개념으로 편을 가른 이념의 극단적 대치 상황이 예감되는 대한민국의 현재와 쉽게 연결될만한 풍경이다. 거기서 무엇을 찾을 것인가는 결국 개인의 권한이다. 무엇이 괴물을 잉태했나. <바더 마인호프>가 발생시킬 궁극적 가치는 그 물음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 있다. 2009년 대한민국에서 1970년대 독일을 본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기이하게도 그 현장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건 이미 우리 주변에 잉태되고 자라나기 시작한 괴물의 흔적들을 인지하게 되는 까닭은 아닐까.
총을 맞고 사망한 부랑자 시신이 발견된 이튿날, 하원의원 스티븐 콜린스(벤 애플렉)의 여비서가 지하철역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이 덕분에 스티븐과 여비서의 섹스 스캔들이 불거지고 무기회사를 상대로 한 청문회에서 공격적인 질문을 던지던 스티븐의 발언권이 상실될 처지에 놓인다. 하루 차이로 발생한 두 죽음은 그저 동떨어진 두 개의 점처럼 접점이 없는 개별적 사건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를 취재하던 ‘보스톤 글로브’의 기자이자 스티븐의 친구인 칼 매카프리(러셀 크로우)는 두 사건을 연결하는 단서를 발견한다. 연결고리가 없는 두 사실을 관통하는 진실이 직감된다.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이하, <플레이>)는 거대한 음모를 추적하는 기자의 이야기다.
뛰어난 취재력을 자랑하는 베테랑 기자 칼 매카프리와 혈기왕성한 신예 여기자 델리 프라이(레이첼 맥아담스)는 진실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사건의 취재를 밟아나간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노크가 번번히 무산되거나 박대 당하는 와중에도 진실을 향해 접근해가는 취재과정이 호기롭게 묘사된다. 때때로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까지 연출되며 스릴러적 긴장감을 더한다. <플레이>는 스릴러적 구조를 통해 긴장감을 끌어당기는 동시에 전문직 드라마로서의 지적인 묘미를 더한다. 영화의 중추는 분명 거대한 집단의 이기에 대항하는 개인의 윤리적 저항을 곧잘 이야기하는 토니 길로이의 각본이다. 음모론에 갇힌 진실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고 믿어지는 결말 직전, 영화는 진실의 맹점을 자각하고 왜곡된 진실의 남은 한 꺼풀마저 벗겨내며 논의를 한 차원 더 발전시킨다. 진실을 추구하는 건 정의를 위해서지만 정의에 대한 집념은 때로 진실을 향한 시야를 가린다. 기자는 자신이 작성한 기사를 송고하기 직전까지 진실에 대한 의심의 끈을 놓쳐선 안 된다. 정의라고 믿어지는 부분조차도 의심해야 한다. <플레이>는 거대한 자본의 알력과 권력의 위협에 대항해 사선을 넘어서까지 결백한 진실을 얻어내려는 기자의 직업윤리를 흥미롭게 그려낸다. 찌라시가 득세하고 가십이 넘쳐나는 시대에 완전한 진실을 향해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기자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경종을 울린다.
박 모씨는 미네르바가 아니다. <신동아>는 위풍당당했다. 이미 미네르바의 기고문과 인터뷰를 실었던 전력이 있는 <신동아>였다. 미네르바는 7인으로 구성된 금융계 인사들이라고 했다. 반전에 대한 기대 심리마저 형성됐다. <월간조선>이 대항마를 형성했다. 전선이 형성됐다. 하지만 이내 <신동아>는 꼬리를 내렸다. 오보를 사과 드립니다. 해프닝으로 일단락됐다. 그렇다면 대체 미네르바를 자처한 K씨를 비롯해 7인의 금융계 인사는 대체 누구였나? <신동아>는 함구했다. 의문이 도졌다. 어쩌면 말을 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이 사람이 우리 K씨다, 라고 왜 말을 못해! <신동아>의 연인도 아니고. 어쩌면 <신동아>는 미네르바가 체포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잖아. 가상의 미네르바가 수갑을 차고 소환됐다. 와, 이거 진짜 리얼이야. 소름 돋았어. 물론 감탄할 때는 아니고, <신동아>입장에서는 이래저래 사색이 될만한 사안이었다. 두 가지 시나리오가 탈고됐다. 뻥카였냐, 밑장빼기였냐. 전자라면 밑천을 탕진하는 셈이고, 후자라면 손모가지 날아갈 판이다. 하지만 여러모로 바보가 사기꾼보다 낫다. 쪽팔림은 한 순간에 불과할 뿐. 뻥 터져서 잠시 찌그러지면 된다. 여전히 <신동아>만이 K씨를 안다. <신동아>는 정말 속절없이 K씨를 믿었을까? 정말 K씨는 존재하나? 말이 말을 낳아도 <신동아>는 침묵한다. 진실은 <신동아>너머에 있다.
1월 30일, 군포여대생 납치살해 용의자로 검거된 강 모씨가 입을 열었다. 경찰은 당일 오전 강 모씨가 경기 서남부 연쇄 실종자 여성 7명을 살해했음을 자백했다고 발표했다. 사건의 본질이 달라졌다. 더욱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사건의 체급이 오른 만큼 언론보도의 비중도 급격히 변했다. 30일을 기점으로 공중파 방송국 3사의 저녁 메인 뉴스는 더 이상 강호순의 실명을 가리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미 27일 첫 번째 현장검증 이후, 일간지에서는 강호순이란 이름 석자가 알게 모르게 활자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공중파 방송에서 강호순의 이름 석자가 고스란히 들려온 건 30일에서였다. 연쇄 살인범의 신원이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송출됐다.
1월 31일,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지면을 통해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했다. 언론과 여론이 함께 술렁였다. 얼굴공개 논란이 얼굴공개로 이어졌다. 조선일보는 1면에 얼굴공개 기사를 게재했다. 중앙일보는 4면이었다. 조선일보가 좀 더 대담했다. 당일 저녁 SBS 8시 뉴스에서도 강호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1시간 뒤, KBS 9시 뉴스에서도 강호순의 얼굴이 드러났다. MBC 뉴스데스크가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한 건 하루가 지난 2월 1일이었다. 역시 하루가 지난 2일엔 동아일보를 비롯한 여타 일간지에서 강호순의 얼굴을 나란히 게재했다. 반면 한겨레와 한국일보는 강호순의 얼굴 대신 얼굴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지면을 통해 독자에게 알렸다.
신문과 방송
얼굴 사진을 입수한 건 비단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뿐만이 아니었다. 일간지나 방송국이나 가릴 것 없이 이미 강호순의 얼굴공개에 대한 논의는 각기 내부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단지 시점이 문제였다. 과거 신정아의 누드 사진을 게재한 문화일보처럼 선정성의 뭇매를 맞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달랐다. 사생활 침해에 대한 손가락질보다 극악무도한 흉악범에 대한 주홍글씨가 선명했다. 여론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이 유력했다. 선봉에 선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깃발을 꽂은 것도 그런 판단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지난 1월 31일자 지면에서 강호순의 얼굴공개에 관한 입장을 게재했다. 중앙일보 유건하 기획전략팀장은, “일일이 제작과정을 이야기할 순 없지만 편집권에 대한 심사숙고 끝에 내부결론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같은 날 SBS와 KBS의 저녁 메인 뉴스가 뒤를 따른 건 우연이 아니다. 필연적인 타이밍이었다. “보도국장, 팀장 선에서 간헐적인 논의는 계속되고 있었다. 단지 추이를 살피던 중이었다. 결국 31일 오전회의에서 갑론을박 논의 끝에 방송이 결정됐다.” KBS 정은천 사회부 팀장의 말이다. SBS의 입장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SBS 양철훈 편집부 부국장에 따르면, “애초에 편집부 차원의 고민이 있었다. 31일, 보도국 전체 편집 회의 차원에서 논의됐고, 부장 선 토론으로 결정됐다. 조선과 중앙에서 먼저 얼굴을 공개한 마당에 딱히 얼굴이 가려질 의미가 없어졌다는 판단이 우세했다.”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기습적인 보도가 방송사를 움직이는데 영향을 끼친 건 분명하다. 그렇다고 허를 찔린 건 아니었다.
“조선과 중앙의 보도가 공개 논의의 단초가 된 건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방송과 신문은 신의의 잣대나 파장이 다르다. 이 부분의 고민이 있었다.” SBS 양철훈 편집부 부국장의 말이다. 누군가가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편해질 일이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물꼬를 텄다. 방송사의 고민을 어느 정도 덜어준 셈이다. 신문이 정보를 선점했다 해도 방송의 위력은 차원이 다르다. 조간신문의 보도 이후의 저녁 뉴스는 늦은 것이 아니다. SBS와 KBS가 차례로 강호순의 얼굴을 뉴스에 내보낸 시점은 주효했다. 이상한 건 MBC였다. 31일 당일에 침묵했던 MBC는 다음 날이 돼서야 MBC뉴스데스크를 통해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했다. 익명을 요구한 타방송국의 인사가 의문스럽게 말했다. “타사보도에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지만 개인적으로 의아했다. 어째서 하루 늦게 방송을 했을까. MBC가 고민한 지점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MBC 역시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보도에 반응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MBC 김성환 수도권 팀장은 말한다. “사진은 이미 강호순의 검거 당일에 입수됐다. 다만 이를 공개할 것인가, 라는 내부 논란이 계속됐다. 당일 편집회의에서 보도 시점은 결정된다. 얼굴공개까진 하지 말자는 의견이 우세했던 30일과 달리 31일엔 논의가 좀 더 깊어졌다. 그리고 2월 1일엔 논의가 무색해진 경향이 있었다. 타방송사에서 보도가 된 상황에서 우리가 얼굴을 가린다는 게 무의미하다는 판단이 섰다.” MBC는 좀 더 신중했다. 심각한 후유증을 야기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방송의 공정성을 내세워 공영방송 사수라는 기치를 내거는 MBC가 앞장 설 일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방송에서마저 강호순의 얼굴이 알려진 마당에 MBC의 고민은 무의미하다는 내부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니고 있는 정보를 묵힐 수 없다는 의견이 점차 힘을 얻었다. 타방송국보다 하루가 늦은 시점에서의 보도는 무색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보의 껍데기는 유효했다. 시의적 효력은 상실됐지만 정보 차원의 목적에서 접근할 필요가 없었다. 자체적인 의사표명이 중요한 사안이었다. MBC의 내부적 합의는 그렇게 이뤄졌다.
언론과 여론
강호순의 얼굴공개는 달리기가 아니라 꼬리잡기였다. 속도전보다도 탐색전에 가까웠다. 방송사는 두 일간지의 꼬리를 잡았다. 하지만 두 일간지도 머리는 아니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얼굴공개의 원칙으로 내세운 건 ‘국민의 알 권리’였다. 여론의 요구에 부응한 정보라는 점을 앞세웠다. “기사를 작성한 경위의 논리에 대해서는 이미 지면에서 충분한 입장을 밝힌 셈이라 본다.”김수혜 조선일보 기동팀장이 잘라 말한 것처럼 조선일보는 지난달 31일자 지면을 통해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한 자사 입장을 기사로 전했다. ‘반 인륜범죄자의 얼굴을 마땅히 공개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눈에 띄는 대목이다. 중앙일보 역시 ‘공익을 위해 연쇄살인범 강호순의 이름, 얼굴 공개’라는 헤드라인으로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했다. “즉흥적인 반응이 아니라 일련의 사건이 발생한 끝에 여론의 요구가 높아진 끝에 응답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극악무도한 인면수심의 사건이 거듭되고 이에 대한 국민적 감정이 여론화되는 시점에서 언론이 방관할 순 없는 사안이다. 신문은 여론은 대면하는 매체 아닌가.”중앙일보 유건하 팀장의 말이다. 방송국의 입장표명도 크게 다를 바는 없다. 방송국 3사는 이번 얼굴공개가 ‘국민의 알 권리’와 ‘여죄의 제보’를 위한 것이라는 공통적 견해를 밝혔다. 국민을 위한 공익이 얼굴공개의 목적이란 이야기다.
지난 1일 오전, 강호순의 자백에 따른 추가 현장검증을 위해 군포경찰서를 떠나기 직전 기자들과의 질의 대면이 있었다. 첫 번째 질문이 나왔다. “어제 얼굴이 언론에 공개됐는데 심정이 어떠세요?”강호순은 묵묵부답이었다. 이를 대신한 건 오후 5시경 경찰의 브리핑이었다. 군포경찰서 이명균 강력계장은 그 질문을 통해 강호순이 자신의 얼굴이 언론에 공개됐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고 밝혔다. 그리고 강호순이 심경적인 충격을 느꼈다고 전했다. 경찰은 강호순에게 언론의 얼굴공개를 알리지 않았다. 대신 현장에서 변화가 있었다. 경찰은 당일 현장검증에서 강호순에게 마스크를 씌우지 않았다. 언론의 얼굴공개가 다음 날 이뤄진 특단의 조치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랬다. 현장검증 주변에서는 유족을 비롯한 구경꾼들의 고함이 빗발친다. 마스크를 쓰고 모자까지 눌러쓴 강호순을 향한 비난은 때론 주변의 경찰에게 향한다. “경찰 내부에서도 항상 논란이 있었다. 일선 형사들도 마스크를 벗기고 싶어한다. 피의자 인권도 중요하지만 여론 앞에서 피의자의 편에 서는 것처럼 보이는 게 좋을 리 있겠나.”이명균 강력계장의 말이다. 경찰 역시 여론을 의식하고 있었다.
강호순의 마스크가 벗겨진 뒤에도 현장검증은 여러 차례 거듭됐다. 경찰은 강호순이 자신의 얼굴공개에 충격을 느꼈다고 발표했다. 강호순의 현장검증을 일선에서 취재한 모 일간지의 기자는 전한다. “범인의 심경변화에 대한 경찰의 발표는 기자들이 확인한 사안은 아니다. 현장에선 실제적으로 얼마만큼의 심경 변화가 있는지 느끼기 어려웠다. 다만 마스크를 벗은 뒤로 고개를 더 파묻는 경향이 있다.”마스크를 벗겼지만 강호순의 얼굴이 보이는 건 아니다. 눌러쓴 모자와 후드로 얼굴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얼굴을 파묻는 행위는 강호순이 마스크가 벗겨진 자신의 얼굴을 의식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큰 변화는 강호순이 아니라 다른 쪽에 있었다. “사진 기자의 카메라 앵글 각도가 변했다. 정면이 아니라 좀 더 아래로 내려간 거지.”한겨레 사회부 김기선 기자의 말이 현장의 분위기를 전달한다. 마스크가 벗겨진 강호순의 얼굴을 찍고자 하는 노력이 있다. 김기선 기자의 말이 이어졌다. “얼굴공개 뒤로 점점 보도가 선정적으로 변하고 있단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팩트를 찾기 위한 노력보단 이슈를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늘고 있다.”
언론은 강호순의 얼굴공개가 사회적인 공익을 위한 결단이라고 소개해왔다. 그 뒤를 이어 강호순의 과거 행적들이 낱낱이 드러난다. 살인 수단과 살해 방법, 살인 행적까지 여과 없이 보도된다. 범죄 예방 차원에서 강호순의 범행을 보도하고 추적해 샅샅이 공개한다. 전국적으로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여자가 줄었다는 뉴스가 뒤따른다. 그 가운데 싸이코패스 테스트가 유행한다. 주요 일간지를 비롯해 인터넷 매체까지 싸이코패스 진단법이라는 테스트를 기사화하고 유포한다. 이수정 경기대 심리범죄학 교수에 따르면, “최근 싸이코패스 진단법이라고 알려진 대부분의 테스트는 잘못된 정보다. 게다가 싸이코패스 테스트를 비범죄자에게 적용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불특정 다수의 호기심은 일회적이다. 다만 그 호기심에 영합하는 배후는 지속적이다.
“현장의 기자들 중에서도 보도가 너무 선정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지적이 심심찮게 나온다.”어느 일선 기자의 말처럼 강호순을 둘러싼 언론의 보도방식에서 이상기류가 발견된다. 지난 2일, YTN에서 보도된 현장검증 관련뉴스는 단연 자극적이었다.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돌을 던져서 죽이고 그러는데 (강호순 역시) 그런 식으로라도 처참하게 죽여야죠.”강호순의 현장검증을 지켜보던 수원의 한 시민이 내뱉은 분노 섞인 언어가 여과 없이 방송으로 흘러나왔다. 언론의 보도가 여론의 흥분상태를 부추기고 있다고 할만한 사안이다.
원칙과 논란
흉악범 얼굴공개를 입법화하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정치권의 움직임도 나타났다. 인권실천시민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이를 반박한다. “흉악범에 대한 기준이 모호할뿐더러 법에 따른 얼굴 공개가 된 용의자가 후에 진범이 아니라고 밝혀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2차, 3차 피해자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벌써 ‘강호순의 고향 특산물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지 않나.”강호순의 얼굴공개와 함께 우리 사회의 내면에 감춰져 있던 인식이 드러났다. 죄질에 따라 인권존중이 분류돼야 한다는 주장과 범죄자라 할지라도 기본적인 인권은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이를 빌미로 사형제 폐지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곳곳에서 설전이 벌어진다. 지난 2월 5일자 법률신문에서는 헌법학자 30명과의 전화 설문조사를 공개했다. 찬성 46.7%, 반대 53.3%. 반대가 앞섰지만 팽팽한 결과다. 법적인 합의 역시 쉽지 않다는 의미다. 찬성하는 쪽이 내세우는 논리의 기반은 알 권리에 있다. 반대하는 쪽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헌법 27조 4항에 기반을 둔다.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반면 알 권리는 헌법이나 실정법으로 규정된 권리가 아니다. 법무법인 드림 정영택 변호사의 자문에 따르면 이렇다. “헌법 21조 1항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돼있다. 여기서 언론, 출판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와 연관되고 이것이 알 권리의 바탕이 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하지만 두 사안이 흉악범 얼굴공개에 대한 찬반 논리를 완벽하게 보좌할 수 있는 근거가 못 된다. 무죄추정의 원칙이나 알 권리가 얼굴공개와 직결된 지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영택 변호사는 다양한 유권해석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헌법 10조 1항에서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한 의무를 진다.’고 명시돼 있다. 또한 헌법 37조 1항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고 한다. 헌법 37조 1항을 근거로 국민 개개인은 헌법에 열거되지 않은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이에 따라 헌법에 열거되지 않은 초상권 역시 개인의 보장받을 권리에 속한다. 이는 헌법 10조 1항에 따라 개인의 기본적 인권에 대한 국가적 의무와 연동된다. 강호순의 얼굴공개가 초상권의 문제로 발전될 수 있다는 의미다. 예외는 있다. 사회적인 공인에 한해서 초상권의 문제는 예외로 적용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강호순을 공인이라고 구분할 수 있는가라는 지점이다. 공인의 사전적 의미는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인물’이다. 연예인이 공인인가, 라는 논란이 발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강호순 역시 마찬가지다. 유명세를 치렀다고 해서 공인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호순이 공인이 아니라면 얼굴공개는 초상권 침해에 해당한다. ‘고의 또한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민법 750조에 따른 처벌을 요구할 수 있다. 언론의 얼굴공개 보도는 초상권의 권리를 강호순의 동의 없이 신문에 게재했기 때문에 고의적인 위법행위로 해석이 가능하다. 동시에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 받지 아니한다.’는 헌법 17조에 따라 과거 행적이 담긴 사진의 게재까지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과거 신정아의 누드 사진을 게재해 패소한 문화일보의 판례도 여기에 해당된다. 얼굴공개에 대한 다양한 유권해석이 존재함에도 언론이 보도를 선점했다는 건 원칙에 대한 고민이 가벼웠거나 이를 간과했다는 의미다.
“언론입장에서는 위법성보다도 기사로서의 의미가 관건이 될 수 있다. 불법적인 보도가 면책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법률적 판단과 무관하게 언론 입장에서 기사적 가치를 판단하고 보도를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MBC 김성환 수도권 팀장의 말은 인권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의 말과 연동된다. “언론의 보도는 자유다. 상업적이고 부적절한 일이라 해도 거기에 대해 간섭할 필요는 없다. 그 후 그만큼의 책임을 지면 된다.”언론은 뉴스로서의 가치를 먼저 선택한다. MBC가 PD수첩을 통해 광우병 관련 보도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표현의 자유에 따라 뉴스 선별과 보도 결정은 언론의 권리다. 문제는 세세한 원칙의 틈새를 파고 든 관행이 거대한 원칙들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사나워진 여론 위로 강호순의 얼굴을 내던져 대중에게 물어뜯게 한들 사건의 근본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기존에 고수하고 확립되던 원칙이 흔들린다. 언론을 통해 흉악범의 얼굴이 공개되고, 이를 통해 경찰은 피의자의 마스크를 벗겼다. 공익을 위한 것이라 했지만 실상 논란만 가중되고 있다. 사회적 합의가 어려운 소모전이 계속된다. 상처의 치료를 위한 고심보단 당장의 고통을 잊을만한 마약을 처방한 셈이다.
“언론은 사회의 표정 중 하나다. 국민들이 강호순을 얼굴을 보고자 하는 건 국민의 분노가 반영된 것이다. 그 안엔 강호순의 얼굴 자체가 보고 싶다는 순수한 호기심이 있을 수도 있는 반면 집단적인 광기도 분명 존재한다.”김성환 팀장의 말처럼 언론의 얼굴공개는 사회적 요구의 부응이다. 다만 그 사회적 요구가 현명했는지 확신할 수 없다. MBC가 타방송사에 비해 하루 늦게 얼굴공개를 결정한 건 이런 고민이 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MBC마저 확신할 수 없는 사회적 요구에 짓눌린 셈이다. 여론을 악용했다는 비난에도 자유롭지 못하다. “공분하는 대중을 이성적 판단으로 이끌어야 하는 언론이 오히려 대중적 공분을 흡수해 여론을 선동하고 있다.”김기선 기자의 말에 무게가 실린다.
지난 2일 MBC 뉴스데스크의 클로징 멘트는 그 일부 언론을 향한 것이었다. “몇 년 전 경찰이 마스크를 씌우면서 내규로 슬그머니 시작했듯이, 이번에 일부 언론이 이를 벗기면서 어물쩍 결정했습니다.” KBS의 정은천 팀장은 이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 클로징 멘트가 KBS를 겨냥한 방아쇠란 판단 때문이었다. 그리고 MBC의 선정성을 지적했다. “우리는 MBC와 달리 강호순의 단독사진만 사용했다. 피의자 가족이 함께 찍힌 사진을 입수했지만 무관한 제3자의 피해를 고려했기 때문이다.”그러나 MBC의 클로징 멘트는 비단 KBS를 향한 것만은 아닐 수 있다. 어쩌면 MBC 스스로를 향한 손가락이 될 수도 있다. 뒤늦은 합류라 해도 MBC가 그 대열에 들어선 건 마찬가지다. “절차의 실종의 생각의 실종이 될 수 있어서 더 우려스럽습니다.”클로징 멘트의 마무리는 이렇다. 언론의 강호순 얼굴공개 과정이야말로 절차의 실종이자 생각의 실종이었다.
절망과 희망
“어차피 이건 길게 갈 사안이 아니다. 알지 않나.”모 일간지의 팀장급 인사의 말처럼 강호순의 얼굴도 어느 다른 이들처럼 곧 잊혀질 것이다. 문제는 강호순의 얼굴을 다시 볼 것인가의 문제다. 강호순을 통해 유영철과 지존파를 다시 보게 된 것처럼 언젠가 우리는 새로운 흉악범을 통해 강호순의 얼굴을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른다. 살인의 추억은 되풀이된다. 강호순의 얼굴공개를 범죄예방효과로 연결하는 논리는 미약하기 짝이 없다. 단지 강호순을 힐난하고 때려죽인다고 해서 범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흉악범만큼이나 끔찍한 증오만 양산될 뿐이다. 징벌이 아니라 예방이 필요하다. 강호순의 얼굴이 아니라 우리의 얼굴을 봐야 한다. 강호순의 얼굴은 우리 사회에 잠재된 악의 뿌리가 어디까지 내려앉아있는가의 지표다.
개개인의 절망이 모여 사회적 공분을 이룬다. 추악한 사회적 기저에 맞닥뜨린 당혹감이 거대한 분노로 몰아친다. 언론은 여론의 방파제다. 진짜 알아야 할 것과 단순히 알고 싶은 것을 구별해서 떠내려 보내거나 막아서야 하는 것을 가늠하는 것이 진정한 언론의 몫이다. 그저 살인자의 얼굴을 공개하고 여론의 돌팔매질을 부추기는 것이 언론의 역할은 아니다.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보다 전문화된 형사정책과 효과적인 교정교화가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합니다.”이수정 교수는 지난 10년간 이에 대해 주장해 왔지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강호순의 검거에서 프로파일링 수사가 큰 역할을 했다. 이수정 범죄심리학 교수는 그 프로파일링이 유영철 사건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고 말한다. 불행을 통해 절망을 얻기는 쉽다. 하지만 희망을 가늠해야 한다. 강호순은 이 사회의 직설적인 절망이자 희망의 역설이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강호순의 얼굴엔 살인마에 대한 친절한 예시 따윈 없었다. 소박하고 온화한 미소에 가증스러움이 더해질 따름이다. 그 끝에 무력한 분노만 잔뜩 걸려들었다. 살인자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에 동의합니까, 라는 질문에 적합한 답을 찾긴 어렵다. 하지만 살인자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살인자의 얼굴을 다시 한번 마주보지 않기 위해선 좀 더 현명해야 한다. 싸이코패스 테스트 따위를 클릭하거나 강호순을 향한 육두문자나 날리고 있을 사안이 아니다. 당신 앞에 드러난 강호순의 얼굴을 향해 물음표를 얻어야 한다. 어째서 우리는 강호순의 얼굴을 보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보고 있느냐에 대해 따져 물어야 한다. 여론을 위해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했다는 언론에 되물어야 한다. 살인마의 얼굴을 본 당신이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깨달아야 한다. 당신의 분노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구별해야 한다. 절망을 볼 것인가, 희망을 볼 것인가. 우린 지금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살인마의 얼굴이 잘 생겼다는 것 따위를 알고자 했던 게 아니라는 걸 당신은 분명 알고 있다.
흉흉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몇 주 동안 가판대에서 보이지 않고 있는 어느 주간지에 대한 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해를 넘기고 신년이 되면 출판될 거란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새해가 밝아도 그 주간지는 보이지 않았다. 주간지가 한 달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중이다. 가히 치명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8주년 기념호를 낸 직후부터였다. '필름2.0'은 그렇게 침전하고 있다. 인쇄 과정의 문제라고 둘러대던 답변도 인쇄 대금의 부족을 고백하는 실정에 이르렀다. 한 시대의 획을 그었다 할만한 영화 전문지 하나가 시장에서 점멸하듯 기울어간다. 물론 아직 스스로 선언하지 않은 끝을 논하기엔 시기상조다. 하지만 시장에서 모습을 감춘 어느 잡지의 끝을 예감하는 소문엔 범상치 않은 기시감이 덧씌워진다. 공공연하게 떠도는 소문 너머로 드리운 그림자는 꽤나 낯익은 것이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드라마 전문지를 표방한 '드라마틱'은 지난 해 2월을 끝으로 무기한 휴간을 결정했다. 산소호흡기를 떼지 않았지만 뇌사 진단이 떨어졌다. 미드와 일드의 국내 저변이 넓어지고 국산 드라마의 제작이 활기를 띠는 가운데 드라마 잡지의 가능성에 담보를 잡았다. 영화나 음악과 달리 드라마에 대한 담론이 전무하다는 점에서도 새로운 시도는 고무적이었다. 독보적인 시장 개척이 가능하다 여겨졌다. '드라마틱'은 격주간 발행으로 시작됐지만 월간 발행으로 궤도를 수정했고 끝내 운행을 멈췄다. 길은 열려있었지만 연료가 부족했다. 수익에 발목을 잡혔다. 컨텐츠에 대한 열의만으로 자본의 무심함을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작년 말, 장르문학을 표방하던 '판타스틱'이 휴간됐다. 폐간되는 것 아니냐. 소문이 분분했다. 한 달 동안 자취를 감췄던 잡지가 익월에 출간됐다. 하지만 불운한 소식이 연이어졌다. 일년 열두 달마다 발간되던 잡지의 발행일이 연중 네 번으로 줄었다. 월간지가 계간지가 됐다. 기사회생을 위한 일말의 선택이었다. 소설과 만화가 연재되는 장르잡지가 세 달마다 돌아온다는 건 가혹한 일이다. 척박한 국내장르문화의 토양 속에서 '판타스틱'은 일종의 오아시스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장르 팬들의 호응도 뜨거웠다. 비주류의 소수감성이 한데 뭉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번에도 문제는 자본이었다. 광고가 붙지 않았다. 자본은 새로운 문화적 시도에 좀처럼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인터넷 공간에서도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TV라는 매체비평을 통해 다양하고 획기적인 컨텐츠를 생산하던 '매거진T'도 새로운 움직임의 한 축이었다. 기사마다 차곡차곡 쌓이는 댓글의 양이 독자들의 애정을 확인하게 한다. 어느 포털 사이트마다 밑도 끝도 없이 악랄하게 인신 공격을 퍼붓는 악플러도 보이지 않는다. 순수하게 컨텐츠를 즐기고 의견을 교류하고 매체에 대한 애정을 남긴다. '매거진T'는 현재 버려진 땅처럼 황량해졌다. 더 이상 기사도 댓글도 업데이트되지 않는다. '매거진T'를 채우던 일원들은 새로운 스폰서를 찾았으나 갈등을 빚었고 결국 기존의 집을 버리고 새집을 장만했다. '매거진T'를 버리고 '텐 매거진'을 꾸렸다.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 사이 주인을 잃은 집은 황폐해졌다. 손님을 맞이하는 건 새로운 컨텐츠가 아니라 백신에 감지되는 트로이목마다. 버려진 집기처럼 묵어가는 컨텐츠 사이에서 바이러스가 흉측하게 자리잡고 유저를 급습한다.
'키노'의 폐간은 상징적이었다. 영화 담론의 한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했다. 그 뒤로도 몇몇 영화지가 시장을 선도하고 온라인 영화 사이트가 성장했지만 자본의 논리에 예술적 담론이 무너지는 형국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상징적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키노'의 온라인 자매지에 가까운 '엔키노' 역시 '키노'의 폐간 이후 3년이 지나서 사이트가 폐쇄됐다. CJ는 '엔키노'를 인수했지만 컨텐츠를 수급한 뒤 과감히 경영을 포기했다. 거대한 자본을 다스리는 대기업에게 있어서 '엔키노'는 수익 창출에 기여하지 못하는 작은 부서에 불과했다. 문화적인 언어의 존명은 중요치 않았다. '엔키노'의 몰락은 여타 영화 사이트의 어려움을 대변한다. 한때 군소 영화사이트들은 업계의 주목을 받으며 파이를 키웠다. 하지만 거대한 포털사이트들이 시장을 잠식하면서 영화사이트의 파이는 눈에 띄게 줄어갔다. 결국 시장 장악력이 떨어질수록 수익은 악화됐다. 컨텐츠의 질적 하락을 부추겼고 경영 악화로 이어졌다.
대중문화에 대한 담론은 점차 낡고 고루한 것이 됐다. 오프라인에서 문화적 언어가 남루해지는 사이, 온라인에선 수많은 말들이 찰나를 오간다. 블로그를 장만하며 인터넷에 입주한 개개인은 저마다의 익명을 내걸고 자신만의 사념을 축적한다. 여기저기 발길을 돌리며 부지런히 발자국을 남기기도 한다. 크건 작건 제각각 목소리를 내고 서로 뒤엉켜 굴러가다가도 무심히 지나친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고유의 아이디로 접속한 대중들은 저마다의 주파수를 개설해 자신들의 생각을 송신한다. 저마다 뒤엉킨 생각들이 어지럽게 나열되고 뒤섞인다. 서로 자신의 생각을 트랙백으로 걸고, 링크를 달며, 댓글로 남긴다. 자신의 생각을 알리는데 여념이 없다. 언어의 바다가 형성되는 것 같지만 개개인의 사유화된 생각이 첨탑처럼 솟아오른다. 거대한 논의의 장이 형성되기 보단 개개인의 각축전이 활발하다. 논의보단 주장이 첨예하다.
포털사이트의 메인화면에 종속된 언론은 언어의 가치를 급속하게 몰락시켰다. 정보의 우열보단 속도전이 중요해졌다. 포털사이트가 뉴스를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신문을 펴는 대신 모니터를 켰다. 실시간으로 세상의 소식이 빠르게 전해졌다. 정보의 질적 가치는 중요치 않다.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사람을 현혹시킬 수 있는 언어의 선택이 중요하다. 언어가 가벼워졌다. 짧고 굵은 언어들이 난무한다. 대상에 대한 표피적인 판단이 압도한다. 언론에게 뉴스 공급을 사주하던 포털사이트는 이제 을이 아니라 갑이다. 신문이 시장을 잃어가는 사이 포털사이트는 시장을 독점했다. 남의 안방을 넘보다 자신의 안방을 잃어버린 언론은 머슴살이가 한창이다. 포털사이트가 메인화면에 인심 쓰듯 기사를 올려주면 마냥 고마워해야 할 따름이다.
포털 사이트의 메인화면을 장식하는 뉴스의 팔 할이 연예인에 대한 가십으로 도배됐다. 사람들은 연예인에 대한 왈가왈부에 손가락을 쉽게 허락했다. 재미를 본 언론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값싼 컨텐츠를 쏟아냈다. 질적 우열과 무관하게 동일한 장소에 진열된 정보들의 가치는 일정하게 하향 평준화됐다. 하나같이 그저 그런 정보로 도매금처럼 취급 당했다. 언어의 가치를 스스로 몰락시킨 언론의 자충수는 신뢰의 기반을 잃었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단어들이 대세가 됐다. 비평은 말장난처럼 따분해졌다. 날카로운 분석이나 섬세한 비유는 인기스타 사진 한 장 앞에서 무색해졌다. 스크롤의 압박 속에서 텍스트에 대한 인내심은 사라졌다. 그 와중에 개개인의 주장들이 난무한다. 저마다 옳은 소리를 내며 분열해 나간다.
시청률 30%를 넘긴 드라마들은 하나같이 막장 드라마라 불린다. 대중 가요는 아이돌 그룹의 경연장이 됐다.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지만 맥을 짚어줄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전문가가 보이지 않는다. 대중문화에 대한 담론의 영토가 상실되니 언어의 주체도 함께 소멸한다. 짧고 자극적인 텍스트에 익숙해진 대중들은 긴 호흡의 언어가 지겹다. 자연히 진지한 논의가 무색해진다. 문화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어려워지는 만큼 문화적 담론을 언어로 생산하는 대중문화저널들이 궁핍해진다. 물속에 산소가 부족하면 금붕어는 뻐끔거린다. 생존을 위한 신호를 보낸다. 대중문화저널의 위기는 대중문화 위기의 신호다.
자본의 논리로 모든 것이 선택되고 수급된다. 자본의 선택에 따라 양산된 컨텐츠는 결국 과도한 팽창으로 이어지고 소멸된다. 돈 되는 댄스 가수 일색으로 무대를 채우던 대중가요가 시장을 잃은 것도 자본에 휘둘린 까닭이다. 대중가요에 대한 언어는 무력했다. 영화도 드라마도 비슷한 양상이다. 예술적 가치가 무마되고 자본의 횡포가 도외시될 때 대중문화는 급격히 퇴보한다. 대중문화에 기생한 저널들이 여기저기서 난립한다. 연예인의 사생활을 보도하고 소문을 퍼뜨리는데 여념이 없다.
창작자가 생산한 컨텐츠에 대한 언어도 일종의 예술이다. 작품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견지되고 새로운 시선을 부여할 때 넓고 깊은 유희가 발생한다. 대중문화저널은 단순히 대중문화를 팔아먹는 장사꾼이 아니다. 대중문화의 발전을 도모하는 동반자로서 공존할 때 명분이 선다. 오늘날 대중문화저널의 위기는 언어의 가치가 상실되는 가운데 대중문화저널의 존재가치를 망각하는 데서 온다. 대중문화를 씹어 뱉기보다 되새김질하고 곱씹을 때 대중문화저널에 힘이 실린다. 점점 힘이 부친다. 대중문화를 팔아먹는 언어가 진지한 담론을 벼랑으로 밀어내고 있다. 정작 그것이 자신들의 시장을 몰락시키는 하나의 형태가 될 것임을 그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