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세상이 텅비었다. 인적이 없는 거리에는 죽은 듯이 고요한 열기만 가득하다. 해가 저문 뒤, 도시의 밤은 분주해진다. 세상이 어두워진 뒤에서야 사람들은 거리를 활보한다. 하지만 그 거리를 채운 사람들은 우리가 아는 그 사람들이 아니다. 2019년, 뱀파이어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류 대부분은 어둠 아래 사는데 익숙해진지 오래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인간들은 그들의 피를 원하는 뱀파이어들에게 사냥당한 뒤, 혈액은행에서 사육당하는 운명에 놓이거나 이를 피해 달아나야 한다.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뱀파이어들은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영원의 삶을 누린다. 완벽할 것 같은 그들의 현실을 위협하는 건 먹고 사는 문제다. 수적인 우위로 세상을 장악한 뱀파이어들은 피를 공급할 인간이 필요하지만 세상에서 인간의 수는 점차 줄어가고 있다. 인간이 멸종할 때, 뱀파이어들의 멸종도 찾아온다. 대체 혈액 개발이 실패를 거듭하는 사이 혈액공급에는 차질이 생기고 점차 피를 얻지 못한 뱀파이어들이 늘어간다. 그리고 오랫동안 혈액을 공급받지 못한 뱀파이어들은 ‘서브사이더’라는 돌연변이가 되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다.
<데이브레이커스>가 묘사하는 세계관은 뱀파이어라는 소재 안에서 참신하지만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뱀파이어로 변한 인간들이 수적우위로서 기존의 인간사회를 장악해버린다는 설정은 기존의 좀비물에서 얻은 모티브를 변주한 결과처럼 보인다. 예를 들자면 <나는 전설이다>처럼, 인류의 다수가 좀비가 되어버린 세계와 유사한 것이다. 다만 <데이브레이커스>는 다수가 된 변종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의 사투를 벌이는 소수 인류의 입장보다도 그 다수가 돼버린 변종이 지배하는 사회를 보다 면밀히 다룬다는 점에서 특이점이 발견된다.
뱀파이어라는 매끈한 이미지는 퇴화적인 뉘앙스를 발생시키는 좀비들과 달리 보다 진화적 변이를 이룬 인류의 다른 개체처럼 인식된다. 좀비물이 육식동물의 사회에 갇힌 초식동물의 공포를 드러낸다면 <데이브레이커스>는 변화한 우성 개체가 답보적인 열성 개체를 지배하게 된, 자연스러운 진화론적 세계관에 가깝다. 지능적인 뱀파이어들은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의 이기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수적인 우위로 세상을 잠식해버린다. 마치 기계에 사육당하는 <매트릭스>의 디스토피아처럼, 뱀파이어들의 에너지 원천이 되어 집단으로 사육당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데이브레이커스> 역시 디스토피아에 가까운 영화다.
하지만 <데이브레이커스>는 살아남은 인간들의 생존보다도 주류가 된 뱀파이어들의 생존에 보다 많은 눈길을 준다. 그 시선의 방향은 참신한 변주를 보다 참신한 태도로 인식시킨다. 그 착상만으로도 점수를 따고 들어가는 셈이랄까. 그 세계관의 설정만으로도 <데이브레이커스>는 흥미로운 영화다. 그 참신한 설정은 <데이브레이커스>를 보기 좋게 두르는 포장지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 매력적인 포장지에 감춰진 영화의 알맹이들은 유난히 조악하다. <데이브레이커스>가 묘사하는 세계의 풍경은 훌륭한 아이디어를 착상한 결과다. 이는 영화에 대한 흥미를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좋은 입구 역할을 한다. 하지만 <데이브레이커스>는 좋은 입구에 비해 출구를 찾기 어려운 영화다. 입구에 들어선 뒤, 매끈한 복도와 방을 설계하지 못하고, 미로를 헤매듯 서사를 다듬지 못한 채 출구를 방치해버린다.
다만 그 서사적 이음새들의 무책임함과 달리 <데이브레이커스>가 묘사하는 결말부의 살풍경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생존을 위해 서로를 물고 물던 뱀파이어들이 연쇄적으로 살육과 변종을 거듭하는 광경이란 그 잔인한 이미지와 무관하게 흥미로운 광경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데이브레이커스>는 자본주의적인 계급사회에 대한 우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피를 공급받지 못하는 뱀파이어들은 대부분 사회의 하층민들이며 그들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돌연변이가 되어 암적인 존재로 취급당한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그 사회의 붕괴를 예감하게 만드는 현상적 지표가 된다는 점에서도 의미심장하다. 본질적으로 인간의 존엄성, 더 나아가서는 어느 개체가 이룬 사회의 몰락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비범한 감상적 욕구를 부추긴다.
뱀파이어가 된 인간들의 사회는 악랄하지만 근사한 기운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그 세계의 몰락을 암시하면서 정상 인류의 생존을 대립각으로 세운 채 갈등과 긴장을 고조시킨다. 문제는 그 플롯의 인과관계다. <데이브레이커스>는 앞선 상황을 뒤틀기 위한 전환점마다 무리한 코너링을 시도한다. 애초에 그 세계가 뱀파이어 바이러스라는 밑도 끝도 없는 가상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했듯이 그 세계의 갈무리 역시 우연이 빚어낸 운명적 결과로서 봉합해도 된다고 스스로 믿는 것만 같다. 딜레마에 놓인 세계관과 운명에 대한 갈등에 빠진 인물의 모습은 지적인 기대감을 잔뜩 부풀린다. 하지만 <데이브레이커스>는 자신이 설계한 내러티브의 미로를 빠져나가는 것보단 그 미로를 스스로 폭파시키듯 망가뜨린다.
한편, <데이브레이커스>는 상당히 잔인한 B급 감성의 이미지가 동원되는 영화다. 신체가 폭발하듯 터져나가거나, 찢겨지거나, 피가 분수처럼 솟아나는, 신체훼손의 이미지가 적나라하게 전시된다. 이를 참을 수 없는 취향의 관객에게 불편한 광경이 되겠지만 견딜 수 있는 관객에게는 일정한 재미를 줄만한 수준은 된다. 다만 지나치게 날카로운 음향효과나 돌발적인 등장으로 관객을 놀래키는 영화의 연출 방식이 그리 영리하다고만 말하기란 어렵다. 이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이상의 해결책을 얻지 못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데이브레이커스>는 발상의 가능성에 비해 착상이 떨어지는 영화다. 좀 더 영민한 창작자를 만났다면 보다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란 아쉬움을 떨치기가 어렵다. 보석을 구슬처럼 굴리는 것과 같다고 할까.
<사랑해, 파리>는 파리라는 도시로부터 배어나는 낭만적 기운을 로맨틱한 에피소드와 연결한 기획적 옴니버스다. 파리를 배경으로 18편의 옴니버스를 직조한 20명의 감독들은 저마다의 상상력을 통해 파리라는 도시의 환상성을 부추긴다. 사실상 <사랑해, 파리>는 파리라는 도시의 고유적 낭만성을 증명하기 이전에 긴 세월 동안 환상성을 구축한 도시가 로맨스라는 감정을 얼마나 탁월하게 보좌할 수 있는가를 증명한 작품이나 다름없다. <사랑해, 파리>에 이어 새로운 낭만도시 프로젝트의 제작에 착수한 엠마뉘엘 벤비히가 <뉴욕, 아이러브유>로 뉴욕을 새로운 로맨틱 시티로 낙점한 것도 그 도시를 동경하는 이들의 환상을 등에 업은 것이나 다름없다.
18편의 에피소드마다 명확한 구획을 나눈 <사랑해, 파리>와 달리 <뉴욕, 아이러브유>는 각 단편의 시작과 끝을 이어 붙이며 마침표의 영역을 지워버렸다. 주가 되는 단편 사이마다 다리 역할을 하는 짧은 전환점(transition)을 삽입하고 이를 통해 사연을 쉼 없이 이어나간다. 그만큼 매 순간의 감정을 음미할 여유가 줄어든 반면, 다음 작품에 몰입할 대비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산만한 인상을 줄 확률도 적지 않다. 매 단편마다 적확한 마침표를 찍어내듯 경계를 둔 <사랑해, 파리>보단 보다 불친절한 형태로 완성된 <뉴욕, 아이러브유>는 뉴욕이라는 도시의 번잡함을 영화적 구성 그 자체로 승화해버린 것마냥 번잡한 영화인 셈이다.
그럼에도 <뉴욕, 아이러브유>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부르는 동경심의 너비만큼이나 풍요로운 로맨스의 만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각적인 영상미를 자랑하는 이와이 슌지를 필두로 11명의 감독이 만들어낸 로맨틱한 상상을, 그것도 다채로운 배우들의 얼굴을 빌려 뉴욕의 사랑담을 그려내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일면 의미 있는 일이다. 작품마다의 편차를 떠나 뉴욕이라는 도시를 모티브로 삼은 러브스토리의 향연을 지켜본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감흥이 배어난다. 특히 감각적인 영상미와 함께 황홀한 충격을 선사하는 세자르 카푸르와 고전적 무게감 속에서도 섬세한 감정적 울림을 전달하는 이와이 슌지의 단편은 <뉴욕, 아이러브유>안에서 단연 빼어난 감상을 부여한다. 그 밖에도 장난끼 넘치는 반전을 품은 브렛 라트너와 이반 아탈의 작품, 그리고 수다스럽지만 귀여운 노부부의 애틋한 감정을 깊게 전달하는 조슈아 마스턴의 영화 또한 꽤나 인상적이다. 감독으로 데뷔한 나탈리 포트만의 깔끔한 연출력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좋은 관심사가 될만한 지점이다.
번잡한 뉴욕의 교차로를 건너듯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단편적 상상력을 따라잡는 건 그만큼의 집중력을 요하기에 피곤한 감상을 부여할지 모른다. 동시에 옴니버스의 특성상 작품마다의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도 일종의 맹점이 될만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뉴욕, 아이러브유>는 그 다채로운 감각과 다양한 상상력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먹음직스러운 만찬이라 해도 좋을 작품이다. 어느 도시에서나 만남과 이별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사랑해, 파리>와 <뉴욕, 아이러브유>는 특별한 도시의 로맨스라기 보단 어느 도시를 배경으로 둔 특별한 로맨스적 일화의 총망라에 가깝다. 떨리는 찰나의 이끌림도, 담담한 영원의 엇갈림도, 낮과 밤을 아우르며 도시를 떠돌다 그 거리에 낭만을 켜켜이 채워나간다. 낭만을 먹고 자란 도시는 전인류적 동경을 끌어안고 그 환상을 품에 안은 채 또 다른 낭만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뉴욕, 아이러브유>는 도시를 위한 낭만의 헌사라기 보단 유려한 도시를 풍경으로 낭만을 증명하는 작업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새로운 낭만은 또 다른 도시로 전파된다. 아마도 인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사랑을 꿈꾸는 도시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밀착한 남녀의 육체가 전후로 흔들릴 때마다 남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희열이 새어 나온다. 막 섹스를 마친 남녀의 표정만으로도 절정의 환희가 느껴진다. 하지만 육체적 쾌락이 끝난 직후, 현실적 고민이 그들의 침대를 덮친다. 현실적 물욕 앞에서 육체적 쾌락의 잔상이 손쉽게 걷힌다. 그리고 30분 후,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남자가 마련했던 어떤 비책은 무참히 실패하고 만다. 되레 끔찍한 상황이 발생하고 비극이 예감된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이하, <악마가>)라는 중후한 제목을 지닌 이 영화는 일그러진 욕망에 사로잡힌 형제의 공모로부터 시작되는 가족의 파멸을 응시하는 작품이다.
비극의 방아쇠는 물질적 욕망이다. 이혼한 전처와 딸로부터 무시당하는 행크(에단 호크)는 자신의 무능력을 극복할 단서를 찾지 못하고 겉도는 신세다. 그런 그에게 형 앤디(필립 세이모어 호프만)가 접근해 솔깃한 제안을 던진다. 동생과 달리 반듯한 직장의 중역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앤디 역시 당장 거액의 돈을 마련해야 할 형편에 놓여있다. 형제는 새로운 출발을 꿈꾼다. 하지만 새로운 출발을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결국 형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로 결심한다. 그저 생각대로 하면 된다. 잠깐의 긴장감을 견디면 인생역전이 가능하다. 그 누구도 다치지 않고 큰 행운을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은 그들의 편이 아니다. 자신들을 구원해줄 꿈이 박살나고 결코 맞이해선 안될 최악의 상황이 눈앞에 드러난다. 형제의 공모가 비밀로 움트는 사이, 가족에게 찾아온 비극이 뿌리를 내려가며 파멸을 향해 무럭무럭 자라난다.
<악마가>는 플래쉬백을 적극 활용하며 지속적으로 서사를 재구성한다. 서사의 변화와 함께 서사를 지배하는 시점이 이동한다. 30분 후로 점프컷하는 초반의 단 한번을 제외하면 영화는 전진하는 서사의 중심에 놓인 인물을 갈아입으며 5번에 걸쳐 플래쉬백된다. 전진하다 뒷걸음질치는 서사는 사건의 전모를 천천히 드러내며 사건에 연루된 인물 제각각의 사연을 수집해나가고 이를 통해 <악마가>는 영화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구축한다. 인물 개개인의 심리를 하나의 면처럼 이어 만든 입체도형의 형태로서 영화를 완성해나간다. 행크와 앤디의 시점이 교차되던 영화가 그들의 아버지인 찰리(알버트 피니)의 시점으로 옮겨 마침표를 찍기까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서사는 원인에 대한 의문을 결과까지 이어나가며 시작부터 끝까지 스토리텔링의 에너지를 보존한다.
<뜨거운 오후 Dog day afternoon>(1975)와 <네트워크>(1976)와 같이 사회를 관통하는 인상적인 작품을 통해 과거의 영예를 누렸으나 현대에선 점차 잊혀지던 시드니 루멧은 2007년에 발표한 <악마가>를 통해서 영광의 시계를 현재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악마가>는 팔순을 넘긴 노장 감독의 영화라는 점이 무색할 정도로 신선한 스타일을 유지하고 기품 있는 연륜이 깊게 배어든 중후한 시선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실로 대단한 작품이다. 시종일관 중후한 극적 무게를 보존하는 동시에 고조된 인물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한다. 특히 심장박동기의 신호음을 이용해 긴박하면서도 정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결말부는 <악마가>의 클라이맥스로써 손색이 없다. 어떤 부족함이나 지나침이 발견되지 않는 배우들의 연기력 또한 백미다. 특히 온화한 미소 너머로 점차 불안의 기색을 방출해내면서도 대범하게 움직이는 앤디를 연기하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표정은 <악마가>의 심리적 깊이를 대변하는 바다와 같다. 반대로 초조하게 흔들리는 에단 호크의 표정은 영화의 불안한 심리를 출렁이게 만들고, 알버트 피니는 단호한 중압감을 더하며 마리사 토메이는 관능과 허무를 동시에 이끈다.
<악마가>는 흉악하고 퇴폐적인 사회를 고발하고 있지만 근엄한 기운을 잃지 않는 중후한 영화다. ‘하나씩 더해도 완벽해지지 않는 삶’을 떠도는 도시의 양자들은 결국 끝없이 더해지는 욕망에 이끌려 천천히 파멸로 한걸음씩 다가간다. 앤디의 제안을 받은 행크의 불안을 잠재우는 건 다름 아닌 지폐이며 행크의 제안을 받은 바비(브라이언 F. 오바이런)의 불안을 잠재우는 것 또한 지폐다. 양심과 공포를 잠재우는 건 물질적 욕망이다. <악마가>는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혀 인간 본연의 존재적 가치를 망각한 이들의 삶이 향한 본질적 비극을 향해 전진하는 가족드라마다. 지독하게 흉악하고 끔찍한 스토리는 현실의 치부를 드러내는 동시에 폐부를 정확히 찌른다.
개인의 몰락이 도미노처럼 이어지며 결국 가족은 붕괴된다. 이는 결국 극악하게 타락한 세태를 대변한다. <악마가>는 결국 중후하고 세련된 영화적 양식을 통해 충격적인 현실의 세태를 놀라운 방식으로 고발하는 영화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천국으로 가 있기를(May you be in heaven a half hour before the devil knows you’re dead).’ 근사하면서도 엄숙한 제목을 포함한 이 문구는 마치 악마의 유혹처럼 흉악한 물질적 욕망에 시달리는 현대인을 위한 비통한 기도와 같다. 그리고 <악마가>는 그 끔찍한 현실을 생생하게 포착하는 뜨거운 시선이자 깊이 전해 들어야 할 비장한 묵시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