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르윈>은 음악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당신을 울리지 않을 거다. 그것이 이 영화를 잊지 못하게 만든다.
<인사이드 르윈 Inside Llewyn Davis>은 제목 그대로 르윈 데이비스라는 인물을 들여다보는 영화입니다. 여기서 르윈 데이비스(오스카 아이작)는 밥 딜런이 스스로 자신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고백하며 헌사를 바쳤던 전설적인 포크 뮤지션 데이브 반 롱크를 모티프로 기획된 허구의 인물이죠. 영화 역시 전기적 실화와 무관한 허구의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두고 있습니다. 한 분야에서 나름의 족적을 남긴 인물을 모티프로 기획된 영화라니, 무언가 대단한 의미나 성찰을 기대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주인공인 르윈 데이비스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나 성찰을 남길만한 영화나 인물이 아닙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런 기대감의 기준에서 보자면 <인사이드 르윈>은 공갈빵 같은 영화란 말이죠.
모든 이의 삶이 그리 대단한 무언가 일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평범한 사람이고요. 그렇다고 하여 어떤 의미가 없는 삶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영화적인 관점에서 큰 울림을 준다거나 대단한 여운을 남길 만한 삶을 살아왔다고 할만한 인생은 몇이나 될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그런 관점에서 영화가 될만한 삶은 드물 겁니다. 놀랍게도 <인사이드 르윈>은 특별한 의미나 성찰을 동원하지 않고도 이러한 삶을 스크린에 흥미롭게 풀어냅니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건 삶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특별한 의미나 성찰로 가닿지 못하는 누군가의 삶을 그저 관찰하는 것 자체도 하나의 영화적인 감상이 될 수 있음을 설득합니다.
물론 그렇다 하여 그 삶을 위로하는 것도 아닙니다. 객석에 앉은 어느 관객 또한 그런 의무감을 느끼지 못할 겁니다. 영화 속의 르윈 데이비스에게선 어떤 낭만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는 음악이 전부인 남자입니다. 살기 위한 수단으로서도 인생의 의미로서도 말이죠. 하지만 그는 음악에 자신의 모든 것을 투신할 만큼 음악 그 자체를 사랑해마지 않는 인물처럼 보이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업적으로 쉽게 타협하는 인물도 아니죠. 때론 음악에 속박된 인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음악은 운명이라기 보단 지금 당장 그가 해낼 수 있는 무언가일뿐입니다. 단지 그것이 그에게 대단한 성공을 안겨주지 못하고, 그 스스로도 그것을 이용할 만큼의 절실함을 갖고 있지 안다는 것이죠. 게다가 내면적으로 성숙한 인물도 아닙니다. 최소한의 책임감은 있지만 필요 이상의 의무감을 껴안으려 하지도 않아요. 고로 관객은 그 인물에 대한 흥미를 느낄 수 있을지언정 대단한 애정을 갖진 못할 겁니다. 덕분에 스크린과 객석은 물리적인 거리만큼이나 감정적으로도 철저하게 분리돼있습니다. 영화적 세계를 향한 ‘관찰자’라는 거리감 안에 머무르도록 만든다는 말이죠. 아이러니하지만 이것이 이 영화를 대단히 흥미롭게 만듭니다. 그 삶에 어떤 애정이나 연민을 품을 필요도 없다는 말이죠. 이러한 감상의 방식이란 대단히 놀라운 것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삶을 윈도 너머로 바라보듯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니까요. 감상이 텅 비어있는 것 같지만 허무하지도 않습니다.
코엔 형제의 첫 번째 음악영화입니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코엔 형제의 영화를 보면서 단 한번도 실망해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평범했다고 말하는 몇몇 코미디물도 말 그대로 ‘그들의 필모그래피 안’이기 때문에 평범하게 느껴지는 것이었죠. <인사이드 르윈>은 대단한 이야기꾼이기에 가능한 음악영화라는 생각도 듭니다. 큰 울림을 남기기 용이한 음악영화에서 이토록 그저 인물의 주변부에서 벌어지는 사연의 굴레를 관찰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은 한편으론 대단한 자신감의 발로가 아닐까 싶을 정도니까요. 대구의 형식으로 구성된 이야기부터 전체적인 내러티브의 진행 자체 면에서도 느슨해지는 면이 없습니다. 자극적인 진폭을 만들어내지 않으면서도 보는 내내 얕은 흥미를 놓치지 않습니다. 삶의 리듬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인물의 예측불가능한 일상을 파편적으로 나열하는 듯한 이야기 속에서 흥미로운 캐릭터들이 치고 빠지듯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사라집니다. 이를 관찰하고 경험하는 재미가 생각보다 쏠쏠하며 기대 밖의 위트를 곳곳에서 건질 수도 있죠. 특히 수다스러운 존 굿맨과 지극히 말이 없는 가렛 헤드룬드가 등장하는 중반부의 드라이빙신은 이 영화에서 액자 구조라고 여겨도 될 정도로 흥미로운 여정 그 자체입니다.
무엇보다도 음악영화로서의 가치가 대단한 작품입니다. 대단히 훌륭한 넘버가 삽입된 동시에 그 훌륭한 넘버들을 적재적소에 절묘하게 삽입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모든 넘버는 실제로 촬영 현장에서 녹음된 라이브 버전이라고 합니다. 영화적인 현장감을 실제적인 체험으로서 감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실제로 이 영화에선 ‘좋은 노래’ 그 자체를 전달하고자 하는 야심보다도 노래하는 인물의 표정이나 감정을 표현하는데 보다 집중하는 인상입니다. 기타를 치며 ‘Hang me, oh hang me’를 부르는 르윈 데이비스를 근접 촬영하는 도입부부터 노래하는 표정과 연주하는 풍경을 묘사하는데 공을 들이기도 하고요. 실제로 오스카 아이삭이 연기한 르윈 데이비스를 비롯한 배우를 섭외할 때 연주와 노래가 뛰어난 배우를 염두에 두고 캐스팅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두말할 필요 없는 저스틴 팀버레이크와 <언애듀케이션>, <셰임> 등의 작품에서 감미로운 보컬 실력을 뽐낸바 있는 캐리 멀리건이 함께 한 넘버 ‘500 miles’ 또한 이 영화로부터 건질 수 있는 백미 같은 화음입니다. 두 배우 역시 음악영화로서의 완성도에 기여하고 있고요.
한편으론 애묘가들을 위한 영화라는 생각도 듭니다. 고양이를 정말 자연스럽고도 사랑스럽게 포착했더군요. 촬영 감독의 애정이 깃들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죠. 게다가 가장 극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매개 역할을 하기도 하고요. 저로서는 이것만으로도 결코 싫어할 수 없는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글도 평소보다 너무 길어져 버린 것 같군요.
홀로 방 안에 앉아 있는 소녀에게는 그득한 불길함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 불길함은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현실로 박차고 나온다. 아내의 유산이 두 딸에게 고스란히 넘어간다는 것에 대한 의붓아버지의 분노는 학대적인 행위로 번진다. 그리고 폭력적인 그를 피하려던 소녀는 위기에 놓인 여동생을 보호하고자 총을 든다. 손가락 끝에 걸린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총구로 총알이 튕겨져 나온다. 하지만 의붓아버지를 스치고 지나간 총알은 여동생을 관통한다. 여동생의 죽음과 함께 경찰에게 연행된 소녀는 의붓아버지의 동의 하에 정신병원에 인도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베이비돌(에밀리 브라우닝)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처참한 일상에 직면한다.
일단 앞서 설명한 서사의 줄기를 읽은 당신이라면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예고편에서 줄기차게 등장하는) 거듭되는 액션 시퀀스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울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써커 펀치>에서 등장하는 액션 시퀀스는 소녀 베이비돌의 상상 속에서 구현되는 판타지 혹은 망상이다. 소녀가 정신병원에 수감되기까지의 과정을 별다른 대사 없이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션으로 중계하던 영화는 어떠한 예고나 조짐도 없이, 어느 한 찰나에 급작스러운 시공간의 점프컷을 이행한다.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소녀는 퇴폐적인 물랑루즈의 쇼걸로 전락한다. 공간에 대한 정보가 모호한 이 영화는 캐릭터들의 행동과 심리를 액션 시퀀스로 연동시키는데 주력하는 반면, 그 캐릭터들이 속한 체제의 현실감을 완전히 무력화시킨다.
사실 이는 연출자 개인의 야심이 강력하게 피력된 일종의 수단에 가깝다. 잭 스나이더는 <써커 펀치>를 완전한 자기 취향의 전시적 행위 혹은 전리품으로 인식한 것처럼 보인다. 장단은 그 지점에서 등장한다. 스팀펑크적 모티프를 배경으로 한 아날로그적인 전투 시퀀스, 거대한 사무라이 로봇이 등장하는 일본식 무협, 미래적인 테크놀로지의 이미지가 눈에 띄는 SF액션, 거대한 드래곤이 등장하는 판타지까지, <써커 펀치>는 재패니메이션을 비롯해서 망라한 만화적 취향이 총동원된 액션물이다. 또한 바디수트와 가터벨트, 망사팬츠, 세일러복까지, 일본 망가의 미소녀 캐릭터가 연상되는 여전사 이미지는 스테이지 형식으로 진전되는 단계적인 액션 시퀀스와 함께 완전한 버추얼 게임의 속성을 띠기 시작한다.
단계적인 게임 스테이지의 속성을 띤 <써커 펀치>는 <인셉션>과의 구조적 비교가 가능하며 야심 또한 유사한 영화다. 꿈과 현실이라는 단면을 재료로 다양한 액션 시퀀스 연출이 가능한 신을 마련하기 위해 구조적인 합의를 구축해나간 <인셉션>과 마찬가지로 <써커 펀치>는 현실과 무의식 속의 상상을 구체적인 이미지의 시퀀스로 세워나간다. 하지만 <써커 펀치>는 <인셉션>에 비해 이성적인 구조로 설정의 무리수를 설득해내는 영화가 아니다. <써커 펀치>는 무의식 속에서 스펙터클하게 확장되는 파편적인 액션 시퀀스들을 전시하고 수집하는, 무리수를 스스로 감당해낼 수 있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영화다. 이는 대단한 야심이기에 그만큼 위험한 방식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이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동시에 강력하게 밀어붙이는데 여념이 없다. 그렇기에 이런 연출 방식은 의도 자체로서 성공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만 그런 의도가 완벽한 설득을 이루고 있는가라는 지점에서 또 한번의 문제가 발생한다.
<써커 펀치>는 잭 스나이더라는 어느 개인의 취향이 총아를 이루는, 지극히 개인적인 작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취향이, 오락적인 자극의 역치를 이루는 액션 시퀀스들이 즐비한 이 영화를 고립시킨다. CG로 범벅이 된 이 영화의 액션 시퀀스는 여러 모로 눈여겨볼만한 완성도를 자랑하며 그 가짓수만큼이나 흥미도 확대될만하다. 하지만 거듭되는 버추얼 액션 시퀀스가 자극의 역치를 높이는 반면 상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현실은 급속도로 흥미를 반감시키고, 동시에 반복되는 액션 시퀀스의 자극의 역치 또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버리는 측면이 있음을 간과하기 어렵다. 이 영화가 품은 의도나 태도에 대한 이해 여부에 따라 작품 자체가 존중 받을 길은 있으나 결과적으로 이런 연출적 형태로 완성된 영화가 완벽한 자신만의 이상향에 다다랐다고 말하기에도 석연찮은 덕분이다.
비주얼리스트로서 할리우드에 자신의 입지를 구축한 잭 스나이더에게 <써커 펀치>는 그의 세계관을 대변하는 소품에 가깝다. 디스토피아적인 정서와 여전사의 면모를 지닌 걸캐릭터들, 그리고 화려한 액션 시퀀스의 화력과 톤다운된 화면의 질감, 비트가 강한 일렉트로니카와 락넘버들, 이 자극적인 요소들로 점철된 <써커 펀치>는 그 대단한 화력을 무기로 삼아 감상을 초토화시킨다. 여기서 감상의 초토화란 영화에 장악 당한다는 의미일수도 있고, 반대로 지나친 자극이 영화적 몰입의 장애물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전자보다는 후자로서의 가능성이 더욱 커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개인적인 야심과 취향이 매력적인 유혹을 일으키지만, 오르가슴을 공유하지 못하고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한 섹스뿐인 상대와의 관계는 불화로 나아갈 가능성이 농후한, 치명적인 약점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