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스라치게 놀라듯 깨어난 남자는 자신이 사막 어딘가에 있음을 알게 된다. 곧 고통을 느낀 그는 복부의 깊은 상처를 발견했다. 그리고 왼손 팔목에 정체 모를 금속 팔찌가 채워져 있다는 것도 알았다. 벗겨내려 해도 소용이 없다. 깡그리 지워진 것처럼,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 와중에 말을 탄 세 남자가 그에게 접근해온다. 수작을 거는 꼴이나 행색을 보아하니 예감이 좋진 않다. 그 중 하나가 남자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다가온다. 하지만 그 세 사람을 차례로 쓰러뜨린 남자는 옷과 신발을 챙겨 입고 길을 떠난다. 그리고 곧 한 마을에 당도하게 된다.
웨스턴과 SF의 이종교배, <카우보이 & 에이리언>은 그 제목만으로도 흥미롭다. 웨스턴이 과거형의 장르라면 SF는 미래형의 장르다. 일단 이 영화는 말 달리는 카우보이들이 즐비한 웨스턴의 풍경 안에 그들을 사냥하는 외계인들을 삽입해 넣으며 두 장르의 이종교배를 성사시킨다. 일단 그 괴상한 풍경의 목격만으로도 흥미가 배가된다. 동시에 기억을 잃은 채 반시대적인 파괴력을 지닌 무기를 장착한 제이크(다니엘 크레이그)의 정체에 관한 호기심과 그 주변을 둘러싼 인물들이 이루는 관계의 양상도 흥미를 자극한다.
사실 <카우보이 & 에이리언>은 웨스턴 세계에 침입한 외계인들을 몰아내는 카우보이들의 활극에 가깝다. SF는 얹혀졌을 뿐, 기본 바탕을 이루는 건 웨스턴의 세계관이다. 황야를 전전하며 외계인을 추적해 나가는 인물들의 여정 속의 황량한 풍경에는 웨스턴의 풍미가 서려있다. 특히 외계인과의 대결을 그리는 대단원은 일종의 웨스턴식 난장에 가깝다. 외계인에게 맞서는 카우보이들의 무리에 인디언들까지 합세해서 벌이는 마지막 전투 신은 SF적인 요소를 빌린 웨스턴 스타일의 패러디적인 재현처럼 보이기도 한다. 선악의 구분이 불분명한 수정주의 웨스턴 양식의 캐릭터들이 이루는 갈등과 화합의 여정은 의외의 경로로 이탈하기도 하지만 감정적으로 큰 무리수 없이 자신의 종착역을 향해 나아간다. 다만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의 설계 안에서 안이하다 싶은 측면이 발견된다.
영화는 관객과 대국을 벌여나가듯 진전된다. 몇 가지 의문을 포석으로 배치하고 그에 관한 흥미를 집처럼 지어나가며 감상을 붙잡아두는 것. 이와 같은 대국의 형세에서 중요한 건 결국 자신이 깔아둔 포석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해내느냐의 문제다. 스스로도 자신의 정체를 잊어버린 사내와 인간을 습격하고 납치해가는 외계인들의 의도, 그리고 그들을 찾아 떠나가는 이들의 여정까지, <카우보이 & 에이리언>에는 그 끝을 목격하고 싶게 만드는 떡밥들의 가능성과 이를 부추기는 요소들이 마련돼 있다. 하지만 종종 그 의문의 해소를 위한 결정적인 순간들, 즉 스토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만한 결정적 단서들이 무성의하다는 인상을 부여한다. 가장 명확해져야 할 순간에 되레 불명확해진다. 다리를 이루려는 이야기의 이음새들이 헐거워서 끝내 덜컹거린다.
카우보이들과 외계인들의 비행선이, 그리고 외계인들이 맞서는 대결 장면들은 그 자체로 이례적인 볼거리다. 버디 무비를 연상시키는 다니엘 크레이그와 해리슨 포드의 캐릭터 조합도 근사하다. 다만 자신이 마련한 의문의 포석들을, 이를 테면 초현실적인 근거에 기대어 모든 상황을 설명해버리는 이야기 방식은 이 영화가 품은 가능성의 일부를 해제시켜 버린다. 그럼에도 낭만을 머금고 있는 결말은 고전적인 웨스턴의 향수가 깃들어있다. 기대감을 충족시키기에는 불충분한, 그럼에도 흥미로운, 이종교배 블록버스터의 성취와 한계가 느껴진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영화에서 영상기술의 발전은 장르의 개척을 가능하게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SF와 판타지 장르에서 거둔 성과들은 이런 전제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사례일 것이다. CG기술의 발전은 형이상학적인 상상력을 형이하학적인 표현력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들의 표현이 가능해짐에 따라 자연스레 장르 개척의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이 현실에서 가능해졌다. 1982년에 공개된 <트론>의 속편격인 <트론: 새로운 시작>(이하, <트론 2>) 역시 바로 이런 영상기술의 발전을 통해 얻어진 표현의 가능성에서 비롯된 기획이다.
오늘날의 기준에서는 조악한 이미지의 결과물처럼 보여지는 <트론>은 당시만 해도 혁신적인 실험작이라 평가 받는 작품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이미지화한 8비트 게임 영상 수준의 그래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상의 세계는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당대에서는 보기 드문 실험적 작품으로서 평가 받았다. 이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둔 아이디어가 표현 기술의 발전 속도를 앞서 구현된 사례로서도 유용하다. 마치 10년 전에 <아바타>가 나온 것과 비슷한 이치랄까. 이는 결과적으로 실험적인 도전으로서의 가치를 벗어나서 그 조악한 이미지가 이룬 결과적인 성과, 즉 도스 체계로 운용되는 8비트 컴퓨터의 베이직한 프로그램 원리를 비유적인 이미지로서 치환한, 가상의 평행우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컬트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그 조악한 영상이 되레 단순명확하게 컴퓨터의 프로그래밍 원리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트론>(이 제작된 시대)에 비해 진일보된 영상기술을 활용한 <트론 2>는 그런 장점을 통해 전작과 차별화된 감상의 묘미를 발생시킨다. 서사적으로 속편에 가까운 <트론 2>는 전편의 바탕을 이루던 컴퓨터 체계의 평행우주 세계관 ‘그리드’를 비롯해서 ‘광선 바이크’ 레이스나 ‘디스크 배틀’과 같은 볼거리의 이벤트를 동일하게 등장시키면서도 상대적으로 보다 화려해진 이미지의 미장을 통해 리메이크의 의미를 부여해도 상관없을 결과물을 완성했다. 어두운 무채색의 색상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조도가 높은 형광색 띠가 곳곳에 배치한 ‘그리드’의 이미지는 과장된 빛의 황홀경에 가까운 감상을 부여함으로써 가상세계에 대한 환상을 더욱 부추기며 언어 그대로 레이저쇼를 구경하는 듯한 관람의 재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트론 2>는 그 현란한 빛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심심한 영화다. 말 그대로 구경에 가까운 재미라는 건 <트론 2>의 장점이라기 보단 단점에 가깝다. <스피드 레이서>가 연출해낸 비현실적인 레이싱 경기와도 비교해봐도 좋을 <트론 2>의 광선 바이크 레이스는 바이크를 따라 흐르는 빛의 물결을 구경하게 만들면서도 레이스의 속도감이나 긴장감을 차단해버린다. 이는 곧 그 화려한 이미지의 향연이 쾌감의 속성으로 연동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는 <트론 2>를 두른 모든 이미지의 결과적 감상과 연결된다. <트론 2>는 <트론>의 시대보다도 진화된 컴퓨터 프로그래밍 체계를 포섭하며 보다 광활해진 전자신호 시스템의 세계를 보다 화려해진 영상으로 표현해낸다는 점에서 전작의 야심에서 보다 나아간 기획물이다. 보다 진일보된 영상은 이를 대변하는 핵심적인 근거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트론 2>는 조악했던 전편이 얻어낸 컬트적인 의미로부터 차단된, 발전된 이미지를 과시하는 평범한 공산품으로서 퇴보된 작품처럼 보인다. 미학적으로 흥미로운 이미지의 세계관을 설계하고 구상했으나 그 모든 이미지마저도 결국 전작이 마련한 세계관의 발전적 차용에 불과하다는 점에서도 창의적인 결과물은 아닌 셈이다. 눈부신 이미지의 향연 속에는 감흥이 결여돼 있다.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의 세계관과도 비교할 만한 기계와 인간의 대립, 혹은 정보를 독점하는 시스템 속에서 발생하는 정보적 약자들에 대한 억압과 같은 현실 체계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트론 2>는 전작과 일맥상통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하지만 딱히 탁월한 스토리텔링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하기 힘든 전작만큼이나 속편의 기승전결 역시 세심하게 세공되지 못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극적 긴장감의 결여는 전시적 용도로서의 기능성을 뛰어넘지 못하는 이미지로부터 기인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클라이맥스의 구심점을 마련하지 못한 무미건조한 이야기의 흐름이 이를 부채질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게다가 <트론>의 속편으로서 ‘트론’이라는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롤타이틀 무비가 정작 ‘트론’이라는 제목을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의아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