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에서 국민은 오랫동안 고자였다. 100여 년 전만 해도 개인의 자유란 일부 계층만 세울 수 있는 권리였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국가가 명하지 않으면 자유를 세울 생각조차 못했던, 발기부전의 시대를 살아왔다. 민주주의라는 비아그라를 찾기 전까진.
그러니까 이것도 국가다. 국가란 이렇게 좆 같을 수도 있단 말이다. 결국 국민의 권리를 세우는 문제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에게 달려있다. 저항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자유란 그저 자위다. 평생 민주주의라는 딸딸이나 치면서 억압 속에서 사는 것이다. 다시 고자가 되고 싶진 않다.
키스하면 안 된다. 허벅지를 감춰라. 언제부터인가 금지된 것들. 영화 포스터에서 불가능해진 것들. 대체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최근 국내에서 개봉된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의 포스터가 흔히 ‘영등위’라고 일컫는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주관하는 등급 분류 심의에서 반려됐다. 설마 거칠게 폭발하는 폼페이 화산의 야성미가 위험해 보여서? 그럴 리가. 위험한 건 키스였다. 키스 장면이 선정적이라는 이유였다. 변경된 포스터에선 입 대신 눈을 맞추고 있는 남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영등위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뇌를 헤집어 봐도 ‘이해’라는 단어를 발굴할 수가 없었다. 이쯤 되면 음모론을 제기해야 한다. 설마 심의에 참여한 이들이 죄다 모태 솔로인 것인가?
사실 영등위의 포스터 심의 기준에 대한 볼멘소리는 하루 이틀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최근 들어서 관계자들의 불만이 더해지는 데엔 이유가 있다. “지난 1년 사이에 지나치게 심사 기준이 엄격해진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기준을 잘 모르겠다는 거다. 지난 달까진 별 문제 없었던 기준이 불과 한 달 사이에 불가 판정을 받게 되면 좀 황당할 수밖에 없지 않나.” 한 영화 관계자의 말이다. 최근 개봉된 <아메리칸 허슬>은 두 가지 이유로 심의에서 반려됐다. 여성이 입은 드레스에서 가슴 부위 노출이 너무 심하다는 것과 ‘개수작’이란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 ‘선정적인 묘사’와 ‘비속어 등의 표현’에 대한 기준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다.
하지만 이런 판단을 무색하게 만드는 전례들이 존재한다. 상반신을 드러낸 채 양 손으로 가슴 부위를 가린 두 여성을 앞세운 <손톱>(1994)이나 전라에 가까운 여인의 상반신이 드러난 <사마리아>(2004)의 포스터는 <아메리칸 허슬>을 반려시킨 ‘선정적인 묘사’라는 기준 안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각각 ‘미친놈’과 ‘엿같은’이란 활자가 눈에 띄는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2006)과 <똥파리> 앞에서 ‘개수작’은 좀 무색한 느낌 아닌가. 최소한 일관성 있는 기준이 없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
사실 명문화된 기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공식적으로 영등위의 업무는 영화 포스터 ‘심의’가 아니라 ‘등급 분류 서비스’다. 사용 가능한 영화 포스터의 등급은 전체관람가밖에 없다. 사실상 심의인 셈이다. 물론 심의가 불필요한 건 아니다. 공공 장소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는 선전물의 유해성은 사전에 판단할 필요가 있다. 그 판단의 기준이 되는 전체관람가 기준은 영등위의 홈페이지에 명시돼 있다. 세부기준에 따르면 선정성과 폭력성, 반사회성 등이 이에 해당된다.
문제는 이 기준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느냐다. 명시된 기준에 따라 반려된 포스터 몇 가지를 해석해보자. 폭발하는 화산 앞에서의 키스하는 남녀의 모습은 ‘성행위와 관련하여 방법, 표정 등을 지나치게 묘사한 것’에 해당되는 것일까. 혹은 ‘사회통념상 허용되지 아니하는 성관계를 묘사하는 것’일까. 아니면 폭발하는 화산 앞에서의 키스가 반사회적이거나 폭력적인 것일까. 그렇다면 가슴골의 노출은 ‘가슴을 자세하게 선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해당되는 것일까. 드레스 상반신으로 선명하게 드러난 가슴골이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반려된 <베일을 쓴 소녀>의 포스터는 단순히 가슴골의 선 일부를 지우고 전체관람가를 받았다. 그렇다면 지난 해에 개봉된 <컴플라이언스>라는 영화의 포스터를 검색해보자. 노출에 대한 관계자들의 우려와 달리 전체관람가를 받는데 성공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두 포스터에서 노출된 가슴의 선정성이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
전체관람가의 큰 기준은 청소년들에게 끼치는 유해성 여부다. 성숙한 여인의 육체가 발육이 왕성한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순 있다. 하지만 그 호기심이 유해한가. 그렇다면 해수욕장에서 비키니 입은 여자들도 청소년 입장에선 죄다 선정적일 테니까 청소년들의 해수욕장 출입을 금지시키고 거대한 장벽이라도 둘러야 하는 건가. 어른들이 청소년들에게 섹스를 권장하진 않는 건 섹스가 나쁜 것이라서 아니다. 그 행위를 감당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섹스에 대한 올바른 접근을 가르치는 것 역시 어른들의 의무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것이 되레 잘못된 호기심을 부추기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결국 제도의 확립만큼이나 중요한 건 제도를 다스리는 사람들의 가치관일 것이다.
사실 유해성의 큰 기준이 되는 건 노출 수위만이 아니다. 피를 비롯해서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색을 사용하는 것 또한 철저하게 제한된다. 혹은 생채기나 흉터와 같은 신체 훼손의 흔적이 선명한 이미지도 사용이 제한된다. 흉터가 있는 여인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미스좀비>의 포스터도 흉터들을 대부분 지우고 나서야 사용이 가능해졌다. 붉은 핏빛이 선연한 <300: 제국의 부활> 역시 선혈의 흔적을 지워야 했다. 흉터와 피를 ‘폭력성’의 흔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수입된 두 영화의 포스터는 수입된 일본과 미국에서 사용하는 포스터에 활자만 한국어로 바꾼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일본과 미국에서는 이 정도의 수위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인데 두 나라의 아이들은 한국의 아이들보다 폭력적일까. 중요한 건 그 판단의 주체가 어른이란 사실이다. 사실상 믿음의 주체일지도 모른다.
전체관람가라는 기준 아래 집행되는 등급 분류는 때때로 지나치게 모호하다. 지극히 주관적이다. 현재 영화 포스터 등급 분류에 참여하는 건 공모제를 통해서 위촉된 다섯 명의 위원이다. 사실상 세밀한 가이드라인이 부재한 가운데서 전체관람가 기준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다섯 명의 위원의 결정에 따라 영화 포스터의 유해성이 판단된다. 하지만 ‘청소년에게 끼칠 유해성’이란 기준은 지나치게 모호하다. 때때로 개인적인 관점에 따라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이들은 1년 단위로 교체된다. 매년마다 새로운 관점이 적용된다. 어쩌면 다섯 명의 시각을 통해서 전국민의 관점을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다. 물론 영등위 입장에서도 고심하는 지점이 있다. “아주 세밀한 규정까지 명문화하면 진짜 규제가 될 수 있다.” 관계자의 말이다. 일리가 있다.
사실 한국은 표현에 있어서 대단히 보수적인 사회다. 전체관람가의 대상이란 대한민국 국민 모두다. 그 모두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전제란 영화 포스터에서 가능한 예술적 시도를 무시하는 결론을 도출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기준이란 말이다. 그만큼 위원회 역시 보수적인 시선을 견지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정당한 시각이 곧 모두를 만족시키는 시각일리도 없다. 영화 포스터상에서 동성애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 자체가 금기시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우린 예술성을 판단하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유해성만을 판단하는 셈이다.” 영등위 관계자의 말이다. 그렇다면 유해성에 대한 올바른 판단 기준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 영화 관계자들 역시 영화 포스터의 표현 가치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제시해야 한다. 어차피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다만 모두가 납득하도록 추구해야 할 가치관은 존재한다. 그것이 영화 포스터에서도 허락 받지 못할 이유는 없다.
외기러기 같은 영혼의 허기를 채우고자 사람들은 바삐 친구를 맺고 댓글을 단다. 하지만 필요할 땐 잠시 고독해도 좋다. 고독이야말로 당신의 외로움을 치유할 비상구다.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 고독의 사전적 정의다. 그리고 독일 출신의 신학자 폴 틸리히는 말했다. “’외로움’이란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고, ‘고독’이란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 어쩌면 고독이란 감당할 수 있는 외로움일지도 모른다. 외로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부딪힐 때 고독은 비로소 자유가 되고 유희가 된다. 완전히 혼자가 될 수 있다면 오히려 삶은 가벼워질지도 모른다.
사실 우린 너무 많은 관계에 둘러싸인 채 살아간다. <피로사회>는 성과주의에 찌든 채 극단적인 피로감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을 진단한 책이다. 독일의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한병철 교수가 집필한 이 서적은 2010년에 이미 독일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뒤, 지난해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현대인은 피로하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이뤄야 할 것이 많다. 성취를 위한 관계 맺기에도 연연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 “당신은 당신과 관계하고 있습니까?” 수많은 관계 속을 전전하는 우린 정작 나 자신과 소통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진짜 고독을 아는 사람일 게다. 고독이란 고립이나 결핍으로 정의할 수 없는, 나 자신을 위한 충만과 고뇌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OECD 국가 중 8년째 자살률 1위를 수성 중인 대한민국은 외롭고 지친 사회다. 고독이란 말이 사치처럼 들리는 건 우리가 진짜 외로운 사람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고 했다. 진단과 치유가 필요하다. 감추고 숨겨야 할 것이 아니라 드러내고 기꺼이 도움을 청해야 할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야 있다 해서 외롭지 않을 리 없다. 외로움이란 되레 군중 한가운데서 새어 나온다. 벼락처럼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물처럼 스며들어 마음을 잠식한다. 만약 그 외로움을 견딜 수 없다면 당신은 고독한 사람이라기 보단 마음의 병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다양한 네트워크 속에서 수많은 유무형의 관계를 전전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우리 자신 스스로를 보존하고 지키는 일이다. 그러니 당신은 어쩌면 진짜 고독해져도 좋다. 물론 고독해지겠다 하여 세상 사람들을 밀어내고 관계의 차단 속으로 자신을 가두라는 말이 아니다. 고독을 즐긴다는 건 홀로 남는다는 말이 아니니까. 고독이란 당신을 가두는 벽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를 지켜내는 방패다. 세상이 뭐라 해도 우린 모두 가치 있는 사람이다. 고독을 통해서 우린 진짜 스스로를 발견하고 되새기며 보존할 수 있다. 그러니 고독을 두려워하지 말라. 고독은 언제나 당신 곁에 있다. 그 고독이 당신을 지켜줄 것이다.
다채로운 재료 본연의 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전주비빔밥의 고장, 한국의 전주는 매년 4월마다 각양각색의 입맛을 지닌 시네마키드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자유, 소통, 독립’의 슬로건을 내건 전주국제영화제는 인디 필름과 디지털 시네마를 위시한 새로운 영화적 발견의 장을 전통적인 한옥의 도시 전주에 마련했다. 4월 28일부터 5월 6일까지, 12회를 맞는 이번 영화제에서도 신선한 영화의 진미를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