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이 등장하지만, 이것은 장르물이 아니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삼각관계가 등장함에도, 단순히 로맨스물이라고 주장하기도 어렵다. 10대 취향의 하이틴 무비에 가까운 것은 맞지만, 이것이 적확하게 하이틴 무비에 수용될 수 있는 것이냐면 그 역시 아니다. 물론 영화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장르적 정의가 그리도 중요한 건 아닐 테다. 할리퀸 로맨스? 물론 그쪽이 보다 유력해 보인다. 어쨌든 영화화된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거대한 팬덤을 담보로 시공된 작품이다. 그 맥락은 <해리 포터> 시리즈와 비슷하다. 궁금한 건 그 원작이 텍스트에서 이미지로 건축될 만큼 매력적인 설계도였느냐, 라는 것이다.
일단 시리즈의 결말을 쪼갠 <브레이킹 던 part1>의 내용은 이렇다. 에드워드(로버트 패틴슨)와 제이콥(테일러 로트너)과의 삼각 관계 안에서 에드워드를 선택한 벨라(크리스틴 스튜어트)는 그와 결혼한다. 그리고 임신한다. 잠깐, 뱀파이어와 인간 사이에서 임신이 가능하냐고? 그 전에 섹스는 가능한가? 그 전에 연애는 가능한가? 그 전에 뱀파이어가 사람 목을 물지 않고 버티는 게 가능한가? 이미 이 시리즈를 볼만큼 본 사람이라면 이제 와서 그런 건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 중요한 건 벨라의 상태가 위독해진다는 것. 벨라의 뱃속에 든 아이가 인간의 자식이 아닌 탓에 씹고, 먹고, 맛보고, 즐길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생을 위협할 정도로 앙상해진 벨라와 이로 인해 타들어가는 심정의 에드워드의 심정과 분노를 금치 못하는 제이콥의 삼각 관계가 다시 활성화된다. 그것이 이 작품의 요지다.
사실 지난 세 편의 작품만으로도 시리즈는 자신의 할 말을 다한 것처럼 보인다. 시리즈의 결말이라는 타이틀을 내건 <브레이킹 던>은 사실상 에필로그에 가깝다. 벨라의 결혼식은 시리즈의 부록 역할을 할만한 이벤트로서 유용해 보인다. 하지만 시리즈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결혼식 이후의 사건을 그린다. 물론 팬의 입장에서는 이 시리즈가 밀고 나가는 이야기가 어떠한가, 라는 사실보다는 이 시리즈가 그려나가는 모든 상황이 어떠한들 그저 지켜 보고픈 욕망이 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브레이킹 던>은 그런 팬덤의 심리를 담보로 증축된 사연처럼 보인다. 좋게 말하면 부록이고, 나쁘게 말하면 사족 같다.
물론 이 시리즈에서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지점도 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연애와 결혼이라는 관념에 대한 소년, 소녀들의 환상과 공포를 장르적 판타지에 이입한 체험적 오락물처럼 보인다. <브레이킹 던>은 이런 특성이 가장 구체화된 지점까지 나아간다. 특히 결혼과 섹스, 그리고 임신까지의 과정이 빠르게 진전되는 과정 속에서 벨라와 에드워드가 겪어나가는 희로애락은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통해서 우화적으로 진전된다. 하지만 이런 의미까지 읽어내기에 이 시리즈의 스토리텔링이, 캐릭터에 관한 깊이가, 지독하게 얕고 가볍다.
물론 이는 이 할리퀸 로맨스를 좋아했던 팬들과 하등의 상관이 없는 문제일 것이다. 단지 이 시리즈에 취향을 포갤 수 없는 외부인의 퉁명스런 투정에 가깝다면 모를까. 게다가 취향의 보편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하여 이 시리즈가 손가락질 받을 이유는 물론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역시 그 취향의 외벽에 놓인 이들의 호불호가 영화의 취약점을 변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 영화를 보고 원작을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발전하지 못할지라도 시리즈로 기획된 영화라면 다음 작품에 대한 호기심 정도는 안겨주는 것이 당연한 의무일 것이다. 단지 살아 움직이는 에드워드와 제이콥, 벨라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팬들의 이벤트물이 돼선 곤란하다는 것이다. 물론 제작자들은 이 영화가 팬덤의 위력을 통해서 얻은 흥행작의 지위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겠지만.
시리즈의 의미를 떠나서 <브레이킹 던 part1>은 과한 기획이다. 딱히 긴 말이 필요 없는 이야기를 늘리느라 애쓴 흔적인 역력하다. 마치 남의 결혼식에 갔다가 분만실까지 끌려들어가는 것마냥 난감하달까. 물론 이미 세 번의 예시를 통해서 학습기회를 경험한 이가 자신이 이 시리즈를 소화할 수 없는 취향임을 깨닫고도 다시 한번 이 시리즈의 관람을 선택했다면, 문제는 그 당사자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이게 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
미국의 인기 애니메이션 <아바타-아앙의 전설 Avatar: The Last Airbender>를 영화화한 <라스트 에어벤더>는 물, 불, 흙, 공기로 세상이 이뤄졌다는 플라톤의 4원소설을 기초로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동시에 <라스트 에어벤더>의 세계관은 사실 현대 문명에 대한 우화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문명의 발전과 함께 자행되는 자연의 파괴, 그리고 제국주의의 정복적인 역사관에 대한 비판에 가깝다.
물의 왕국, 불의 제국, 흙의 부족, 공기의 유목민으로 이뤄진 <라스트 에어벤더>의 세계는 제국주의적인 야심으로 가득한 불의 제국과 대항하는 타부족인들의 저항을 그리는 영화다. 균형을 이루던 4개의 세계는 100년 전, 막강한 힘을 발판으로 전쟁을 일으킨 불의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혼란을 겪게 되고 억압에 억눌린 타부족인들은 물, 불, 흙, 공기를 모두 다스릴 수 있다는 에어벤더, 즉 아바타(Avatar)의 재림을 꿈꾼다. 그리고 어느 날, 남극의 빙하에서 한 소년이 발견된다. 아앙(노아 링어)이란 이름을 지닌 이 소년은 스스로가 아바타임을 밝히고 자신을 사로잡으려는 불의 제국 왕자 주코(데브 파텔)로부터 달아나며 모든 요소를 다루기 위한 수련에 매진한다.
M. 나이트 샤말란은 일찍이 초자연적인 신비에 대한 취향을 자신의 영화적 세계관에 적극적으로 반영해 왔다. 그가 <라스트 에어벤더>에 흥미를 느낀 것도 그 취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일관적으로 미스터리 장르에 가까운 필모그래피를 축적하던 샤말란이 <라스트 에어벤더>에 흥미를 느낀 건 아무래도 장르적 도전에 의미를 두고 있다기 보단 자연적인 요소를 기초로 둔 초자연적인 판타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라스트 에어벤더>는 샤말란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이례적인 동시에 이질적인 작품으로 기억될 것임에 틀림없다.
<라스트 에어벤더>에서 두드러지는 건 단연 볼거리일 것이다. 물과 불, 흙, 공기를 이용한, 즉 ‘벤딩 액션’이라고 부르는 <라스트 에어벤더>의 액션신은 CG를 이용해서 완성한 비주얼을 통해 시각적 재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라스트 에어벤더>는 지나치게 안이한 스토리텔링을 방관하듯 만들어진 영화다. 캐릭터의 등장부터 캐릭터간의 관계를 이루는 과정이,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모든 서사가 온전히 쉽고 편하게 진전된다. 간단한 설명만으로 진전되는 모든 인과관계의 흐름에는 정서적인 동의를 얻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결여됐다. 이는 곧 감상자로 하여금 영화에 감정적으로 참여할 가능성을 모색할 수조차 없도록 완벽하게 영화로부터 괴리시켜 버리는 과오나 다름없다.
물론 국내 개봉 전에 이미 북미에서 <라스트 에어벤더>에 대한 기록적인 혹평이 쏟아진 것에 비하면 이 영화의 만듦새는 꽤나 양호한 편으로 분류할만하다. 이는 샤말란이라는 작가적 감독에 대한 비아냥으로 읽힌다. 그의 필모그래피의 흐름과 함께 하락했던 평가의 관성들이 이 영화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어 일종의 묘한 경쟁으로 발전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만큼 샤말란이 여전히 주목 받고 있는 감독이란 사실을 역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 모든 외부적 분위기와 무관하게 <라스트 에어벤더>는 완전한 범작 혹은 그 이하다. 3부작을 완성하겠다는 샤말란의 야심 또한 백일몽에 불과하다 느껴질 정도로, 딱히 인상적인 성과도, 샤말란의 아이덴티티라는 인장도 발견되지 않는다. 작가주의적인 면에서도, 상업주의적인 면에서도, 온전한 실패다.
누군가는 오그라들어 등마저 굽어버릴 판에 어느 누군가는 잘도 깔깔대며 마냥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건 누군가의 이성적 판단으로서 좌우될 문제가 아니다. 극장을 나와서 난 못 보겠네, 난 보겠네, 38선을 긋고 총뿌리를 겨눠본들 부질없고 하찮은 짓이다. <트와일라잇>을 보고 그 때 오그라든 손가락이 여전히 펴지질 않아, 라는 관객이라면 <뉴 문>은 꿈도 꾸지 말고 머리맡의 달이나 봐라. 하지만 태양을 받으면 온몸이 반짝거리는 스와브로스키 협찬 태생의 뱀파이어를 보고 마음이 두근거렸다면 티켓을 사라. 결국 취향의 문제다. 결국은 그 오그라듦을 감내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의 문제다. 귀여니 소설을 보고 헥토파스칼 킥이라도 맞는 것과 같은 개념적 충격을 느꼈다면 <뉴 문>은 130분 간 자기 성찰을 거듭하다 득도하는 시간이 될 게다. 만약 <뉴 문>이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피 튀기는 사투 즈음으로 알고 극장을 찾았다면 팔자를 탓해라. 물론 거기서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취향의 신세계를 발견하고 커밍아웃을 외치게 될진 모를 일이다만 그것이 장담하기 어려운 도박의 확률임을 깨닫는 게 보다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길일지도 모를 일이라는데 내 전재산과 오른손을 건다, 는 훼이크고, 그러니까 그렇단 말이다. <뉴 문>을 보고 할 수 있는 건 이런 말 장난에 불과하다. 그냥 그런 영화일 뿐이란 말이지. 그러니 그냥 웃지요. 화내면 지는 거다.